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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IROS 포럼 | 신학적 전회? 현대철학자들 성서를 읽다 - 후기(복음과 상황 기고문)

                                                                                                                박성훈카이로스 회원 


이 글은 지난
228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명동 숭의교회 청어람 아카데미에서 진행된 카이로스 포럼의 요지와 분위기를 전하는 글이다. CAIROS(Christian Association for Interactive Researches On Scripts)는 신학, 인문학,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기독연구자들의 네트워크이다. 다양한 신앙적 배경과 입장들을 서로 존중하면서 진솔하게 대화하고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지향한다. 이러한 소통이 때로는 충돌이 될 수도, 혹은 새로운 접속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카이로스에서 벌어질 다양한 충돌과 다기한 접속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사회를 성찰하는 담론들이 생산되고 지배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길들을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 club.cyworld.com/cairos


철학자들이 서신서를 읽은 이유는?


신학, 철학, 사회학 등의 다양한 인문학 전공의 젊은 기독인들의 열린 모임카이로스(CAIROS: Christian Association for Interactive Researches On Scripts) 228일 토요일, 1회 카이로스 포럼을 열었다. 포럼에서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그리고 조르지오 아감벤(Georgio Agamben) 등의 성서 이해와 기독교의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 이들의 분석틀을 사용해 한국 교회내의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주요 논제는 먼저 바디우와 지젝이 보편적 주체의 가능성을 성서에서 인식하는 방식 및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연대 주장, 그리고 벤야민과 아감벤이 논의하는 메시아적 시간과 예외상태로서의 법의 중단에 대한 것이었다. 이 논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질문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일견 뜬금 없는 성서 읽기를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시작한 것일까? 기독교의 일자적 폭력성에 대해 비판하던 철학자들이 왜 바울 서신서들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것일까?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박치현 씨(홍익대 강사)가 ‘지젝과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으로 발제한 데 대해 이규원 씨(연세대 문화학과 석사)가 논찬한 발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규원 씨에 따르면 바디우, 지젝, 아감벤 등의 성서에 대한 관심은 현대의 시대상, 후기 자본사회로서의 현대라는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 사라지고,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와 소비의 미덕으로 환원되고 있다. 모든 것을 포괄하여 떠받치는 자본 논리에게는 기묘하지만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동거인이 있는데, 놀랍게도 이는 소위 사회적 진보라는 사람들이 차이의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들고 나오는 소수자와 정체성의 정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0분토론>과 같은 TV 토론 프로그램은 의견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최소한의 의견 조정도 되지 않는. 그저 다양한 의견과 권리의 차이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다양성의 존중과 관용이라는 그 이름도 아름다운 이 덕목은 차이의 고착화와 의견의 파편화에 봉사하여, 근대적 의미의 제국화 된 자본의 논리에 대항하지 않으며, 대항을 위한 연대의 가능성 마저 박탈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자들은 제국에 대한 저항과 보편적 공동체와 연대의 가능성을 바울 서신에서 찾게 된 것이다. 기독교와 성서에 대한 이들 철학자들의 관심은 바로 연대를 위한 새로운 보편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차이의 횡단 – 잉여 또는 찌꺼기가 되는 주체, 법과 정치 그리고 보수/진보 담론의 폐지


각 포럼 참여자 및 청중 개개인을 관통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과연 이 현대 철학자들의 시각을 받아들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와 교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한편으로 이 철학자들의 논의가 신학의 유구한 전통 내에서 이미 한번쯤은 논의되었던 사항들에 대한 논의임을 확인하면서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들 철학자들이 설파하는 찌꺼기 혹은 잉여가 되는 주체 그리고 그 결과로서 뒤따르는 보편과 연대의 가능성은 한국 교회 내에 팽배한 고지론적 보상논리에 정면으로 배치한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우월의식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구원의 증거로서 드러난다는 세상에서의 지위와 부를 거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 스스로 기존의 교회가 속하던 노선에서 벗어난다면 교회는 더 이상 우리가 아는 교회가 아닌 무엇이 되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찌꺼기 혹은 잉여적 주체의 논의는 법에 대한 논의로 연장된다. 법은 금지로 이루어진다. 법은 ‘무엇을 하라’는 긍정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말라’는 한계와 부정으로 이루어 진다는 말이다. 법이라는 이 부정적 진술의 체계는 항상 법에 의해 보호되지 않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마치 용산 참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철거민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이다. 사실상 이런 법은 태생적으로 보편적 평등성이라는 법의 정신을 모든 이에게 담보할 수 없다는 역설적 문제를 지닌다. 정치 역시 이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기존의 정치란 언제나 지위와 권리라는 하나의 잣대에 의해 평가될 뿐이기 때문이다. 실상 ‘좌’와 ‘우’는 정권이라는 고지를 놓고 대결하는 하나의 지평 위에 놓인 양자일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우’는 정권을 쥐고 이를 지키려 하는 자들이며, ‘좌’는 이를 탈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라는 것뿐이다. 정치가 지속되고, 법이 그 금지의 힘을 발휘하는 한 차이와 다양성 그리고 정체성의 권리만이 존재하며, 이에 의해 그 저변을 관통하는 세계화된 자본이라는 ‘거짓 보편’만이 있을 뿐, 진정한 보편 그리고 평등의 가치는 허황한 꿈이 될 뿐이다. 진정한 보편과 연대의 맥락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선점한 지위와 권리를 내려놓고 ‘자기 몫이 없는 자들’과의 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한국 교회는, 그리고 기독교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우리는 이들 철학자들의 주장에, 아니 교회 오랜 전통 속에 내재했지만 애써 귀 기울이지 않았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었을까?


한국의 기독교 – 시각의 한계 또는 다른 하나의 정체성의 정치?


한국 기독교를 바라볼 때 그렇지 않은 듯 하다. ‘바울 복음 혹은 총체성과 특권에 대항하는 보편성의 정치학’으로 발제한 정정훈 씨(서울산업대 강사) 대로 한국 교회는 바디우가 말하는 지배의 담론을 추구하고 있다. 사회 내에서의 정치적 영향력 역시 커지고 있다.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 이후 또 다른 ‘장로 대통령 만들기’의 성과였는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의 대형교회들은 스스로 자본의 영성에 붙들려 (어쩌면 스스로 이 붙들림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손에 쥔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 노골적으로 보수화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마치 교회가, 기독교가, 더 나아가 이 땅의 모든 기독교도가 희생자라도 된 양 타협의 여지가 없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 결과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 기득권을 지켜내려 애쓰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있다. 강부자(강남 땅부자), 고소영(고대, 소망교회, 영남)으로 대변되는 현 정권의 코드가 이들 보수화 된 제도권 교회들의 코드가 아닌가? 과연 이들의 눈에는 용산과 같은 곳에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추구해야 할 ‘작은 자’들이 보일까? 오히려 이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이권을 챙겨주는 울타리가 역할을 하는 기존의과 제도를 위반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협하는, 반듯하지 못한 범법자들만을 볼지도 모를 노릇이다.


희망 - 기독교 아닌 기독교


낯선 바울에게 메시아에 대해 다시 듣다’라는 제목으로 아감벤에 대한 발제를 진행해 준 정용택씨는 교회가 거리를 둘 수 있다는 편의상의 이유로 기독교 내부의 타자가 내놓은 주장은 무시하고 외부의 타자가 하는 주장에는 귀를 기울인다는 지적을 내놓는다. 그의 말대로 기독교인인 우리가 과연 기독교 아닌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보다 문제는 과연 우리 스스로가 변화의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변화는 살아있음의 증거다. 죽어있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절대 스스로를 변화시키지하며, 오히려 스스로를 화석화 시키고, 현재를 고착화 시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회색으로 만들 뿐이다. 이 날 모인 참여자들은 분명 한국 교회가 이 오컬트적 종교성이라는 동굴 밖으로 기어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포럼에 참여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철학자들의 논의에서 소통과 연대 그리고 살아있음의 증거로서의 변화가 가능하다면, 이들 철학자들의 논의가 오랜 신학 전통 내부의 논의서 나온 것이던 아니면 그저 외부 의견일 뿐이든, 혹은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가 된다는 것이 무슨 상관일까? 어쩌면 이 철학자들의 논의는 ‘너희가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의 실현일지도 모른다. 포럼에서 우리는 단지 옳은 것을 말할 뿐 실현 가능성 배제 뜬구름 같은 희망을 모색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디우의 논의를 잠시 빌어 말하자면, 희망(elpis)이란 믿는 바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죽음의 죽음’, 다시 말해 변화가 없는 상태의 폐지다. 이런 희망만이 우리 스스로 기독교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키워나갈 수 있는 토양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작은 기획 희망의 토양 위에 뿌려질 하나의 씨앗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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