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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사이-Be-評

국제결혼 이주여성에 관한 미디어의 재현체계와 시민사회의 분류체계

*제4회 맑스코뮤날레 주관단체(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세션 발제문


정용택 | 카이로스 회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1. 이주여성에 대한 전형화된 이미지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은 90개 이상의 나라 배우자와 국제결혼을 하고 있으며 21개국 이상의 여성들이 한국 남성과 혼인관계를 맺고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우리 사회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현황을 살펴보면, 2008년 현재 외국인의 수는 144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는 70만 명 가량인데 그중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의 수가 약 2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다른 한편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2008년 새로 결혼한 사람들 가운데 11%가 외국인과의 결혼이었다. 농촌 지역의 경우는 무려 41%가 외국인과의 결혼이다. 국제결혼을 통해 형성된 다문화가정의 자녀 수 역시 계속 증가하는 추세여서 작년 기준으로 5만8000명이었으나, 2010년에는 10만 명이 넘을 것이라 하고 2020년이 되면 160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이상 통계청, 2007). 세세한 숫자에서 조금씩 예상이 빗나갈 수 있다 하더라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앞으로도 이 추세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국내 거주 외국인 110만 인구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어디서나 쉽게 외국인을 만날 수 있으며, TV속에서도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다문화가정의 경우에도 2010년에는 5가구 중 1가구 즉 20%에 달할 것이라는 통계가 나올 만큼 다문화 가족이야기는 더 이상 우리들만 이야기가 아닌 그들과 함께 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 이주의 여성화(feminization of migration)는 최근 이주 및 다문화사회 연구의 단연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이주와 다문화사회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가 이주의 여성화라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주의 여성화라는 용어는 초국가적 이주 경관에서 여성의 역할과 비중이 상대적으로 급격히 높아지면서 등장하였다.1) 초국가적 이주의 주체로서 여성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주여성의 수가 남성을 압도할 정도로 증가하였다는 사실 외에도 1960년대 이후 활발해진 페미니즘 운동과 연구가 그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학문의 전 영역에서 젠더 관점의 도입은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이는 이주 연구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욱이 여성이 주도적인 행위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초국가적 이주 현상에서 젠더 관점의 도입은 매우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주의 젠더화는 이주여성의 숫자보다 이주의 양상이 젠더화(gendered) 되고 있다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이주의 젠더화는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정현주, 2008: 896), 첫째는 여성 이주자가 과거 남성가장의 동반가족인 경우가 많았던 반면, 최근의 여성 이주자는 가정의 생계부양자로, 자발적인 노동이주자로 국경을 넘는다는 점이다. 둘째는 젠더 선별적인 국제 이주 통로가 최근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의 노동을 선별적으로 요구하는 대표적인 분야는 가사노동, 성산업, 유흥업, 상업적 매매혼, 인신매매 등으로, 이러한 부문은 노동과 구인 메커니즘의 성격상 미등록이주가 유난히 많기 때문에 등록된 이주만을 나타내는 통계지표보다 실제로 이주하는 여성이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는 이주의 여성화가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른바 지역화 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최근 이주와 젠더 연구자들에게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는 아시아는 성별적 이주의 특징을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단적인 예가 아시아 지역 내에서 국제결혼이주 여성의 급증이다. 김현미(2006: 16)는 이주 노동 수용 조건이 유난히 까다로운 동아시아 국가(일본, 한국, 대만)로 이주하기 위해 여성들이 결혼이라는 이주 통로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전체 이주경관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과 비중 증대라는 양적 측면보다 이주의 메커니즘이 젠더관계의 전 지구적인 확장의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질적 측면이 이주의 여성화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주의 여성화라는 현상이 양적 메커니즘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으며 이주의 젠더화라는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주의 여성화 즉 국제결혼 이주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한국사회 정착의 다양한 어려움(언어문제, 빈곤한 경제문제, 교육, 취업, 한국문화 적응, 임신 출산, 남편의 폭력, 시댁과의 갈등, 사회적 시선, 이혼 이후 불법체류 문제 등)을 이해하고 해결함으로써 국제결혼 이주여성 가족의 행복을 찾는 국가적 정책과 민간 프로그램이 다방면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또한 최근 들어 미디어, 정부, 시민단체, 학계에서 국제결혼 이주여성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활발한 학술적, 정책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일반에서는 여전히 이주여성을 ‘저출산과 고령화를 해결해줄 영웅’, ‘돈 때문에 팔려온 후진국의 불쌍한 여자’ 또는 ‘한국사회의 배제된 주변부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풀어주기 위해 인신매매성 결혼을 한 여자’ 정도로 보는 시각이 만연해있다. 예컨대 다음의 언론 인터뷰를 보라.


며느리한테 시간을 줘야 합니다. 주변에서 너무 조급하게 생각합니다. 빨리 아들도 낳아야 한다고 하고, 집안일도 알아서 척척 해주기를 바랍니다. 신혼 때 정말 머리가 아팠습니다. (가즈코, 일본 이주여성)


돈 때문에 결혼한 것도 아닌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팔려온 신부’로 오해하고 있어요. 왜 이런 시골까지 와서 고생하느냐는 눈치죠. 한국사람들 스스로도 시골을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더 속상해요. (요란다, 필리핀 이주여성)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 입구마다 “베트남 숫처녀랑 결혼하세요”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어요. 얼마나 화나고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보기가 흉해 저랑 남편이랑 밤에 몰래 차를 타고 다니면서 뜯어내기도 했어요. 인간을 단지 섹스파트너로 보려는 것 같아서 아직도 맘이 많이 아픕니다. (이희림,  베트남 이주여성)


그동안 이주여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경향신문』 2007년 11월 25일자 인터뷰는 여전히 한국인들 사이에선 이주여성들이 씨받이와 돌봄노동을 하러 온 것이라거나, 돈 때문에 위장결혼하여 입국한 것이라거나, 혹은 성적 노리개가 되기 위해 강제로 끌려온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있음을 보여준다. 이주여성의 고통에 대한 문제제기와 다문화사회에 걸맞는 시민적 사고를 요구하는 진지한 논의와 정책들이 계속 시행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주여성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실제적인 시선은 이러한 것일까? 이 글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 가운데서 이미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국제결혼 이주여성과 다문화가족의 삶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어떠한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2)되고 있는지, 나아가 그러한 특정한 재현의 체계를 가능케 하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미디어 재현체계 내의 이미지로서의 이주여성


한국 사회는 ‘단일 민족 신화’가 견고하게 작동 중인 사회인 동시에, 도심과 촌락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이산(diaspora)’3) 현상을 실시간으로 마주할 수 있는 다문화사회이기도 하다. 민족주의적 신화와 상충하는 새로운 일상의 풍경을 수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시도되고 있다. 특히 텔레비전 제작자들은 ‘국제결혼 이주여성’이라는 새로운 소재에 주목하여 이와 관련된 것들을 서사로 구성하여 뉴스, 드라마, 오락프로그램, 시사교양프로그램, 논픽션다큐멘터리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텔레비전은 이들의 모습, 삶의 현장을 포함한 출신 지역의 풍경과 문화 등 다양한 영상적 소재를 활용해 특정한 방식으로 의미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방법도 가르쳐준다. 이러한 텔레비전의 활동은 문화적 상징인 낯선 지역, 민족, 인물 등을 재현함으로써 새롭게 편입된 소수자들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되는 다인종적ㆍ다문화적 현상에 대한 의미들은 한국 사회가 인종적, 민족적 단일 사회의 신화에서 벗어나 다원화된 사회로 서서히 진입해가고 있는 과정의 대중문화적 실천들이라 할 수 있다(전규찬, 2004: 16).

 

문화권력의 한 장치로서 대중매체, 특히 텔레비전 미디어가 재현하는 이주여성들은 주로 빈곤탈출이라는 경제적인 이유로 취업 또는 결혼의 형태를 통해 한국사회로 유입된 외국인 여성, 특히 동아시아의 저개발국가 출신의 여성들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이주여성들은 한국사회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서열을 놓고 볼 때 스피박이 말한 하위주체(subaltern)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다기보다는 주류사회에 의해서 말해지고 규정되어지는 위치에 놓여 있다. 신뢰성과 권위의 아우라를 가지고 뉴스나 다큐의 형태를 빌어, 또는 영화나 드라마 등 사실적 내러티브의 형태를 통해 이들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주축은 단연 미디어이다. 미디어가 재현하는 이주여성의 이미지는 이주여성들의 자기 정체성 형성에도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이들 여성에 대한 다수 대중의 인식을 형성하고, 이주여성들의 삶에 즉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양한 정책결정의 토대로 작용한다. 즉 미디어에 의한 이주여성 재현은 특정집단에 대한 의미구성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 물리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 이주여성에 대한 법적, 제도적 지원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활발하지만 한국인과 결혼하여 자녀가 있는 이주여성만을 지원 대상으로 포함시키려는 시도는 이주여성을 한국사회의 가족 제도 유지에 기여해야 하는 존재로서 바라보는 주류사회의 시선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러한 시선을 형성하고 확산 강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곧 텔레비전 미디어라는 것이다. 젠더와 계급과 인종의 교차점에 서 있는 이주여성들이 한국사회에서 겪는 경험은 타자화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 타자화(Othering)는 지배집단이 소수 집단에게 그들의 문화에 적극 적응하거나 동화되도록 요구하고, 소수집단의 정체성을 다수집단의 언어로 규정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이주여성들 역시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혼란, 이방인으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주류사회의 시선에 대한 불편함, 인격체로서의 존중이 부재하는 가족 내부에서 겪는 비인간적인 대우 등을 경험하면서 막상 이러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담론은 주류 사회에 의해 말해질 수밖에 없는 타자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텔레비전 미디어의 의미화 작용은 미디어 텍스트 내의 재현체계 속에서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는 구체적인 현실의 이주여성들의 삶과의 관계 속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주여성의 주체위치 혹은 주체형성을 분석하고자 할 때, 미디어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놓여 있는 사회문화적 컨텍스트와의 관계, 이미지로 재현된 이주여성과 그것을 보고 있는 실재의 이주여성들의 삶과의 관련성에서 어떠한 이주여성 주체가 형성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다층적 분석을 통해 재현된 여성과 구체적인 현실의 여성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이주여성의 재현 즉 주체화4)의 과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국제결혼 이주여성을 포함한 한국사회와 연관된 다양한 이산인(離散人)들의 존재가 텔레비전을 통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2003년에 방영된 MBC의 오락 프로그램, <! 느낌표>를 통해서였다. 이 프로그램은 <박수홍ㆍ윤정수의 아시아! 아시아>라는 코너를 통해 한국에 거주하는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의 가족상봉, 한국의 재외이산인인 고려인과 위안부 등과 한국 내 국제결혼 가족의 상봉 등을 매회 감동적으로 그려내곤 했다. 이후 2005년 말부터 현재까지도 방영되고 있는 KBS1 TV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러브 人 아시아>가 ‘국제결혼가정’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이산현상, 농촌현실, 이주여성, 혼혈아동 문제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시켰다. <러브 人 아시아>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들의 삶과 결혼 과정을 조망하는 프로그램으로, 이들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 또 이국 생활의 어려움, 한국 사회로의 편입 과정 그리고 한국에서의 결혼생활에 거는 기대 등을 보여주고 있다. <러브 人 아시아>가 인기를 끌자 이와 유사한 포맷의 <사돈 처음 뵙겠습니다>란 프로그램이 2007년 11월부터 SBS를 통해 방영되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진행자가 한국 농촌으로 시집 온 아시아 각국의 여성을 찾아가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 가족들의 일상을 소개하고, 이주여성들이 너무나 그리워하는 본국의 부모들을 한국에 모셔와 사돈끼리 상견례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선택된 이주여성들은 대가족과 지역사회 내부로의 성공적인 정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을 적극 실천하고 내면화시켜 나가는 존재로 일관성 있게 재현된다. 그 대표적인 의미화 전략이 국제결혼 이주여성들을 한국의 고향을 ‘대신’ 지켜주고 있는 영웅적인 인물들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부모님과 함께 웃음을 만들어가는 며느리들, 아름다운 고향의 모습입니다(2회)”, “고향에서 우리의 전통을 배워나가는 외국인 며느리들(5회)”,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 생김새는 달라도 우리 이웃입니다(8회)” 등과 같은 자막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며느리는 꼭 고향사람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문제는 이러한 동질화가 전형적인 타자화의 방식으로 이주여성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는 무관하게 그녀들을 한국사회의 일부로 완전히 동화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점이다(양정혜ㆍ오창우, 2008: 354-356). 

 

그리고 2006년 11월에 방송을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많은 화제를 뿌리며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오락토크쇼 성격의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에 체재하고 있는 세계 각국의 젊은 여성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타자로서 한국에서 겪은 경험과 한국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와 인상을 이야기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공부를 하거나 직장에 다니는 20대 엘리트 여성들로서 이주여성 일반이 경험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치열한 삶을 그려내는 데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또한 방송이 진행되면서, 외국인 여성들의 미모를 부각시키면서 그녀들을 연예인화하는 제작행태와 방송 도중 언급된 발언 등을 둘러싸고 숱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은 이주여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미녀(美女) 즉 한국사회에서 수용 가능한 성애화된 여성주체로 한정시키는 재현체계를 실천하고 있다. <미녀들의 수다>에서 출현 중인 그 ‘미녀’들을 재현하는 이 프로그램의 전략은 그녀들을 ‘미인’으로 주체화하는 권력 작용인 동시에, 이미 우리 사회가 전제하고 있는 엘리트 이주여성 특히 제1세계 출신 이주여성들에 대한 성애화된 판타지의 산물이다.  

 

한편, 국제결혼이 증가함에 따라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외국 국적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도 생겨났다. 2006년~2007년에 방송된 KBS의 일일 드라마 <열아홉 순정>은 연변 조선족 여성 양국화가 온갖 편견과 차별을 딛고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해가는 모습과 평범한 서민가정인 홍씨 집안의 단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드라마가 인기리에 종영한 후 몇 달 뒤에는 SBS에서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라이따이한)이 결혼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고 있는 드라마 <황금신부>가 방영되어 역시 큰 인기를 누렸다. 이 드라마가 문제적이었던 것은 그 서사구조 속에 국제결혼 이주여성 문제의 한 단면을 부분적이나마 리얼하게 반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에 묘사된 베트남 신부를 구하는 과정은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제결혼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극중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인 강준우는 애인이 자신을 배신하고 부잣집 남자와 결혼하자 충격으로 3년간 공황장애를 앓는다. 한국 여성들 그 누구도 그런 준우와 결혼할 것 같지 않자 그의 어머니 정한숙은 베트남으로 직접 신붓감을 찾아 나서고, 그곳에서 국제결혼을 주선하는 업체 직원인 라이따이한 누엔 진주를 만나게 된다. 정한숙은 진주에게 준우가 정신 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도 않은 채 오로지 아들을 치유하겠다는 목적으로 진주와 준우의 결혼을 강행시킨다. 이 드라마는 뭔가 결격 사유가 있는 사람들의 배필로 베트남 여성을 지목하는 무의식적인 민족적 편견을 반복 재생산하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는 준우라는 인물이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기에 그런 연상을 덜 일으키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설정은 “재혼이나 나이 많으신 분, 그리고 장애인 가능함”이라는 문구를 버젓이 거리에 내거는 베트남 신붓감을 알선하는 국제결혼 중개업체의 광고 현수막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김명혜, 2008: 129-131). 베트남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에 준우의 정신 장애와 같은 결격 사유를 받아들일 수 있고, 또 받아들여야 한다는 차별적인 시각이 숨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강준우를 재빨리 치유시키며 진주와 낭만적 사랑을 하게 만듦으로써 이와 같은 사실을 애써 은폐한다.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이 드라마는 그간의 여성단체와 비판적 지식인들, 그리고 저널리즘 등이 꾸준히 제기해온 국제결혼의 상업적 매매혼화 현상이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되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주여성을 국제성별 노동분업에 의해 발생한 돌봄 노동을 채우기 위해 지구적으로 강제 이동된 일종의 성적(性的) 상품으로 규정하는 많은 연구들에 따르면, “현재의 국제결혼은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가 만들어내는 ‘여성의 빈곤화’, 각 정부의 개발 정책, 여성의 쉽게 ‘자원화’하는 성차별적인 이주체제, 그리고 여성을 이동시킴으로써 이윤을 만들어내는 준인신매매적 중개업자들이 행사하는 일련의 권력망에 놓여 있는 사회적 문제이다.”5) 여기에서 이주여성은 전지구적 젠더 정치학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테마인 것이다. 이렇게 이주여성은 다층적 권력망에 포획된 존재로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행위의 능동적인 주체는 외려 국제결혼 중개업을 이주산업으로 실행하고 있는 결혼중개업자들로서 그들은 한국남성의 성적 환상을 자극하여 한국 남성을 동원하는 동시에 다 나은 미래를 열망하는 베트남 농촌여성을 국제결혼으로 끌어들인다. 절차화된 신속한 결혼과 바로 뒤이은 인신매매적 여성관리 체제, 그리고 베트남 여성의 한국으로의 비자발적인 한국으로의 이주가 이어진다. 이 과정의 끝은 친밀성의 위기로 특징지어지는 끔찍한 결혼생활이다. 국제결혼을 한 한국남성들의 일부가 드라마 <황금신부>의 강준우처럼 정신장애, 알코올 중독, 성 중독, 습관화된 폭력, 도박 등으로 결혼 및 가정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 사람들이고, 안타깝게도 이주여성은 이들에게 팔려온 일종의 성상품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의 파국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최종렬ㆍ최인영, 2008: 159-160).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방식의 국제결혼에 대한 학계의 비판적인 재현은 이주여성을 지나치게 구조화된 질서에 편입된 수동적인 희생자로 묘사함으로써 이주여성의 행위자적 주체성을 거의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주체수준의 분석이 있더라도 그 분석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과정, 즉 종속화의 과정을 위한 배경을 서술하는 데만 그치고 있다. 이러한 기존 연구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주여성이 이주라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노동시장과 가정에서 여성의 위치를 재구성하고 있음을 적극적인 의미에서 부각시키고 있는 연구들도 분명 많이 존재하고 있다.6) 실제로 경제적ㆍ문화적으로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사회적 소수자로서 이주 여성들은 전지구화라는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주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주자는 그 사회의 도태자라든가 부적응자가 아니라 오히려 체제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하는 적극적 행위자이다.

 

물론 그러한 개별 행위자들은 이주의 전 과정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다양한 ‘구조적 강제들’과 협상을 벌여야 한다. 스피박의 말대로 모든 주체가 타협과 협상의 주체라고 한다면 이주여성들의 가능성과 한계는 과정 중에 있는, 즉 타협을 통해 형성된 주체라는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스피박, 2005: 40~43) 예컨대 협상과정에서 이주여성들은 자신의 출신국가에 대한 자격지심과 이입국의 차별적 인식을 통해 자신의 국적이 갖는 위계성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정체성이 사회문화적 제한 속에 있는 자율성을 지닌 행위자가 적극적인 선택과 협상을 통해 만들어가는 관계적 구성물이라 했을 때, 이러한 정체성 협상과정에서 이주여성들은 상당한 장애물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이중에서도 이주자에게 던지는 타자화의 시선은 이주여성들이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은밀하고도 견고한 장애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인들과의 접촉이 적거나 여전히 경제적 주체로서의 입지가 분명한 이주노동 여성들보다 한국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국제결혼의 여성에게서 훨씬 더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상당수가 연애결혼인데다가 자신의 정당한 노동력을 가지고 들어온 여성들이기 때문에 한국 입국과 관련해 어느 정도 자발적 선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주여성들이 갖는 이러한 나름의 자부심과는 달리 이들을 송출시키는 국가들이 대부분 경제적으로 빈곤한 제3세계이기 때문에 한국 내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는데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은 필연적으로 한국인이 자신과 이주여성들과의 관계를 위계화 하면서 이주여성들을 ‘타자화’시키는 폭력성을 동반하게 된다. 

 

이처럼 이주여성의 행위자측면과 다시 그것을 제약하는 구조화된 질서 간의 갈등 관계를 염두에 둘 때,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인 KBS1 TV의 전원드라마 <산 너머 남촌에는>은 매우 징후적인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동시대 농촌의 희망과 절망을 함께 담아내는 보기 드문 전원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는 이 작품에는 나이 많은 농촌 총각과 결혼한 젊은 베트남 신부가 등장하여 바야흐로 농촌을 중심으로 한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급속한 증가 현실을 극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드라마 <산 너머 남촌에는>은 “우리들 마음 속 정겨운 고향, 건강한 삶의 의지가 충만한 농촌의 ‘꿈’을 그리면서 동남아신부와 코시안 2세가 늘어가는 곳, 치열한 삶의 터전인 농촌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내겠다는 기획의도를 가지고 다문화사회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는 농촌의 꿈과 현실을 그려내고자 시도한다.7) 이 드라마에서 하이옌이라고 하는 이주여성은 마을 이장 봉춘호의 장남인 노총각 순호의 베트남 출신 신부로 5회(2007년 11월 21일 방송)에 처음 등장한다. 5회의 줄거리를 잠깐 살펴보자: 오매불망 그리던 베트남 신부 하이옌의 입국날 순호는 기대에 부풀어 공항으로 향한다. 하지만 하이옌은 입국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이옌을 만나지 못했다는 소식이 마을에 전해지면서, 한 이웃 할머니는 이런 말을 봉춘호에게 들려준다. “도망간 거 아닌가? 요새는 처음부터 결혼만 하고 안 들어오는 색시들이 많다고 하던데..... 그 아랫 마을의 ○○이 처도 처음부터, 들어와서 살 생각 없이 들어왔다가 그 길로 도망갔다고 하던데......” 공항에서 순호에게 탑승자 명단을 확인해주었던 항공사 여직원들은 순호의 뒤에 대고 이런 말들을 주고 받는다. “뻔하게 내뺀 거지 뭐. 그런 식으로 불법체류하는 여자들이 한 둘이니? 어떻게 그런 일이 하루 한 건씩 생기니?”8)

 

한편 순호는 걱정이 앞서 눈물마저 맺히고 가족들은 애가 탄다. 이때 순호의 회상을 통해 하이옌과 만나게 된 경위가 소개된다. 현실의 많은 농촌 총각들처럼 순호 역시 베트남 현지로 가서 관광형 맞선을 본다. 그 맞선 자리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통역사로 나온 이가 하이옌이었고, 순호는 맞선 상대로 나온 여성 대신 하이옌에게 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이후에 두 사람이 어떻게 하여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소개되지 않는다. 한편 늦은 시간, 가방을 잃어버려 뒤늦게 나타난 하이옌을 보는 순간 순호가 내뱉은 말은 다름 아닌 “어디 갔었어요? 난 도망간 줄 알았잖아요”다. 드라마가 보여준 줄거리대로라면, 하이옌은 애초부터 자신이 맞선을 보기 위해 맞선 자리에 나온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 자리에서 보통의 한국 여성들처럼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고, 또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로 순호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와의 결혼을 결심했다고 볼 수 있다. 결혼을 통해 여성으로서 더욱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또 결혼을 통해 한국에 가게 되면 베트남에서보다 당연히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기대를 갖고, 그녀는 한국행을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극중의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심지어는 순호조차도 그녀의 그런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한다. 더구나 결혼이주를 결심하고 실행하게 된 그녀의 의지나 생각이 자신의 내면이나 말, 행동을 통해 제시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상황들 가운데서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그녀의 표정이 마치 풍경처럼 그려진다.

 

우여곡절 끝에 순호를 만나 무사히 마을로 들어와 가족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는 것도 잠시,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불안과 의혹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다. 순호의 친구는 순호에게 하이옌의 여권을 빼앗아 놓으라고 진지하게 충고한다. 여권을 갖고 있으면, 언제든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남자들이 대부분 다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친구의 말대로 순호가 하이옌의 여권을 빼앗으려고 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며칠 후 하이옌이 정말로 여권을 들고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물론 후반부에 가면 그녀가 고국에 있는 어머니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을 구하러 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 밖을 나갔다는 사실 앞에서 순호는 다시 절망한다.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자신의 부인이 되기 위해 온 것이지, 취업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은 자신이 주는 것이고, 그녀는 자신의 부인으로 혹은 며느리로 살아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순호로서는 하이옌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옌을 노래방에서 찾아냈을 때, 순호는 하이옌에게 이렇게 일을 하러 다닐 것이면, 차라리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이옌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처음부터 속인 것이라고 격분한다. 하지만 하이옌은 자신이 순호를 배신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위장결혼을 한 것도 아님을 분명히 한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일을 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순호의 입장에서 그 두 가지의 진실은 절대 양립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하이옌이라는 한 이주여성의 선택을 철저하게 자신의 관점에서 즉 자신이 원하는 부인,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위한 며느리라고 하는 미리 전제된 인식의 틀 안에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결혼 이주여성=전업주부=며느리=성적 파트너=자식을 낳아줄 부인. 이러한 사고의 틀 가운데, 결혼을 통해 낭만적 사랑을 실천하려는 동시에 한국에 와서 자립적 경제주체가 되고자 하는 이중적 욕망을 가진 그런 보통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전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5회에서 그려지는 하이옌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인식은 정확하게 두 가지의 대립항으로 구성되고 있다. 즉 순수한 배우자인가 아니면 결혼을 위장하여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들어온 불순한 이주자인가. 사람들은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의 틀 안에서 그녀의 모든 말과 행동을 판단한다. 그녀는 도망갈 사람이 아니면 농촌에서 며느리/신부로 계속 살 사람으로만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 드라마가 재현하는 이주여성의 이러한 이미지가 국제결혼 이주여성을 둘러싼 한국인들의 차별화된 사고 구조를 현실에서 정당한 것으로 의미화한다는 사실이다. 이 드라마의 시청자 게시판을 유심히 관찰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러한 재현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아울러 드라마가 계속 진행되는 동안 여러 차례 하이옌의 경제주체 되기가 시도되지만, 그러한 시도들이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묘사되고, 그 시도는 매번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러한 방식의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자존감 상실을 발생시키는 미디어의 시선은 곧 이주여성들의 존재를 위계화 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 차별적인 상황을 이들이 스스로 내면화해 사회적 욕구의 쓰디쓴 좌절을 경험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좌절감은 하이옌과 같이 고학력으로서 모국에서 전문직에 종사했던 경험을 가진 여성들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총84회의 에피소드가 방송되는 동안도, 그리고 드라마 안의 시간 전개상 하이옌이 이주해온지 1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채, 그저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신부요, 며느리로 남아 있다. 드라마 안에서 하이옌은 계속 해서 경제주체가 되기를 시도하지만 이 드라마는 혹은 이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 이 사회의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욕망을 여전히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최근에 방영된 82회(6월 4일)에서 하이옌의 어머니가 고향오빠인 호앙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이옌은 그 빚을 대신 갚기 위해 그간에 열심히 돈을 벌고자 했던 것인데, 그 순간 순호는 하이옌이 역시 돈 때문에 자기와 결혼한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다가 그 빚이 자신과의 결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순호는 그 빚을 하이옌 대신에 모두 갚아준다. 감동적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하이옌이 남편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하이옌은 그렇게 무력하게 타자화된 존재로 묘사되는 것과 동시에 사람 좋은 홀시아버지와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남편 덕에 언제나 공주처럼 살아가는 신부 혹은 며느리로 그려지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속 깊은 둘째 며느리가 있어 다문화로 인한 갈등도 거의 없다. 그러한 현실을 드라마가 반영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를 삼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행복하게 하이옌을 설정하는 것이 어쩌면 또 다른 방식의 이주여성에 대한 타자화 혹은 차별화된 재현체계를 의미화하는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하이옌과 같은 이주여성들을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하기 보다는 경제적으로 못사는 나라에서 온 시혜의 대상으로 그려내면서 결과적으로 동등하게 존중받을 수 없는 여성으로 재현하고, 그러한 재현이 현실에서 계속해서 의미 있는 재현체계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는 것이다.



3. 이주여성에 관한 미디어의 재현체계와 시민사회의 분류체계


드라마는 이미지, 사운드, 서사라는 각각의 층위들을 이용해서 해석된다(김영미, 1998). 드라마와 관련된 비평이 내러티브 구조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도 드라마의 이런 측면 때문이다. 서사구조 혹은 내러티브란 표피적으로 보이는 내용들을 가능하게 이야기의 심층구조로 사회적 삶의 모순을 표상해주며 그와 그 모순을 해소, 혹은 해결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 문화적 해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즉 내러티브의 구조는 사회적 긴장과 모순을 처리하는 결정적인 수단으로서 줄거리 전개와 구조적ㆍ기능적인 논리가 하나 혹은 몇 개의 에피소드 안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설명하고 자연화 하는데 사용되는 방식이다. 일련의 관습과 전략으로 짜여진 내러티브는 하나의 이야기를 연속된 장면으로 조직한다. 이 때문에 사건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이야기의 구조를 찾는 내러티브 분석은 드라마에 내재된 세계관과 그 사회의 유통되는 이데올로기를 파악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조윤경, 1997). 그러나 드라마를 단순한 이데올로기 주입의 완성된 구조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외려 드라마는 의미 생산의 과정이며 담론의 장으로 파악해야 하는데, 이는 드라마가 가지는 서사적 특성 때문이다.

 

드라마의 서사는 객관적인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인과 법칙을 인용하여 가상의 사건들을 일련의 순서대로 배열하고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포장한다. 여기에서 제공되는 연속적인 이미지의 흐름이 시청자에게 매우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은 드라마의 담론과 음성언어의 유사성 때문으로 일상에서 실재 자체를 인식하는 것과 관련된 코드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내재된 의미들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상호 모순되는 기호의 병치와 대조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 논리는 시각적이고 구어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드라마 텍스트가 함의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구조주의적 형태를 띠고 있다고 지적한다(박명진, 1995). 드라마 텍스트의 내용을 구성하는 어떤 논리, 즉 어떤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데 작용하는 체계인 논리와 의미체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이러한 이면의 구조를 찾아내는 작업이 텍스트의 분석과정이며, 이것이 곧 이데올로기 분석이다. 의미는 현실의 표상과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할 수 있을 때 성립하는데, 이때 발생하는 자연스러움은 사회 일반에 공유된 코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드라마 비평은 필연적으로 사회 일반에 공유된 문화적 코드에 대한 분석 작업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통해 전달되는 모든 메시지나 이미지를 분석하는 작업은 드라마에 작용하는 다양한 기호체계가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기호의 의미화 작용은 그 기호가 소비되는 한 사회 내의 현실과 그 현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문화적 가치, 이데올로기 혹은 신화들 사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고 의미화되어, 다시 텍스트 속에 재귀적으로 구조화된다. 결국 드라마 텍스트에 대한 비평 작업은 텍스트 내의 이데올로기 문제뿐만 아니라 해독자의 의미화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는 미디어의 이주여성 재현체계를 분석하는 작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 매스미디어에서의 이주여성 이미지 재현에 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나마 적은 수의 연구들조차도 대부분 미디어에 있어서 이주여성의 이미지, 즉 드라마와 뉴스보도, 토크쇼, 오락 및 시사교양 프로그램 등에서 이주여성이 어떻게 이미지화되고 있는가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9) 오히려 이러한 방송프로그램에 나타난 이주여성의 이미지 혹은 가부장적 성역할이 수용자적 측면에서 즉 일상의 행위자들 가운데서 어떻게 다시 의미화되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즉 아직까지 미디어의 이주여성 재현에 관한 연구는 재현된 여성과 현실 속의 여성들을 어떻게 연관 지을 것인가 하는 이론적 시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그와 같은 ‘재현된 여성의 이미지를 연구하는 것(image of woman)’에서 ‘재현체계에서 구성되는 이미지로서의 여성(woman as image)'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 판단한다.

 

다시 말해 재현된 이미지가 다시 특정한 사회적ㆍ역사적 맥락 속에 만들어내는 ‘의미화의 과정’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재현된 여성의 이미지 연구는 매체 속에 재현되는 여성 이미지가 갖는 현실성 그리고 즉각적인 사회적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서, 문화가 만들어내는 여성에 관한 이미지와 메시지가 현실에서 구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이 구체적인 여성들의 경험을 억압하고 규제하는 입장을 갖는다는 것을 비판의 주된 대상으로 삼는다. 물론 이때의 재현 개념은 반영론적 내지는 의도론적 접근에 기초해 있다. 반면에 재현체계 내의 이미지/기호로서의 이주여성의 의미화 연구는 재현을 하나의 기호체계로 간주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입장에 따르면, 텍스트 재현체계 속의 이주여성은 그것 자체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이미지가 이주여성으로 의미화되는 재현체계 내의 성별성과 권력적 우열의 관계망 속에서 이주여성이라고 하는 특정한 주체성을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구성론적 재현이론에 따르자면, 이주여성이라고 하는 문화적 정체성이란 것도 언제나 특정한 재현체계가 제공하는 주체의 위치가 주어지고(사회적 조건), 다시 그녀들 혹은 그녀들을 바라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판타지와 욕망에 추동되어 그 위치와 그녀들 자신을 접합시킴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주관적 동일시). 결국 이주여성이라고 하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동일시(identification)’ 과정은 그녀들과 그녀들을 규정하는 우리의 판타지와 욕망이 불완전한 재현체계와 결합되는 운연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과 그녀들 곧 이주여성들 사이의 가상적인 ‘분리’(cut)를 실행하면서 각각의 차별적인 정체성을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맑스주의 문화연구자인 스튜어트 홀은 미디어가 재현하는 현실은 주어진 사실의 투명한 반영이 아니라, 담론에 의해 사물이나 사건이 특정한 의미를 갖도록 하는 의미 작용 실천의 산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Hall, 1996: 247). 즉 미디어는 특정하고 제한된 의미가 보편적이고 자연적이며 ‘현실’ 자체와 일치해보이도록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미디어에 의한 현실의 특정한 재현을 ‘당연한 것(taken-for-granted)'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세계에 대한 부분적이고 특수한 설명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을 맑스주의적 용법에 따른다면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이주여성에 관한 타자화는 일상에서 이미 작동 중인 특정한 분류체계를 의미화하면서 동의를 생산한 결과물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미디어 담론은 보편적인 의미 규칙에 따라 이주여성에 관한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며, 그 과정에서 그녀들에 대한 부분적인 특수한 설명 혹은 시선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디어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주여성에 관한 미디어 담론의 의미 작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인가? 이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구조주의적 관점 혹은 기호학적 관점에서 텍스트의 의미 작용이란 개별적 용어들의 고유한 의미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담론 내에서 서로 연관된 요소들의 조직된 묶음, 즉 의미들의 배열 혹은 분류체계에 의존한다고 본다. 그래서 홀 역시 “특정한 범위의 특권화된 의미들이 어떻게 유지되는가 하는 문제에서 중심적인 것은 분류와 틀짜기(framing)의 문제”라고 말한다(홀, 1996: 256). 결국 이 논리에 따르자면, 이주여성에 관한 미디어 담론은 이항 대립적으로 구조화된 사회적 분류체계 속에 있는 그녀들에 관한 의미들을 선택하고 조합함으로써 특정한 상황 정의를 미디어 텍스트, 이를테면 드라마 안에 생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 정의의 의미에서 그리고 그것을 생산하는 사회의 분류체계가, 곧 이주여성에 관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분류체계가 의미들로 구성된 문화적 목록이라고 한다면, 이데올로기는 선택적인 문화적 목록으로서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의미구조라고 할 수 있다. 분류체계는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나 전제들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디어는 특정하고 제한된 의미가 보편적이고 자연적이며 ‘현실’ 자체와 일치해보이도록 재현할 수 있는가? 한 언어 공동체 내에서의 의사소통은 구성원들이 일상적으로 의식하지 않는 문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소쉬르(Saussure)의 주장처럼, 미디어의 제작자나 그것의 수용자인 대중 모두가 이데올로기적 의미 작용의 토대가 되는 문화적 분류체계를 이미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미디어 담론은 자연화된 재현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분류체계란 사회적 세계에 대해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상식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통적인 역사적 체험과 기억 속에서 축적되어 온 요소들, 전제들, 가정들이며, “방송인들이 새로운 일어난 골치 아픈 사건의 의미를 구성하는 작업을 할 때 의존할 수 있는 주제와 전제들의 저장소”이다(홀, 1996: 261).

 

미디어 담론은 시민사회의 상식적인 분류체계, 즉 특정한 역사적 조건 가운데서 축적되어, 사회적으로 공유되며, 시민들의 정치적 무의식 속에 있는 상식의 목록을 통해서 새로운 인물, 집단, 사건을 인식하고, 분류하고, ‘전형화’(typification)'한다(버거ㆍ루크만, 1982: 54). 어떤 사건에 대한 재현의 ‘사실성’은 이처럼 ‘당연한 것’, ‘친숙한 것’에 의해 성취된다. 특정한 담론적 구축물이 ‘사실성’의 당연함 속에 뿌리내림으로써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특정성을 은폐할 수 있는 것이다. 미디어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동의하는 것, 즉 합의된 바의 경계나 틀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고, 또 그 속에서 작동함으로써만 정당성을 갖고 존속할 수 있다. 그런데 공공성을 지향하는 미디어에서의 여론 형성과정과 공중을 향한 설득 과정은 기존의 묵시적인 합의를 조성함으로써 새로운 합의를 생산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특정 이슈에 대한 새로운 합의의 창출은 다원화된 사회일수록,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서 ‘공공성’이나 ‘국가적 이익’에 대한 정의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의 결과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디어는 재현의 정치의 장(場)인 것이다(박선웅, 2005: 160). 앞서 서두에서 살펴본 신문 인터뷰에서처럼, 이주여성을 영웅, 효부, 피해자, 성상품, 노예, 하인 등과 같은 전형화(typification)된 ‘타자’(the other)로 구성하는 미디어(media, 대중매체)의 재현의 정치학 역시 바로 그러한 전형적 인식이 한국인들의 생활세계 가운데서 지배적인 인식의 틀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주여성에 관한 미디어의 특정한 의미와 해석이 그 ‘특정성’이 은폐된 채 보편적이며 당연한 것으로 자연화될 수 있는 것은 미디어 담론이 시민사회가 공유하는 이주여성에 관한 상식적인 분류체계에 토대하여 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주여성에 관한 미디어의 재현체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결국 시민사회의 분류체계를 추적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주여성에 관한 특정한 의미를 생산하는 미디어, 그리고 시민사회, 이데올로기, 정책 등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홀을 비롯한 맑스주의적 문화연구자들은 미디어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에 대한 이론적 통찰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지배’의 문제틀(problematic) 속에서 미디어 담론을 통해 지배계급 혹은 사회적 다수자의 동의를 얻는 방식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분석적인 측면에서 크게 두 가지가 미흡하다. 하나는, 이데올로기적 의미 작용에 대해 기호학적 접근을 시도하고는 있으나, 이데올로기가 은밀히 상주하고 있는 시민사회의 상식적인 분류체계의 구체적인 논리와 구조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 홀의 논리대로라면, 구성론적 재현 이론이 제시하고 있는 ‘의미화 실천’으로서의 재현이란 나름의 자율적인 언어학적, 기호학적 법칙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 구성체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헤게모니 투쟁과 직ㆍ간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이 시민사회의 의미 생산과 이데올로기적 작동 방식에 관한 분석은 결여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주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메커니즘에 주목함으로써 분류체계가 어떻게 이데올로기 투쟁과 재현의 정치에서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찾기 어렵다. 다시 말해 미디어의 담론의 재현체계와 시민사회의 분류체계가 맺고 있는 관계와 상호적인 작용 방식에 관한 매끄러운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와 같은 맑스주의적 문화연구의 결점이 민중신학자들의 시민사회 담론 연구로부터 보완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예컨대 3세대 민중신학에서는 민주화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를 국가나 시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분화된 자율적인 결사체 즉 보편주의적 결속의 영역(realm of universalistic solidarity)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이는 단연 김진호인데, 그는 과거 독재 시대의 국민이 매우 수동적으로 시민사회의 외부자 즉 ‘민중’을 망각했다면, 성찰 없는 민주화 시대의 시민은 좀 더 적극적 행위를 통해 민중을 망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야만의 은폐 기제가 훨씬 ‘심미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엔 은폐의 주체가 국가였지만, 오늘의 은폐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의식적 무의식적 공모를 통해 민중에 대한 은폐와 망각이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 혹은 시민사회에 있어서 민중 현실의 은폐는 외적 감시에 의한 비자발적 내지는 수동적 동의보다는 훨씬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럽게 벌어진다는 것이다(김진호, 2006: 28). 시민사회 내부의 시민적 결속의 보편적 경계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인 한계를 분명 지니고 있으나, 주변화된 개인 곧 소수집단이나 하위계급(under-class)에 대한 예외적 배제 혹은 배제적 포섭에 의한 공동체적 결속의 지속적 팽창은 한국시민사회의 반복되는 열망이기도 하다. 신뒤르켐주의 문화사회학자 알렉산더는 미국적 맥락에서 의회, 법원, 자발적 결사체, 미디어 등을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제도로 보고, 그러한 제도들은 사회적 위기와 갈등을 의사소통적으로 해소하는 공공 영역을 제공한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시민사회의 구성 요소가 정박하고 있으며 시민사회를 규범적으로 규제하는 문화적 코드이다. 그는 구조적 수준에서 시민사회가 행위자, 행위자 간의 관계, 제도로 구성된다고 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일관되고 유형화된 방식으로 토의하고 상호 관련짓는 일련의 이항 대립적 코드를 시민사회의 문화적 핵심으로 간주한다(알렉산더, 2007: 267-276). 필자는 이러한 알렉산더의 시민사회에 대한 통찰이 민중신학의 비판적 시민사회론과 긴밀히 통한다고 본다.

 

예컨대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한국의 민주화란 과거 독재 시대의 영토성이 해체되고, 새로운 경계들로 인한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가 구축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민주화라는 재영토화 과정은 시민사회가 독재권력에 의해 독점되던 권력 자원의 배분에 핵심 변수로 개입함으로써 수행된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시민사회의 급격한 사회구성 능력의 확대는,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식적으로 평가하면, 공공성의 확대로 나타나기보다는 ‘시민사회의 이익집단화’의 확대로 나타났다. 이것은 시민사회가 더 이상 사회적 통합의 단위로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열된 시민사회 내의 각 행위자들은 수많은 영토들을 만들고, 그 외부를 배제하는 소위 민주화라는 게임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물론 각 영토들은 서로 경쟁만 하는 게 아니라 한편으로 결속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경쟁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토들 간의 교차 과정에서 특권과 비특권이라는 통합과 배제의 메커니즘이 생성된다. 여기서 민중신학은 비특권의 영역에서 시민사회 내의 ‘비시민’의 대두를 본다. 과거 독재시절의 민중/오클로스가 국가라는 영토의 외부로 쫓겨난 ‘비국민’이라는 단일요소로 묶일 수 있었던 반면, 이제는 ‘비시민’이라는 다층적 영토화의 배제 메커니즘의 희생자가 등장했던 것이다. 즉 비시민으로서의 민중/오클로스는 비균질적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민중/오클로스는 ‘소수자’(minorities) 개념과 맞물리게 된다(김진호, 2006: 26). 이와 같이 소수자로서 민중/오클로스를 이해하는 시각을 통해 우리는 시민사회 내부에서 다층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적ㆍ사회적 포섭과 배제의 문화적 코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시민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투쟁의 중심에는 시민/비시민에 대한 분류와 재분류를 둘러싼 상징투쟁이자 재현의 정치가 위치하고 있다.

 

이주여성에 대한 사회적 포섭 및 배제에 관해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은 미디어와 같은 대중적 의사소통의 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이 사회에 유익한가에 대한 치열한 담론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시민사회의 미디어는 이주여성에 대한 이항담론에 의해 시민사회의 생활세계 현장에서 발생한 이주여성에 관한 사건이나 문제, 혹은 위기를 재현한다. 만약 이주여성이 문제라고 한다면, 미디어는 그녀들의 경제적 욕망, 한국사회에 대한 이질성, 타자성 등을 부각시켜 차별적 동기의 코드로서 이주여성을 묘사할 것이다. 이주여성이 포함된 가족 내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문제일 경우에는 그 관계 속에 나타난 편견, 폭력, 불신, 소통부재, 섹슈얼리티, 취업, 출산, 성역할, 빈곤, 가부장제 등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또한 특정한 국가적 정책이 이주여성에 대한 차별적 행위와 관계를 낳는다면, 미디어는 제도에 관한 비차별적 코드에 근거하여 이주여성을 위한 지원 정책이라든지 교육프로그램, 법률 조항이 이주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과 배제를 심화시키거나 혹은 그것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결국 미디어가 재현하는, 혹은 미디어 담론을 통해서 작동하는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시민사회 안에 작동하는 시민권을 둘러싼 분류체계의 양상을 분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민중신학은 미디어 담론과 시민사회론 양자를 통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론적 장점을 갖고 있다. 즉 미디어 담론이 특정 사건이나 특정 주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작용을 하고 또한 그 과정에서 특정 정책이 시민사회로부터 정당화되는 상호 작용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데 공헌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스튜어트 홀과 같은 맑스주의적 문화연구자들은 기호학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터하여 미디어가 어떻게 실재를 의미화하면서 동의를 생산하는가에 주목한다. 그들은 미디어 담론이 시민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는 상식적인 시민권의 분류체계와 같은 보편적 의미 규칙에 따라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며, 그 과정에서 대상(및 존재)에 관한 부분적이고 특수한 설명이 보편성(객관성)을 획득하는 미디어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규명해냈다. 반면에 민중신학자들은 민주화 이후 한국 시민사회 담론의 의미 구조를 구체적으로 해부해냈다.

 

이를테면 민중신학은 87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은 ‘국민의 시민화’라는 대중의 재주체화 과정과 맞물린다고 보았다. 여기서 ‘국민’이 국가의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한 집합적 주체를 의미한다면, ‘시민’은 국가와 교섭/거래하는 집단적 혹은 개체적 주체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란 시민의 참여를 제도화하는 정치 양식이며, 시민의 주권을 실체화하는 권리 양식이다. 한데 시민의 주권화는 비시민의 탈주권화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시민의 주권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 위기에 직면한다. 하나는 퇴출 가능성에 대한 시민의 위기이며, 다른 하나는 퇴출되어 비시민화된 이의 존재 파괴의 위기이다. 이에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안보의 장치를 마련했는데, ‘시민적 안보의 장치’(퇴출의 억제)와 ‘비시민적 안보의 장치’(복지)가 그것이다. 문제는 후자가 거의 부재한 상황에서 전자가 압도적으로 발달하면서, 시민의 비시민에 대한 배제적 망각의 분류체계가 강화되는 현상 즉 사회전반의 보수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시민사회에 있어서 포섭과 배제의 길항적 작동은 기본적으로 공공성과 시민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의미화 실천의 과정이자 결과이며, 그런 시민사회의 합법적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당연시 여기는 의미구조의 지배를 받는다.

 

미디어 담론이 재현하는 문화체계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항대립으로 조직되어 있듯이, 민중신학은 민주화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의 담론구조를 ‘특권 대 비특권’ 혹은 ‘시민 대 비시민’라는 코드로 구분한다. 전자는 ‘시민적 안보 담론’, 후자는 ‘비시민적 안보 담론’을 창출한다. 이처럼 민중신학적 시민사회론은 시민사회에서 행위자가 그 의미 구조에 기초하여 미디어를 통해 실천하는 이주여성에 대한 재현의 정치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론 시민사회의 시민/비시민에 관한 상식적 분류체계는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것처럼, 정/부정의 사회적 분류체계는 언제나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 체계의 논리 또한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 혹은 행위나 제도, 담론, 가치가 정당한 것으로 분류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동반하면서 그러한 의미를 획득한 결과이며, 나아가 미디어와 같은 여러 기제를 통한 재현의 정치의 산물일 뿐인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 시민사회의 상식적 분류체계가 갖고 있는 다양한 차별과 배제의 목록들을 해부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보강된 실증적 경험연구를 통해 이주여성에 관한 미디어의 재현체계와 시민사회의 분류체계가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제도적  차원에서, 그리고 주체의 일상적 행위 차원에서 규명해나가는 작업도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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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테마를 직접적인 연구 주제로 삼고 있는 글들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이혜경 외(2006), 김민정 외(2006), 신경아(2008), 정현주(2008) 등.


2) 일반적으로 ‘재현’(representation)이란 기호를 통해 사물, 사건, 인물 그리고 현실이 기술되고 표현되고 의미가 부여되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재현을 설명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입장들이 있을 수 있다(Hall, 1997: 24-25). ① 반영적 접근으로서, 의미는 실제 세계의 사물, 사람, 관념, 사건에 있다고 간주하고, 언어는 거울처럼 이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진실한 의미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② 의도적 접근으로서, 재현의 의미는 언어를 통해 세계에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작가가 의도한 바로 그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언어가 의사소통 수단으로 가능한 것은 공유된 언어적 관습과 코드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저자들이 사용하는 의미는 이미 기존의 언어체계에 속하는 그 언어의 이미지와 의미들과의 타협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③ 구성론적 접근으로서, 여기서는 언어의 사회적공공적 성격을 인정한다. 또한 사물과 사람들이 존재하는 물질적 세계와 재현, 의미, 언어가 작동하는 상징적 실천과 과정을 구별하고, 의미가 전달되는 것은 물질적 세계가 아니라 언어체계나 개념을 재현하는 재현체계라고 본다. 여기서 의미를 구성하고, 세계를 의미 있게 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개념적 체계, 언어, 재현체계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사회적 행위자라고 본다. 이 글에서 사용되는 ‘재현’ 역시 세 번째 입장을 따른다. 한편, ‘재현' 개념 속에는 ‘현재(present)'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재현’은 그것을 만들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현존뿐만 아니라 재현되는 무언가의 현존을 전제하고 있다. 즉 ‘재현’에 대한 논의에서 ‘재현’은 재현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 맺음이 아니라 매개를 통한 작용이라는 것이 전제가 된다. 보다 자세한 것은 홀(1996: 247-249)을 참조하라.


3) 삶·문화·제도·국가(민족) 등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인 '디아스포라'(diaspora)는 사전적으로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말한다. 오늘날에는 단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 재일조선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았다.


4) 여기서 주체화란 담론과 기술 그리고 윤리적 규범과 같은 다양한 권력 장치들을 통해 고안되고 구축되는 특정한 인간의 형상에 대한 동일시(identification)이며 내면화를 뜻한다.


5) 윤형숙(2004), 김은실(2004), 이혜경(2005), 설동훈 외(2005), 김현미(2006), 윤인진 외(2008) 등.


6) 이수자(2004), 김민정 외(2006), 이혜경 외(2006), 김현미(2006), 정순희(2006), 김은실(2007) 등.


7) 연출자인 신창석 PD는 방송이 시작되기 전 가진 한 인터뷰에서 “‘대가족이 중심이 되는’ 농촌 드라마의 틀을 완전히 벗을 수는 없겠지만 농촌의 ‘오늘’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농촌 노총각 가운데 30~40%는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 사회의 차별 때문에 느끼는 아픔 등도 자연스럽게 〈산너머〉에서 그릴 예정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PD저널, 2007년 10월 19일자 기사).


8) 이러한 묘사나 진술을 통해서 이미 베트남 출신의 국제결혼 이주여성은 한국의 순수한 농촌총각을 배반할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한 타자로 재현되고 있고, 그리고 이주여성과 국내 여성 일반의 차별화하는 구도가 강력한 재현양식으로 채택되고 있다.


9) 필자가 자료를 수집하는 가운데 확인한 매스미디어-뉴스보도, 신문기사, 시사교양프로그램, 오락프로그램, 드라마 등-를 통해 재현된 이주여성 이미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들로는 이경숙(2006), 양정혜(2007), 양정혜오창우(2008), 김명혜(2008), 서울YMCA 방송모니터회(2008) 정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