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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2회 카이로스포럼:선교라는 스캔들

한국보수기독교 선교에 대한 문화비평적 분석[정정훈]

[제2회 카이로스 포럼: 선교라는 스캔들?!]

불가능한 타자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

한국 보수 기독교의 선교에 대한 문화비평적 분석


*제 2회 카이로스 포럼(2011년 2월)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각주 및 세부논의는 포럼 자료집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0. 들어가며

아마도 모두 공감하지 싶은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지배적 선교 행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최근의 봉은사 땅 밟기 사태부터 시작하여, 가난한 제3세계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이 호화생활을 하거나 선교지에서도 선교사들이 교파에 따라 서로 갈등하는 등의 오래된 문제들, 인터콥 등과 같은 선교단체의 활동으로 인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공격적이고 안하무인격의 선교행태 등은 사회적 문제 거리가 될 정도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주류 보수 기독교 대중들은 그런 문제 자체를 부인하거나, 문제가 좀 있더라도 선한 일을 위한 약간의 역기능 정도로 치부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주류 보수 기독교에 비판적인 이들은 절망, 환멸, 냉소적 태도로 점점 선교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된 ‘지상명령’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아무리 이 땅의 교회가 행하는 선교의 현실이 부정적이라고 해서 선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근본적으로 보수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명령’이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하여 선교에 대해서 보수 기독교의 통념에 전면적으로 위배되는 몇 가지 주장을 하려고 한다. 그와 같은 주장을 전개하기에 앞서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내 기독교 신앙은 매우 보수적 신앙 고백의 전통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가령 나는 사도신경을 나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성서가 구원에 이르는 앎을 인간에게 제공함에 있어서 무오하다는 것을 믿는다. 물론 구원자로서 예수의 유일성 역시 나는 고백한다. 이러한 나의 신앙은 현재 한국 보수교회의 주류적 선교활동을 수행하는 이들의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생산하는 선교 담론과 수행하는 선교 행태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참된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런 담론들을 생산하고 그런 행태를 보인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 보수 교회의 선교 담론과 선교 행태는 그 신앙에 정확히 충실한 결과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한국 보수 교회의 선교에 대한 신학적 비판 작업이 아니다. 신학적으로는 큰 틀에서 비판자인 나와 비판대상인 그들 사이에 별 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논점은 자신의 신앙(혹은 신학)을 성찰하는 입지점의 차이, 그리고 그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타자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이 글은 오늘날 한국의 보수 교회들이 생산하고 실행하는 선교 담론과 선교 실천 행태에 대한 문화 연구적 비평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나는 한국 보수교회가 실행하는 선교가 한국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어디 즈음에 위치하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1. 선교 : 기독교와 그 타자와의 관계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는 세 가지 핵심적 차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차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관계의 차원일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리스도인의 평생 동안, 아니 영원토록 중심적인 관계이다. 이 관계를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이라는 용어로 달리 표현할 수 있을 것 이다. 두 번째 차원은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홀로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언제나 다른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공동체 속에서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이 차원이 바로 교제 혹은 공동체의 영역이다. 세 번째 차원은 비그리스도인들, 즉 불신자나 타종교인과의 관계이다. 기독교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비그리스도인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차원이 ‘선교’의 영역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선교의 개념을 다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폭넓게 선교를 재정의 하자면, 선교란 바로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의식적으로 형성하는 관계 일반’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자. 여기서 A는 그리스도인이고, B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때 A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별다른 의미가 없고, 또 그에게 B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지 않을 때 A가 B와 맺는 관계는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맺는 관계가 아니다. A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분명하게 자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B를 비그리스도인으로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때 A와 B의 관계는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의식적으로 형성하는 관계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과 상대방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을 때 A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비그리스도인인 B와 선교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관계를 맺는 주체인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식하고, 관계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을 비그리스도인으로 분명히 규정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형성하는 관계가 바로 ‘선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행위이건, 가난하고 소외된 비그리스도인에게 구제와 봉사의 손길을 내미는 활동이건, 비기독교적 사회제도와 공공정책을 변화시켜가는 기독교NGO의 운동이건, 다른 나라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건 모두 선교의 차원에 포함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교는 단지 저 멀리 외국에 나가 타문화권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그곳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활동이나, 아니면 기독교 NGO을 설립하고 거기서 사회와 문화를 변혁하기 위해 벌이는 활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 가운데 비그리스도인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아주 일상적인 영역으로까지 선교라는 개념은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외선교사/사회선교사와 같이 전문적으로 ‘선교’에 헌신된 이들만이 아니라 나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도 선교적 맥락에 동일하게 놓여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교적 관계가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양상은 어떨까? 즉,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관계 맺는 방식은 어떠한가? 최근 몇 년간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인이나 불신자들에 대해서 매우 무례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아왔다. 뉴올리언즈의 카트리나 피해를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정죄하는가 하면, 태국을 휩쓴 쓰나미는 우상숭배에 대한 징벌이라고 설파하는 목사, 이슬람이 한국을 이슬람화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을 학살할 계획 중이라고 주장하는 선교사,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 시장을 옹호하는 목사와 장로들을 비롯한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말과 행동으로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폭력을 서슴없이 행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폭력성이 단지 일부 몰지각한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된 행태일까? 태국으로 선교여행을 가서 불상의 목을 베어버리는 단기 선교사들, 사찰 뒷산에 올라가 통성기도를 해대어 조용한 산문을 어지럽히는 열심 있는 신도들,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기 위해 실력행사에 나서는 기독교인들 등등.....이들은 영적 전쟁을 단지 영적 세계에서 영적으로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서 물리적으로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보수 교회의 평신도 대중들은, 정도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있을지언정, 그 지도자들 못지않게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폭력적이다. 그저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 가득 찬 평신도에 의해 사찰과 불상이 훼손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에 비판적인 방송국 앞에서 데모를 하고 있으며, 구령에 열정에 가득한 이들이 무슬림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타종교와 불신자들, 즉 타자에 대한 배타적이고 폭력적 태도는 이미 한국 교회의 대중들에게서도 쉽게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와 다른 이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조금만 상식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오히려 증오와 폭력의 정서가 더욱 쉽게 발견되지 않는가.

이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의식적으로 형성하는 관계 일반’의 구체적 모습, 즉 선교의 현실적 양상이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믿음에 어긋나는 모든 타자들에 대해 맹목적인 증오에 찬 폭력이 실제적으로 한국 보수 기독교 대중들에 의해 수행되는 선교적 실천의 모습인 것이다.

 
2. 기독교인에게 타자란 어떤 존재인가?

대다수 의식 있는 보수 기독교인들, 혹은 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행태를 근본주의의 잘못으로 돌릴지도 모르겠다. 타종교와 불신자에 대한 무례한 태도는 우리 신앙의 참된 가르침으로부터 이탈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는 잘못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다면 결코 이런 모습은 있을 수 없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 보수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신앙에 이미 타자에 대한 폭력적 태도의 계기가 내재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동일자와 타자, 그리고 인식론적 폭력

여기서 잠시 집단적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인문학의 논의라는 우회로를 경유할 필요가 있다. 정체성의 형성과정을 논의하는 비판적 인문학의 관점에 따르면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관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동일자란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특성이나 속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집단이다. 동일자는 자신과 다른 특성이나 속성을 가진 이들을 타자로 규정하면서 양자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설정한다. 일단 동일자에 의해 타자가 상정되면, 타자는 동일자에 비하여 결함이나 결핍을 가진 존재로 규정된다. 동일자에 의해 타자가 구별되고, 그리하여 타자가 결핍과 결함을 가진 존재로 규정되는 과정을 통해서 동일자는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존재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상적이고 규범적 존재인 동일자와 결함과 결핍을 안고 있는 비정상적 존재인 타자라는 관계의 쌍이 설정된다. 이 관계에서 동일자는 타자에 대해서 우월한 존재가 되고, 타자는 동일자가 보기에 열등한 존재이자 문제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적 타자들은 정상인들의 교정 작업 통하여 정상화되어야 할 존재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나타난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항상 권력관계로 나타났다. 가령 비서구인들(타자)을 정복하고 식민화한 서구인들(동일자)은 자신들이 비서구의 야만인들(비정상성)을 문명화(정상화)하는 소명을 실천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이와 동일한 구도가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비이성애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관계에도 작동해 왔음을 많은 비판적 인문학 연구자들은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 정상적 동일자와 비정상적 타자라는 관계의 구도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한국의 주류적 보수 기독교인들의 인식 속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동일자와 비그리스도인이라는 타자의 구도. 그리스도인에게 불신자나 타종교인이란 죄인들, 다시 말해 타락한 자들을 의미한다.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에 의하면 비그리스도인은 그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로 인해 영원한 지옥불의 심판을 받을 죄인들이다. 반면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정상성의 범주에, 그리고 타종교인이나 불신자와 같은 비그리스도인들은 비정상성의 범주에 위치시키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이러한 구도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신앙 고백의 중심적 내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출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비판적 인문학/사회과학에서는 어떤 존재를 그의 존재 그 자체로 비정상적이고 문제 있는 자로 인식하는 방식을 일컬어 ‘인식론적 폭력’epistemic violence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타자에 대한 보수 그리스도인의 인식과정은 항상-이미 ‘인식론적 폭력’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때 죄나 타락과 같은 개념은 비그리스도인들의 비정상성, 그들의 결함이나 결핍을 지칭하는 ‘기독교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정상성의 범주에 속한 존재로, 비그리스도인들을 비정상적 범주에 속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니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맺는 관계는 동일자와 타자의 구도 속에 형성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존재인 그리스도인들은 비정상적인 비그리스도인들 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저 타락한 죄인들인 비그리스도인들을 동정하거나 혹은 문제시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관계가 타자와 동일자,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구도 안에서 성립되고 있으니 이 관계를 일컫는 다른 용어인 선교 역시 타자에 대한 동일자의 무례하고 무시하는 태도 혹은 기꺼해야 동정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고 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동일자가 타자를 깔보고, 무시하는 것만은 아니다. 동일자는 타자를 깔보고, 무시하는 만큼이나 또한 타자를 두려워한다. 동일자는 언제나 타자를 자신의 순수성purity을 침범하여 오염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두려움은 또한 타자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가령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주의적 증오는 항상 흑인들에 대한 공포를 수반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는 언제나 동일자의 순수성에 대한 애착을 깨트릴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동일성 자체가 사실은 타자를 구축하는 과정을 전제로 성립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타자야 말로 자기 동일성, 혹은 정체성을 성립하게 하고 유지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자는 이렇게 동일자에게 자신의 순수한 정체성을 오염시키거나 파괴할 수 있는 ‘위험요소’로 상정된다. 그래서 타자는 늘상 암묵적으로 두려운 존재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을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비그리스도인에게 두려움과 증오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그들이 어느 듯 우리의 순수한 신앙을 오염시키고,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아지면 우리를 위협하고 박해할 것이라는 상상적인 두려움을 우리는 타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익숙한 교리대로, 우리가 배워온 바대로 믿지 않는 이들이라면 그들은 우리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내부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멘탈리티가 우리에게 배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들'을 배제하거나 정복하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타자들을 자신에게 동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거나 아니면 배척하고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밖에 파악할 뿐, 차이를 타자화하지 않고 상호 인정 가운데 공존해야할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여기에 보수 교회의 선교가 봉착한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앙의 내적 계기로서 타자에 대한 폭력성

비판적인 인문학은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가 갖는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동일자와 타자를 나누는 경계를 해체할 것을 제안한다. 그 어떤 순수한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어떤 정체성도 다른 정체성에 비하여 우월하거나 특권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동일성은 항상-이미 타자성을 그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순수 동일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 모두는 항상-이미 타자들이란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차이들의 상호인정이나 평등을 강조한다. 백인이 흑인보다, 남성이 여성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보다, 서구인이 비서구인 보다 우월하거나 정상적이지 않다. 그 모든 정체성 범주는 서로에 대한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비판적 인문학의 해법이 과연 보수 기독교에도 단순하게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단지 사회적, 문화적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신앙고백의 문제, 신앙의 본질 문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보수 기독교에서는 결코 구원받은 자와 죄인이라는 서로 다른 범주가 상호인정 가능한 ‘차이’에 그칠 수 없다. 우리 보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진리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이들, 그들이 아무리 선하고 정의롭고 윤리적으로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믿음은 신앙의 본질적 차원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보수 기독교의 진리주장은 비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독단이다.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단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존재 자체가 신의 심판을 받아야할 죄인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보수 그리스도인의 관점을 벗어나서 보자면 그리스도인은 항상-이미 비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인식론적 폭력’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마치 가부장적 남성이 여성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 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남성에게 복종해야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인식론적 폭력을 저지르듯이,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을 단지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갈 존재로 단정하는 인식론적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진리주장이 독단주의적이고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이라고 해서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신념은 보수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핵심에 속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을 믿는 ‘의’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는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의 본질에 따른 가치 판단의 영역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죄인인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경계는 결코 해체될 수 없고, 두 가지 정체성이 상호 인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 기독교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동일자와 타자의 구도 속에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신앙의 본질적 차원에서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물리적 폭력의 가능성은 보수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내재적 계기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항상 비그리스도인을 비정상적 타자로 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타종교에 구원이 없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모두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보수적’ 기독교인인 한, 비기독교인들에게 보수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이 독단주의자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으며, 비그리스도인들을 비정상의 범주에 위치시키는 인식론적 폭력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보수 그리스도들은 타자에 대한 실제적인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에 언제나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존하는 위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신념 상 비그리스도인을 타자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지 말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타자에 대해 무례하지 않기를 원하는 의식 있는 보수 그리스도인들, 혹은 복음주의자들은 그래서 이러한 곤혹스러운 딜레마를 언제나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견지하는 그 참된 신앙의 본질 내에 배태되어 있는 타자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성은 그것의 윤리적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어떤 ‘자연인’에 대해서 그가 어떠한 나쁜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 자체가 악하다고 규정하는 입장이 어찌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러한 태도는 ‘유색인종’이나 ‘여성’에 대해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들이 보이는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상식적인 이성과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들이 결코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다시 말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에 잠재적 폭력성이라는 비윤리성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그것의 내재적 계기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수 그리스도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다.

 

 3. World Without Strangers

이상은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선교라는 맥락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성이 보수적 기독교 신앙의 내적 구조로부터 발생하게 되는 논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이었다. 그러나 타자에 대한 보수 그리스도인의 폭력성은 신앙 논리상 잠재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잠재적 경향이 현실적으로 발현되는 양상은 충분히 몇몇 조건의 영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땅의 보수 기독교는 타자에게 단지 인식론적 폭력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을 통한 과도한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 기독교의 신앙적 본질에 타자에 대한 폭력적 계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폭력성을 제어하거나 전화할 수 있는 사랑의 계기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에 내재된 잠재적 폭력성의 계기가 사회적 장 속에서 지금과 같은 과도한 폭력적인 양상으로 발현되는 현실적 메커니즘 역시 설명되어야 한다. 타자에 대해서 인식론적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보수적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과 행동을 통한 실제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들도 외국 보수 기독교의 경우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한국 보수 기독교의 문화적 특수성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타자에 대한 한국 보수 기독교인의 폭력성은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서 기독교인의 동일성identity의 형성 메커니즘이란 문화적 과정을 통해서 분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문제의 핵심은 타자와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때 타자와의 관계는 타자의 부재를 상상함으로써 구축되는 역설적 양상을 보인다.

타자의 상상적 부재와 폐쇄적 동일성의 구성 : 일본 우익적 국민주의의 경우

이와 같은 관계 구조를 나는 ‘공감의 공동체’와 ‘공상적 실천계’라는 개념을 통하여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개념은 코넬 대학에서 아시아 사상사를 가르치는 일본계 미국 지식인 사카이 나오키의 글, 「공감의 공동체와 공상의 실천계 -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존재를 둘러싸고」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사카이의 이 글은 2001년 NHK 교육방송의 ‘씨리즈, 전쟁을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의 2편 ‘전쟁 성폭력을 묻는다’가 일본 우익의 압력에 의해 대폭 수정되어 방송된 사태가 함의하는 바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카이는 이 사태를 통해 일본의 우익적 국민주의를 분석하면서 ‘공감의 공동체’와 ‘공상의 실천계’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개념들이 보여주는 바는 일본 대중 사이에 만연한 우익적 국민주의는 자신들이 타자와 분리되어 있다고 공상적으로 가정함으로써, 그리고 일본인들이 전적으로 동질적인 정체성을 가진 폐쇄적 공동체라는 공감대를 상정함으로써 성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우익적 국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이 타자에 대해서 취하는 상상의 구조를 이해해야한다고 사카이는 생각한다.

사카이는 인류학자 요하네스 파비언의 ‘동시대성’coevalness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타자와의 분리를 통한 폐쇄적 공동체의 성립구조를 설명한다. 동시대성이란 말 그대로 시공간적으로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 즉 타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자가 자신의 연구대상과 상호작용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적 동시성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 인류학에서 인류학자는 원주민과 같은 시간대에 있는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서양의 인류학자는 자신이 속한 시간대와 원주민이 속한 시간대가 다르다고 상정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이 속한 시간대가 원주민이 속한 시간대 보다 진보되었다고 생각함으로써 원주민과 자신 사이의 상호 작용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사카이에 의하면 동시대성의 문제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사카이는 타자와 같은 시간 속에 함께 존재하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타자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그렇게 타자를 대할 수 있는 윤리적 가능성이 수립된다고 한다. 윤리란 나는 인식주체이고 타자는 인식대상이라는 주체-객체의 도식에서 벗어나, 나 역시 타자의 시선에 노출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나는 내 잘못된 행위가 타자의 시선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다는 부끄러움의 감각을 갖게 된다. 또한 타자가 나와 동시간대에 존재함을 인식함으로써 나는 타자의 물음에 응답할 책임이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사카이는 말한다. 그런 견지에서 시간의 위계화는 내가 타자에게 응답하는 존재를 부인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그들의 대답이나 질문을 면제 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을 향해 말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그들에게 단순한 인식주관이 될 것이다. 또 동시에 인식주관이 된 나는 그들에게 노출된 존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의 위계화는 응답에 대한 책임과 부끄러움의 불안으로부터 면책되기 위한 기제인 것이다.

‘전쟁 성폭력을 묻는다’를 검열했던 일본의 우익세력이 기반하고 있는 국민주의는 자신들이 타자와 분리된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기반 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사카이는 분석한다. 즉 일본의 우익 국민주의는 타자와의 동시대성을 부인함으로써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철저하게 타자의 시선을 차단하고 타자의 물음에 귀를 막는 자폐적 동일성을 추구하는 태도이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비윤리성이 유발하는 모든 부끄러움을 은폐할 수 있게 된다.

부끄러움이란 타자의 시선이 전제되어 있을 때 만 성립하는 것이다. 즉 일본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은 일본인이 아닌 비일본인(비국민,외국인)과의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만이 가능하다. 이는 동시에 같은 일본인끼리는 자신들의 치부를 들춰내고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동질집단의 친밀함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즉, ‘전쟁 성폭력을 묻는다’의 검열 행위와 같은 수치스러운 행위들을 우익이 일삼는 것은 그들의 공상세계에 외부 혹은 타자 즉, 비일본인, 비국민의 시선의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상된 시나리오는 ‘우리 일본’과 그에 대한 적대적인 ‘외부/타자/비일본’의 구도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의 가치판단의 근거는 일본이라는 본질적이고 폐쇄적인 영역 내부에만 고착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국민이란 서로의 부끄러움을 용서하고 공감을 통해 성립된 자기연민의 공동체이므로, 그곳에서는 나라를 위해 우리의 부모나 형제, 천황폐하가 저지른 범죄가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새삼스럽게 제시되는 사태는 공동으로 부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상된 친밀성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타자의 시선과 물음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야 한다. 즉 ,이 시나리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상된 친밀함의 정서를 퇴색시키는 현실적인 조건이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이 친밀함의 공상성을 자각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상태에서 작동될 수 있다.

일본 우익의 국민주의는 공상된 친밀함에 근거하는 공상적 공동체 속에서 수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으로 타자의 부재를 상상함으로써 가능하다. 타자의 존재를 상상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자신들이 타자에 대해서 저지른 폭력이나 억압에 대해서 눈감을 수 있으며, 타자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자신과 다른 존재와 어떻게 공존하며 협력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윤리적 질문을 은폐할 수 있다. 이렇게 타자와의 상상적 분리를 통해 자신들을 친밀성과 동일성을 공상하고, 그러한 공상에 기반해 폐쇄되고 자기 완결적 공감의 공동체를 구축함으로써 일본 우익 국민주의는 자신들의 비윤리성을 은폐하며, 자신들이 마주한 윤리적 정당성의 위기를 가상적으로 해소한다.

타자의 상상적 부재에서 악마화된 적이라는 공상된 타자로

보수 기독교인의 신앙 논리 외부에서 타자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독단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폭력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앎은 보수 기독교인의 관점이 아니라 타자의 관점에 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타자의 관점이나 시선을 의식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면 타자의 존재 자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자신들의 인식체제가 결코 윤리적이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보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윤리적 의구심을 품어야 하고, 타자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적 태도를 부끄럽게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보수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타자에 대한 폭력적 경향이 내재한다는 윤리적 불안감과 그 동안 자신들이 타자에 대해 취하였던 인식에 대한 부끄러움을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불안감과 부끄러움은 보수 기독교 신앙을 윤리적 의미에서도 최고의 진리라고 믿어왔던 신념을 붕괴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 신념에 의해 주조된 정체성 역시 해체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된다. 타자의 시선의 존재는 그래서 보수 기독교인의 동일성에 대한 위협요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것에 입각해서 성립된 자신들의 동일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자의 시선과 물음을 차단해야 한다. 즉 자신들과 타자들 사이의 동시대성을 부정해야하는 것이다.

한국 보수적 주류 기독교는 타자를 철저하게 ‘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을 통해서, 그것도 그냥 이해관계가 달라서 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동기로 선한 ‘우리’를 공격해오는 그러한 적들로 규정함으로써 그들과의 동시대성을 부정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상적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그들은 기독교인을 삼키려고 두루 다니는 우는 사자와 같은 자들이며,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자들이며, 죄에 빠져 하나님을 부정하는 진노의 자식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에 대해 가나안의 이방민족을 진멸하던 여호수아의 담대함으로 맞서야 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던 골리앗과 싸우던 다윗의 용맹함으로 대적해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타자가 사악한 적으로 설정되면, 그리고 그 사악한 적이 위협적인 존재이면 일수록 나를 향한 타자의 시선은 물리쳐야 할 유혹이며 그들의 물음은 분쇄되어야할 계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것이 한국 보수 기독교의 공상적 실천계이다.

타자의 부재를 상정하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사악한 타자의 위협을 공상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보수적 주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비윤리성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고, 집단적 동일성을 지킬 수 있게 된다. 한국을 장악하여 기독교인들을 학살하려는 이슬람세력,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우상 숭배하는 불교도들, 세속 쾌락에 빠져 타락해가는 불신자들, 하나님을 부정하는 좌파들로 인해 한국 교회와 사회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다고 상상한다. 이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용사들이 영적 전쟁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슬람의 음모에 대해서 모여서 규탄하고, 불상의 목을 치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을 유지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며, 좌파세력을 척결하고 우익세력을 지지하는 대규모 정치집회를 연다.

기독교인들 내부에서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비판하면서 보수 기독교의 폭력성을 지적하게 된다면, 이러한 행위는 즉시 배신자가 된다. 마치 ‘종군 위안부’를 비롯한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지적하는 일본 내의 진보적 인사들을 향해 일본 우익이 민족에 대한 배신자로 규정하거나 일본인의 자격이 없는 자들로 낙인찍는 것처럼, 보수 기독교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보수적 주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공동체성을 위협하는 불순분자로 규정한다. 보수 기도교에 비판적인 자들은 ‘형제를 향하여 라가라고 하는 자들’이며,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자들’이고, ‘제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 눈의 가시를 지적하는 자들’이며, ‘사랑 없는 자들이고’, 결국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들이 된다. 한국의 보수적 주류 기독교인들은 부끄러움의 감각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부끄러움을 서로 묵인하는 공감의 공간 안에서 이들의 동질적 정체성은 지켜질 수 있다. 한국 보수 기독교의 안정적 동일성 역시 공감의 공동체를 구축함으로써만 성립되는 것이다.

동일화하고자 하는 욕망 : 같아지거나 죽어야 하거나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타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또 다른 방식은 그들에 대한 동일화의 실천을 통해서이다. 한 마디로 온 국민을 자신들과 같은 보수적 기독교인으로 만듦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 푸르디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기를 기대하며, ‘민족복음화’를 위한 열망을 장려한다. 그리고 한국을 넘어서 온 세계의 사람들을 보수적 기독교로 동일화하기 위해 한국사회가 ‘쓰임 받기를’ 원하며 ‘선교 한국’의 꿈을 전파하고 있다.

이러한 동일화의 욕망은 전도해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의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구령의 열정에 그치지 않는다. 이 욕망은 한국 사회의 문화와 제도 자체를 그들이 신봉하는 성서의 원리에 의해 동일화하겠다는 발상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도시를 하나님께 ‘봉헌’하여 ‘성시화’하고자 하며, 궁극적으로 한국을 성서위에 세워 ‘성서한국’을 달성하고자 한다. 이렇게 타자를 자신의 신앙에 동일화하고자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욕망이 달성되면 한국 사회는, 어느 의류 회사의 카피처럼, ‘낯선 사람 없는 세계’world without stranger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보수적 기독교인들만 넘쳐나는 그런 사회의 도래를 실제로 한국 보수교회는 꿈꾸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가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보수적 기독교인의 윤리적 정당성을 의문에 부치게 만드는 타자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즉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라면 나의 윤리적 정당성을 성찰하도록 만드는 타자의 시선이나 물음과 같은 것은 원천적으로 필요 없을 것이다. 동질적인 기독교 신앙만을 가진 이들로 이루어진 세계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이상향이다.

성서한국, 선교한국과 같은 표어들이 보여주는 바가 동질적 존재들로만 구성된 사회, 즉 동종사회homogeneous society에 대한 욕망이다. 이러한 타자 없는 사회, 동종사회를 이상향으로 삼는 지향점은 한국 보수 기독교의 신학적 차원으로부터 발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세계가 처음 창조될 당시에는 세계는 완전한 세계였다. 거기에는 악이 없었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독교인만 있었다. 그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회였다. 그런데 그들이 타락함으로 인해 비기독교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어 종말이 이루어지면 모든 비기독교인들, 즉 기독교의 타자들은 그들의 행위doing와 상관없이 단지 그들의 존재being만으로 심판받게 되고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지며, 기독교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기독교인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 게 된다. 그리고 최상의 세계이자 완전한 세계인 종말을 통해 이루어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는 오로지 기독교인들만 존재할 것이다. 타자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이렇게 보수적 기독교인의 신학적 지향 속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있다.

나는 보수적 기독교에게 있어서 타자의 존재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타자는 동일화되거나 아니면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이 보수적 기독교인의 믿음이다. 이는 보수 기독교의 신앙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교리적 중핵으로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를 인정할 수 없는 보수 기독교의 욕망은 현실적 사회 공간 안에서 타자를 사악한 적으로 상정하는 공상적 시나리오를 구축함으로써, 또한 공감의 공동체를 구축함으로써 정당화되며 유지된다. 이것이 이 땅의 보수 기독교회가 자신의 타자와 의식적으로 맺는 관계의 양상을 규정하는 논리이다.

 

 4. 찌꺼기의 자리, 선교의 자리

나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나 ‘아 하나님의 은혜로’와 같은 찬송을 좋아하며, 아무 대가 없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보수적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절대적으로 믿으며, 성서의 무오성을 신봉하고, 종교다원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교리에 기반 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나를 포함한 보수 기독교인이 자신의 타자와 의식적으로 형성하게 되는 선교적 관계는 그 근본에서 폭력의 계기에 의해 관통되고 있다. 나는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폐쇄적 동일성에 함몰되지 말고 타자의 관점에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관점에 서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 믿고 있는 우리의 윤리적 정당성을 의심스럽게 만들며, 우리 안에 내재한 폭력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인종주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몰윤리적 주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타자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윤리적으로 정당한 주체가 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내 신앙을 포기할 생각도 없다. 여전히 내게 예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보수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타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입장은 인종주의자들이 타인종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상동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편견이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은 덜 폭력적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보수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을 여전히 타자로 설정하고 그 타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신념과 신앙에 대해 폭력이 되지 않는, 혹은 최대한 덜 폭력적인 선교의 방식을 고민해야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 지점에서 기독교 선교의 최초 시점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다시 말해 성경에 기록된 선교의 모습 속에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보수적 신앙의 태도에 가장 걸 맞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최초의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질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주류였다. 앞에서 말한 동일자와 타자의 구도에서 보자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타자의 위치에 있는 존재였다. 유대 사회에서도, 로마 사회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비정상적 존재로 규정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는 유대교에 의해 신성모독자의 혐의로 처형당했고, 로마정부에 의해 반란 선동자 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유대교 입장에서 기독교인은 신앙적 정상성을 벗어난 비정상적 이단이었고, 로마사회의 입장에서 기독교인는 로마 제국 질서의 위대함에 순응하는 시민적 정상성에서 벗어난 비정상적 위험세력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 사회에서도, 로마 사회에서도 동일자의 권력에 의해 배제되고 차별받는 타자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 즉 주류가 될 수 없었다. 주류의 자리는 언제나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존재로 인정되는 동일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의 동성애자, 불법이주민, 장애인 등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초기 기독교 선교가 행해졌다는 것은 오늘날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의 과업을 수행하는 자신의 처지를 ‘만물의 찌꺼기’와 같다고 한 바울의 표현(고4:13)을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곱씹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바울이 말하는 ‘찌꺼기’란 바로 당시 사회 속에서 타자화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바울의 시대에는 그 어떤 사회적 권력도 갖지 못한 소수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 없는 타자들, 혹은 소수자들이 권력을 가진 동일자들, 다수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사회적인 위협이나 폭력으로 다가올 가능성은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세상의 주류이다. 세계적으로도 기독교권 국가들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고, 한국 사회에서도 그리스도인들, 특히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정상적 존재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차라리 주류와 다수자의 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의 신념이나 신앙을 틀렸다고 말하고, 그들이 심판받을 죄인이라고 정죄할 때, 그것은 하나의 위협으로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리스도인이 사회적으로 타자와 소수자의 자리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진리주장이 실제적 폭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최소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리더가 되어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의 주류적, 다수적, 지배적 위치를 지향하고 그 자리를 획득하게 되면 될수록, 오히려 기독교의 선교는 기독교의 타자들에게 위협과 자의적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진리라고 믿는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본받아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며 제시하는 형상은 바로 ‘만물의 찌꺼기’이다. 그것은 기꺼이 타자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 나아가 적극적으로 타자-되기를 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보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과 같이 찌꺼기의 삶을 살아 갈 때, 적극적으로 타자-되기의 삶을 구현할 때,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의식적으로 형성하는 관계인 선교가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폭력으로 나타나게 될 가능성이 가장 최소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정정훈/연구집단 카이로스
복음주의자인 줄은 잘 모르겠으나 보수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다. 거기에 성속이원론자이다. 중앙대에서 문화연구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이라는 연구자 코뮨의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코뮨주의선언>(교양인), <서양고전을 읽는다-정치사회편>(휴머니스트), <문화정치학의 영토들>(그린비), <모더니티의 지층들>(그린비) 등을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