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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trans-post-christianities

이념과 일상 혹은 동원과 참여, 그 사이의 길을 찾아서

― 정종훈 교수님의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반성과 과제”에 덧붙여 -

* 본 글은 2009 KSCF 정책토론회의 논평문입니다. 

정용택 (한신대 SCA 회원, 한신대 Th.M, 카이로스 회원)


1. 너무나 추상적인,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들..


정종훈 교수님의 발제문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듯이, 먼저 분단시대의 의미를 짚으면서, 그리고 그 분단시대의 극복을 한국교회의 당면 과제로 제시하면서 논의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 과제를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과거를 돌아보는 것, 즉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다섯 가지 죄과를 고백하고 그로부터 철저히 돌이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욱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신학은 “율법의 제3용법을 결여한 복음주의신학”이었고,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모르는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 영광의 신학을 모르는 십자가의 신학”이었으며, “바울의 신학과 야고보의 신학을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바울의 신학을 앞세운 신학”이자,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을 상호보완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대립과 정죄의 기회로 삼은 신학”이며, 결국 “무책임한 정교분리와 이기적인 정교밀착의 혼란 속에 있는 신학”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교수님의 한국기독교에 대한 시좌가 분단시대의 모순 즉 분단체제론(백낙청)적 관점에서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과 또 그에 대한 대안들, 예컨대 “진리와 자유를 축으로 하는 열린 신학”, “개교회중심적인 목회자들과 편협된 신앙의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을 도전하는 에큐메니칼 신학”, “기독교인의 모든 삶을 도전하는 생활신앙의 신학”, “정치인들의 행위와 국가의 대내외 정책 그리고 정치의 구조적인 차원을 신학적인 대상으로 성찰하는 정치신학”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또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분단을 생존의 문제이자 신앙의 문제”로까지 이해하고, “분단극복과 통일의 모색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교회를 거대한 구조의 전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단일화된 집합적 주체로 설정했을 때나 타당한 것이지, 한국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의 신앙인들에게, 그중에서도 특히 저 같은 젊은 세대들에게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적인 이슈로만 느껴지게 사실입니다.

 

분단체제, 민족통일, 신자유주의와 같은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의 보다 포괄적인 의미는 세상을 보는 지배적 관점, 인간의 삶과 자연의 자원을 관리하는 지배적 방식을 제공해주는 생각과 가치의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인간의 행위와 가치판단은 개별적으로 수행된다기보다는 그 공동체가 고유하게 지키고 있는 보다 큰 담론의 모태로부터 기원합니다. 이것이 이념이라는 용어가 포착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진실일 것입니다. 분단체제, 세계체제, 민족모순, 신자유주의, 계급모순, 통일운동 등이 분단체제론의 키워드라고 했을 때, 분단체제론은 결국 이러한 키워드들로 표현된 현실을 극복 혹은 모색해나가려는 보편적 가치 혹은 이념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보편적 가치들이 배타적 가치들이 되고 그것이 제도와 행위를 만드는 유일한 조직원리로 상정될 때 분단체제론은 또 하나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 현실의 다중적인 고통과 폭력의 체계를 은폐하는 기능을 할지도 모릅니다.

 

 

2. ‘스펙 쌓기’는 선택이 아니라 강제입니다.


분단체제(혹은 민족모순)가 다른 그 어떤 사회구성체나 구조, 제도, 담론보다 한국인들의 실제 삶의 가치와 행위를 결정짓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검증도 반박도 곤란한 문제 같습니다. 당장의 대학 등록금과 성적, 스펙, 취업, 연애(혹은 결혼), 내 집 마련, 자기 계발, 소비생활 같은 다소 지엽적인(?) 소시민적 사안이 막상 일상을 살아가는 데 더 절박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청년세대들에게, 분단과 통일 같은 민족모순은 그리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실제적인 감각의 차원에서만 놓고 본다면, 참여정부와 MB정부 시대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현실의 문제는 차라리 교수님이 마지막의 ‘맺는 말’에서 지적하신 “소민적 삶을 담보하기 위한 스펙쌓기”, 바로 그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보입니다.  물론 교수님은 그것을 두고 “비기독교인 청년들과 구별되는 것을 찾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이 문제가 기독교인/비기독교인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처한 현재의 위기를 반향하는 것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한데 교수님은 청년들이 “소시민적 삶을 담보하기 위한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있는 현상을 “신앙인으로서 자기 정체성 상실”, “삶의 궁극적인 질문 외면”,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삶의 자리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회피 및 무관심”과 동일한 차원에서, 즉 청년세대 일반에 나타나고 있는 일종의 무능함 혹은 부족함의 문제로 평가하고, 그에 대한 신랄한 질타를 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과연 이러한 훈계 혹은 질타가 청년세대들이 처한 위기적 상황을 공정하게 인식하고 내린 판단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기독청년들이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삶의 궁극적인 질문을 외면한 채,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삶의 자리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회피 및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 가운데서 오로지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그나마 신앙생활의 모습도 소위 열린 예배류나 은사집회류 또는 대중집회류에 참여하는 선에서 자족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이 지금 기독청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청년 일반으로 하여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전가시키는 신자유주의적 문화에 지나칠 정도로 순응적이게 만들었는지를 좀 더 섬세하게 고려해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청년들이 부딪히는 문제가 한국 사회의 일상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대단히 미시적이고 문화적인 억압, 특히나 그것이 자유나 창의성, 자기계발이라는 허명 아래 불안을 가중시킴으로서 덧씌워진 달콤한 유혹의 폭력일진대, 청년들을 이 숨막히는 일상으로부터 온전히 구원해줄 그 무엇을 한국 기독교는 정녕 제공한 적이 있었던가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성서가 증언하는 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하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 청년들의 불안한 일상을 대신 살아주지 않고 계시고, 또 그 일상으로부터 확실한 구원을 보장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제자됨의 헌신과 복종을 요구한다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너희들은 한심하게 “자기계발” 혹은 “스펙 쌓기”에만 몰두하고 있냐고 질타하기 전에, 무엇이 청년들 스스로도 한탄해마지 않는 그런 삶을 반복하도록 강제하고 있는지를, 그 구조화된 행위의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이러한 분석을 기초로 하여 스펙 쌓기에 몰두하지 않아도, 혹은 88만원의 임금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생활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모색해나갈 수 있도록 청년들의 활동을 후원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3. 동원형 교육훈련이 아닌 자율적 실험의 공간이 될 수는 없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교수님이 제안하신 “기독청년 아카데미”는 분명 유익한 프로그램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취지와 내용, 목표, 전망 등에 관해서는 어떠한 이견도 없습니다. 잘만 시행된다면 분명 효과가 클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청년들(=KSCF 회원 학생들)이 얼마나 호응을 하겠냐는 것입니다. 이 좋은 프로그램을 청년들에게 어떻게 홍보하고 전달하여 참여를 끌어낼 수 있을지가 관건인데, 이 아이디어가 청년들의 자발적인 고민 가운데서 나온 것이 아닌 이상, 기획의 단계에서 아무리 청년들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고 그들이 주체가 되어 준비가 진행된다고 해도, 결국에 또다시 청년들을 수동적인 객체로 ‘동원’하던 종래의 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오늘의 정책토론회와 관련하여 좀 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보겠습니다. 오늘의 정책토론회가 있기 전에 먼저 KSCF의 주체인 청년들로부터 KSCF의 정책과 프로그램 개발에 관한 광범위한 의견 수렴의 과정들이 진행되었는가 하는 것을 묻고 싶습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에 제가 소속해 있는 한신대 SCA 정기 모임에 참석해서, 후배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KSCF에서 여러분들을 상대로 정책과 프로그램 계발에 관한 아이디어 공모전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학생들 개개인이 혹은 각 단위 SCA가 제안한 아이디어에 어떠한 이의도 달지 않고 KSCF 사무국에서 그대로 수용하여 그 아이디어의 구체화를 도와주기로 약속했다면, 가령 운영비 내지는 활동비, 컨텐츠, 인적 네트워크, 자료, 장소, 소품, 노하우 등등에 이르는 모든 제반 여건을 KSCF 사무국이 책임지고 후원하되, 기획과 운영은 학생들에게 일임하기로 한다 했을 때, 단 정책이나 프로그램의 취지가 KSCF가 지향하는 바와 상통한다는 전제 하에서 여러분들을 후원해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여러분들이라면 어떠한 아이디어를 내놓겠는가?” 학생들이 무엇이라고 답변했을 것 같나요?


“제 손으로 몇몇 친구들과 교회 주일학교 교재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요. 이를 위해서 KSCF에서 제게 재정적 후원 및 유능한 동료들, 작업 공간, 참고 자료 등을 제공해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 이름으로 혹은 우리 팀의 이름으로 책을 출간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해요. 책의 내용을 발표할 수 있는 자리도 만들었으면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도 KSCF에서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예술단을 조직하고 싶어요. 연극, 영화, 소설, 춤, 공연 등의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그런 팀을 만들고 싶은데.. KSCF에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기존에 있는 기독교 예술팀 가운데 재정적 여건이 열악한 팀을 KSCF가 후원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대안학교 교사가 되고 싶고, 나아가 대안학교를 직접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KSCF에서 그런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나 단체를 소개해줬으면 좋겠어요.” 


“해외 유학을 가고 싶어요. 그 부분에 있어 KSCF의 도움을 받고 싶어요.”


“공정무역으로 판매되는 커피숍을 만들고 싶습니다. 바리스타가 되고 싶거든요. 『88만원세대』의 저자들도 제안했고, 또 실제로 지금 많은 청년들이 스타벅스나 커피빈 같은 다국적 프렌차이즈가 아닌, 일종의 대안적 공동체의 개념으로 이런 저런 카페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어요. KSCF 안에도 분명 그런 꿈을 가진 친구들이 있을텐데, 사무국에서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소년소녀 가장들이나 실업계 고등학교 청소년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고 싶어요. 공부의 꿈을 잃어버린 분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데.. KSCF에서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떻습니까? 한신대 SCA는 대부분이 신학 혹은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회원입니다. 어른들이 보시기엔 학생들의 생각이 황당할 수 있고, 또 이러한 활동을 KSCF에서 지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학생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KSCF에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 희망사항의 기독교운동적인 가치나 실현 가능성을 따지기 전에, 먼저 이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들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KSCF가 여전히 청년들을 상부에서 동원하여 운영하는 단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청년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운영되는 새로운 가능성의 운동체가 될 것인가는 바로 그런 작은 변화의 몸짓에서부터 판가름 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제가 관련을 맺고 있는 단체 두 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 개혁과 집단지성의 실험실을 표방하는 ‘카이로스’(Christian Association for Interactive Researches On Scripts) 그리고 ‘가름’과 ‘다름’ 사이에서 새로운 형식의 기독교청년운동을 꿈꾸는 ‘나름’, 이 두 단체는 KSCF와 비교했을 때, 역사적 위상도 전혀 없고, 해외의 풍부한 네트워크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물론 당연히 청년들을 도와줄 간사나 이사님도 없습니다. 오히려 청년들 스스로가 자기 돈과 시간, 열정을 쏟아 부어서 만들어가야 하는 그런 단체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열악한 여건에 있는 단체들에 여기저기서 소문을 들은 기독청년들이 계속 몰려오고 있습니다. 모임을 꾸린 지 몇 달 만에 청년들 스스로의 힘으로 공간을 마련했고, 자발적인 회비 납부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나름'의 경우는 기독교 청년문화담론을 일신하는 웹진을 이미 4호째 발간했고, 강좌도 운영 중입니다. 곧 있으면 까페도 오픈할 것이라고 합니다. ‘카이로스'의 경우에도 대학생/대학원생들의 신분인 회원들의 자력으로 번듯한 연구실을 마련했고, 여러 기존 기독교 학술/운동단체들과 협력 사업을 추진 중입니다. 물론 이 두 단체는 공히 별도의 상근자 없이 모든 멤버들이 상근자가 되어 활동하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 있구요.

 

KSCF에서는 플랫폼 생산 방식으로 끊임없이 좋은 아이템들을 생산하여, 청년들에게 홍보하고 있지만, 왜 사무국에서 늘 말하듯 호응과 참여는 저조한 것일까요? 반대로, 아무 데서도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청년들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카이로스와 나름은 어째서 매일 같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그 아이디어가 과감하게 실행되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타율과 자율, 수동과 능동, 동원과 참여, 강제와 선택, 교육과 실험의 차이가 바로 그런 상이한 풍경을 낳은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