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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을 읽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다. [김인봉]


김인봉 (카이로스 회원)

 

목차

1. 군주론에 대하여(1) : 마키아 벨리에 대한 잘못된 편견

2. 군주론에 대하여(2) : ‘운명’과 ‘역량’ 그리고 ‘인민’

3. 한국 정치의 현실(1) : 한국의 이상한 군주들

4. 한국 정치의 현실(2) : 정당정치에 대한 회의

 

 

1. 군주론에 대하여(1) : 마키아벨리에 대한 잘못된 편견.

 

<군주론>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때는 고등학교 정치과목 시간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때에 학교에서는 마키아벨리에 대해 아주 단편적인 지식을 가르쳤었다. 때문에 그 동안 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라는 이 근대의 정치철학자가 토마스 홉스와 비슷한 사상을 펼치는, -우리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알 수 있듯이- 민중의 의사에 반(反)하는 주장을 펼치는 이론가라는 편견이 강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살던 시대에도 환영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의 사후에 나온 그의 대표 저서 <군주론>을 금서목록에 올렸고, 프로테스탄트 쪽에서도 카톨릭 교회 못지않게 비난을 했다. 예를 들면 마키아벨리와 동시대 사람인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장티유(1538~1588)는 ≪반마키아벨리론≫에서 생 바르텔미의 학살(1572)[각주:1]을 <군주론>의 탓으로 돌렸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에 대한 비난이 가능했던 것은 <군주론>에서 상당히 노골적으로 군주의 비도덕적 행동을 옹호하는 그의 글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군주라 하면, 특히 신생 군주라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의도 버리고, 자비도 버리고, 인간미도 잃고, 반종교적인 행동도 때로는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한다. ⋯⋯⋯⋯ 그러면서도 부득이 필요한 때는 나쁜 일에도 발을 들여놓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군주는 오로지 전쟁에 이기고 나라를 유지하는 일이 제일이다. 그렇게 하면, 그 수단은 훌륭하다고 누구에게서나 칭송받을 것이다. 대중은 언제나 표면만을 보고, 일의 결과만을 보고 평가하기 때문이다.”[군주론, 18장]

 

이렇게 마키아벨리는 표면적으로 군주의 힘의 정치, 군주의 대중에 대한 절대적 지배의 정치를 펼치는 듯하다. 그러나 진정 마키아벨리는 단순히 폭압적인 군주정 옹호론자였을까? 나는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을 통해 그 동안의 가지고 있던 마키아벨리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해보고자 한다.

 

마키아벨리는 일찍이 이탈리아 정세에 통찰했던 사람으로 그러한 모습은 그가 피렌체 정청의 사무국에서 활동했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분열의 정국으로 혼란과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탈리아는 여전히 여러 도시국가와 공국들로 나뉘어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을 달성한 절대왕정 국가들과 동등하게 유럽 패권을 다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절대왕정 국가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각축장으로 전락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교회(로마),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등 5대 도시국가가 서로 경쟁하는 상태에 있었고, 이 과정에서 도시국가들은 종종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외세를 끌어들이곤 하였다.”[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77p]

 

일찍이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수공업과 해상운송업의 발달로 경제적 부가 증진 되었었다. 특히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유 시민계급의 급속한 세력성장은 기존 교회와 귀족세력들을 위협하며 계급적 특권층을 형성하였다. 14C를 바탕으로 움베르토 에코가 수도원을 배경으로 쓴 소설 ≪장미의 이름≫에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사회를 자세히 묘사한 구절이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는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도시는 제 나라(신성로마제국) 도시와는 어딘가 다른 도시 같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황제나 교황보다는 시장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 눈에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는 수많은 왕국 같았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공국과 소국들은 도시국가(City State)를 형성하며 이탈리아 내부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다투고 있었다. 이러한 이탈리아 정국은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 아테네, 테베와 같은 폴리스(Polis)의 정세와 유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국가의 형태로 인해 이탈리아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같은 절대왕정국의 침략과 위협에 항상 무력하고 지배받던 상황이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국민군 체제가 아니고 용병제였기에 절대왕정국의 군대에 처참히 패배하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이탈리아 내에는 ‘교황청’이라는 반갑지 않는 존재도 이탈리아 내부에서 수많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와 공국‧왕국들을 위협했었다.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이탈리아의 용병제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현재 이탈리아의 몰락은 오랫동안 용병제를 믿어온 데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군주론, 12장] 그리고는 마키아벨리는 용병제는 이탈리아를 무력하게 하는 군대 체제였고 대외적으로 국가의 나약함을 보이게 하는 원인이며 하루빨리 개혁해야 하는 중차대한 사안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는 결론짓는다. 자기 군대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어떤 군주국이라도 평안할 수 없다. 오히려 일단 위기에 처하게 되면 자신을 지켜 나갈 힘이 없으므로 모든 것을 운명(Fortuna)에 맡기게 된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처참한 정세에서 현실적 통찰력이 뛰어났던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해방을 위한, 그리고 인민이 행복해지는 세상을 위한, 그러한 현실주의적 감수성을 호소하며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뚜렷이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는 지금 이 야만인들의 잔학성과 횡포에서 자신을 구해 줄 인물을 보내 주기를 신에게 기도하고 있다. 또 누구의 눈에나 명백하게 비치듯이, 이탈리아는 깃발을 들고 궐기하는 사람만 있다면 언제라도 따라나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군주론, 26장] 마키아벨리에게 이탈리아의 해방은 당시 중세적 사고의 종교적/초월적 문제가 아닌 현실의 문제였으며 다분히 인본주의적인 문제였다. 때문에 그는 <군주론>에서 이탈리아의 정세를 직시하고 해방을 위한 군주를 원했던 것이다. 이에 우리는 단순히 그를 군주제의 옹호론자로만 보고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악마’로 규정하는 것이 역사적/정치적으로 심각히 왜곡된 해석임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말했듯이 “정치는 결코 아름다운 이상을 이 땅의 현실에 도덕적 방법으로 구현하는 활동일 수 없다.”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도덕적이 아닌 윤리의 차원 그리고 현실의 차원에서 그의 정치철학적 함의를 조명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비록 폭력을 옹호하는 글이 그의 저서 곳곳에 있지만 그러한 짧은 맥락을 보고 마키아벨리를 판단하는 것은 큰 실수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정치가를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정당하다고 판단하더라도 결국 그 정치가는 다른 영역에서는 ‘폭력’을 낳을 수 밖에 없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낳아진 ‘폭력’들은 무수히 많은 ‘폭력’들을 낳는다. 정치란 결국 폭력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칸트가 ‘정치적 도덕가’들을 비판하며 “이 정치가들이 수시로 법과 원칙을 떠드는데, 그들이 정작 좋아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폭력이며 원칙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말한 주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실을 외면하는 도덕적이고 단순한 차원의 정치적 접근법을 떨쳐버려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나오는 정치철학을 현실적 접근법으로 읽어야 한다.

 

 

2. 군주론에 대하여(2) : ‘운명’과 ‘역량’ 그리고 ‘인민’.


저자의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에서 저자가 <군주론>의 마키아벨리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운명’과 ‘역량’그리고 ‘인민’이었다.

 

우선 ‘운명’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마키아벨리에게 운명이란 “인간이 자신의 주체적 의지와 역량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자신에게 닥쳐와 그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성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힘”[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106p]라고 설명하며, 운명이란 군주의 역량을 감소시키고 부정적인 일들을 초래하는 요인이라고 말한다. 즉 마키아벨리에게 운명이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사건과의 조우’였던 것이다. 그러한 운명을 이기지 못했던 자가 바로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의 해방자로 여기며 군주의 자질을 두루 갖추었던 ‘체사레 보르자’였다.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가 사자의 힘과 여우의 교활함을 겸비한 해방적 군주의 표상으로 여기었다. 그러나 체사레 보르자도 결국은 ‘운명’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해방의 군주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마키아벨리는 “그의 죽음을 통해 파도처럼 덮쳐오는 운명(Fortuna)의 힘을 타고 넘을 수 있는 역량(Virtu)을 갖춘 군주의 모습을 구성해 갔던 것이다.”[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97p] 여기서 우리는 <군주론>이 이탈리아의 해방을 실현시킬 역량을 두루 갖춘 미래의 군주를 위한 지침서였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오로지 역량의 힘을 신뢰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역량이란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적응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전략을 적절하게 변환하는 유연성이 군주에게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118p] 때문에 군주는 “자신의 권력의지를 현실 속에서 구현해 가기 위해서 운의 영향력을 최대한도로 줄이고, 자신의 통제력을 최대한도로 높여”[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118p]가야 했고 또한 군주는 일치감치 군주의 자질, 즉 역량의 기초들을 닦아야 했다. 즉 ‘역량’이란 “운에 일방적으로 좌우되지 않고 그것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고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이루어 내는 힘”이었다. 때문에 군주가 역량을 키운다면 운명과 조우하더라도 그 운명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군주의 역량이 당시 이탈리아 정세에 필요했고, 군주는 그러한 역량으로 그 당시 이탈리아를 약탈하고 침략하던 야만인들의 -프랑스, 독일, 스페인 같은 절대국가 같은- 운명의 힘들을 맞설 준비를 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역량의 힘이란 그리스도교의 이단 종파인 그노시스파의 ‘아이온’[각주:2]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역량은 단지 군주 한사람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군주의 역량의 힘은 ‘인민’에게서 나왔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가 “마키아벨리는 국왕에게 가르치는 척 하면서 인민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었다. <군주론>은 공화파의 귀한 전서이다.”라고 말했듯이 마키아벨리에게 최상의 관심사는 ‘인민’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최상의 요새가 있다면, 그것은 민중의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요새를 구축한다 해도 백성들의 미움을 샀다면 요새는 당신을 구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민중이 반란을 일으키면 반드시 민중 편에 서려는 세력이 나타나게 마련이다.”[군주론, 20장]

 

하트․네그리는 또한 ≪제국≫에서 마키아벨리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마키아벨리에게 권력은 언제나 공화주의적이다. 권력은 언제나 다중의 삶에서 나오는 산물이며 다중의 표현 구조를 구성한다.”[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10p] 즉 다수의 인민들에 의해 구성된 권력이 마키아벨리에게는 역량 그 자체였고, 인민의 지지가 없는 역량이란 무가치하고 존재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군주는 민중을 항상 자기편으로 잡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역경에 처할 때 대책을 세울 수 없게 된다.”[군주론, 9장]



3. 한국 정치의 현실 : 한국의 이상한 군주들

 

현재 한국의 대통령과 정부에게 국민이란 ‘존재자’들은 없다. 또한 우리 ‘존재자’들은 우리가 ‘존재자’인지 성찰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존재자’들은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인가? 하이데거는 ‘존재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아주 다양한 의미로 ‘존재한다’고 명명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우리가 의미하고 있는 것, 그것과 우리가 이렇게 또는 저렇게 관계 맺고 있는 것 등 그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 것도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존재와 시간, 109p]

 

하이데거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모두는 우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의미를 고찰할 때는 상황이 좀 틀리다. 현재 한국의 군주는 ‘존재’의 의미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 그보다 심각한 사안은 ‘존재자’들 또한 ‘존재’의 의미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여태까지 한국의 군주들은 의미 없는 무(無)를 추구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리고 ‘존재자’로 남고 싶은 이들 또한 무(無)를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들은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나 ‘존재’를 찾고 있지 아니하는, 끊임없이 방황하는 ‘존재자’인지 모른다. 아니, 이제는 ‘존재자’들 또한 허황된 ‘존재’의 진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며 ‘비존재자’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러한 ‘존재자’가 ‘비존재자’로 나아가는 상황을 소위 ‘안철수 현상’이라는 한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군주로 여겨지는 사람에 대한 대중의 광란적 지지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을 ‘존재자’로 여기고 있는 ‘존재자’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한 ‘존재자’들은 대중매체와 매스미디어가 남발하는 이미지에 매료 되 그러한 이미지를 필터 없이 받아들이는 광신주의로 빠져들고 있다. 자신들 스스로 ‘존재자’로 여기며 ‘역량’이 뛰어난 정치적 주권자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진정 ‘존재’의 의미를 -어찌 보면 이러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하나의 놀이일 수도 있지만-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분명하게 당시의 이탈리아 인민의 처참한 현실과 지금 한국 사회의 ‘존재자’들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무관심이 서로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우리들에게 “깨우치고 저항하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그의 책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졌었다. 각설하고 다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돌아오겠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으로 중세시대 군주들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근대적인 사유를 펼친다. “신분이 낮고 비천한 자가 대담하게도 군주의 정치를 논하고 지적한 일을 주제넘은 일이라고 꾸짖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민중의 성격을 충분히 알려면 군주의 입장이 되어 봐야 하고, 군주의 성격을 충분히 알려면 민중의 입장에 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군주론 / 헌사문] 이러한 주장은 흡사 그리스도교 신약성서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구절과 비슷하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태복음서, 23:12] 그러나 지금 한국 정치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은 국민들의 소리는 듣지 않고 자신들의 역량을 일부의 꼭두각시에 맡기려고 한다. 국민들 또한 자신들의 역량을 키우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이러한 국가의 폐단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진정으로 국가를 지속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은 뛰어난 일인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들을 결집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인민이 자신들의 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 조건은 바로 그들이 자유로울 때 성립된다. 인민의 자유에 기반한 정체, 그것이 바로 공화정이다.”[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157p]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일인의 역량이 아닌 다중의 자유로운 인민의 역량에 의해 구성되는 정치가 공화정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위를 통해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인민을 위한 해방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사유를 곱씹으며 우리나라의 군주(현재의 군주, 미래에 군주가 될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나라의 정당정치의 한계를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

 

 

4. 한국 정치의 현실(2) : 정당정치에 대한 회의

 

헌법 제 19조에는 분명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정부와 국가는 국가보안법으로 국민들을 자유를 억압하고 규제하며 헌법의 정신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군주의 ‘역량’의 기반이 되는 국민들의 자유를 탄압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군주의 반(反)인민의 정치를 규탄하며 소수의 특권세력을 위한 정치가 아닌 다수의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군주에게 요청한다. “진정으로 나는 다중이 그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권좌를 장악하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는 군주는 불운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단지 소수를 적으로 둔 자는 쉽게 그리고 폭력에 자주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보전할 수 있지만, 인민을 적으로 둔 자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로마사논고, 16장]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시대와 상황이, 신중하고 끈기 있게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에게 적합하다면 융성하게 된다. 반대로 시대와 상황이 변했는데도 군주가 자기 방침을 바꾸지 않는다면 망하고 만다.” 지금 우리의 군주가 이러고 있다. 자기의 방침을 바꾸지 않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우리는 이러한 폭군에 대한 저항과 함께 이 우매한 군주를 부추기고, 한국 사회를 자기들 멋대로 조작하는 ‘정당정치’의 수렁의 늪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이 늪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지난번 정권 때의 집권정당이든 현 정권의 집권정당이든 우리는 정당정치가 몰락했다는 표현을 해도 무방할 것이다. 국민을 배반하는 수구 정치가들이 모여 있는 한나라당은 서로 물고 싸우며 해체하기 직전이며 합리적 보수와 진보를 주장하는 정당들은 ‘통합’이란 슬로건을 내밀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수구 정치가들에게는 본인이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그러나 나는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을 보며 합리적 보수를 자처한 사람들에게 할 이야기가 많아졌다. 그들은 현재 ‘노무현 대통령’을 기점으로 정치적이 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을 ‘소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다. 그들은 ‘노무현’이라는 과거의 대통령과 관련된 모든 언어적․시각적 이미지를 재구성하고 재번역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말이다. 그곳에는 어떠한 성찰도 어떠한 반성도 없다.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노동자와 농민들에 가한 억압과 폭력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말이다. 하중근 열사에 대해 알고 있는 국민이라면 노무현 대통령 추종자들이 내세우는 ‘합리’에 대해 절대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해방의 마키아벨리즘의 입장에서 보면 노무현 대통령은 인민의 대통령이 아니었다. 오히려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같은 책을 통해서 관찰하자면 현 정권의 대통령이든 노무현 대통령이든 국민들과 소통하지 않는 절대적 군주들이다. 마키아벨리가 <로마사논고>에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보자면 노무현 대통령 또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오직 자신의 올바른 신념만을 국민에게 강요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이 한미 FTA를 시작했다는 얽매임의 사슬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사건이야 말로 우리 국민들이 판단해야 할 ‘소급적 이해관계’의 역사적 사건[각주:3]이다. 그들이 판단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이러한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키아벨리는 물론이고 동양사상가 맹자 또한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왕도(王道)의 정치를 강조한 동양의 사상가 맹자도 군주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지 않았다. 맹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군주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그 군주는 곧 변혁하여 새롭게 갈아치워야 한다. 그러나 평범한 백성들이야말로 영원히 갈아치울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면을 보면 맹자라는 왕도(王道)의 정치를 지지한 중국의 이 뛰어난 고대 사상가는 마키아벨리와 유사하게 인민을 위한 현실주의적 정치를 펼쳤다 할 수 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정도(正道)와 도덕(道德)에 집착하다 '합리'를 잃어버린 합리적 보수의 정치가들 보다도 군주에게 인민과 함께하는 정치를 하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제 서평의 마무리를 하겠다.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에서 저자가 마키아벨리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처럼 나는 한국의 정치가들과 국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에 대한 재해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치에 대해, 한국의 사회에 대해, 지금 우리가 어떠한 길을 걷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말이다.

즉 우리는 현재 '존재'의 의미가 필요하다. '존재'의 의미를 알아가기 위해 성찰함으로서 우리가 진정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불의가 되었던 악이 되었던 우리는 우리의 의사에 반(反)하는 것들에 ‘저항’할 수 있다. 프랑스의 혁명가이자 정치가였던 생쥐스트(1767~1794)가 우리 자신의 존재의식 성찰에 대한 부재를 비판하며 이야기 한 것처럼 말이다. “국민은 근거도 없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착각은 고향같이 아늑해서 현명한 판단을 가릴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착각의 늪에 빠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들에게는 마키아벨리가 강조했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행동도 ‘인민’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행동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잠재적 ‘역량’과 ‘인민’의 주체성을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각주:4]에게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평에 참고로 한 도서>

[군주론/정략론, 마키아벨리, 동서문화사]

[존재와 시간 :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이기상, 살림]

 


1.위그노 전쟁의 정점을 이루는 구교도에 의한 신교도의 대량학살사건. 1572년 8월 24일 생 바르텔미(Saint Barchelemy) 축일의 미명에 파리에서 시작해서, 프랑스 각지로 파급되었다. 살해된 자의 수에 대해서는 동시대인의 평가에서도 전국적으로 2천 명에서 10만 명으로 큰 격차가 있는데, 종교적 불관용이 극단적인 형태를 취한 전형적 사례이다. [본문으로]

2.그노시스(gnostiques)파가 주장한 영구 불변의 힘이다. 지상 존재에서 나온 이 힘으로 지상 존재는 세계를 다스린다. 결국 이 힘은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정신이다. [본문으로]

3.과거의 역사적 사건은 기술하는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이나 평가가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집단들이 있다면 그 역사적 사건에는 늘 과거와 관련된 이해관계가 수반된다. [본문으로]

4.고대 로마의 운명의 여신. 그리스의 티케(Tyche)와 동일시되었다. 본래는 풍요다산의 여신이었는데, 점차로 <행운>에서 <운명>의 여신으로 발전하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