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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trans-post-christianities

프란시스 쉐퍼, 기독지성운동의 퇴행


프란시스 쉐퍼, 기독지성운동의 인가, 인가?: 쉐퍼, 진정한 '이성으로부터의 도피'

*2009년 성서한국대회 신앙과 학문 분과 발표문

연구집단 카이로스 cairos_@naver.com 

1.프란시스 쉐퍼와 한국 기독교 지성운동

프란시스 쉐퍼. 신앙과 학문에 대한 논의에서 어떻게 그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스위스 알프스산 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오두막으로 전세계로부터 모여든 젊은이들이 당대의 인생과 신앙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사역이 펼쳐진 곳, 라브리. 그리고 그 라브리를 이끌며 철학, 미술, 음악, 영화, 신학을 아우르는 현대 문화와 문명 사조를 날카롭게 파헤치며 '성경적' 비판의 메스를 가했던 저작들을 산출한 대표적인 행동하는 기독지성인 프란시스 쉐퍼. 그의 영향력은 1980년대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한국의 기독지성운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근 프란시스 쉐퍼에 대한 새로운 전기가 한국에서 출간되면서 그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시작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더욱이 다양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기독 젊은이들이 다시 공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분위기에서 프란시스 쉐퍼와 같은 인물이 기억되는 것은 한국 기독지성운동에 유의미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프란시스 쉐퍼를 다시 읽는 일은 더 이상 무조건적인 동의나 수용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프란시스 쉐퍼의 삶의 많은 부분이 존경할 만하고, 그의 사역의 적지 않은 부분이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의 사유와 신념에 내재된 심각한 문제점들 역시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훌륭한 사역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쉐퍼에 대해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는 것은 지금이야말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쉐퍼를 읽을 때가 왔기 때문이다. 서구의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의 작업은 일단 옳다는 가정하에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어떤 서구 사상가의 작업을 이 땅에서 읽고자 한다면, 그 사상의 논리적 정합성, 비판이나 주장의 근거, 그리고 그것의 현실적 함의 등을 철저하게 검토하고 우리 상황 속에서 그의 작업을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서양, 특히 영미권의 최신 논의들을 번역해서 읽는 것으로 기독지성운동을 하고 있다고 더 이상 위안 삼을 때는 지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프란시스 쉐퍼를 감히 비판적으로 읽어보고자 한다. 정말 그에 덧씌워진 아우라만큼 그는 위대한 사상가인지, 그는 정말 자신이 비판하는 현대 사상과 신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가 주장한 정치적 노선이 정말로 정의와 사랑에 부합되는 것인지, 그의 주장이 정말로 기독교 진리에 적합한 것인지를 말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이 땅의 기독지성운동이 한 걸음 진전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

2.프란시스 쉐퍼의 지적 정합성 검토

2.1.진리관 - 명제주의와 반정립

(1)명제주의와 상식실재론

조지 마스덴, 마크 놀 등뿐만 아니라, 쉐퍼의 제자인 낸시 피어시가 인정하고 있듯이 쉐퍼는 "상식적 실재론에 입각한 옛 프린스턴 전통을 익혔다".(낸시 피어시, 834쪽, 미주 68번) (미국 신학 및 복음주의에 미친 상식 실재론을 처음 거론한 것은 예일대 종교사 교수 시드니 알스트롬이다.(조지 마스든,1997,『근본주의와 미국문화』))

쉐퍼의 성경무오설 역시 이러한 상식 실재론에 근거한다. 소박(naive) 실재론이라고도 하는 이 입장은 그 이름만큼 "나이브"한 가정을 가지고 있다. 실재와 그것의 경험(인식론)의 단절 없는 혹은 투명한 대응, 즉 실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판적 실재론"은 실재와 그것의 표상(representation) 간의 투명한 대응관계를 상정하지는 않으며 실재의 경험이나 상대성과 인식론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반면, "소박 실재론"은 지식의 상대론이나 인식론의 문제를 계시나 객관적 진리라는 명목하에 무시하고 외면한다. (곧 지적인 성실성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소박 실재론은 실재에 대한 융통성 있는 사고를 차단한다.

가령 쉐퍼가 비판하는 현대(인)적 사고인 반정립적 사고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 논리는 개념의 의미가 시간을 초월해 고정되어 있다는 외연적 의미론에 사실상 기대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쉐퍼의 문장을 보자.

"몇 년 전에 들었던 어떤 실존주의 신학자의 말이 기억난다. 그가 이야기를 끝낸 후에, 나이 많은 그리스도인 한 명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향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라고 하던 말을 귀 너머로 들었다. 그랬더니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그리스도인이 대답하기를 '놀라운 이야기임은 틀림이 없는데 나는 무엇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네요.'라고 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가령 성경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을 하면 어린 아이와 철학자는 공히 그 성경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지 아니하겠다고 하는, 하나의 반정립에 대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을 뜻하는 것임을 넉넉히 이해하고도 남는다(기독교는 말한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지 이렇게도 저렇게도 다 될 수 있는 소위 양자 긍정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에 관해서 알고 계시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의 깊이를 낱낱이 모두 다 우리 인간이 헤아려 알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근본적인 사실이 명백하게 표현되어서 반정립(antithesis)에 맞서고 있다는 의미이다. 역설에 짓눌린 신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는 그것이 내어놓는 진술이 굉장히 심오하게 보이는 듯하지만 사실상 그 내용은 따지고 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다.(『쉐퍼 전집』IV:178)"

쉐퍼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진술을 “창조하지 않음”에 대한 반정립으로서, 즉 창조와 비창조라는 이분법적(binary) 인식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창조”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거꾸로 “창조하지 않음”을 이해해야만 “창조”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실제로 우리가 대화를 할 때 혹은 학문을 할 때 문제가 되는 “창조”나 “태초”, 심지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고정적이지 않고 매우 다양하게 정의되거나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진술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반정립으로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사회문화적 맥락과 장르적 특성에 대한 우리의 전제에 입각하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그것이 발화되는 사회/언어적 맥락하에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어떤 하나님”, “어떤 창조” 등을 문제제기함으로써 창조와 비창조 간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나타나게 된다. 쉐퍼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개념은 우리가 창조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중에서 하나의 제한된 범주로서 그만의 분류체계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접한 "창조"의 유사(가족유사성) 개념들은 쉐퍼의 "창조"에서는 함께 묶일 수 없는 배타적 개념이지만 다른 이들에게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미래를 향해 열린 개념인 것이다(의미한정주의). 그 분류체계가 정당한 것인지는 오직 쉐퍼만이 아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창조/비창조의 양극단 간의 수많은 차이들을 무시함으로써 ‘투명’하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지만 쉐퍼의 이른바 “명제적 진리”에는 회색지대가 없다. 결국 쉐퍼가 “명제적 진리”를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외연적 의미론을 전제함으로써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2)반정립과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쉐퍼의 방법론은 한 마디로 반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정립이란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명제 모두가 동시에 진리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말한다. 즉, A ≠ not A라는 것이다. 이는 A와 notA가 동시에 둘 다 참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두 개의 진리는 있을 수 없다. A가 진리라면 notA는 비진리라는 것이다. 쉐퍼는 이러한 입장이야말로 성경적 진리관이라고 한다.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가 이러한 반정립이라는 기초 위에 근거하여 존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없으면 역사적 기독교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기독교와 현대사상』)

그러나 이러한 진리관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연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진리관은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그의 논리학의 기초를 이루는 세 가지 법칙, 동일률, 모순율, 배중율을 생각해보라. 간단히 말해, 동일율이란 '한 번 사용한 "개념 및 판단"은 이후에도 똑같이 적용한다'는 것을, 모순율이란 'A와 ~A가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는 것을, 배중율은 '어떤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쉐퍼의 반정립은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과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로써, 그러한 원리가 모든 원리들 중 가장 확실한 원리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원리인지 말해보자. 그것은 '같은 것은 같은 것에 따라 같은 것에 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들어 있지 않을 수 없다'이다.....이 원리는 정말 모든 원리들 중에서 가장 확실한 원리이다.....정말이지 아무도 '같은 것이 있으면서(/이면서) 동시에 있지(/이지) 않다'고 믿을 수 없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쉐퍼가 말하는 반정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분명하게 찾아지는 것이다. 즉, 쉐퍼의 반정립적 진리관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다름 아니다. 더하여 그가 진리와 비진리 사이의 중간이 없음을 강조한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배중율이 추가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쉐퍼가 성경적 진리관이라고 강조하는 반정립이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발전된 논리법칙과 진리관을 그는 성경적인 진리관과 등치시키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은 진리관이나 논리학을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쉐퍼가 성경적 진리관이라고 전제하는 반정립적 진리관은 성경과는 무관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서 도출된 논리학일 뿐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실상 쉐퍼가 성경적 진리관이라고 주장하는 반정립적 진리관은 성경에 그 기원 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지배적 지적 전통을 주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논리학(형식논리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즉 그는 성경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라는 이교세계의 철학으로부터 발생한 진리관을 성경적 진리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2.쉐퍼의 철학이해 검토

(1)헤겔과 변증법

쉐퍼는 헤겔의 변증법과 더불어 반정립적 진리관이 무너지게 되고, 절대적 기준을 상실한 상대주의적 사유가 서양의 지적 풍토에 스며들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쉐퍼는 이러한 상대주의의 도입이 인간의 사유가 ‘절망의 선’ 아래로 몰락하게 된 원인이라고 말한다.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가 전개된) 그 결과는 가능한 모든 개별적 입장이 사실상 상대화하는 점이다. 물론 이 말은 헤겔의 전체 입장을 너무 단순화한 것이긴 해도, 이런 입장은 진리가 반정립보다는 종합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는 헤겔의 변증법이 진리를 정-반-합의 삼각형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비판한다. (『기독교와 현대사상』)

쉐퍼는 변증법을 일종의 상대주의로, 그리고 헤겔의 종합을 일종의 절충으로 오해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쉐퍼의 헤겔 이해는 매우 초보적 수준이다. 실제로 쉐퍼는 헤겔을 비판하면서 그의 저작 어디에서도 헤겔의 원문장을 단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고 있다. 그가 헤겔에 대해 인용하는 문장은 코풀스톤이 헤겔에 대해서 연구한 책을 사이어가 정리한 것을 인용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가 현대문화의 상대주의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토록 헤겔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헤겔의 어떤 지점이 그런 상대주의를 배태시키게 되는지를 헤겔의 저작을 통해서 증명하지 않는 이유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정말 헤겔의 원전을 정독했는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헤겔의 변증법을 조금만 이해해도 그것이 결코 절충주의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헤겔은 그의 초기 주저 『정신현상학』에서 "진리는 전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나의 단순한 사태를 그것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절대적 규정에 이르는 과정 전체가 진리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것도 서로 모순되는 둘 모두 참이다는 논리가 아니다. 하나의 사태에 대한 규정이 완전하게 진전되지 않았을 때에는 상호 모순적인 차원이 그 사태에서 나타난다는 것이고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보다 더 규정성이 진전된 단계로 고양하게 된다. 여기서 모순되는 두 항은 진리로 이행하게 되는 계기를 이루는 것이지 둘 다 진리인 것은 아니다. 규정성이 최종적이 될 때 그때 비로소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절충이 아니라 완성의 개념을 내포한다. 사태에 대한 최종규정이 이루어지기까지 과정 전체가 진리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부정의 부정)은 최종규정(종합/통일)으로 수렴되며, 최종규정에 의해서 비로소 과정들은 진리의 계기들로서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종합, 즉 최종규정은 절대적인 것이지 결코 상대적인 것들의 절충이 아니다. 헤겔은 절대적 진리의 출현과정을 해명하려는 절대성의 철학자였다. 그런 그를 쉐퍼는 상대주의의 창시자라는 혐의를 덧씌우고 있다. 쉐퍼에 대한 전기를 쓴 콜린 듀리에즈는 쉐퍼의 헤겔 이해가 '독창적이지만, 인류의 지성사에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마치 플라톤이 사실은 이원론자가 아니라 일원론자라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주장하면서, 그러한 주장을 독창적이고 인류의 지성사에 공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사태이다. 이는 독창적 공헌이 아니라 지적 불성실함일 뿐이다. 쉐퍼는 헤겔의 변증법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범박한 상대주의요 절충주의라고 평가하지만 헤겔에 대한 쉐퍼의 이러한 언급은, 안타깝게도 헤겔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증거일 뿐이다.

(2)키에르케고르와 비합리주의

쉐퍼는 세속주의에 물든 현대 사유가 가진 또 다른 문제점을 비합리주의라고 말한다. 우주의 합리적 원리를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인간은 이성 너머의 영역으로 신비주의를 비롯한 각종 비합리주의를 통해 ‘도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절망의 선’의 또 다른 차원이다. 그리고 쉐퍼에 의하면 이러한 비합리주의의 문을 열어젖힌 철학자는 키에르케고르이다.

스테판 에반스가 지적한 것처럼, 쉐퍼는 교회 안에 키에르케고르를 비방하는 풍조를 발생시킨 중심 인물이다. 쉐퍼는 그의 종교적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가 이삭을 다루는 방식 안에서 그는 이성의 포기를 본다.

하지만 -홍치모가 소개한- 루에히스제거(Ruegsegger)의 주장이 옳다. 키에르케고르가 이성과 신앙을 분리시켰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이는 곧 쉐퍼가 추구하는 이성이 명제적 합리성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일 뿐이다. 신앙으로의 도약을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로 이해하는 것은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이성 개념에 기인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한 이성은 인격적(=주관적) 합리성이다. 사람이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객관적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 방법이다. 전자에 기초한다면, 지적 변증을 통해 기독교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로막는 지적 장애물을 제거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간과하는 것은, 지성은 인격의 일부(물론 중요한 일부이지만)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당한 지적 변증으로 이지를 설득해도 모두가 다 회심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지정의를 포괄하는 전인격적 차원에서 형성된다. 진리와 이에 대한 신앙 모두 인격적인 차원에 속한다. 주관적 방법은 인격적이다. -특정한 명제로서의- 진리에 대한 초연한 접근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진리에 대한 열정적 참여를 가리킨다. "따라서 명제적 진리는 하나님의 인격적 신실성에 의존한다." 우리가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찾을 것은 명제적 진리 이전에 인격적 진리이다. 아니, 그 이전에 쉐퍼는 자신의 내면에서 진리에 대한 근대적 편향성을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었다.

2.3.쉐퍼의 신학이해 검토

(1)칼 바르트

문제는 이러한 교회 바깥의 사상에 현대 신학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가 바르트를 대하는 관점은 쉐퍼의 편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바르트 신학이 이단 및 동양 종교와 동급으로 취급된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교회에게 있어서 현대신학은 곧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와 구별되는 다른 종교다. 쉐퍼가 서 있는 사상적 라인은 구 프린스턴 학파이다. 구 프린스턴 학파를 대표하는 그레샴 메이첸의 대표작이 -『헬라어 교본』과 더불어-『기독교와 자유주의』(크리스찬출판사, 2004)이다. 메이첸은 이 책을 통해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라고 말한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훼이스 신학교로 이어지는 구 프린스턴 학파의 후계자들에게 있어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자이다. 그러니 기독교 이단 및 동양의 종교와 동급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

실상 쉐퍼의 바르트 이해는 대단할 것이 없다. 그의 바르트 해석은 기본적으로 반틸, 하비 칸(한국명: 간하배) 등의 입장과 유사하다. 물론 유사하다라는 평가로 정리하고 끝낼 수는 없다. 일단 그의 사상사적 서술 가운데에서 바르트가 차지하는 위치가 있기 때문에 그의 역사관을 간단하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일단 쉐퍼는 역사의 흥망성쇠의 과정을 밟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19세기에 철학을 포함한 서구 문화 전반이 '절망의 선'(line of despair)을 넘어섰다고 주장한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구 문명은 절대라고 하는 것을 수용하였지만, 20세기에는 계몽주의가 미치는 비합리주의적 영향이 역사비평을 통해 교회에까지 파급되었다는 것이다. 쉐퍼가 보기에 성서의 역사 비평을 수용하는 이들은 성서의 무오성을 거부하고, 나름의 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쉐퍼는 "성경 안에 인간 이성이 작용한 곳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상을 주장하"는 두 복음주의자의 주장을 인용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특별히 실존주의적 방법론을 성경과 관련하여 주장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은, 성경에는 오류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체계, 가치 체계, 종교적 사실들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실존주의 방법론이 복음주의 진영으로 침투해 들어온 형태입니다. 결국 이것은 성경의 진리를 객관적 세계로부터 잘라내어 버리고 "내적 증거"라고 하는 주관적 경험으로 대체합니다." 일단 초보적인 사실 하나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쉐퍼가 언급하고 있는 주장은 실존주의 이전에 존재한 관점을 가리킨다. 실존주의의 원조 격인 키에르케고르 이전에 역사비평과 자유주의는 존재하고 있다.

쉐퍼가 보기에 복음주의자들의 실존주의 수용은 결국 바르트에 영향 받은 것이다. 바르트가 가장 위험한 존재인 것이다. 바르트는 성서에 대해 구원의 진리와 사실의 오류를 수용하는 절충적인 이들은 가리켜, 그는 "일종의 신정통주의적 실존주의 신학"(a form of neo-orthodox existential theology)이라고 부른다. 바르트로 대표되는 신정통주의가 바로 실존주의적 신학인 것이다. "신정통주의 뿌리가 결국 주변 세계관의 신학적 표현이며 실존주의의 방법론"이며, "실존주의자는 주관적인 인간 체험을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존재의 객관적인 측면을 잘라버"린다. 실존주의가 "존재의 객관적인 측면을 잘라버"린다니,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것도 같지만, 이것은 실존주의에 대한 나름의 해석으로 인정하기로 하자. 그리고 "실존주의자들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참으로 알 수 있다거나, 어떤 객관적 진리 또는 도덕적 절대기준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한다는 '주장'도 왠지 실존주의=상대주의=해체주의=탈근대주의라는 역사적 "비약"이 있는 도식으로 읽히기는 하지만, 이것도 나름의 해석으로 존중하기로 하자.

하지만 이 가운데 드러난 나는 쉐퍼의 합리성에 대한 관점은 간과하기 어렵다. 그가 실존주의라는 용어를 통해 전하고 싶어하는 것은 -현대 철학과 더불어- 현대 신학이 참된 합리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복음주의의 대재난 속에서 그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위한 근본주의자들"(radicals for the Truth)이 되길 요청한다. 여기에서 진리 개념을 그가 명제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역사와 우주에 대해서 언급할 때도 성경은 명제적 진리(propositional truth)를 제공한다"라는 것이다. "존재하시는 무한하며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침묵하지 않고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에서 명제적 진리를 말씀하셨다-종교적인 것에 대해서뿐 아니라 역사와 우주와 도덕적 절대성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도 포함해서 그러하다."

이승구는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명하고 있다. "특히 복음주의권에서 명제적 진리를 포기하려는 시도가 많은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쉐퍼가 이전의 신학자들에게 동의하면서 매우 강조하는 명제적 진리에 대한 강조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진리관과 쉐퍼의 진리관이 상통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보수 교회나 미국의 보수 교회 모두 근대적인 명제적 진리관을 관철하고 있다.

다시 바르트로 돌아오자. 바르트와 키에르케고르의 관계에 대해 다뤄볼 차례이다. 『로마서 강해 (2판)』서문에서 바르트는 자기가 받은 영향을 제시한다. 바울 연구와 오버벡(F. Overbeck)의 영향, 하인리히 바르트를 통한 플라톤과 칸트의 이해, 키에르케고르와 -투르나이젠을 통해 소개받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관심 등.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은 신학 작업에 있어서, 물론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일부에 불과하다. 뒤에 가서 칼빈, 키에르케고르, 오버벡, 도스토예프스키, 블룸하르트 등을 사상적 전환의 동기로 제시한다. (국역본, p. 370) 중요한 것은 헤겔이 아니라 칸트가, 그리고 플라톤이 등장하고 있는데, 마치 키에르케고르에 경도되어 책을 쓴 양 바르트를 평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는 초기에 국한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종말론적 측면에서 살펴보자. 『로마서 강해 (2판)』에 키에르케고르가 끼친 영향은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으로 나타나며, 이를 통해 바르트의 신학에는 종말론이 없다라는 비판을 가한다. 그런데 이는 종말론에 대한 편중된 오해에 기초한 비판일 뿐 아니라 후기의 바르트에 적용될 수 없는 비판이다.

첫째 항목과 관련해서 바르트의 말을 들어보자.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종말론이 아닌 기독교는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국역본, p. 471) 구원의 시작과 진행과 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다. 구원론을 통해 종말론과 기독론이 만난다. 그러나 이 종말론은 수직적 종말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형적 역사가 아니라, 수직적 신비를 발견한다. 그러나 종말론의 근본적 의미상, 이 또한 종말론임에는 명백하다. eschatos는 파국과 더불어 목표를 가리킨다. 그리고 지금 바르트는 목표로서의 종말 개념을 공간적 은유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명백히 키에르케고르가 상정하는 종교적 단계에 상응한다.

그리고 이 또한 실은 자유주의 비판과 관련되어 이해되어야만 한다. 초판에서는 시간 안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하는 우주론적인 전망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이러한 전망이 2판에서는 누락되고 있는가? 역사와 하나님 나라를, 시간과 영원을 강력하게 분리시키고자 함이며, 이는 곧 문화개신교에 대한 거리 두기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의 신학적 스승들이 나치에 지지 서명을 한 것으로 인해 받은 신학적 충격에 기인한다. 세상은 세상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입장은 1919년 탐바하 강연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입장의 강조는 역사적 종말론의 결여를 보여주므로, 그 자체로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몰트만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전형적인 것이다. "파루시아가 하나님의 영원과 동일시되면 [...] 시간이 끝나는 미래의 종말은 없게 [...]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 p. 442) 하지만 바르트는 곧 역사적 종말론에 대한 입장을 오래지 않아 다시 천명한다. 1934년에 작성된 바르멘 선언 3항은 이를 잘 보여준다"([...] 교회는 그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 살며, 또한 살고자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 즉 둘째 항목과 관련하여 쉐퍼(와 -아마 거의 확실히 미국교회)는 바르트를 단편적으로 보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종말론과 관련하여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흔히 바르트에게서 역사적, 선형적 종말론이 결여된 것을 그의 『교회교의학』에 종말론 항목이 결여된 것을 통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교의학』의 미완성은 그의 육체적 한계에 기인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르트가 선형적, 역사적 종말론에 대한 논의를 화해론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해론(4권 62항)을 보면, "교회의 시간"이라는 부분에 명시적으로 다뤄진다(Church Dognatics(영역판) IV-1, pp. 725-8). 교회의 시간은 부활과 마지막 사이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종말은 마지막에 완성된다. 바르트가 제시하는 선형적 사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가 역사를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바르트에게서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은 부분적이다. 결국 헤겔에서 키에르케고르로 다시 바르트로 이어지는 절망의 선의 확립이 가능한 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흡사 바르트가 책 한 권만 썼다면, 따라서 그 책 한 권으로 그가 명성과 영향력을 획득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키에르케고르 영향은 부분적이다(상당히 큰 부분이긴 하지만).

쉐퍼가 헤겔은 고사하고, 제대로 이차문헌 조차 읽은 적이 없다는 비판은 아마 바르트에 대한 이해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필자는 쉐퍼가 바르트의 주요한 저작들을 얼마나 읽었을 지 의문이다. 그가 제대로 인용문을 적시해놓은 적이 없다. 설혹 그가 바르트를 직접 읽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인식론적 태도로 보아 바르트의 장황한 서술 방식 꿰뚫어 보고, 바르트의 통찰을 제대로 짚어낼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의 독해 능력은 제대로 훈련되어있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바르트를 비판하는 이차문헌에서 인용된 부분을 찾아 그 앞뒤맥락만 훑어본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조지 마스덴에 따르면, 많은 철학자들이 종국에는 쉐퍼의 철학적 순진성을 비판한다. 이에 뒤이어지는 마스덴의 변호, 즉 그 비판이 쉐퍼의 진정한 목적이 전도에 있음을 간과한 것이라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 바울, 루터, 칼빈의 전통을 이어 받아 세상의 초등학문을 이해하기 위한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최소한 그 사상과 대결하고, 대화하려 한다면 말이다. 결국 미국에서도 그의 말년에는 철학자로서나 역사가로서 함량미달 혹은 왜곡하는 자로 평가되었다(비록 전도자로서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흔들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대체 "바르트 자신이 틸리히와 그의 뒤를 따른 사신신학에게 문을 열어준 셈이 되어버린 자연적 추세"라는 문장이 어떻게 나온 것일까?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역사적 비판」, p.36) 틸리히와 세속화 신학에는 깊은 상관 관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세속화 신학과 사신 신학에도 상관 관계가 있으므로, 사신 신학이 틸리히의 뒤를 따랐다는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런데 왜 바르트가 이의 문을 열어준 건가? 쉐퍼는 필경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서에 대한 입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의 결과)은 심히 창대해질 것이다라고... 이것은 물론 증명되지 않은 선언이다. 아니, 그 이전에 성서론의 입장차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물론 이는 쉐퍼가 미국 보수 교회 특유의 경직된 성서관을 답습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2)폴 틸리히와 라인홀트 니버

쉐퍼는 『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에서 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와 동질의 것으로 취급하고, 신정통주의를 실존주의 사조의 신학적 표현으로 주장한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기존의 구프린스턴 학파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반틸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현대 신학에 대한 그의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차라리 그 다음의 것이라 해야겠다. 이는 다름 아니라 바르트(와 니버)와 틸리히를 묶는 방식이다.

"신정통주의라는 이름 아래 자유주의 신학계를 지배해 온 성경관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성경관이 소위 복음주의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단체에 침투해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수년 전에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상황에 대해 매우 흥미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의 종국은 이미 니버와 틸리히가 주장한 "신은 죽었다"라는 증후군(症候群)에 의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정통주의는 이미 60년대의 신학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신은 죽었다"라는 막다른 결론으로 이끌었습니다."

도대체 언제 "니버와 틸리히가" "신은 죽었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인지를 알 길이 없다. 신정통주의라는 라벨로 묶여서 바르트와 틸리히가 미국에 소개된 것은 나름의 맥락과 정당성이 있지만(순전히 미국적 맥락에서만 정당성이 획득된다), 그것은 대단히 편협한 인식을 낳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편협한 인식 안에서조차 틸리히를 "신이 죽었다"라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거짓 전도자의 모습이 아닌가? 이게 도대체 복음 전도자라는 미명 아래 용납될 수 있는 발언인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거짓(지적 부정직성)의 문제이다. 곧 비윤리적이라는 뜻이다. 이게 만일 거짓말이 아니라면 착각이거나 부실하 경로를 통해 획득한 정보일 텐데, 그렇다면 이는 곧 그가 무능력하고, 무책임하다는 뜻이 된다.

틸리히는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이데거와 교류했고, 그 결과 전기 하이데거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그리고 이는 존재와 존재자를 가르는 하이데거의 구분방식을 수용한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게 하는 힘과 기반이다(존재의 능력, 존재의 기반). 신이 죽었다고 틸리히가 말했다? 신이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틸리히의 입장인데 그게 가능한 말인가? 혹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능하겠다.

그리고 니버는 신정통주의의 표준과 같은 인물이다. 애초에 신정통주의라는 라벨 자체가 미국식이므로, 미국의 신정통주의자가 신정통주의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다. 신정통주의의 대표자 중 하나인 니버는 신의 존재를 당연히 인정하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유한함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어떻게 그가 신이 죽었다고 외쳤다는 망상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겠다.

우리가 쉐퍼의 복음전도자로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지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그가 근대 철학자(헤겔, 키에르케고르)나 현대 신학자를 다룬 방식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가령 제레미 잭슨의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IVP)를 보라. 제20장, "현대 신학의 역동성"에 등장하는 키에르케고르나 바르트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고, 부적절하다는 점을 굳이 상술할 필요는 없겠다. 물론 쉐퍼는 "교회사에 대한 최상의 책이다"라고 추천한다. 이 책의 사상적 계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게다. 이제 우리에게는 좀 더 섬세한 역사적 인식과 철학적 시야가 필요하다.

3.쉐퍼의 정치관

(1)쉐퍼의 정치신학 : 기독교 우파의 이데올로기

그는 오늘날 미국 보수정치를 주도하는 기독교 우파의 정초적 이데올로그였다. 실제로 제리 폴웰이나 팀 라헤이와 같은 미국 기독교 우파의 지도자들은 쉐퍼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가령 폴웰의 경우 리버티 대학의 모든 신입생들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토론하는 의무를 부과하였다고 한다. 그랜드 워커와 같은 역사가는 쉐퍼를 ‘복음주의 우파의 공식적 지식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 우파운동에 이데올로기적 논리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논평들을 통해서 특정 정파와 운동을 지지한 바 있다. 1981년에 발표된 『기독교 선언』은 짧지만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쉐퍼의 인식과 그의 정치관이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미국은 기독교적 합의에 기반하여 출발하였으나 점차 인본주의에 굴복하여 이제는 인본주의를 비롯한 세속문화가 지배적이 되었으며 이는 곧 엘리트의 자의적 지배로 이어질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운명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길은 1980년의 미국 선거에서 나타난 보수화 경향이다. 이와 더불어 바로 이 순간에 미국에는 하나의 독특한 창문이 열렸다. 그 창문이 지금같이 열렸던 것은 참으로 아주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참으로 독특한 일이다. 우리는 이 창문이 계속 열려 있기를 바라며, 또한 이 창문이 단지 한 가지에 대해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기독교선언』)

알다시피 1980년 미국선거에서 승리한 이는 레이건이다. 쉐퍼는 레이건의 집권이 하나님이 세속화되는 미국을 다시 기독교적인 국가로 전환시키도록 주신 기회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레이건의 집권이라는 열린 창을 통하여 인본주의와 같은 세속주의를 물리치기 위한 ‘전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쉐퍼는 역설한다.

쉐퍼가 말하는 두 번째 길이란 공화당의 집권이 끝나고 다시 인본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아 그 창문이 닫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결과가 발생한다면 머지않아 엘리트들의 독재로 귀결될 것이라고 본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쉐퍼는 이런 상황에 온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시민불복종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관점이며 교회사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력사용의 가능성까지도 열려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결국 미국의 현실적 맥락에서 쉐퍼가 강력하게 지지한 정파는 레이건과 같은 극우적 공화당이었다. 쉐퍼는 『기독교 선언』에서 레이건 집권을 위해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고 미국의 사회적 현안에 보수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운동에 대한 지지를 천명한다. ‘도덕적 다수’는 레이건이 대통령이던 1980년대 기독교 우익계에서 영향력을 크게 끼친 보수주의 단체로 기독교 소리(Christian Voice)등과 더불어 낙태 반대,동성애자들의 시민권 인정 반대, 학교 내 기도부활, 당시 인종차별이 존재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지지, 국방비 증액요구, 공화당내 보수인사 경제정책 지지, 사회복지 예산증액반대 등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쉐퍼는 인본주의 문화에 의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미국을 구원할 정파를 사회복지예산을 줄이고,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소수인종을 차별하고, 제3세계의 군부독재를 지지한 레이건 정권에서 발견하고 있으며, 이들을 지지하기 위한 적극적 정치개입을 성경의 이름으로 선동하는 우파화된 기독교 정치 이데올로그인 것이다.

(2)쉐퍼의 역사관 : 기독교적 합의가 존재하던 시대?

쉐퍼는 1935년을 기점으로 미국이 '절망의 선'을 넘었고, 그 결과로 인본주의라는 세속사상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타락한 현실에 대비하여 미국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미국독립혁명기로부터 '절망의 선' 이전의 시기이다. 그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미국독립혁명이 기독교적 합의에 기초하여 수행된 하나의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쉐퍼의 주장, 즉 기독교적 합의가 미국의 건국 정신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이라는 주장은, 이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화에 근거한 막연한 믿음에 불과하다. 그는 (특히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미국의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이 애착을 가지는 기독교 정신(구체적으로 청교도 정신)에 입각해 미국이 건국되었다는 신화를 공유하는 듯하다.

역사학자 버나드 베일린은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The Ideological Origins of the American Revolution)에서 미국 건국의 사상적 기반은 고전 고대의 정치 사상, 계몽 합리주의 정치 이론, 영국 고대 보통법 사상, 청교도적 언약 신학 사상 등 다양하고 상이하기까지 한 선행 사상들의 복합적인 혼합물이었지만, 이러한 사상들을 긴밀하게 통합시킨 것은 17세기 말 18세기 초의 반권위주의 사상이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이 일정 부분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요소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미국 혁명은 치열한 정치 사상적 투쟁의 결과였고, 이를 추동한 것은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이 미국사가들의 일반적인 합의이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과 한국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미국의 건국부조들(Founding Fathers)이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이들이 기초한 미국 헌법에는 기독교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신화를 고수하고 있다. 건국부조들의 사상과 그들의 입법 활동은 향후 미국에서의 교회와 국가 관계의 향방을 설정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헌법에서 교회와 국가 관계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조항은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또는 자유로운 신앙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고 명시한 수정조항 1조이다.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의 주도로 통과된 이 조항을 통해 미국은 서구에서 최초로 국교를 폐지하고(disestablishment) 종교의 자유-비록 개신교파 내에서의 선택의 자유라는 상당히 제한적인 자유였지만-를 확립한 나라가 되었다. 주요 교파들은 건국부조들과 다른 이유로 비국교화에 찬성했다. 정치인들은 교파 간의 갈등을 피하고 신생국의 종교적 통합을 위해 특정 교파(뉴잉글랜드의 회중파와 그 외 지역의 성공회)의 특권을 배제하고자 했고, 장로교와 침례교를 비롯한 소수 교파들은 종교적 박해에서 벗어나 종교 활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비국교화를 지지한 것이다. 정통 신앙을 고수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종교 활동의 자유를 위해서 자신들과 신앙관이 판이하게 다르게 이신론을 신봉하던 정치인들과 제휴했던 것이다.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이신론자인 정치인들 사이의 제휴를 "기독교적 합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쉐퍼가 이해하는 식의 보수적이며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으로의 대동단결은 아니었다.

미국 혁명은 미국 교회가 교파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미국적 가치와 미국적 질서를 존중하는 점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룰 수 있게 해주었다. 많은 종교학자들은 건국 초기부터 미국 사회를 특징짓는 종교적 다원성(religious pluralism)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 내에 정신적인 공통분모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 말에 벨라(Robert N. Bellah)는 “미국의 공민 종교(Civil Religion in America)”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공민 종교(Civil Religion)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종교학자들은 미국의 공민 종교를 “미국적 삶의 방식(American Way of Life),” “국가의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종교(transcendent universal religion of the nation),” “종교적 국가주의(religious nationalism),” “민주주의적 신앙(democratic faith),” “개신교적인 공민적 신앙(Protestant civic piety)”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쉐퍼와 마찬가지로 종교학자들도 미국 사회 내의 일종의 종교적 합의가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쉐퍼의 바람과는 달리, 그것은 정통적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애국주의적이며 국가주의적인 종교관이었다. 쉐퍼가 주장하는 기독교적 합의란 사실 교파 간의 다양성과 차이가 공민 종교라는 우산 속으로 포섭되는 국가주의적인 보편 종교일 뿐이다.

또한 그가 기독교적 합의가 존재했던 시대라고 부르는 미국 건국 초기부터 1930년대 전까지에 대한 평가는 또 어떤가? 그는 미국에 기독교적 합의가 존재했을 때는 자유의 토대가 존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본주의에 의해 그 기독교적 토대라는 것이 붕괴되자 이제 자유의 토대 역시 붕괴했다고 말한다. 법은 그것의 신적 기초를 상실하고 자의적인 것이 되었으며, 정부는 더 이상 정당한 권위의 근거를 상실하였다고 쉐퍼는 말한다.

그러나 쉐퍼가 말하는 기독교적 합의가 존재하던 시대의 실상은 어떠했는가? 흑인노예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인디언이라 부르는 미국 선주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 노동계급에 대한 끔직한 착취, 노예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인종차별, 여성차별, 제국주의적 식민화 등 수많은 불의와 구조적 모순이 존재한 국가가 미국이었다. 쉐퍼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저 일종의 실수에 불과한 것이거나 실천적 오류이고 근본적으로 그 시대는 올바른 기초 위에 놓인 황금 시대였다고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자의적 역사해석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취하여 부각하고 불리한 사실은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아전인수식 역사의식일 뿐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기독교적 합의에 의해 형성된 사회'라는 역사적 픽션을 주조해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자행된 온갖 불의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지적 부정직성으로 은폐하는 것이다.

4.결론 : 이성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기 위하여

이상으로 우리는 프란시스 쉐퍼의 사유를 철학, 신학, 정치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논의를 통하여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한 것은 첫 번째 자신이 옹호하려고 했던 기독교적 진리관이 사실은 기독교 외부의 세속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진리관이라는 점, 두 번째 이 논쟁적인 사상가가 사실은 자신의 비판대상을 매우 불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정치적으로는 레이건과 같은 극우적 정치인을 지지하고, 레이건 당선은 물론 이후 조지 부시2세의 집권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독교 우파의 사상적 출발점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이제 쉐퍼를 더 이상 우리의 기독지성운동을 위한 어떤 사표나 모델로 삼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쉐퍼의 논의는 기독교 서클 내에서 읽을 때에는 '탁월'해 보일지 몰라도 쉐퍼가 손쉽게 비판하는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에 대한 원전과 함께 읽는다면, 쉐퍼가 옹호하는 정파들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를 살펴보고, 쉐퍼가 그리워하는 시대의 역사를 역사가들이 기록한 자료를 통해서 읽어 보게 된다면, 그에게서 탁월성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쉐퍼의 논의는 지금 여기의 기독지성운동을 위한 살아있는 목소리로서는 유통기한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논의는 이제 역사학의 대상이다. 쉐퍼는 어쩌면 기독지성운동을 위한 출발점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미 1970년대나 1980년대 그는 그런 출발점을 했다. 지금은 21세기가 시작된 지 이제 10년이 다 되가는 때이다. 우리는 이미 출발점을 한참 지나왔다. 출발점에 대한 추억은 호고적 취향을 가진 이들에게 족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