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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준곤의 만남

 

김준곤 목사는 초교파 선교단체인 CCC를 설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준곤 목사는 1950년대 중반에 풀러신학교를 다녔고, 여기에서 CCC의 창립자인 빌 브라이트(Bill Bright))를 만나게 되었다. 1958년에 귀국한 김준곤 목사는 CCC를 설립하면서 CCC의 초대 대표가 되었다. CCC1960년대에 오늘의 학원복음화, 내일의 세계복음화를 모토로 하였고, 1970년대에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70~80년대에 일본 도쿄의 외신기자 클럽에 소속돼 당시 군사독재체제하의 한국을 취재했던 미국 언론인 짐 스탠츨(Jim Stentzel)의 평가에 의하면, CCC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억압에 대한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다고 한다(주1). 짐 스탠츨은 1960년대 중반 김준곤 목사가 반공기독교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아지자 박정희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박정희와 김준곤 목사는 정규적으로 만나기 시작하면서 상호 이익을 주고받는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진설명: 2013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하는 예배에서 박정희를 찬영하고 독재까지도 미화하는 발언이 나왔다. 주최 측은 박정희 대통령이 개신교 발전에 공헌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져, 그의 신앙을 재조명하고자 추모예배를 마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최 측은 6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회관 부지의 제공이었다.

 

짐 스탠츨은 1968년 박정희가 학생운동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준곤 목사에게 학생들의 정치적인 정열을 공산주의로 향하게 하는 대학 내 학생운동을 전개할 것을 조건으로 백지 수표를 제시하였다고 한다. 김준곤 목사는 이에 동의하고 대신 서울 중심부에 대학생선교본부를 지을 수 있는 땅을 달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결국, 박정희는 서울시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대사관 부지 일부를 CCC에 제공하였다고 한다. 짐 스탠츨도 이것이 무상 제공이었는지는 확실하게 언급하지 못하고 있는데, 분명한 것은 이 대사관 부지에 형성되었던 판자촌을 경찰의 진압으로 철거한 상태에서 CCC 회관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정교유착의 시작

 

러시아 대사관 부지 일부를 제공받은 김준곤 목사는 1969년 박정희가 삼선개헌을 고려하고 있을 때 청와대를 방문하여 삼선개헌을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조언하면서 적극적인 박정희 지지활동을 시작하였다. 짐 스탠츨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기독교 내의 입장이 양극화되자 박정희와 김준곤 목사 사이에 4가지 계획이 수립되었다고 한다. 군대를 기독교인화하기 위한 선교단체와 친정부 보수교회들의 계획을 정부가 전적으로 지원한다. 닉슨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본뜬 대통령조찬기도회를 열기 위한 일련의 계획을 강력히 지원한다. 새로운 헌법(유신헌법-인용자 주)이 제정된 후 조속한 시일 내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선교단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추진한다. 그레이엄 선교단에 뒤이어 CCC 자체의 친정부적 작품을 서울에서 선보인다. 짐 스탠츨은 이 모든 구상들이 반체제적인 기독교 인사들을 고립시키고 정치적으로 묵종적인 교회를 만들며, 전 세계를 향해 박정희 정권이 종교자유를 지원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박정희와 김준곤 목사 사이의 거래와 일련의 계획들은 반공을 매개로 한 정권과 교회의 공생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다. 개신교는 미군정과 이승만 시기를 거치면서 특혜로 주어진 다양한 선교 기회들을 통해 급속한 양적 팽창을 경험하면서 남한사회 내 최대의 시민사회조직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1955년에 처음으로 신자 수 100만 명을 넘어선 개신교의 급성장은 1960년대 말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반공주의적 성향이 뚜렷하고 잘 조직화되었으며 인구 구성에서 무시 못 할 부분을 점유하는 거대집단이 된 개신교는 정권 측에서 볼 때 정치적 활용가치가 매우 큰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개신교 측으로서도 독재정권을 지지함으로써 제도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었다. 박정희와 김준곤 목사의 거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와 김준곤 목사 사이에 수립된 계획들은 어떻게 실현되었을까? 맨 먼저, 김준곤 목사는 1969년에 전군신자화(全軍信者化) 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준곤 목사에 의하면, 1969년에 박정희가 군대 내 좌익 침투에 대한 우려를 갖고 군인들의 사상 무장과 정신 무장에 대해 자문을 구해왔고, 이에 대해 자신은 신앙전력화가 군대 내 반공운동과 정신력 무장에 크게 도움이 될 거라며 전군신자화 운동을 제안했다고 한다(주2). 전군신자화 운동에 대해 김기홍 교수는 기독교로 국교가 바뀐 고대 로마제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평하였다(주3). 전군신자화 운동의 전개로 1971년에서 1974년 사이에 1천 명 이상의 대규모 합동세례식이 무려 25회나 거행되어 36천 명이 세례를 받았고, 기타 103회의 합동세례식으로 6만 명 이상이 세례를 받았다. 성서 속의 인물 이름을 딴 부대들도 나타났다. 예컨대 김용식 장군은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를 여호수아 부대, 박도신 중령은 자기 부대를 엘리사 부대로 명명하였다. 1975CCC의 설립자인 빌 브라이트(짐 스탠츨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를 노골적으로 변호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는 남한의 60만 군인 가운데 절반이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다고 한다. 이는 분명 과장된 것이지만, ‘군의 기독교화라는 목표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군신자화 운동을 통해 경찰과 함께 대표적인 억압적 국가기구인 군대가 정교유착의 매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가조찬기도회와 Propaganda

 

대표적인 정교유착의 사례는 국가조찬기도회라고 할 수 있다. 196851일 대통령조찬기도회로 시작된 국가조찬기도회도 김준곤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 정권에 유착하여 기득권을 옹호하거나 묵인함으로써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인권이 유린되고 독재가 자행되던 상황에서 오히려 기독교는 축복과 칭송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 기독교는 권력층과의 교류의 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대통령조찬기도회는 1975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열렸는데, 1976년부터 행사의 명칭이 대통령조찬기도회에서 국가조찬기도회로 변경되었다. 김준곤 목사는 제2회 대통령조찬기도회(1969.5.1)에서 5.16군사혁명으로 명명하고, ‘군사혁명은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켰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고 미화하였다. 3회 대통령조찬기도회(1970.5.1)에서 김준곤 목사는 하나님이 세운 강력한 영도자가 정치력을 가지고 민족의 체질을 혁명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다는 설교를 했었다. 김준곤 목사는 유신체제의 성립 이후 처음으로 개최된 제6회 대통령조찬기도회(1973.5.1)에서 10월 유신을 정신혁명으로 찬양하였고, 전군신자화 운동이 전민족신자화 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10월 유신은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축복하였다(주4). 198086일 김준곤 목사는 517쿠테타로 5월의 광주를 짓밟고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을 축복하기 위해 모인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에서 한경직 목사, 조향록 목사, 정진경 목사, 김인득 장로 등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였다.

 

 

출처: 1973년 5월 1일자 경향신문.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유신체제를 정당화한 김준곤 목사의 메세지 내용이 실려 있다.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정신사적 새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

 

대형집회의 정치학

 

김준곤 목사는 전군신자화 운동과 국가조찬기도회 이외에 엑스플로74의 준비위원장과 80세계복음화대성회의 대회장을 맡아 초대형 전도집회들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독재 정권의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을 보완해 주기도 하였다. 엑스플로74CCC가 주최한 초대형 집회로 1974814일부터 18일까지 여의도 516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초대형 집회를 위해서 CCC69학번부터 73학번까지의 대학생들이 6개월간 준비하고 진행하였다. 유신 정권은 만 명의 성가대가 앉을 수 있는 좌석의 설비, 수십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군사용 텐트 5백 채와 2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로 여의도 변두리 76개 각급 학교 3,000개 교실 등을 마련해 주었다. 체신부에서는 엑스플로74대회 개최기념 우표도 발행하였다고 한다.

 

 

출처: 1974년 8월 10일자 경향신문. 유신 정권은 엑스플로 74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서울 시내 버스 운영을 조정하기도 했다.

 

 

엑스플로74는 반공궐기대회의 양상을 강하게 띠었다. 엑스플로74의 둘째 날 행사 당시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가 저격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육영수의 쾌유를 비는 통성기도가 시작되었고, 육영수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추모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셋째 날 집회는 추모와 분노가 뒤섞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박치순 목사는 북괴의 간악한 도발에 맞서 한국을 이끌어온 박정희 대통령에게 용기와 지혜를 불어넣어 달라는 기도를 하였다. 마지막 날 강태국 목사는 공산당의 악랄한 만행을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주시기를빌었다.

 

 

짐 스탠츨은 엑스플로74가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1973)보다 한층 더 노골적으로 친독재적이었기 때문에, 엑스플로74는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보다 더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엑스플로74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종교인들의 투옥으로 인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조성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유신정권은 엑스플로74를 정권 홍보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짐 스탠츨에 의하면, CCC의 빌 브라이트는 엑스플로74를 통해 한국에는 종교탄압이란 없다. 단지 정치적 억압이 있을 뿐이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으며, 이어서 투옥된 사람들은 관여하지 말아야 할 일에 관여되어 있다. 미국을 포함해서 세계 어느 나라도 한국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 와있던 선교사들로 구성되어 한국의 인권상황을 해외에 알리던 월요모임에서는 빌 브라이트가 미리 파견한 준비위원회의 간사에게 한국 정부가 엑스플로74를 독재정권 홍보용으로 조작할 것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려주었다고 한다(주5).

 

김준곤 목사의 반공주의

 

1975년도에 이르러 한국기독교의 반공운동은 격렬해졌다. 1975년 초 인도차이나 지역의 공산화와 김일성의 중국 방문은 남한 사회에 큰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교회연합신보는 1975427일 사설에서 기독교야말로 반공의 보루임을 강조하였다. 421일 새문안교회의 강신명 목사는 시국선언을 통해 전국기독교 반공궐기대회를 제창하였고, 북한 땅에 선교의 뿌리가 내릴 때까지 활발한 승공운동(勝共運動)을 전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김준곤 목사도 강력한 반공운동을 전개하였다. , 197554일 김준곤 목사는 CCC 주최로 반공구국기독학생기도회를 열었던 것이다. 여기서 김준곤 목사는 공산당의 천재성은 위장술과 변장술이라고 말하고, “공산당은 악한 박테리아 같아서 정의, 자유, 민족해방 등 인기 있는 구호 속에서 서식하며 적화시키고 있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였다(주6).

 

 

이러한 상황에서 1975513일 박정희는 반유신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9를 선포하였다. 이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의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정, 폐기를 주장하거나 청원, 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일체 금지하였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긴급조치 9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대통령의 특별조치로 짓밟은 것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과 반대의 금지를 제도화한 것으로 1,669일 동안 계속되었다. ‘겨울공화국이 시작된 것이다.

 

 

유신체제의 긴급조치 9호에 대해 많은 언론들이 사설, 논평, 해설을 통해 지지의 입장을 밝혔다. 경향신문1975514국가안전 공공질서의 수호란 사설에서 긴급조치 9호의 불가피성을 강조하였으며, 조선일보는 515새 질서 확립의 이정이란 사설에서 현실론과 합법성 그리고 안보논리를 내세워 긴급조치 9호를 새 질서의 이정표로 미화시키고 있다. 중앙일보515난국에의 대처란 사설에서 긴급조치 9호를 안보논의의 종결선언으로 해석하였고, 한국일보517모두 한덩어리가 되자라는 사설을 통해 긴급조치 9호를 지지하였다. 서울신문514일 각계 인사들의 앙케이트를 받아 긴급조치 9호를 지지하는 특집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종교계 지도자들의 글도 실렸다. 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손경산은 국민들이 국가안보를 위해 총력궐기하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긴급조치 9호는 너무도 당연한 결단이라고 했으며, 김준곤 목사는 국론을 분열하게 하는 일체의 망국적 행위를 금지한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는 국가안보와 국민총화를 위한 영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어서 김준곤 목사는 1975717-19일에 열린 제3차 세계기독교반공대회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림길에서라는 기조연설을 통해 유신체제를 지지하고, 진보신학과 운동의 용공성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김준곤 목사는 기독교반공운동의 실천방안으로 해방신학과 사회복음의 위험성을 알릴 것 한국교단들은 특별대책위원회와 같은 조직을 구성해서 정부와의 생산적 대화에 임할 것 반공운동을 전군신자화운동, 민족복음화운동, 기도운동, 성령운동과 연결시켜 그 차원을 높이고 승화시킬 것 필요하다면 한국교회는 WCC를 탈퇴하고 차원 높은 교단연합운동체를 만들 것 등을 제안하였다.

 

 

한국의 인권 사항을 해외에 알리던 월요모임에 참석했던 진 매튜스(Gene Matthews)는 한국교회의 성장과 번성이 더 크고 웅장한 교회건물을 갈망하게 하였고, 교회는 이런 식의 발전이 정부를 비판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정부를 공개적으로 적극 지지하면 종종 눈에 띌 정도로 재산 증식이 빨라진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고 한다. 이어서 진 매튜스는 교회가 사회적 불의와 싸우는 어떠한 노력도 교회 영역 바깥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독재정부가 공산주의와 같은 악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한다고 믿으면서 독재정부를 성실하게 옹호했다고 하였다. 진 매튜스는 이러한 유명한 사례로 CCC를 언급하고 있다(주7).

 

 

(주1) Jim Stentzel, The Anti-Communist Captivity of the Church, Sojourners, 1977.4, p. 15-17 (1970년대 민주화운동(), 1987, 846-848).

 

(주2)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 한국대학생선교회, 2005, 581-582.

 

(주3) 김기홍, 군선교의 역사와 신학, 군선교신학, 총회출판국, 1990, 143.

 

(주4) 6회 대통령조찬기도회 메시지, 교회연합신보1973.5.6.

 

(주5) 진 매튜스, 시대를 지긴 양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171.

 

(주6) 구국기독학생 기도회 CCC 1천여 학생 참여, 교회연합신보1975.5.11.

 

(주7) 진 매튜스, 위의 책,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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