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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Father Brown

신앙 행위의 대상: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정신분석’을 읽은 후의 단상)


성령이 하나님이 되기까지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바이블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삼위일체로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어떻게 루아흐, 또는 프뉴마로 지칭되던 하나님의 영, 생명의 영, 신의 숨결, 아담의 코에 신이 불어넣었다고 일컬어지는 ‘생기’가 성부, 그리고 성자와 동일한 위격으로 간주되었는가? 판넨베르크는 그의 <사도신경 강해>(2000년 영어 번역 출판)에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영’은 지식의 근원이자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바람, 공기,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생기로 흔히 비유된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바로 구약의 이 생명의 힘, ‘하나님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부활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즉 예수의 부활은 바로 예수에게서 이 하나님의 영, 성령이 ‘새로운 생명’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예수를 믿음으로써 이 생명을 얻게 되고, 이 생명에 참여한다고 믿어졌다. 그리고 이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은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형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 나타난다고 믿었다. 즉 그리스도인임의 증거가 되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 그리고 사랑의 형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나타나는 분, 바로 그 분이 성령이라는 점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위격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성화, 성도의 유리천장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발목을 잡는 문제는 이러한 ‘사랑’이 결코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너무나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는 결코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러한 사랑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려면 우리는 사랑해야 하지만, 결코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사실 이러한 것은 굳이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개신교인들의 경우 이 문제는 더욱 심해진다.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것들을 하라고 요구하고,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는 사랑이니 부흥이니 바이블대로 사는 삶이니 하는 거대한 이야기들이 수사학적 차원에서 엄청나게 많이 돌아다닌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랑이 무엇인지, 그 부흥이 무엇인지, 과연 바이블에서 말하는 대로, ‘일점일획의 변경도 없이’ 바이블에 따라 산다는 그러한 것들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지, 과연 저러한 기표들이 가리키고 있는 기의는 어떤 것인지, 과연 그러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의 질문을 듣는다면 평범한 개신교인들 가운데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보통은 ‘그런 것들은 우리들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므로, 주의 뜻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기도해야 한다’라는 식의 대답으로 이 질문의 대답을 회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까. 아니면 전혀 인과 관계의 연관성이 없는, 그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해야 한다 등등의 단순한 대답으로 그치거나. 


부흥을 원치 않는 그리스도인

오히려 좀 더 근원적인 문제는 과연 이러한 목표를 개신교인들이 이루기를 원하느냐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같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바이블의 모습과 일치하는 삶을,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사랑을, 개신교인들 각자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기대하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부흥을 과연 기대하고 있을까. 아니, 여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국 개신교회에서 신화화되고 있는 평양대부흥의 모습 정도에 국한한다 하더라도, 과연 우리가 그렇게 우리 자신의 모든 잘못들이 공동체에서 낱낱이 벗겨지는 모습을 과연 기대하고 있을까. 그렇게 평양대부흥을 마치 주문처럼 되뇌면서, 막상 그러한 부흥이 다가온다면 개신교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오히려 더 이상 자신들이 할 일이 없어졌다는 그 사실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단지 저 부흥이라는 것을 결코 우리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가정해 놓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단지 우리들의 종교 행위를 저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인 부흥에 도달하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이런 것이다. 개신교인들은 부흥이 실제로 그들에게 임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일단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부흥이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도달하는 것을 견딜 수 없으며, 더 나아가 그 부흥이 실제로 그들 자신에게 임함으로써 자신들이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목적은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되지만, 즉 초점은 자기 자신에게 놓여지지만 (여담으로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판넨베르크는 ‘죄’라고 정의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여전히 그들은 이미 초점이 자기에게 놓여졌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도달할 수 없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행위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종교 행위, 스스로를 기만하는

꽤 오래된 책인,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정신분석>(1999년, 민음사)을 읽으면서, 크리스테바가 이 책에서 파고든 지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이 부분에서부터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일천하고, 또한 번역이 어느 정도 잘 되어 있는지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 영어 번역을 구하기는 했지만 미처 대조를 하지 못했다 – 필자의 잡념이 뻗어나간 정도로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에 따르면 신앙이란 “사랑과 보호를 제공하는 심급instance과의 동일화 운동”이다. 이러한 심급은 결국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사랑, 부흥, 아니면 한국 근본주의 개신교의 ‘성서무오설’ 등, 실현할 수는 없지만 이루어져야 하는 목표로 이야기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할 것이며, 더 극단적으로는, 바르트 식으로, 결코 인간에게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이야기되는 ‘신’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물론 이런 식의 이해에는 대타자와 심급 사이의 차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겠지만). 즉 신앙인은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크리스테바는 이를 symbolic이라 부른다 – 번역이 애매한지라 일단은 영어로 남겨둔다)가 아니라 그 이전의 의미 단계(크리스테바는 이를 semiotic이라 부른다 – 역시 번역이 애매해서 일단은 영어로 남겨두며, 여담으로, 따라서 크리스테바에게 있어서 ‘semiotic’은 소쉬르의 기호학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기표-기의 전단계의 정념적인, 생성 단계의 그 무엇을 의미하기도 한다)를 사용해서 “대타자와의 연속 관계, 혹은 융합 관계를 복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복원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이 결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단절을 복원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양한 기호sign를 생산해 낸다. 바로 이러한 기호들을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종교 행위’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극단적으로는 자신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것,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로까지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결핍의 종교

크리스테바는 언어 표상과 사물 표상, 그리고 정동affect 표상을 구분한다. 언어 표상은 소쉬르 언어학의 기표signifying에 가까운 것이고, 사물 표상은 소쉬르 언어학의 기의signified에 가까운 것이다 이 둘이 symbolic을 이룬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포섭되지 않는, 갑작스레 일어나는 일시적이고 급격한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정동 표상이며, 이 부분이 바로 크리스테바에게는 ‘의미’라는 것이 실제로 형성이 되는 단계, 즉 semiotic이 된다. 만약 우리가 크리스테바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신앙 행위, 그 중에서도 스스로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지 않는 것을 향한 행위에 대한 분석은 결국 언어 표상과 사물 표상을 넘어서는 정동 표상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정동 표상에 대한 분석은 결국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한 정동, 그 정동에 대한 분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분노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종교적인 그 무엇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여전히 나는 확신을 하지 못하겠다. 이전부터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것이지만, 고전적인 기독교가 흔히 가정하듯, 구원이라는 것을 인간이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신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 있는 사건으로 가정하면, 이러한 결핍을 극복할 방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 나아가,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그러한 결핍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결핍 그 자체가 구원을 결국에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정신분석이라는 작업에 대해서 주장하는 대로, 단지 우리는 기독교인들, 좁게는 개신교인들 스스로 이러한 결핍을 직면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이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들의 결핍을 ‘말’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할 것인가? 정신분석이라는 것이, ‘환자’ 대신 ‘분석 주체’라는 표현을 쓰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그 선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얼마 안 되는데도 굳이 덧붙이는 후기

원래 ‘사랑’이라는 주제는, 얼마 전 모 신문에 실렸던 ‘교회 누나’의 이야기가 비평루트 편집회의에서 언급되면서 떠올랐다. 기사 자체의 질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과연 한국 개신교회에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다가 결혼할 시기를 놓친 여성들에 대해서 얼마나 배려를 하고 있는가, 이 자체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질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도,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의 잣대를 적용할 수 있을지… 이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 전혀 의도한 방향으로 글이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