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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사이-Be-評

“목사 없이 하나님 앞에.....”

*이 글은 <복음과 상황> 10월호 기고문의 오리지날 버전입니다.

 

정정훈ㅣ카이로스 공동대표 

 


<선덕여왕>의 정치철학 
 

요즘 나는 월요일과 화요일이 즐겁다. 바로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90년대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팩션이라는 장르에 기반 하여 긴박한 모험과 애뜻한 사랑, 음모와 그에 대항하는 지략, 전쟁 스펙터클과 무협 활극, 거기에 영웅의 성장담을 엮어내는 서사의 힘으로 정말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웰 메이드 드라마이다. 또한 <선덕여왕>은 잘 만들어진 대중 엔터테인먼트물일 뿐만 아니라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좋은 정치인가’라는 정치철학적 질문을 드라마의 서사 속에서 솜씨 좋게 제기하는 대중 교양물이기도 하다. 회가 거듭 될수록 <선덕여왕>은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덕만(선덕여왕의 공주시절 이름)이 공주 자리를 회복한 뒤 미실과 일대일로 나누었던 다음과 같은 대화가 정치에 대한 이 드라마의 성찰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백성들은 환상을 원합니다.”(미실)

“아닙니다. 백성들은 단지 희망을 원할 뿐입니다.”(덕만)


이 드라마에서 미실은 권모술수를 통해 왕권을 누르고 신라의 실제적인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 귀족 여성으로 그려진다. 미실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격물(과학)을 활용하여 천문 현상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일식과 월식 혹은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의 힘 앞에서 두려워하고, 이러한 현상을 하늘의 뜻이 드러난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늘의 뜻을 해석하여 하늘의 진노를 피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신의 대리자, 다시 말해 하늘과 자신들을 매개해 줄 수 있는 자를 원했다. 미실은 백성들의 이러한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천문의 운행을 연구하여 일식이나 월식, 가뭄과 홍수의 때를 ‘예언’함으로 백성들로부터 ‘천신황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미실은 하늘과 백성 사이를 매개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미실의 권력은 ‘신권’에 기초한 것이었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은 백성들의 환상을 이용해서 백성과 신의 매개자로 행사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미실의 대항자로 그려진다. 갖은 노력 끝에 미실로부터 ‘신권’을 빼앗아와 그 자신이 새로운 ‘천신황녀’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덕만은 천문운행의 비밀을 백성들에게 공개하겠다고 선언한다. 권력에 대한 백성들의 환상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첨성대가 백성의 환상을 없애는 수단이었다. 권력의 비밀이자 원천을 백성들에게 공개하겠다고, 다시 말해 백성들의 환상을 이용해 백성들을 통치하는 방식을 포기하겠다고 덕만은 선언한 것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앞의 대화가 나온다. 미실은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그들의 환상을 이용해야한다고 말하고, 덕만은 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며 미실에 맞선다.


과연 이러한 대화가 1500년 전 고대 사회의 정치에서만 타당한 내용일까? 오늘도 여전히 대중들에게 환상을 제시함으로서 그들을 통치하려는 권력자들의 행태는 동일하지 않을까? 747, 뉴타운, 대운하 등을 통하여 부자 되게 해주겠다는 환상을 부추김으로 대통령이 된 MB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환상의 정치이지 않는가?

 

 

교회에서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이유


그러나 나는 미실과 같은 이들이 대중들의 환상을 이용한다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왜 대중들이 환상을 원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철학자 스피노자는 바로 이 문제를 자기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로 삼았던 인물이다. 그는 <신학 정치론>이라는 책에서 대중들이 권력에 예속되는 이유가 바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환상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외적 힘들에 휘둘리는 존재이다. 갑작스레 닥치는 병,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 뜻하지 않은 사고 등과 같은 불운과 불행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하다. 이러한 외적 힘은 그들에게 커다란 공포로 다가온다. 스피노자는 공포에 처한 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도피처가 바로 환상이라고 말한다. 대중들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불운과 불행의 원인을 신의 뜻으로 이해하고 불운과 불행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바로 이때 신의 뜻을 해석하고 대리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이 바로 사제들이다.


대중들은 사제들이 신과 자신을 매개하는 자라는 환상을 품게 된다.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외적 힘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가 환상을 낳는다. 왜 자신이 이런 불운에 처하게 되었는지, 자기가 처한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지 사제들은 신의 뜻을 빌어 설명해주며 그로부터 벗어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역할, 즉 신의 대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신과 자신 사이를 매개해 주는 자, 사제를 강력하게 원한다. 나는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잘 알다시피 개신교는 원칙적으로 사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할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교회에서 그 성경을 해석하는 최종적 권위는 누구에게 있는가? 성경은 아무나 함부로 그 뜻을 풀 수 없는 신성한 책이기에 성서를 전문적으로 해석하고 해설하는 훈련을 받은 목사들, 성서를 잘 해석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목사들이 성경을 가르쳐야한다는 논리가 일반적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뜻이 담긴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는 권리를 목사가 독점하게 됨으로써 목사는 하나님과 평신도를 매개하는 이 시대의 ‘천신황녀’가 되는 것이다.


성경이 교회에서 최종적인 권위가 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는 특권적 권위를 가진 목사(사제)는 역시 교회에서 최종적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성경이 교회의 운영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근본원리를 제공하는 최종권위이기 때문에 목사는 또한 교회의 운영과 교인의 삶을 지도하는 영향력, 다시 말해 권력을 지니게 된다. 교회 운영에서 갈등이 생길 때 이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최종 결정권은 성경의 원리에 있고, 교회에서 성경의 원리에 가장 정통한 자인 목사가 결국 최종 결정권자가 된다. 심지어 교인의 삶조차 목사는 성경의 원리를 통해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된다.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매개하고 대리하는 자이기에 목사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불순종)이 되고, 목사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종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벌과 축복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 벌 받지 않고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대리자인 목사에게 순종해야하는 것이다.

 

대중들이 자신의 외적 힘에 대해 공포에 빠져있고, 초월적 힘에 의해 복을 구할 때 결코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대중들이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와 자신을 매개하는 자들에게 의존하고 그들로부터 신의 진노를 피하고 신의 축복을 얻는 길을 구할 때 민주주의는 결코 가능할 수 없다. 결국 성경해석에 대한 최종적 권위를 목사가 독점하게 될 때 그는 하나님과 평신도를 매개하는 자가 되고, 평신도에게 남는 것은 목사의 뜻에 복종하는 것 밖에는 없다.

 

 

우리에게도 첨성대가 필요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교회가 반드시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 교회의 민주주의를 말할 때의 민주주의란 근대적 대의 민주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의 정관을 만들고, 정관에 따라 교회의 의사를 결정하고, 교회의 성원 모두가 1인 1표를 갖고, 교인의 대표를 교인들이 선출하고 교인대표에 대해서는 임기제를 실시하고..등등이 오늘날 교회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일반적인 방식인 한에서 나는 그런 민주주의는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개인의 삶은 언제나 다른 이들과 협력적인 관계를 구성함으로써만 풍성해지며, 그 공동체의 형성 및 활동에 구성원들 모두가 공동의 원인이 되는 삶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는 교회야말로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가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적이 되려면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과 신도들 사이를 매개하는 자들이다. 교회에는 신의 뜻을 대리하는 특별한 자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만인 제사장’론이 보여주는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원래 개신교에서 목사는 결코 하나님과 평신도 사이를 매개하는 사제가 아니다. 개신교에서 우리 모두는 사제이다. 다만 은사와 직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가 성경 해석을 목사들의 전유물이 되도록 허용함으로써 한국의 목사들은 새로운 사제들이 되었다.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민주화되려면 바로 이 특권계급, 사제들을 몰아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서해석의 권리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마치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세움으로써 천문의 운행을 신비의 영역에서 격물의 영역으로 이전시켜 온 백성이 이를 활용할 수 있게 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해석하고 연구하며 가르치는 권리가 모든 성도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때야말로 성서에 입각한 민주적 교회가 가능해질 것이다. 교회의 민주화를 위한 관건은 평신도들에 의한 성서연구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를 탄생하게 한 종교개혁의 정신이기도 하다.

 

 

성서 해석의 민주화, 교회 민주화의 열쇠


이를 위해 특히 성서학자들의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 교리를 확인하기 위한 ‘성경공부’나 ‘성경묵상’이 아니라 참으로 성서 그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 지를 평신도들 스스로 연구할 수 있도록 성서학자들은 도와야한다. 아카데믹한 학술논문이라는 자신들의 성벽 속에 숨지 말고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얻은 성과들을 대중적 글쓰기로 평신도들과 나누어야 한다. 평신도들과 유리된 성서연구는 지적 자위행위에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또한 평신도 스스로 성서를 연구하고 해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성서학자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다양한 관점에서 저술된 성서연구서들을 읽고 성서를 읽는 법을 스스로 배워야 한다. 이는 평신도 스스로가 교회 공동체의 운영과 활동의 원인이 되기 위해서, 그래서 민주적으로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서 스스로 감당해야할 책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이 민주화될 때,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를 매개하는 ‘천신황녀’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교회의 형식적인 민주화가 아니라 내용적인 민주화가 가능해 질 것이다. 여전히 핵심은 성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