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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 선교의 미시적 실천논리

*제2회 카이로스 포럼 발표문 "Here I am, Tell me"를 다소 수정한 글입니다.


  일반적으로 선교는 신자가 (기독교)신의 명령을 받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선교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대의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때로는 목적 그 자체로 - 흔히 교회론에서 교회의 사명이나 존재의의와 같은 방식으로 - 여겨져 왔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는 지상명령(과 문화명령)이나 선교적 사명을 자신의 존재 이유(혹은 목적)로 믿어왔다. 그러나 어떤 대의든지 그것의 옳고 그름이나 정당성과는 별개로 그 대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실제 실천이 문제가 된다. 이 대의를 올바르게, 정당하게, 제대로 실천하는 문제가 발생하지만, 나는 여기서 단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인 대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인간들의 실천을 통해 비로소 대의로서 주장되고 존재하는 동시에, 이 추상적인 대의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경험의 내용과 동기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 곧 이 대의를 실천하는 과정이 선교의 현재적 의미를 결정한다. 이 종교적 실천의 문제를 우리는 선교 (행위자의) 내적 동원 메커니즘이라고 부른다.


  이 글은 이 내적 동원 메커니즘 중에서도 보다 미시적인 실천감각적 차원에서 공격적 선교 또는 개신교 신앙의 폭력성의 혐의를 포착해 보려는 간략한 시도이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메커니즘 전체를 경험적으로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인용했던 몇 가지의 사례나 담론들을 지나친 비약을 낳을 수도 있고, 또 곧바로 일관된 현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개신교의 현실을 짐작하게 하는 징후를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당방위?: 가해자-피해자의 뒤바뀜(轉置, inversion)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땅밟기 후기들을 보면 마치 판타지 장르처럼 사단(사탄)이나 영적 존재 코드흔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사단의 정수리에 대못을 박"는다든지, "밤에 몰려가 신나게 밟아"준다는 폭력적 언어 사용에서 사단에 대한 깊은 적대적 감정을 엿볼 수 있다. 어떤  후기를 보면, 이들은 본격적인 땅밟기 나가기 전에 "미리 견고한 진들을 밟고 사단을 묶기 위"한 염탐을 한다. 봉은사의 경우, CCTV와 경비원의 "날카로운 눈"을 "제법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며, "봉은사는 상당히 견고한 진이고 제법 쎈놈"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대웅전에는 거대한 붉은용(맘몬청용(권세권력황용(음흉한 모략과 민족선동세마리가 한꺼번에 그것도 양쪽으로 총 6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삼엄한 눈초리" 가운데서도 찬양과 말씀선포의 예배로 주님을 높였다고 자랑한다. "모든 사단의 무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 꿇게하고 거대한 맘몬의 영과 그곳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과 이루어진 계약들을 파쇄하고 주님의 거룩하심과 긍휼하심을 선포"한다. "절 마당제사지내느라 썩어버린 연못물에 주님의 이름으로 생수를 뿌리고  결국은 그 땅은 주님의 거룩한 땅임을 선포"한다. 이들에 의하면 봉은사는 "영적으로 맘몬과 권력과 민족을 이용하는 모략이 함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탄으로부터 실체적인 공격을 경험했다고 진술한다계속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고 토할것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배의 영으로 예수님의 생수에 온몸과 영과 혼을 푹 담그고"는 나았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경험담에서 폭력을 당하는 대상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땅밟기에 나선 신자(이하 전도자)들이 거침없이 폭력을 가하는 - 아마도 그들은 이 폭력적 언사와 행동이 매우 정당한 행위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 대상은 사탄이라는 악의 실체이다. 사탄은 말 그대로 악 그 자체이다. 악은 나쁘다. 없애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들에게 사탄을 대적하는 행위는 정당하기 때문에 폭력이 아닐 것이다. 이 때, 정당하다는 느낌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 감정이 "신나게"라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이 감정은 단지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관계적 -  비록 그 쌍방관계의 한쪽이 사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이긴 하지만 -  감정이다. 그래서 언제든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탄을 상정함으로써 자신들이 사탄을 공격할 수 있는 계기와 정당성을 확보한다. 땅밟기는 적어도 그들에게는 사탄이라는 실체에 대한 정당방위 - 폭력이 아니라 - 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후기를 쓴 전도자는 땅밟기라는 사탄 공격을 하고 나서 사탄으로부터 두통과 구토라는 반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비록 봉은사의 땅을 밟고 서 있을지라도 그들이 지금 보기 있는 현실은 영적 세계이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불교도를 공격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이 후기에는 불교도도, 심지어 봉은사 스님도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경비원 아저씨, 조직폭력배, 마지막으로 예수그리스도. 물론 "불쌍한 영혼들"이라는 추상적 인류보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전도자들에게 영적 세력들이 적대하는 우주라는 구조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타자는 개별 인격체들이라기보다는 사탄과 같은 영적 존재들이다. 세상의 현실은 예수라는 선의 대표적 실체와 사탄이라는 악의 대표적 실체가 대립하는 상징적 공간이며, 땅밟기 선교는 그 실체들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이자 전도자들에게 존재하는 우주의 전부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 대목에서 영지주의적이거나 이원론적인 신학적 세계관의 문제를 다루려는 것일까?(자문자답에 양해를 구한다) 다음의 사례는 전도자와 전도 대상(타자)이라는 필연적인 이분법적 구도가 자의적인 폭력의 구조로 변환되는 지점을 암시한다.

 


가상 공간과 타자()의 증발

  모스크 땅밟기를 다녀온 후기도 있다. 이맘의 무덤에 들어갈 때 소지품 검사를 하는데 아랍어로 적힌 사영리 책갈피가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무사히 넘어갔다는 경험담이다. 앞서 봉은사 땅밟기 사례는 겉으로만 봐도 매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데 비해서, 위의 모스크 사례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매우 다른 태도로 보이는 이 두 사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여기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단지 대적기도와 같은 행위의 동일성보다도 상황 속에서 발현되는 임기응변에 있다. 전도자는 소지품 검사에 당황하는 소심함과는 달리 기도는 "담대하게" 했다. 그런데 그 담대함의 기도가 적용되는 대상은 "저들"이다. 아마도 전도자는 사영리가 이슬람 신자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거나 자신이 이슬람 사원의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당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저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야 한다. 물론 전도자 자신의 행위는 전혀 성찰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몰라야 한다. 사실상 전도의 목적, 아니 땅밟기의 목적으로 갔다면 전도자는 강자이겠지만, 여기서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구하는 약자가 된다. 약자가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이 약자는 신이라는 절대 강자를 빌어 "저들의 눈을 가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 기도의 담대함은 정당성의 다른 표현이다. 또한 이 소심한 약자는 (이슬람 사원에서 뭔가 꺼림직한)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는 데에 이슬람 신자들을 도구화한다. 전도자(가해자)는 약자가 되고 대상자(피해자)는 전도자가 약자가 될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제공한 진짜 가해자가 된다. 이러한 뒤바뀜은 선교()라는 가상공간에 대한 오인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의 폭력을 타자들의 종교(혹은 죄)로 상쇄 내지 무화시킨다. 이것이 보수개신교인들이 자신들의 폭력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달리 말해 전도자는 자신이 자리한 입장position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한편으로 이 '담대함'은 개신교에서 유통되는 영웅적 서사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이 말씀이 20087월에 강하게 다가왔다. 2006년에 아프간 평화행진을 가게 되었다. 정부도 반대하고 엄청난 사건이었다. 공동체의 핍박, 반대도 심했다. 한국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나는 카불에 갇혀 있었고, 두바이, 북인도, 파키스탄, 페르시아에도 사람들이 갇혀 있게 되었다. 한국 대사관이 인터콥 3천 명을 막은 것이다. 나는 카불에서 200여 명과 함께 나오지 못했다. 거기서 예수행진을 하려고 했다. 하나님은 재미있으시다. 인터콥이 조급했는지 모른다. 감당할만한 훈련이 안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신다. 사역에 실패했을지라도, 부족했을지라도. 사무엘상 27장을 보면 다윗이 적의 영토에 가서 아기스 왕과 타협하기 시작한다. 600명 다윗의 용사들이 쳐 죽이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은 그 사건을 통해 왕으로 세워진다. 하나님의 방법과 생각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 다윗이 철저하게 실패했다. 자기 용사로부터 비난 받는다. 인터콥도 한국교회로부터 돌을 맞을 뻔 했다. 사역이 하나님 앞에 조급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에스더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우리의 실패를 하나님의 권세로 바꿔주신다. 그때 다윗이 일어나 부른 노래가 시편 18편이다(인터콥 이○○ 총무 영성집회 설교 중에서).

 

만일 이슬람 사원 검문에서 전도자의 사영리 책자가 발각되었더라면 아마도 그 전도자 역시 인터콥 총무와 비슷한 간증을 하지 않을까? 인터콥 총무의 간증 역시 자신들의 행위는 성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간증이나 개인적 기록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선교 보고서(?)들에 타인의 삶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전도자들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돕고자 한다. 그러나 그 행위가, 또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선교와 선교지 - 선교적 상황으로서 정의될 때 선교라는 프레임은 다른 모든 상황과 개인들의 삶을 압도하게 된다. 고프먼 식으로 말하자면, 개인이 따라야만 한다고 느끼는 요구는 상황 자체가 만들어낸다(콜린스, 48). 이 선교적 상황을 구성하는 것은 인격적 상황이나 개인들의 사회적 삶이라기보다는 영적 구조이므로 이 속에서 전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나 대적 기도 밖에 없는 것이다. 이맘 무덤 곁에서 울던 그녀들의 깊은 한은 대적기도를 동기화한다. 마치 그녀들의 문제가 오로지 종교의 문제인 것처럼. ''과 같이 타자에게서 보이는 부조리나 고통의 문제들은 곧바로 인간의 타락, 죄성, 사탄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다양한 삶의 정황과 맥락은 그것에 대한 일의적인 해석이나 일반화를 방해한다. 그런데 해석 대상의 삶의 정황과 맥락이 제거될 때 가상의 이분법적 적대 구조는 구체적 현실이 된다. 보수개신교인들의 문자주의는 비단 성서해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삶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 같다. 현실의 문제는 종교나 구원의 문제로 너무 쉽게 비약해 버린다.


"2009 청년대학생 세계선교대회 홍보문"을 보면 "캠퍼스가 죽어간다"는 안타까움이 모든 정서를 압도한다. 다른 어떤 일들이 벌어져도(그것과 별로 상관없는듯) 어쨌캠퍼스만이 죽어간다. 한 신자가 어깨를 부딪히며 만나는 캠퍼스 친구나 사회의 동료들에게서 느끼는 안타까움이란 오로지 선교 담론 안에서만 재구성되는 이야기들뿐이다. "십자가 없는 기부와 봉사"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그들에게 단지 "십자가"가 없다는 안타까움만이 담론을 가득 채운다. 개신교인들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먼저 만난다(어색한 표현이지만). 그래서 그러한 만남이 만나는 사람들을 만든다. 스포츠 영웅을 만드는 것은 경기이고 정치인을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만드는 것은 정치이듯이(콜린스, 34), 선교 주체를 만드는 것은 선교라고 정의된 상황, 선교라고 믿는 가상적 선교 공간은 아닐까? 복음전도자들이 전도하러 나서는 것은 사람을 만나기 위함일까, 아니면 영적인 선교의 세계를 확인하기 위함일까? (선교 행위자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구원받은 백성과 같은 '상상의 공동체'는 선교지라는 익명화된 타자들이 우글거리는 대리공간의 상상적 대립물이다) "존재보다 중요한 것이 존재의 목적"인 것에 동의할 수 있다고 해도 존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선교)이 존재를 압도하는 현상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선교는 한 번의 이벤트나, 몇몇 헌신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된 사랑받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이제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삶 전체가 선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성취되기 위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며,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게 되는 어떤 일에든지 참여하길 원하는 자들이 선교하는 사람들입니다. 선교한국대회(8.2~7)는 자신의 존재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자신의 존재하는 목적에 관심 있어 하는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참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창조하신 놀라운 목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010.7.29., “존재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목적입니다중에서, 선교한국 홈페이지).

 

어떤 면에서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인식론적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폭력성이 폭력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문제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 개인의 인식론적 신념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현상적 폭력구조를 낳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메커니즘에서 보다 중요한 변수는 특정한 상황이나 현장이라는 시공간적 매개인 것 같다. 선교(선교를 해야한다고 인지되는 상황이나 선교 현장)는 개신교인들이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투명하고 순수한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특정한 프레임으로 짜여진 가상공간이 아닐까?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만들어 놓은 (영적 전투라는) 가상의 선교 공간에 신자들을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교의 폭력성은 선교를 익명화되고 추상화된 관계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전도자들의 실천 속에서 만들어져 간다. 간단히 말해서 폭력성은 구체적인 상황과 현장 속에서 구성된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구성된 폭력성은 개별적인 신념이나 다양한 변수들로 쉽게 해체되지 않는다(이것이 '실재의 사회적 구성'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따라서 단지 개별적인 성찰로는 한계가 있다. 또 추상화된 이 가상의 선교 공간은 개인들의 합을 넘어서는 한국교회라는 집단과 제도 하에서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타자를 사랑하려는 선교 공간이 (역설적이게도 타자를 대하기 위해서) 타자를 추상화시켜버린다. 개신교인들은 타자들과 가상의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상호작용 속에서 세계와 타자를 인식하는 데에는 전형화typification가 필수적일테지만 현재 한국개신교의 선교에는 특정한 형태의 가상성만이 장려되고 학습되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 가상이 제공되는 보다 구체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체계적이고 집단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병리적이란 평가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병에 걸린 개인과 임상을 매개로 맺는 관계"일 때(깡길렘, 251) 이 임상을 통해서 단지 생리적인 균형을 위한 양적인 질병 및 건강한 상태는 건강의 규범과 질적 상태로 전환되듯이, 교회와 선교단체, 그리고 여기에서 주관하는 선교훈련프로그램들, 내가 곧 "가상의 선교()"라고 말한 사회적 공간이 공격적 선교의 '임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가상의 선교 공간은 관습적으로, 체계적으로 통제되어 있는 공간이다. 의학의 경우, 이 임상의 장에서 객관적인 병리학이 탄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사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개신교의 폭력성은 (개신교인들의 감각과는 다르게) 비개신교인을 포함한 사회전반이 느끼는 매우 객관적인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개신교는 인간이 병들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만, 무엇 때문에 아픈가를 묻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인색했다.

 

타자의 삶의 맥락에 대한 존중과 감수성

 “Here I am, Tell me”. 어느 선교동원단체가 주최한 선교대회의 주제였다여기서 선교의 주체는 신이고인간들은 주체의 의지를 실현하는 대행자(청지기)나 대리자이다성서 어디에서 나오는 말인지를 모르겠지만나는 성서 구절의 앞뒤 문맥을 생략한 이 문장이 오늘날 한국개신교의 선교 정신과 행태를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서로 보였다(이 작업은 이 말이 배치된 성서맥락이나 선교대회 주체측의 의도와 별로 상관없는 의도적인 알레고리적 해석이 될 수도 있겠다). "내가 여기 있으니내게 말해 달라"는 말은 단지 신이라는 진짜 주체의 의지를 받아안은 소극적 행위자라기보다는 '호명'되기를 '주체'적으로 원하는 '주체'를 보여주는 것 같다.[각주:1] "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명령만 해 주십시오!" 그것이 자본주의든 자기계발이든 신이든 성직자든어떤 명령이든지 말이다다시 말해 한국교회의 선교를 대변하는 “Here I am, Tell me”에서 선교가 실천되는 맥락인 "here"는 내부자(선교자)나 외부자(비판자모두에게 망각된 듯하다. 소위 "공격적 선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현지인의 삶의) 맥락을 존중하고 심사숙고하지 않은채, 무조건 자기가 "믿는" 신의 "소명"과 "복음" 에 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력의 구조를 생산하는 영적 세계라는 가상적 선교()와 대적 기도와 같은 의례를 중단하고, 또 그 의례의 집단적 수행을 통해 강화되는 믿음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영적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영적 세계는 부정하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실제 선교는 사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하나의 독특한 상황들일 수 있지만, 제도화된 선교 동원 훈련은 신자들을 일반화된 가상의 선교 영역에 밀어 넣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이거나 실존적인 이유로, 또는 이론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느낄 수 있다. 문제는 해답을 안다고 자인하는 개신교인들이 타자들의 눈물, 얼굴 찡그림, 한숨들의 원인을 단지 역사 저편에 있는 선악의 구도로 해석할 때에 있다. 눈물은 단지 눈물샘에서 흘러나오는 짭짤한 액체가 아니다. 한숨은 단지 허파에서 나오는 바람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원래 슬픔을 느끼면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먹먹하면 한숨을 쉬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다. 타자에 대한 개신교의 접근방식은 마치 감기기운을 느끼는 사람에게 다가가 한 장의 인간 설계도 지면을 고치면서 병을 확진하고 동시에 치료했다고 말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어쩌면 개신교인들을 그러한 삶의 기표들을 읽어낼 수 있는 감수성이 결핍된 것일 수도 있다. 개신교인들에게는 기표 속에 감추어진 개인과 사회의 서사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글_김현준(CAIROS 대표)

 

  1. 강조하려는 뜻에서 동어반복을 사용한다. 사실상 상징은 그 상징이 배태된 상황이나 의례를 의존하면서도 은폐하는 순환론적 자기준거성을 가지고 있다. 이 상징을 전유하는 주체 역시 이러한 자기정당화의 순환논리에 갇혀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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