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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

특별좌담회) '강신주 현상'을 말하다.



'강신주' 개인이 아니라 '강신주 현상'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패널: 마르셀(사회학 박사과정수료생), 미노미노(출판인), 먹보에술꾼(사회학 박사과정수료생), 카라멜마끼아또벤띠(법학박사과정수료생)

1.

마르셀 : 먼저 미노미노님께서 설문조사 결과를 브리핑 해주세요

미노미노 : 특별한 것은 없었고, 두명에게 간단한 서면 인터뷰를 했는데요. 일단, 특징적인 것은 그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반대라는 점이에요. 한명은 엄청나게 긍정적이었고, 다른 한명은 엄청나게 부정적이었다는게 특징적이었고. 강신주의 진실은 ... 그 둘을 합쳐놓으면 그게 완전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강신주의 다면적인 모습은, 이 둘을 조합해보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사실, 계간이라는 특성상 이슈가 있으면 빨리 다루지 않으면 남들이 다 뜯어먹고 뼈다귀만 남을 거 같고, 청소하는 역할이나 할 것 같고 그래요. 그 동안 강신주에 대한 기사가 매우 많이 나와버린 거에요.

먹보에술꾼 : 저는 강신주 개인보다는 강신주를 통해서 한국 사회나 한국의 학문 등을 봐야한다고 봐요. 강신주를 뜯어먹겠다고 하는 건 아니고, 강신주를 하나의 징후로 봐야지요. 강신주가 하나의 좋은(?) 징후가 되고 사건이 되었으니까, 강신주를 통해서 한국사회를 보고, 한국의 아카데미즘이나 학계, 출판 시장, 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강신주 현상을 통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에는 뭐가 있을까요?

먹보에술꾼 : 최근에 프레시안에 올라온 한영인씨가 쓴 <강신주를 위한 변명>이라는 글을 읽어봤는데요. 저의 개인적인 느낌은 반만 동의할 수 있고, 반은 동의하지 못하겠다 이런 거에요. 이 사람이 비난·비판하는 것은 강신주를 가지고 속류사회학주의적으로 비난하는 것, ‘힐링’이라고 하면서 하는 그런거 말이지요.

강신주에 대한 양 극단이 입장이 있을 수 있어요. 하나는, 한영인씨가 그 중 한 입장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식화시켜 놓고 본다면 한영인 씨가 말하듯이 강신주가 개인적으로 ‘힐링’담론을 말하는 것 또는 철학의 문제나 주체의 문제를 말하는 것들이 무엇이 문제인가?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한영인씨가 그 반대에 있는 입장을 속류사회학주의라 말하고 있지요. 박권일씨를 비롯해, 그간 언론을 통해 강신주를 비판해온 사람들은, 물론 강신주만 비판하는 것은 아닌데, ‘힐링담론’임을 이야기하면서 사회를 봐야 한다, 사회 구조가 문제가 말하는 것은 속류사회학주의라고 부른 거에요. 이처럼 강신주에 대한 양극단의 입장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쪽은 윤리의 문제, 개인의 문제 등 개인주의적인 접근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학주의적인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강신주가 사회학적이지 않아서 문제라고 하는 점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이 부분에서는 한영인씨하고 비슷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게 큰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담론 자체가 사회학적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강신주를 둘러싸고서 강신주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전체 사회적인 지평, 사회적인 장(Field)을 봐야 된다는 것이지요. 개인을 가지고 ‘사회학적이다. 아니다.’, ‘속류다.’ 이렇게 비난하는 게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속류사회학주의라고 하는 것도 한영인씨가 잘 모르고 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 정말 사회학주의가 있는가? 제가 생각하는 것은, 개인이 사회구조를 봐야 한다고 하는게 사회학적인 게 아니고, 지식사회학적으로 봐야 한다는 거에요. ‘사회 구조를 봐야 한다.’ 이렇게 하면 사회학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실은 지식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 담론 자체가 전체 사회적인 지평,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한국사회나 한국 학계, 한국의 출판시장, 아카데미즘하고 어떤 관계에 있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강신주를 봐야 된다는 것이지요. 강신주가 말하는 그 자체가 ‘사회학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비난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저도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을 뿐 분석을 해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사회를 잘 안다고 하기도 어렵고 학계를 잘 안다고 하기도 어려운데요. 그럼에도 드는 생각을 말해보자면, 우선은 한국 학계의 문제, 제도권 아카데미즘의 문제가 있을 것이고, 둘째, 대중인문학 시장의 문제가 있을 수 있겠죠. 출판시장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이러한 것을 속에서 강신주가 발언하는 것들이 특정한 효과를 갖는 것이지요. 그게 문제일지 아니면 장점일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이것을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게 사회학적이라는 것이에요. 개인이 발화하는 담론 내용에 사회구조가 들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사회학적인가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학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 수 있어요. 사회학이라면 전체를 놓고 봐야 한다는 것이에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우리가 논의를 조금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 강신주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지점에서 강신주가 문제가 되는 거라고 해석하는 것이지요? 아니면 문제화가 되는 것인가요? 문제를 삼는 사람들의 포인트는 뭔가요?

먹보에술꾼 : 제가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거의 두가지에요. 하나는, 한영인씨는 이걸 ‘속류사회학주의’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서 비판을 한건데요.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해요. ‘강신주가 문제를 개인 주체의 결단의 문제로 환원한다.’ 그리고 ‘사회구조를 보지 않는 강신주’라고 비판을 하고 있는데, 이게 ‘속류사회학주의’라고 주장을 하는 겁니다.

마르셀 : 그게 한영인씨가 강신주에 대한 비판을 정의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방식이죠. 논의의 초점이 흩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다소 도발적으로 사례를 들어볼게요. 제가 연애를 못하는데, 연애를 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강신주에게 ‘연애를 하고 싶은데, 연애를 못해요.’ 이런 고민을 말하면 강신주는 개인 주체의 결단으로 이야기를 하겠지요. 자, 이번에는 제가 강신주를 비판하는 논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연애를 하고 싶은데, 연애를 못해요.’라고 고민을 말한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먹보에술꾼 : 똑같이 이야기 하겠지요.

마르셀 : 그게 강신주에 대한 비판이 스스로 자문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지점이에요. 차라리 상담이라는 형식 자체가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면, 내 주변에 살아있는 인간이 와서 ‘연애하고 싶은데 연애를 못해요.’ 라고 말한다면 뭐라고 말하겠어요? 헤어스타일하고 체형 관리 좀 해라, 패션에도 좀 신경을 써라. 이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하게 된다고요. 또 그렇게 답해주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저 사람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사람아냐?’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그리고 강신주에게 질문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권을 가진 결정권자들이 아니지요. 개인이 자신의 사적인 삶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인데, 사회 구조를 설명해 준다는 것은 ... 그럼 그 사람이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역량이나 힘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할 수는 없는 거지요. 물론, 원인으로 설명은 할 수 있겠지만, 현상을 설명하는 것과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다음처럼 비판할 지점이 생기겠지요. 개인의 결단이나 사회 구조로의 환원이라는 환원주의 사이의 대립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만일 방금 마르셀위원이 말했던 것처럼 환원주의적인 지점이 아닌 다른 지점에서 대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어떤 현실적인 지점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한번 던져보고 싶어요.

마르셀 : 제가 친구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으면 하는 이야기는 첫 번째로 이거에요. “선거 좀 잘하자. 그렇고 그런 사람들 계속 뽑히는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를 기대하겠는가?” 이렇게 말해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친구들이 자신들은 여당 찍지 않았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하지요?

마르셀 : 제가 지난 추석 때 대전에 내려가서, 친구들의 고민을 듣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딪힌 딜레마가 그것이에요. 친구들이 너무 힘들다고 그래요. 결혼을 하고 현실이라는 무게가 다가오니까 너무 힘들대요. 저는 결혼을 안해서 모르는데 너무 힘들대요. 그럼, 저는 또 저대로 힘드니까, 다같이 ‘그럼 우리 어떻게 사냐?’ 이런 질문을 하다가 ‘우리 선거 좀 잘하자.’ 그랬지요. 그러니까 친구 한명이 ‘여기서 여당 찍은 사람 손들어봐’ 했는데, 아무도 없는 거에요. 젊은 사람은 아무도 안뽑았어요. 2010년 이후로 되게 답답한 노릇이, 내 주변 친구들은 아무도 안뽑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힘들어요. ‘선거 잘하자’ 그렇게 말하고 보니 나름 잘 하고 있어요. 그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렇게 되면 ‘앞으로는 부모님들을 잘 설득하자’ 이런 말을 하게 되죠. 그런데 이건 노력의 영역이지, ‘해법’으로 이야기할 만한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이야기하게 되는 두 번째는, 즐겁게 살자, 정신승리하자 이런 것이거든요.

미노미노 : 급진적인 사람들은 ‘짱돌들고 나가서 싸우자. 혁명하자.’ 이런 주장도 하잖아요.

마르셀 : 그것이 우석훈, 박권일씨가 쓴 <88만원 세대>에서 썼다가 그 88만원 세대한테 비판받은 대목이에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혁명 다음에는 무얼 할 수 있는가?’ 등의 비판적 질문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엄기호씨가 ‘뉴파워라이터’라 불리는 이름으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했을 때, ‘한국사회는 이미 망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폐허를 직시할 용기뿐이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것도 어찌 보면 정신승리할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강신주의 정신승리와 엄기호의 정신승리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과 다른 정신승리법을 개발할 수 있는가? 혁명도, 투표도 이렇다할 해법이 아니라면 정신승리라도 해야 할텐데,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지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정신승리를 말하는 주체들을 보면,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부잣집 도련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힘들게 먹고 살아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느낌이에요.

마르셀 : 제가 학부생들이 많이 모이는 웹공간에서 “돈에 연연하지 말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만두자.” 이런 내용을 가진 강신주의 강에 대한 반응을 본 적이 있는데, 반응은 이랬어요. “그렇게 말하는 자기는 돈 열심히 벌면서, 그런 자신은 토나올 정도로 일하고 다니면서, 젊은 사람들한테는 놀라고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한다.” 스스로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렇게 묻더라고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노예에게 ‘왜 당신에게는 자유가 없지요? 하루 2시간씩 일하고, 여행 좀 다니면서 살아요.’ 이런 것을 답변으로 내놓는 주체들의 답변 자체도 정신승리 차원에 있는게 아닐까요? 노예보고 어떻게 살아라한다는 게 되게 무책임하게 다가와요.

마르셀 : 그런 점에서는, 어찌보면 강신주도 무책임하고 강신주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무책임한 거에요.

먹보에술꾼 : 그리고 또 강신주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속류사회학주의’라면서 비판하는 사람도

마르셀 : 그것도 무책임한거에요. 우리 모두는 무책임하네요. (웃음) 정말, 엄기호씨 말대로 우리는 이제 망하는 일만 남았는지도 몰라요.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잘 모르잖아요. 당장 얼마전에 진보신당 부대표가 자살했잖아요. 그것도 예전 운동가들이 그래왔듯이 민주주의를 걱정하거나 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일로 그렇게 했어요.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가 쉽게 혁명을 말하기도 어려워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혁명도 어느 정도는 전망이 필요할 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라서요.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 우리가 일상 혹은 정상이라고 말하는 범주에 진입하지 못하는, 특히 청춘세대에게 이 같은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식이라는 것은 담론을 만들기 위한 소재일 뿐이지 진짜로 그들과의 접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아요.

2.

마르셀 : 한가지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재배치해보는 거에요. 사적이라 여겨지는 개인적 꿈이라는 게 대중사회 속에서는 굉장히 정형화 혹은 획일화 되어 있는 측면이 있어요. 우리 모두는 학력자본을 바탕으로 정규직에 진입한 사람들이 되고 싶어해요. 여기 모여 있는 우리들도 가능하면 정규직이 되고 싶어 하지요. 은퇴하면 연금받고 살고 싶어 하고요. 누굴 탓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것이에요. 1988년 서울올림픽 할 즈음에 만들어진 ‘중산층사회’에서 우리는 중산층 진입을 잠정적 유토피아로 여기고 목표로 삼으면서 사는 것 같아요.

강신주에게 상담하는 사람들 보면, 중산층에 진입하는 대중적 경로인 대기업 가는 것, 고시 같은 걸 보는 것 등등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질문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다양한 경로가 있다’라는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네요. 또 하나는, 중산층 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거에요. 역사적으로 봐도 사실 중산층으로 살아간다는 게 우리 부모님 세대 성장기만 해도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잖아요. 예전 같았으면 대학 가는 것도 소수만 가능했고, 대부분은 중등학교 언저리를 마치고 일을 해야 했죠. 또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주변부 국가에서 최소 반주변부 국가로 들어간 특이한 케이스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 노동계급이고, 우리 부모님들도 양반이나 귀족 아니고 노동계급이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보는 건 어떨까 해요.

먹보에술꾼 : 눈높이를 낮추자는 거에요?

마르셀 : 눈높이를 낮추자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으로 우리를 정의한 상태에서 우리의 살길을 마련해보자는 거지요.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 ‘레미제라블’이니까, 지금 우리가 현재 상태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보장을 요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거에요. 나중에 중산층이 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달라고 하기 보다는 당장 우리 삶을 어떻게 보장받을 것인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게 더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당장에 먹고살게 해달라? 기본 연금을 달라?

마르셀 : 아뇨 당장 우리가 먹고 살 것을 책임져 달라.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안들어주면? 계속 안들어주고 있잖아요.

미노미노 ; 그런 생각을 구체화시킨 것이 기본소득이에요?

먹보에술꾼 : 결론은 기본소득이에요? 그러기엔 비약이 다소 심해 보이는데. (웃음)

마르셀 : 참 어렵네요. 지금까지 한말 그냥 삭제하고 싶네요. (웃음) 근데 역사적으로 봤을 때, 우리 세대는 예전에 꿈꾸기 어려운 중산층의 꿈을 꾸고 있는 거다 이러면 힐링이 되지 않나요? (웃음)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힐링 안되요.

미노미노 : 그거 비슷한 말들을 철학자들이 하잖아요. 욕망을 바꾸자. 주이상스. 이런 말들요. 다른 꿈을 꿔보자 이런 말들.

마르셀 : 다른 꿈이라고 하는게 맞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중산층 되는 걸 당연한 우리들의 꿈으로 여기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은 ‘노동계급’이라는 것, 노동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노동계급으로서 꿈을 꿔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생각나는 게, 브라질의 이냐시오 룰라 대통령이 처음 대선을 치렀을 당시 상대 당 후보였던 호세 세라 후보 또한 룰라 못지않게 극빈층에서 자라나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인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선거 당시에 이러한 자신의 경력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대요. 하지만 룰라가 쓴 전략은 ‘엘리트가 되지 않고도 성공하는 것(triumph without becoming elite)’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중산층이라는 이름을 갖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수많은 경로들, 교육, 정규직 진입, 재산형성 이러한 경로에 진입할 접근권을 요구하기 보다는, 교육받지 못하고, 정규직도 아니고, 재산도 없어도 요구할 수 있는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이것도 당장의 해결책은 아니에요. 상담이라는 형식으로 할 수 있는 말도 아니고요.

미노미노 : 노동계급으로서의 꿈이 기본소득이에요?

마르셀 : 그런건 아니에요 (웃음)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노동계급 아니라도 기본소득은 되어야지요.

마르셀 : 당연히 노동계급만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요. 실제로 서양에서 노동자 조직들은 노동이 창출하는 가치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이 있어서 의외로 기본소득을 그렇게 찬성하진 않는다고 알고 있어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나는 노동하라는 말이 엄청 편하게 다가오지 않는 지점이 있어요.

마르셀 : 우리가 중산층이 아니라 노동계급이라고 정의하면, 노동계급으로서의 라이프스타일, 삶의 질 등을 이야기하면, 현재와 다른 요구들을 말할 수 있어요. 근무강도의 문제, 노동시간의 문제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의 질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게 되요. 그런데 중산층으로 정의가 되니까, 소비 영역에 초점이 두어져서 일은 돈 버는 도구가 되고, 몇 평짜리 집을 가지고, 어떤 차를 끌고,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하고, 어떤 제품을 쓰는지 등에 초점이 모아지게 되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근데 노동계급은 지난 몇십년 간 한국 사회에서 담론을 중요하게 형성해온 주체 중 하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대로 형성하진 못했죠. 그리고 이 청년들은 중산층이 못 되는게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노동계급조차 못되고 있는데요.

마르셀: 그런데 비정규직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요. 역사적으로 살펴보자면 노동계급이란 빈곤이라는 문제를 동전의 양면처럼 가지고 있는 개념이기도 해요, 원래 노동자는 다 가난했으니까요. 19세기 후반부터 일부 숙련공을 중심으로 중산층이 형성되고, 20세기 중반들어 케인즈주의가 전면화 되면서 전국민을 숙련공처럼 만들려는 프로그램이 가동되면서, 직업의 영역에 들어가면 숙련공이 되기 위한 규율의 체계 속에 편입되는 동시에 국가의 주도로 자신의 생계가 어느 정도 보장받는 시스템이었잖아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이제 우리 밑에 세대 20대나 30대 초반 세대가 결정적으로 어떤 세대냐면, 부모가 IMF를 겪고 부모가 맞벌이 전선에 뛰어들면서, 경졔적 어려움을 몸으로 체험하고, 부모의 희생으로 힘들게 대학을 졸업했는데, 비정규직에 들어가서 노동계급을 형성하라고 했을 때 받아들여 질까? 당장 학자금도 빚도 갚아야 되고 부모도 모셔야 하는데, 이런 세대들인데,

마르셀: 비정규직 노동을 꿈꾸라는 것은 아니에요. 비정규노동자라도 되어서 노동계급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 세대의 앞뒤를 살펴보면, 우리 윗세대와 우리 세대만 탁 튀는 면이 있거든요. 정확하게는 1990년대가 탁 튀어요. 다수의 사람들이 내집을 마련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대학에 가고, 그 대학을 졸업하면 정규직이 되겠다는 꿈을 꾸게 된 시절. 그렇다면 이것이 예외적인 것임을 인지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노동계급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에요. 사실 서양 자본주의 역사에서 대학에 가는 건 정말 소수였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신이 현재 노동계급이라는 정체성이 있다 보니까, 장차 내가 무엇을 할 것이다라는 ‘꿈’으로 현재의 문제에 대한 불만을 유예하거나 ‘열심’이란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굴기 보다는, ‘지금, 여기’서 얻어 낼 수 있는 권리에 대한 투쟁을 한 측면이 있어요.

3.

먹보에 술꾼: 아니 강신주 현상을 그렇게 뭐야 여러 측면에서 볼 수가 있는데, 이렇게 보면 어떨까요? 대중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수요의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요? 수요의 측면에서 보는 건 많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수요의 측면에서 본다는 건, 강신주에게 사람들이 원하는게 무엇이냐 하는 것이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개인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멘토의 역할인데요.

먹보에 술꾼: 아직도 멘토현상이 지속되는 건가요?

마르셀: 대중들은 그런 걸 좋아하는 면이 있다고 봐요. 만일 누군가가 연애를 하고 싶어한다고 치고, 두 개의 책이 있다고 칩시다. 한국 사람들이 연애가 힘든 정치경제학적 이유, 그리고 연애를 위한 외모관리법, 보통 둘 중에 어떤 것을 볼까요? 외모관리법 쪽이 훨씬 많지 않겠어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그런데 이런 강신주나 법륜이 뜬 걸 종교와 연결시키면 종교의 쇠퇴와 맞물려 있다고 봐요. 원래 이런 담론들은 목사의 설교 담론에서 형성된 건데요.

마르셀: 목사들이 주로 자기계발 쪽하고 가까웠는데, 스님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담론의 경향이 힐링으로 전환헸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고, 강신주는 이 두 담론을 엮었다고 봐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이게 질책을 하는 것이든 뭐 든 간에 그 누구도 나를 향해 손을 벌리지 않았는데

먹보에 술꾼: 거기까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왜 하필 강신주가 그것을 하게 되었는가? 할 수 밖에 없었는가? 왜냐하면 단순히 생각해서 목사님이 할 수도 있고, 법륜 스님이 할 수도 있고, 다른 멘토들, 가령 안철수 등 사회적 멘토들도 할 수 있는데, 왜 강신주인가? 강신주는 원래, 원래라고 하면 웃기지만, 대학에서 전공을 했잖아, 노자 장자 이런 거 하신 분이고, 쉽게 이야기 하면 소위 지식인이잖아요? 학문하는 사람이 하필 왜 그걸 하게 되었는가? 한국사회에서는 제 생각에는 지식인들이 그렇게 되기 쉬운, 그걸로 빠지기 쉬운 구조가 있다고 봐요.

마르셀: 내가 대중 강연을 많이 알진 못하지만 몇 군데 다닌 경험에 의하면 강연자들이 그와 같은 이야기 해주는 거 좋아하는 것 같아요. 뭔가 구체적인 답을 주길 바라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고.

먹보에 술꾼: 그건 강신주가 대학에 자리를 못 잡았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해요. 지식인이라는 말은 애매해서 안쓰는게 좋지만, 한국사회가 지식인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보다보면 한국은 학자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만히 있는 학자는 비난받거나 뭐 그러기 쉽고, 조금 유명해 지면 이 학자는 발언을 해야 하는 거에요.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도 있지요. 강신주는 노자, 장자로 학술적 커리를 쌓았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은 이쪽 영역에 있지만, 이 사람이 인기를 얻고 또 대중강연을 통해 뜨게 되면 모든 영역에 대해 권위를 갖고 발언을 하게 되는 측면이 있어요. 자신이 공부한 노자 장자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사실 크게 관심도 없고, 말하는 내용을 잘 알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이게 조금 문제적이지 않나 싶어요. 상징자본을 특정한 영역에 갖게 되면, 상징 자본이 확대 된다는 거요. 가령 노장 장자로만 대중하고 이야기하면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노자 장자를 대중에게 가르쳐 수 있고, 그건 괜찮은 거에요.

그런데, 강신주는 상담이라는 형식으로 그 사람 인생을 책임지려고 그래요. 사람들도 그걸 듣기 원하고. 또 강신주는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지만, 한국에 지식인들 중에는 정치영역을 포함해서 오만 영역을 다 인터뷰하고 기자들과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여기에 기자들과 언론의 공모도 있죠. 편한 사람 찾아가 인터뷰 따오고, 내용도 어느 정도 서로 공모하고. 이게 어느 한 쪽의 잘못은 아닌데요 한국은 전문가주의가 없어요. 미국 같은 곳에서는 오히려 전문가가 너무 세분화된 전문가가 되는 바람에 비판받잖아요. 전문가가 전문가에 빠져 보편적인 것에 관심 갖지 않고 스페셜한 측면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런 비판이요. 그런데 한국은 거꾸로 인거 같아요. 아직 전문가가 생성되지도 않은 사회에서, 보편적 지식인, 총체적 지식인을 원하는 것 같아요.

마르셀: 한국 지식사회가 그런 측면이 있지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심한게 기독교 판이지요, 자기 전공이 아니면서 발언하고 ...

마르셀: 이른바 목회를 성공하고 나면, 신학자도 무시하고 자신이 교수도 하고 총장도 하고 다 하는 경향이 있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강신주 현상에서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여기는 건 이거에요. 먹보에 술꾼이 상징자본이라는 표현으로 잘 말해 주었듯이, 강신주는 목사님들이나 스님들이 쓰는 종교적 언어를 쓰지 않아요. 강신주는 박사라는 권위가 있는데, 여기에 철학이라는 권위, 철학자라는 권위가 더해져요. 그런데, 이 권위는 종교적 영역을 뛰어넘거나 혹은 종교적 언어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것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철학도 신학 못지않게 최종적이거든요. 이 사람은 박사이면서 철학자이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 이론을 주장하지 않고아니라 다른 철학자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권위를 덧입고 할용한다는 거지요. 권위가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쌓이면서요. 다른 멘토 그 전의 김난도 같은 경우 박사이고 서울대 교수였고, 김미경의 경우는 경험에서 나오는 말자랑, 그 뿐이었는데요.

마르셀: 잠깐만, 서울대 교수인 김난도가 더 쎈거 아닌가요? 교수인데?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책도 더 많이 팔리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김난도는 상담이 아니라 아프니까 청춘이정도 인데

마르셀: 사회적으로는 김난도의 영향력이 더 센 것 같아요. 책도 더 많이 팔았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질문자를 바꿀수 있는 권위, 김난도는 김난도의 권위로 이야기 하지만, 강신주는 강신주의 권위가 아니라 철학자의 권위를 빌려오는 거에요,

먹보에 술꾼: 조금 그건 아니야, 이제는 자기는 권위가 생긴 건 아닌가?

카라멜마끼아또벤띠: 이제야 그런데, 그 형성 단계에서는 그랬다는 거에요.

먹보에 술꾼: 아무 말이나 해도, 저 사람은 철학자니까, 철학자는 철학자로서의 말을 해야 하는게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저만의 규범적인 생각일수 있어요. 철학자는 철학으로서 말할 수 밖에 없는데요. 강신주의 경우 철학적인 책도 있지만 대중 앞에 설 때는 철학의 언어로 말하지 않아요. 자기 말로는 쉽게 풀어쓴다고 그러는데 , 제가 보기에는 아니에요. 철학 강의에서는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일반적인 상담이나 TV에 나와서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그냥 구루처럼 자기 썰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맞아요. 이제는 그런 단계가 되었죠.

먹보에술꾼 : 그럼 과연 그 사람의 전공인 철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그것과 비슷하죠. 목사가 전도사 시절에는 신학책을 열심히 참고하고 인용하다가, 목사가 되고 난 후 설교를 하게 되면 어떤 말을 해도 그냥 다 성경적인 이야기인가 보다 하게 되요. 강신주도 그러한 권위형성과정을 거친거지요. 그 권위가 완성된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든 간에, 마치 목사가 어떤 말을 던져도 다 설교가 되는 것처럼,

먹보에 술꾼: 맞아요. 목사님이 말하면 다 예수님 말씀이 되는 것처럼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맞아요. 그게 캐논화, 경전화가 되는 것이죠.

마르셀: 젊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 끌다가 성문제로 교회 그만두게 되었던 모 목사랑 비슷하게 되는 수순을 밟을 지도?

먹보에 술꾼: 성적 타락하면 그렇게 되겠죠.

마르셀: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하나님 말씀으로 받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그게 바로 한국의 지식담론이라고 해야 할까요? 좋게 이야기하면 독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나쁘게 말하면, 지식담론이란게 영역도 없이 아무 이야기나 하게 되는 거에요.

마르셀: 지식 담론이기도 한데, 교양을 추구하는 대중의 역사와 외연, 가지고 있는 역량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아직은 조금 더 성숙해야 할 여지가 있다고 보여주는 측면이 있어요. 요즘 인기 있는 팟캐스트 중에 이이제이라는 역사 팟캐스트가 있는데요.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 1-2편 정도를 들어보면 문제가 너무 많아요. 속류화된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이지요. 본인이 설명을 못하는 부분이 등장했을 때 설명은 하지 않고 나쁜 놈이니까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해버려요. 예를 들어, 1980년대 설명을 보면 전두환이 구데타를 일으킬 때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을 무엇을 했는가? 이런 이야기 하다가, 진행자 둥 한 사람이. “에이, 군사정권과 미국은 다 짝짝꿍이지.”하고 넘어가거든요. 하지만, 그때 전두환과 미군사령관 사이에 굉장한 알력과 다툼이 있었어요. 신군부를 인정할 것인가 말건가를 두고 미군사령관과 미국 정부, 신군부 사이에 수많은 일련의 과정이 있었는데, 이러한 과정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그냥 ‘짝짝꿍이다’ 라고 말하고 끝나는 겁니다. 듣다 보면 어떤 느낌이었는가 하면 처음부터 역사 속에 좋은 놈 나쁜 놈이 있어요. 좋은 놈 나쁜 놈이 있고, 나쁜 놈은 나쁜 놈이니까 나쁜 짓하고 있고, 좋은 놈은 나쁜 짓했어도 그런 뜻은 아니지 하는 것 같아요. 이런 방식으로 이분법적 역사해석이라고 하는 게 확대 재생산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노무현 정권시기의 역사로 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사람의 선한의도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그 안에 어둠이 있다고 하는 부분이지요. 그리고 아무리 이명박이고 박근혜가 나쁘다 하더라도, 사람들을 절멸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컨트롤도 하거든요. 사람들의 욕망을 일정 부분 들어 주는 측면이 있어요. 예를 들어, 사람들이 박근혜를 욕한다고 할 때 그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대학구조조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를 실행하기 위한 기준으로 세운 대학평가의 기준 중 교수 충원율, 취업률 등은 비판 가능하지요. 하지만, 대학정원조정이라는 큰 틀에서는 대부분 동의하거든요. 이미 대학정원이 학생 수를 넘어 섰고, 부실 사학들이 제대로 운영도 안 되니까요. 이러한 대중적인 필요의 문제까지를 악의 문제로 덮어버리면 역사가 어떻게 실제적으로 구성되어 왔는가에 대해 총체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봐요.

아무튼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우리의 ‘교양시장’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지금 철학의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가에 대해서는 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속류적인 프로그램 말고, 정말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고통을 마주하는 가운데 지금 수많은 어려움을 만들어낸 상황과 요소를 알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준비하기 위한 다소 복잡하고도 지난한 경로를 사람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한칼에 시원하게 해결해 줄 해결자를 기다리고 있는가?

먹보에 술꾼: 아까 이야기 했지만, 교회에 가서 목사에게 기대하는 것은 성경강해 후 너무 어려워서 머리를 쥐어 뜯게 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속 시원한 말 한마디, 속을 뻥 뚤어 줄 한 마디 거든요. 단지 텍스트가 인문학일 뿐인 거지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왜 그러면, 아무리 그래도 자기 현실이 안 바뀔걸 알지, 내일 또 출근하고 야근하고 연장근로해야 한는데, 마음이나 위로 받고 가면 그걸로 족한 거거든요.

마르셀: 외국하고 비교하는 건 그다지 좋진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스 공항 기념품 판매점 코너에 갔는데, 한 쪽에 책 코너가 있어요. 물론 동네 서점보다 더 작아요. 스트라스부르공항이라는 곳이 한국의 지방공항 정도 크기거든요. 거기에서 사온 책이 한권 있는데, 뭐냐면, 프랑스 일간지가 내는 교양무크지에요. 정신분석학에 관한 것이었는데, 프로이트 이후 프로이트 후계자들이라는 제목으로 페렌치, 융, 라캉, 프랑스와 돌토 등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의 흐름을 정리를 한 것이에요. 이걸 그 조그마한 서점에서 교양서라고 팔더라고요. 이른바 ‘교양독자층’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곳에서는 어려운 철학 이야기를 해도 된다고 봐요.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정도의 교양은 아직 조금 어렵지 않나 싶어요. 앞서 말한 프로그램처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XXX라고 하고, 김영삼은 XXX쪽에 붙은 사람이라고 하고, 김대중, 노무현은 착한사람이었다고 정리해버린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당시의 신자유주의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먹보에 술꾼: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쉽게 풀어 쓸 수도 있어요. 너무 어렵거나 자기가 모르면 잘 이야기를 하지 못할 수 있는 것도 맞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철학을 그냥 속류화 시켜서 막 이야기 하면, 대중을 위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대중을 무시하는 거에요.

마르셀: 무시하는 것 맞아요.

먹보에 술꾼: 그들도 공부할 수 있지요. 공부가 별 건가요? 우리는 날 때부터 공부했나요? 다 대중이잖아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도 다 생활세계 사는 사람이고, 단지 학문적 논의를 할 때만 공부하는 사람의 자리로 오는 거지요. 대중들은 일상이 바쁘죠. 우리도 바쁘면 공부 못하잖아요. 조건의 문제이지, 이게 뭐 개인의 능력의 문제라든지 이런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걸 그냥 굳이 풀어서 하는 걸 이 사람들 마음을 뚫어 줄 수는 있지만 공부한다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못하죠. 텍스트를 보면서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그런 과정을 지나봐야 공부하는 재미를 느끼게 되고, 진정 지식을 안다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있을텐데요.

마르셀: 사실 그런 과정이 축적되었을 때, 실존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고, 거기서부터 주체적 결단이 나오게 되지요. 어떻게 타인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가족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은 앞서 말한 고민의 결과로 주체적 결단이 만들어 지고, 진로를 수정하기도 하고 등등이 등장하는 것인데요. 그 모든 단계를 대부분은 생략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사실은 다른 자리에서도 이야기 한 것이지만, 주체의 고민이라는 지난한 과정이 생략되는 부분은 한국 사회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것이기도 해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보통 우리의 부모세대는 한국에서 우리에게 그런 고민을 더욱 북돋아주기 보다는 고민의 답을 준 측면이 있어요.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을 보면 이런 장면이 있어요. 극중 이름은 정확하지 않은데, 오현경씨가 하는 역할이 있어요. 이 사람이 이혼 위기에 처하니까, 오현경의 아버지가 남편 아버지를 찾아가서 이혼 시키지 말라고 하는 거에요.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 말 ‘이혼을 시킨다’라는 표현이에요. 극 중에서 40대 초반이나 중반쯤 되어 보이는데요, 이러한 성인이 타인의 영향력 하에서 수동적으로 사는 모습이 보여요. 이건 사실 보통의 가족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부모님 세대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자녀들을 대학입학 ‘시키고’, 대학공부 ‘시키고’, 졸업 ‘시키고’, 취직 ‘시키고’, 결혼 ‘시키고’... 모든 걸 부모가 해주고 정답도 부모가 정해놓은 거에요. 이런 상황에서 대중사회에 공통적 욕망에 편하게 진입하는,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최적경로를 쫓아가기를 원하는 기성세대와 젊은세대가 대화하는 방식이 강신주와 대중의 관계에서 재현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런 점에서 강신주는 사회의 반영이라고 봐요.

먹보에술꾼: 그래요. 강신주는 한국시민사회, 학계의 (구조적 현실을 반영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롤모델이죠. 그런데 강신주만 문제적인 것은 아니에요. 그 이전에 도올 선생도 있었죠, 물론 도올은 자기 전공영역에 머문 측면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조금만 지식인으로서 유명해지면 자꾸 딴 짓을 하는 것 같아요.

마르셀: 하나의 사례로 일반화 하기는 어렵지만 예전에 대전에서 있었을 때 시간강사하는 분을 알았는데, 이 분이 강사로 몇 년 고생하다가 교수로 임용이 되셨어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몇 개월 지나니까 자꾸 다른 사람들한테 덕담을 하는 거에요. 주변 사람들은 덕담을 요청한 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말할 때마다 분위기 싸해지고. 한국사회가 ‘교수님’들에게는 덕담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먹보에술꾼: 그게 ‘꼰대’가 되는 거죠.

마르셀: 서로가 꼰대질을 부추기는 거라고도 볼 수 있죠. 이게 우리사회의 보이지 않는 일상 속의 권력을 매개로 한 관계맺음의 방식이에요. 이게 강신주와 대중사이에서도 나타나는 거지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하지만, 일반대중이 계몽이 덜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는데요.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경험이 기억의 축적이라고 해요. 공부도 기억의 축적이죠. 대중은 (학자와 달리)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텍스트를 축적하는 공부를 한 것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텍스트의 축적이라는 것은 있지만 제도적으로 권위가 없어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겠죠.

마르셀: 경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 가지 측면을 말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무슨 철학적 공부를 했다 안했다 여부가 아니라, 자신보다 텍스트를 대상으로 해서 공부를 더 많이 한 사람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에요. 꼰대질을 서로 요구하지 않는게 중요하다는 거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여기서 말하는 ‘꼰대질’이 뭐에요?

마르셀: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굉장히 빠르고 간편하게 상대방의 진로 등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방식. 우스개로 말하면 설날 아침에 떡국 먹고 친척들이 말하는 방식. 영혼없는 덕담 이런거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압축된 길을 먼저 가봤던 사람이 뒷사람에게 압축된 길을 제시하는 방식이잖아요?

마르셀: 나름의 노력을 통해서 중산층이 된 사람들이 자기 경험에 근거해 중산층이 되는 길을 알려주는 거에요. 어디 취직하니까 되더라, 뭐하니까 좋더라...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그런 점에서 사회적 통합이 중요한 것 같아요.

마르셀 : 사회가 나뉘었다는 것은 아니고요. 오히려, 말씀 드린 게 사회에 통용되는 규칙이죠. 이런 방식으로 사회가 통합되어 있다는 거에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그러나까 마르셀의 말은, 여러 사회적 규칙들로 강제적 통합은 되어 있으나 제대로 분화되어 있지는 않은 사회, 그 속에서 사실상 파편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만나는 방식이 바로 한 권위자(지식인)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무리하게 개입하는 방식(꼰대적?)이라는?

먹보에술꾼: 그런 측면도 있죠. 참 복잡한데요. 대중들은 사람들은 본래 각자 자기들만의 텍스트(인생경험 그 자체이자 성찰대상이기도한 삶)가 있다. 제 생각에 지식인은 정보를 주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방향을 가르쳐주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대중은 책이라는 텍스트와 인생이라는 텍스트 사이의 차이를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해결해 나가는 건데요. 소위 ‘강신주 현상’의 대중들의 텍스트는 지식인이에요. 대중들은 자신들의 텍스트에 지식인의 그것을 투영하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다시 말해 대중들은 자신들의 텍스트의 의미와 정당성 지식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얻어 가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정당성 자체를 지식인(의 존재, 텍스트, 강연, 상담)에게서 찾으려는 것은 아닐까요? 지식인 존재 자체가 텍스트(해석의 준거)로서의 권위를 갖는 거에요. 지식인(의 텍스트)이 권위가 나의 인생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한다. 지식인이 나의 삶을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 거에요. 동시에 지식인은 그런 꼰대 짓을 하고 싶어하죠. 상호적인 거에요. (대중적 삶의 의미와 정당성을 지식인이 승인해 주어야 하는 동시에 대중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욕망해야한다는 사실이다) 이게 한편으로는 이중적인 거에요. 지식인 앞에서는 꿈뻑 죽어요.

마르셀 : 그런데 제 경험에 따르면 앞에서는 꿈뻑 죽는데,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지식인들의 말은 별로 힘이 없는 거 같아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강신주에 현상에서 나타나는 강신주라는 텍스트를 소비함으로써 리스크를 없애주고 안정감을 주는 효과를 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대중은 지식인의 텍스트에 굴종함으로써 신학적인 용어로 선취라고 하는 것처럼 자신의 경험이라는 텍스트가 변하지 않은 현실을 망각하는 거에요. 스스로가 멘티가 되면서 결국 멘토를 욕망하는 거에요. 멘토가 제시하는 답이 최소한의 리스크를 보장할 것이라는 믿는 거죠. 마치 안전해진 것처럼. 실제로는 아니지만. 그런 심리적인 교환관계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4.

마르셀: 지금까지 강신주와 대중 사이의 문제, 그리고 강신주를 둘러싼 환경의 문제를 이야기했는데요. 이제 그럼, 강신주 강연이나 책 내용 자체의 문제는 없나요?

이구동성: 판단을 못하지. 전공도 아니고...

마르셀: 지금까지 나온 강신주에 대한 비판은 사실 내용에 대한 비판이죠. ‘힐링담론이다!’이런 주장들은 사실 강신주가 말한 내용에 대해 말한 것이죠. 우리는 지금까지 강신주를 둘러싼 컨텍스트에 대해서 말한거고. 자, 그럼 강신주가 말한 텍스트 자체는 어떻게 될까요?

미노미노 : 그걸 판단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마르셀 : 나는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약간의 면죄부를 주고 싶어요. 현재상황에서 주체의 결단과 실천의 측면에서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우리시대의 조건이 그래요. ‘폐허를 응시하는 주체의 용기’...;;;

미노: 주제를 세속화시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과연 강신주가 약을 팔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대중이 약을 원하는게 아닐까요? 약을 원하지 원재료를 원하는 것 같진 않은데.

미노미노 : 이럴 수도 있어요. 강신주가 실제로는 약을 파는 것이 아닌데, 대중들이 그것을 약으로 받아들이는 거.

마르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은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처방을 잘하고, 스스로 약을 만들 수 있는 약사가 되는게 가장 좋은 형태지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강신주 현상에서 납득이 안되는 게,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주체가 되라고 하잖아요. 그런 자아개념은 너무 근대적이지 않을까요? 사실은 자아라는 게 딱 떨어지게 독립적이고 개별적이기 힘든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강신주의 내용 자체가 맞고 틀리는 문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전공자 입장에서 보면 텍스트의 옳고 그름이 있죠. 설교도 비평 가능하고요. 그런데 대중들에게, 또 그 상황 속에 있는 화자와 청자들에게는 텍스트가 맞는가 틀리는가 하는 것은 이미 관심 밖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대중들이 텍스트를 요구할 때는 텍스트가 맞으면 받아들이고 틀리면 거부한다는 게 아니에요. 강신주가 전혀 철학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철학 전공자들은 비평할 수 있지만, 대중들이 입장에서는 그건 전공자들의 문제라는 것이죠. 저도 동양철학을 모르니까 그 영역에 대해서는 대중인데, 내용의 맞고 틀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거든요.

먹보에술꾼 : 그러면 대중이 스스로 텍스트를 확인하려 하는 공부의 과정이 없다는 말이 되는 거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그러니까 답을 주는 거죠. 강연형식에서 어떤 길로 들어서라고 할 수도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영화배우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정말 좋아서 하고는 싶지만 생계가 막막해 보인다”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고 물어보는 거에요.

먹보에술꾼: 그런 걸 물어보는 것도 갑갑한 일이고, 그에 대해 답해주는 것도 우스운 일이죠.

마르셀: 사회보장, 복지시스템이 잘 되어 있으면 그런 고민 안하겠죠. 어떻게든 먹고는 살 수 있을 테니까요.

먹보에술꾼: 아까 약의 비유가 나왔는데요. 국가와 제약사가 약을 잘 만들어서 싼 값에, 종류별로, 처방에 따라, 다양하게 공급을 할 수 있으면 괜찮을 텐데요. 문제는 약이 몇 종류 없어요. 몇십년 전에 개발된 아스피린 하나를 가지고 만병통치약처럼 쓰는 거에요. 다 이걸 먹어야하는 거죠.

마르셀: 국산으로 예를 들죠. 까스활명수. ㅋㅋ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그 뭐죠? 플라시보 효과. 대중들은 그걸 원하는 건 아닐까요?

먹보에술꾼: 대중들도 원하고, 지식인들이 그걸 이용해서 장사를 하기도 하고. 개중에는 나쁜 놈들도 있고. 지식인들의 내면은 우리가 알 수 없으니까 뭐라고 할 수 없고. 사회학적으로 보아도 내적 동기 라는게 순수와 오염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누어는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서로 다 자기기만 하고 사는 건데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한국사회 전반적인 교양의 인프라가 좀 더 잘 갖추어져 있으면 지적 사기꾼도 많이 나오지 않을 거고, 대중도 그런 류의 지식인들을 덜 우너하지 않을까요?

마르셀: 그래도 어떻게 보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이명박의 <신화는 없다>... 이런 걸 읽을 때보단 낫지요.

먹보에술꾼: 이제 그런 책은 안팔려요. 지금 우리사회가 그 수준(?)이 아니란건 알잖아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개신교는 아직도 자기계발서나 리더쉽 이런게 인기인 것 같던데.

마르셀 : 개신교는 확실히 자기계발하고 친화적이에요.

먹보에술꾼 : 이제 정치인들이 쓴 자기계발서 따위는 안팔린단 말이에요. 그 정도 수준은 된다는 거죠.

마르셀: 예전처럼 자기계발서라면 무조건 팔릴 때보단 나아졌어요.

미노: 요즘 자기계발서가 안팔리는 이유가 대중의 교양수준이 올라가서라기보다는 자기계발서가 현실에 맞지 않아서라고 생각해요.

먹보에술꾼: 그런 점이 있죠. 경험적으로 보자면, ‘봐도 소용이 없더라.’ 이런 의식이 팽배해요. 배신감도 느끼는 것도 같고. 사회에 대한 염세주의에 빠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것 같아요.

미노: 강신주를 긍정적으로 평가해볼 만한 요소가 있는가 하고 생각해봤을 때, 강신주가 대중교양을 향상시켰는가라는 질문에 일말이라도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제하고서라도 인정해줄만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도올 선생을 높게 평가하는데요. 물론, 부정적인 요소가 많지만, 그를 통해서 동양철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불러 일으켜졌다는 점 때문이에요. 그런 대중 저자들이 모든 현상이나, 학문마저도 단선적, 평면화시켰다는 문제도 없지 않지만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대중강연은 내용의 생략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만은 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먹보에술꾼: 강신주 개인만 놓고 보면 안된다고 봐요. 학계가 튼튼하고 전문가 지식인들이 많다면, 예를 들어 노장자 전문가와 철학자들이 많이 있어서 강신주도 그 안에서 토론하고 학회 활동도 하는 상황이라면 다를 거라고 봐요. 대중강연의 피드백 과정에서 이런 사람들이 필요해요. 자기 분야 학계와 단절이 되어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거든요. 전문지식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자, 전달자가 필요하죠. 그런데 우리사회는 전문지식 생산장과 대중 사이의 매개자만 많은 것 같아요. 반면에 전문적 지식의 생산자는 거의 없거나 전문지식과 대중적 전달자 사이에 링크가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노장사상학회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있다면 강신주가 그 곳에서 활동하고 그 구성원들과 교류하고 있는가가 중요해요. 왜냐하면 강신주가 무슨 헛소리를 해도 우리(소비대중)는 알 길이 없어요. 기존의 학계나 지식의 장에서 어느 정도 검증된 사람들이 대중인문학시장에 출현해줘야 한다고 봐요. 지식의 장과 관계 없는 대중지식인들은 대중의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판단할 수가 없어요. 견제도 안되고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징표가 박사학위 논문이잖아요.

먹보에술꾼 ; 그것은 좀 형식적인 것이고요. 학위 이후에도 꾸준히 지식의 장 안에 있어야 되는 거에요. 동료들 간의 영향관계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그런 관계는 어느 학문이나 잘 성립이 안되어 있기도 한데요.

먹보에술꾼 : 그런데 이거는 물론 제도권 학계, 대학에 자리를 못잡았으니까 그런 측면도 있어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강신주가 박사학위는 받았지만 대학에 자리는 못잡았으니까 지식 장의 담론에서는 자리를 못차지 하고. 교수들은 강신주에 대해 크게 신경 안쓰는 거죠. 자신들이 신경 쓸 ‘급’이 아니라고 보는 것 같아요.

마르셀: 유투뷰를 보니까요. 강신주는 박사학위 받은 노장자만 강의하는 게 아니라요. 오만 철학자들을 다 하던데요.

먹보에술꾼 : 그런 점에서 철학의 권위자가 된거에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가 이야기한 것처럼, 동양사상을 전공했지만 각종 철학을 다 다루고 있어요. 그가 강의하는 다른 학자를 전공한 사람들이 보면 조금 문제가 있다고도 하더라고요. 어느 정도 개론적인 수준에서 다루는 것이라면 괜찮겠지만요.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그건 강신주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틀린 소리는 하면 안 되죠. 제가 깜짝 놀란 게 원전을 읽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철학VS철학> 이라는 책에서 모든 철학자들의 사상을 요약해서 동서양 철학을 모두 섭렵하는 그런 책을 쓴 거에요. 그런 학자가 잘 없다는 점에서 그게 일종의 상징자본이 된 것이죠.

미노: 그래서, 어떤 인터뷰에서 강신주는 자기를 비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죠. 자기자기를 비판하려면 자기가 쓴 책 다 읽고 오라는 것이었어요.

5.

미노미노 : 어떤 면에서 보면 약간의 자기 프라이드가 있는 거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그게 어떻게 보면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박사학위자들의 마지막 자존심인 것 같기도 해요.

마르셀: 인간 강신주에 대해서는 조금 공감을 하게 되는 게, 그런 거 없으면 공부 그만두게 되어요.

먹보에술꾼: 이해해요. 그런 거라도 있어야 공부를 계속하죠.

마르셀: 그래야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어요. 글을 쓰려면 스스로 자기를 사랑하거나, 신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해주거나, 피카츄의 사랑을 받거나, 뭐든 간에 마음 안에 신을 모셔야 되요. 대타자가 있어야지 그런 대타자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학문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대타자로 삼을만한 대상이 있어야돼요. 피카츄든, 조상님이든, 산신령이든, 누구든 간에.

먹보에술꾼: 제 답은 그 대타자가 학문장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근데 그런 장이 없는 거에요.

마르셀: 그거 쉽지 않아요. 학문장 안에서 인정투쟁을 하고 인정을 받으려면 교수가 되어야 해요. 그런데, 좋은 지식을 생산하는 것보다 좋은 대학 교수 되는 것이 훨씬 더 인정욕망을 채워주는 측면이 있잖아요. 좋은 대학 교수라면, 외국의 좋은 학교 나왔다고 하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인정해주는 측면이 있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무슨 사건 터지면 어디로 가요? 서울대, 연고대 교수들 찾아가서 인터뷰하잖아요.

마르셀 : 이런 식으로 학문장이 구성되어 있으니 공정하게 실력을 인정해주는 시스템은 아니잖아요. 그런 점에서 인정받으려면 학문장 밖으로 나오는 게 돈문제나 인정 문제에서 훨씬 더 유리할 수 있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그런 의미에서 강신주의 대타자는 자기 자신인거 같아요.

마르셀 : ‘똑똑한 나’, ‘사랑스런 나’, ‘성공한 나’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책을 계속 써내더라고요.

먹보에술꾼 : 마구 써도 거리낌이 없는 것 같죠.

카라멜마끼아또벤띠 : 학자들은 강신주를 이제 학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고. 그래서 스스로가 대타자가 되버린 거죠.

마르셀: 한가지 떠오르는 예가 있어요. 박노자가 굉장히 많은 교양서를 쓰긴 했지만 전공서도 괜찮은 것을 쓰기도 했어요. 근데 그 때 한국 역사학계는 그 사람의 작업에 대해서 토론을 안 해줬어요. <우승열패의 신화> 같은 책은 한말 사회진화론에 대해서 굉장히 잘 쓴 연구서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사학계에 박노자의 이 책에 대해서 서평을 남기거나 토론을 한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그가 오슬로 대학 한국학과 교수가 되는 그 순간부터 한국학계는 그를 기 시작했어요. 각주에 등장하기 시작하고, 그가 책을 낼 때마다 서평과 토론이 등장하고. 만약 박노자가 국내의 그리 이름 없는 대학의 교양학부 교수가 되었다면 그렇게 까지 바뀌지는 않았을텐데, 학교가 또 노르웨이 수도에 있는 국립오슬로대학이잖아요. 그걸로 상징자본을 얻어버리니까 컨퍼런스를 할 때마다 박노자를 불러요. 옛날에 <당신들의 대한민국> 쓰고 이름을 얻었을 때에는 학계에서 박노자 불렀을까요? 오슬로대학 교수가 되고 나니까 이곳저곳에서 부르는게 아닐까 싶어요.

먹보에술꾼 : 빗나간 얘기지만, 우리도 학위를 받긴 받을 거잖아요? 그 다음에 우리는 인용 못 되는 학자가 되는 건가요?

마르셀: 또 한 케이스가 김덕영이에요. 독일에서 하빌리타치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교수가 못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독일에서 박사학위만 받아도 한국에서 교수가 되었는데 말이죠. 하빌리타치온 받았는데도 교수가 못 돼서 독일로 돌아갔죠.

먹보에술꾼: 거기서 강사가 되었죠.

마르셀: 물론 거기서도 완전히 자리를 잡은 건 아니에요. 물론, 독일은 강사만 해도 먹고 사는데 문제는 없어요. 게다가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쓰면 국가에서 생계를 책임져주죠. 국가가 하빌리타치온 정원을 관리하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인정을 못 받고 독일로 돌아간 다음에, 한국학계에 보란 듯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니즘과 자본주의 정신>을 번역했어요.

먹보에술꾼: 짐멜의 <돈의 철학> 도 번역하고, 번역서가 우르르 나왔죠.

마르셀: 번역서 뒤에는 600페이지짜리 해제를 쓰고.

미노미노: 하빌리타치온이 국가박사 같은 건가요?

마르셀 : 박사학위 논문 쓰고도 7~8년 더 해야 되요.

6.

마르셀: 그럼 우리도 강신주 처럼 자신만의 대타자를 모셔야 할텐데요.

먹보에술꾼: 나는 그게 너무 싫어요.

마르셀: 먹보에술꾼의 대타자는 누구? 하나님 아니면 피카추? 와이프?

먹보에술꾼: 이미 와이프는 모셨죠.

마르셀: 게다가 와이프가 생계도 책임져주잖아요.

먹보에술꾼: 와이프도 비정규직이에요.

마르셀: 대신 자녀가 없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게 복이에요. 나같은 비혼에게는 결혼을 안 하는게 복이고요. 물론 외롭긴 하죠. 아무도 날 인정 안해주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하고, 결혼을 하면 와이프는 인정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고.

먹보에술꾼: 마누라도 마누라 나름이죠. 인정 안하고 바가지 긁으면 어떡하려고요?

마르셀: 그럼 우리는 뭘 가지고 남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공간에서 나만의 길을 갈 건가..

미노미노: 이 대화의 가장 솔직한 결론은 이것인 것 같아요. 그럼 나는?

먹보에술꾼 : 나는 강신주처럼 그런 마음을 안 품을 자신이 없어요. 근데 싫어요. 싫은데 자신이 없어요.

카라멜: 사실 정규직 학자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진입하지 못했을 때 선택 가능한 것은 대중시장이에요.

먹보에술꾼: 근데 시장도 만만치 않죠.

카라멜: 만약 사회학자가 베버라는 유명한 고전이론가를 설명한다고 하면, 강의준비만 30~60시간 정도 투자해서 10~20분 안에 설명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저것 생략하고 쳐내고 설명을 하게 되죠.

미노미노: 게다가 대중은 설명을 해석하는 자기만의 틀이 있고요.

먹보에술꾼: 자기 경험이라는 텍스트가 있죠.

미노미노 : 그 어떤한 말을 해도 다 걸러지고 자기만의 틀에 맞는 이야기만 남는 거죠.

마르셀: 그러면 들어봅시다. 무얼 모시고 살 겁니까? 주님?

먹보에술꾼: 카라멜은 주님이 있는 것 같아요.

미노미노: 저는 뭐... 박사도 아니고... 답이 없어요...

먹보에술꾼: 나는 와이프!

마르셀: 나는 작년에 돈 번걸로 독일 프랑스를 다녀온 뒤에 공부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학회에서 발표하고 여행 다니는 걸로 내 인생의 낙이 될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카드비 막느라 너무 힘들었지만.

미노미노: 그러려면 학회에서 불러줘야 하지 않나요?

마르셀: call for paper라고. 스스로 신청해서 갈 수도 있어요. 어차피 하고 싶은 것 하나를 위해서 하기 싫은 열 개를 해야 하는 게 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니까요.

먹보에술꾼: 정현경처럼 call for paper에서 대박날 수도 있죠. 정현경은 굉장히 도발적인 주장을 했거든요.

마르셀: 유럽가서 국제학회에 참가해보니, 내용도 중요하지만 잘생긴 사람이 주목을 받는 것 같던데요? ㅎㅎ

먹보에술꾼: 그럼 못생기고 이런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미노미노: 하~ 답이 없네요.

카라멜: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책을 쓸 것인가, 대중적으로 많이 팔리는 책을 쓸 것인가... 유혹.. 아니 일종의 선택이겠죠.

먹보에술꾼: 엄기호 선생 같은 분은 페이스북 보면 그런 고민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분은 대중적으로 가기로 한 것 같아요. 물론 그 분이야 글이 좋으니까, 아마 본인의 선택일거에요. 자기 필드를 정한 거죠.

마르셀: 그렇게 치면 강신주는 자기 필드에서 나름대로 충실한 거 아닐까요?

먹보에술꾼: 그렇죠.

마르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죠?

카라멜: 교수에 임용되는 게 제일 좋긴 하죠.

마르셀: 사회적으로 많은 존중을 받는 편이죠.

먹보에술꾼: 돈과 관계없이 상징자본이 있어요. 저는 카이로스를 잘 만들어서 대중교육기관으로 만들 생각도 있어요. 그리고 임용을 기대하다가 안되어서 심각하게 장사를 생각하시는 분도 봤어요.

마르셀: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 유학을 가서, 정통 이탈리안 파스타 만드는 법을 배워서 파스타 집을 차리는 건 어떨까요?

미노미노: 자영업자 폐업률도 엄청나다던데...

마르셀: 그럼 복사집은 어떨까요? 대학원 생활 십년에 복사라면 자신이 생겼는데.

먹보에술꾼: 복사집 힘들지 않을까?

마르셀: 움, 초기 비용이 들겠지요. 그러니까 몸으로 뛰는 방식으로, 복사만 아니라 논문 교정도 해주는 박사복사집 이런 거.

먹보에술꾼: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정리합시다.

자기계발, 힐링, 자아성형산업 등 지금까지 나온 강신주에 대한 비판은 내용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강신주가 말한 내용보다는 그를 둘러싼 컨텍스트와 학문적 시사점에 대해서 말한다......는건 핑계고 사실은 우리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는지 모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