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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마르셀

우리는 누구를 ‘내 몸처럼’ 여기는가? 스포츠내셔널리즘과 동포애


마르셀(CAIROS)


#1 선수 입장

스포츠를 전공으로 삼고, 스포츠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지도 몇 년이 흘렀다. 처음 마음먹었을 때만 하더라도, 사회과학적 혹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스포츠를 해석하는 일이 보기 드물어 나름 이게 블루오션이 될 거라는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한윤형처럼 머리 좋고 글 잘 쓰는 사람들까지 스포츠 평론에 나서는 요즈음이다 보니 스포츠에 대해 내가 무언가를 덧붙인다는 게 주저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를 해보자면 -


#2 애국가 제창

독일출신이지만 독일에서는 별로 인정을 못 받고 2차 대전 통에 영국으로 건너가서 곰 인형에 눈 붙이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다가 말년에 대박을 터뜨려 유명해진 학자 엘리아스[각주:1]그렇게 유명해지는 바람에 ‘아도르노 상’을 수상했는데 알고 보니 아도르노보다 선배였던 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이런 말을 했다. ‘스포츠에 대한 지식은 사회에 대한 지식이다.’

언뜻 생각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말이다. 알다시피 한국사회의 엘리트스포츠 구조 속에서 스포츠맨들의 삶은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과 다른 부분이 많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대목은 어떨까? 알다시피 빅토르 안현수는 2006년 토리노올림픽 3관왕에 오른 뒤 2008년부터 부상과 파벌문제, 짬짜미 논란, 소속 파벌과의 갈등, 소속팀 해체 등 일련의 사건 속에서 러시아로 귀화했고 2014년 소치에서 다시 3관왕에 올랐다.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으나 사후에 그가 성공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한 네티즌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와 같이 강도 높은 훈련 위주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컨디션에 따라 훈련하고, 금메달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의 성적 압박에서 벗어나 메달 하나에도 기뻐해주는 러시아라는 나라의 문화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제안했다. “한국 스포츠도 성적지상주의와 고강도 훈련위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다른 네티즌은 이렇게 답했다. “그렇게 되려면 … 한국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해요.” 

예전 같았으면 ‘조국의 배신자’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를 빅토르 안현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이라는 ‘안현수 현상’ 속에서 한윤형은 불공정한 우리 사회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이 빅토르 안현수에 대한 지지를 통해 투사되어 나타난 것이라 말했다[각주:2]사실 그렇다. 그가 겪었던 과도한 경쟁, 성적지상주의, 파벌문제, 짬짜미, 팀 해체 …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부정의와 불안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느끼고 있는 문제가 아니던가? 스포츠는 생각보다 우리 사회를 철저히 닮아 있다. 


#3 전반전

#2 [선수입장] 의 이야기는 그간 언론을 통해 여러 번 회자된 것이기에 딱히 새롭다 할 수 없다. 그래서 이야기 되지 않은 한 가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동계 올림픽에서 드러난 우리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이다. 

내셔널리즘에 대한 설명은 학자마다 매우 다르다. 그러나 주요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깥 경계에 대한 인식, 경계 내 사람들을 묶는 정체성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동질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1국가=1사회의 대당 속에서 형성되는 유기체론, 즉 한 국가 내에 한 사회를 이뤄 살아가는 사람들을 ‘한 몸’으로 여기는 감정 등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국이라는 영토 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누군가를 보면서 걱정하고, ‘모범적’ 행위라 할 만한 것을 한 어떤 이들에 대하여는 자부심을 느낀다. 그와 나의 동질성을 느끼고, 그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공간을 하나의 유기체, 즉 하나의 ‘몸’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다소 비약하자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구성원 누군가를 ‘내 몸’처럼 생각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호날두가 아니라 박지성을 자랑스러워한다. 박지성의 두 다리를 한국을 대표하는 다리라고 생각한다. 내 몸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호날두. 키 크지, 잘생겼지, 클럽에서 여자들하고도 잘 놀지, 축구 실력은 더할 나위 없지, 심지어 기부도 잘하고 봉사활동도 많이 한다. 그래서 한국 네티즌들은 말한다. ‘다시 태어나면 호날두처럼(다·태·호).’ 우리가 박지성에게 느끼는 그런 동질감을 호날두에게서 느낀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하겠는가? 박지성이야 그럴 만하다 치자. 매 경기 최소 30분 이상 출전하면서 최소 30점의 득점기록을 올리는, 경기에서의 카리스마는 더 대단하고 세계에서 가장 돈도 잘 벌던 마이클 조던에게는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던 우리가 아래와 같은 매 경기 100점이 나는 농구 경기에서 1분 45초간 도움 2개를 올린 하승진의 수북한 겨털을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온 신문을 돈 내고 사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같은 핏줄’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신분의 고하가 엄격하던 조선시대에 노비가 양반에게 ‘같은 핏줄’이라고 했다간 매질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신분이 서로 다른 이유는 ‘핏줄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단일 혈통의 신화는 사실 근대 국민국가라는 정치경제체제의 산물이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도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하듯 ‘상상의 공동체’이고, 에릭 홉스봄이 말하듯 ‘만들어진 전통’이다. 그래서 각 국가마다 ‘네이션’을 형성하는 보편성이 존재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각 국가마다의 특성이 드러난다. 한국은 같은 핏줄이 중요하겠지만, 독일은 ‘독일어’가 중요했고, 프랑스는 ‘혁명’이 중요했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역사적 조건 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스포츠 스타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발생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시공간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현상이고 한국적인 그 무엇이 존재하는, 또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현상이다. 


#4. 후반전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어떤 한국인을 내 몸처럼 여기는가? 우리가 ‘같은 혈통’으로 믿는 한국인에 대한 믿음이 인위적이고 역사적이기에 ‘같은 혈통’이라고 해서 모두를 내 몸처럼 느끼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자명하다. 

스포츠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확실히 우리가 동질감을 느끼는 대상도 생각보다 협소하다. 김연아에 대해서, 우리는 동질감을 느꼈고 또 분노를 느꼈다. 동계 스포츠 선수로 성장하기 힘든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 끝에 세계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김연아. 피겨 전용 연습장 하나 없는 현실과 무능하기만 한 빙상협회라는 ‘장애물’을 이겨낸 그에게 우리는 한없는 찬사를 보낸 한편, 그녀가 논란 가득한 판정으로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받았을 때 한없는 분노를 느낀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나라가 약소국이라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먹이면서 말이다[각주:3]빅토르 안현수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고 또 분노를 느꼈다.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했고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지속해서 반복되는 각종 사건들,  파벌, 짬짜미, 권력과의 갈등, 소속팀 해체, 국가대표 탈락이라는 부정의와 불안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이기에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낸 ‘협회’라는 권력에 분노하는 한편 그의 성공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각주:4].

 하지만, 김연아가 아니라 박해진이 심판의 애매한 판정으로 14위 자리를 놓치고 15위가 되었다 하여도 우리가 그 심판 판정에 그토록 분노했을까? 안현수가 이번 올림픽 3관왕이 아니라 30위 정도를 하는 선수였다면 우리가 그에 대해 그토록 강렬한 응원을 보냈을까?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오심으로 동메달을 놓친 신아람에 대해, 그리고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오심으로 금메달을 놓친 김연아에 대해, 우리가 가졌던 분노의 편차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안현수와 김연아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현실로부터 비롯한 그것이라 평론가들이 말했다. 그렇다, 우리가 예전보다 유독 이 둘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가졌던 것은 우리 현실이 불공정하고, 우리들이 그러한 현실 속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피해자로 살고 있다는 감정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러한 피해의 당사자였던 양자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업적을 이룬 양자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의 한편에는 이 사회의 부정의와 불공정의 피해를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업장에서 존재하는 각종 유해물질에 별다른 대책도 없이 노출되어 희귀질병에 걸렸음에도 산업재해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삼성전자의 노동자들은 어떠한가? 스스로가 수년간 회사 경영을 정상화 할 것을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 측의 방만한 경영의 끝에 대량해고를 위해 조작된 회계자료를 근거로 다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실직당한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은? 이들은 심지어 파업을 이유로 총 47억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신의 논과 밭 위로 지나가는 고압 전선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흙바닥에 형광등을 꽂으면 그대로 불이 들어오는 그런 공간을 거부할 권리를 국가에 의해 차단당한, 인간의 기본권인 건강권과 재산권마저 침해당한 밀양의 노인들은? 

이들을 향한 응원과 이들을 둘러싼 권력의 횡포에 분노하는 사람들 물론 있다. 그러나, 김연아에 대한 그것, 빅토르 안현수에 대한 그것과 비교했을 때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감정의 크기는 필자의 기분 탓이기만 한 것일까? 그 크기야 함부로 비교할 수 있겠냐만, 금메달이 아니라 은메달을 받은 것과 말 그대로 생명권과 재산권을 잃은 것 감히 비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관계를 형성한 분노의 크기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좋을까? ‘국민 영웅’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동포애의 힘과 ‘힘없는 국민’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동포애의 편차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한 대답을 위해 한국 역사 속 내셔널리즘 계보의 단편을 통해 추적해보자.


#5. 연장전 - 전력분석

앙드레 슈미트의 [제국, 그 사이의 한국]이 말하듯, 한국의 내셔널리즘은 19세기 말 형성되었다. ‘서세동점’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약자가 되어버린 현실 인식 속에서 타자를 바라보게 되었고 자기를 바라보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이제 조선은 이전에 가졌던 ‘소중화’라는 자아상에서 ‘미개’혹은 ‘반개화’라는 자아상을 갖기 시작했다. 이 때, ‘문명=힘’으로서의 타자인 서양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동일시의 감정도 형성되었다. 내셔널리즘이 그저 ‘같은 민족’을 ‘내 몸’처럼 여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힘’에 대한 경외라는 감정과 결부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경로 덕분이다.

이후 한국의 내셔널리즘은 식민지를 경유했다. 민족이라는 감정은 있으되 민족이라는 감정을 제도적으로 구현할 수 없는 상황, 따라서 그 감정을 스스로 반성할 기회마저 변변치 않았던 상황 속에서 한국의 내셔널리즘은 그렇게 만들어져 갔다. 식민지 내셔널리즘을 일반화하기는 어려우나, 그 중 한 가지 특징은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에 비해 강자에 대한 연대의식의 크기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는 헌법을 가지지 못한다. 권력이 인민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모든 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하지도 않다. 1789년의 인권선언은 사회적 차별은 예외적으로 적용되어야 했지만, 식민지에서 차별은 예외가 아닌 ‘정상’이고 ‘일상’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과 불평등과 차별이라는 현실 사이의 괴리는 체험되지 않는다. 스스로 가진 이상을 선언할 수 없을 때, 식민지인은 불평등과 차별이라는 현실을 자연화하여 받아들인다.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인식과 감정이 압도적 무게를 차지하게 되고, 피식민 네이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된 것이 역사가 가리키는 현실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 속에 모두가 휩쓸려 들어간 것도 아니고, 식민지의 지식인들 사이에 차별받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더욱 차별받는 조선인을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이들에 대한 연대를 요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식민지 내셔널리즘이 약자에 대한 연대를 개념화 할 수 있는 감수성을 버리고 강자에 대한 연대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역사적 계기가 존재했고, 이것이 우리의 ‘민족적 연대’의 상상력을 절반의 폐색상태를 만드는 계기를 이루었다. 그것은 1922년 대한제국의 고위관료 운양 김윤식이 죽음을 둘러싸고 사회장을 추진했던 이들과 반대했던 이들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한다[각주:5]

운양이 죽음 이후 조선의 대표 지식인들, 특히 부르주아적 지식인이라 불리던 이들은 별 문제의식 없이 김윤식의 사회장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때 성장의 가도에 있던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여 이를 반대하기 시작한다.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김윤식에게 ‘사회장’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때 김윤식 사회장을 추진하다가 사회주의자들의 반대라는 뜻밖의 상황에 부딪힌 지식인들은, 이후 민족 내부의 비참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사회’라는 용어에, ‘사회주의자’라는 세력에 맡겨버렸다. 대신 이들은 ‘민족’이라는 용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민족내부의 비참한 이들에 대한 돌봄이 아닌 민족의 강하고 용맹한 이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한 이론이 되었다[각주:6]

 이러한 역사적 속에서 사회주의자 아니었던 식민지 지식인들이 산출한 내셔널리즘은 민족이 ‘가난한 이들에게 구제라는 신성한 부채를 진다[각주:7].’ 고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식민자를 넘어서는 우수한 능력을 갖춘 이가 되어 민족을 대표하라 말하는 강자에의 배려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종목을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을 가리키며 누군가를 향해 “이래도 우리가 약한 민족이냐”고 힘주어 반문하던 심훈의 책 [상록수]에서 우리는 ‘배워서 강해지자’는 주문을 본다. 그러나 책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조선인들을 바라보며 ‘빈곤은 인권 침해[각주:8]’ 라 선언하지 않는 것은, 한편으로는 식민지라는 조건에 구속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떼어내 버렸던, 식민지 내셔널리즘이 상정한 ‘내 몸’의 범주 설정의 문제와 분리시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민족을 말하는 자들이 보게 되는 것, 느끼게 되는 것은 민족의 강한 자들, 식민자들과 자웅을 겨룰만한 이들이 겪는 불평등과 차별의 실체였다. 일본인 학생들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더라도 입학하기 어려운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시를 통해, 국방경기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일본인 학교를 우승시키는 일본군 장교단의 판정에 대한 분노를 통해[각주:9], 그리고 압도적 실력으로 메이지신궁 체육대회에서 우승했음에도 다수의 조선인 선수가 일본 국가대표를 구성해서는 안 된다는 ‘협회’ 권력 탓에 홀로 일본인 선수들 사이에서 볼을 차던 조선인 축구선수 김용식의 사연을 통해, 불공정과 차별이 체험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흔히 알려졌던 식민지 역사 중 차별과 불공정이 식민지 엘리트들이 체험한 그것이 대표하는 일은 결코 우연의 산물만은 아니다.

강한 조선인을 그토록 열망하던 이광수가 천황제 파시즘 국면 하에서 조선인 스스로가 일본인이 되어 약소민족의 처지를 벗어나자 하며 ‘친일 내셔널리스트’가 된 것도[각주:10] 조선 민족의 강함과 우수성을 세계에 드러내는 것을 그토록 열망하던 여운형이 조선인 스포츠 선수들을 일본 국가대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일도 그러하다. 강한 조선인을 ‘내 몸’으로 여기되, 약한 조선인에 대해서는 부지불식간에 침묵해버린 식민지 내셔널리즘이 다다른 막다른 길이 바로 이러했던 것이다.

아니,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가난한 이들을 일컬어 ‘약자’라 부르게 된 개념사로부터 우리는 강함에 대한 정열을 중심으로 구성된 내셔널리즘이 다다를 길이 어떤 것일지 예감하게 된다. 가난한 이들을 ‘불행한 이(Les misérable)’로 부르며, 누군가에게 닥칠 일을 대신 짊어진 사람들이기에 사회가 책임져야만 할 사람들로 개념화 한 서유럽의 한 공화국과 비교했을 때 이러한 예감은 슬픈 예상으로 바뀌는 게 아닐까.

물론, 우리가 말하는 ‘동포’라는 이름이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의 한 축이 텅빈 채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 온 것만은 아니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는 민주공화국을 맞았다. 그에 맞춰, 조국의 시민이라면 모두가 기본적 생활의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사회정의와 균형이 필요하다 말했던 헌법을 가진 적 있다. 이를 위해서는 땅은 농민에게, 중요한 기업은 국가가, 기업의 이익은 노동자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말을 헌법으로 못박았던 역사를 잠시나마 가졌다[각주:11].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은 강력한 냉전의 바람은 조국의 불행한 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정부가 스스로 방기하게 만들었다[각주:12]이후, 우리는 ‘빈곤과 인민의 정부는 양립할 수 없다[각주:13]’ 는 선언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 안의 ‘불행한 자’들을 향해, “저들은 우리의 신체이다. 저들의 불행은 우리가 져야 할 채무”라고 말하는 정부를 가져본 적 없다. 그리고 그러한 정부를 우리 손으로 완전히 뒤집지 못하고 그들과 일정한 타협 속에 ― 보수적 민주화라 불리는 ―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고통 받고 있는 동료 인간들을 목격하는 것에 대한 내면적 반감[각주:14]’ 을 우리 스스로가 상실해가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6. 승부차기

이상의 설명을 통해 이 글은 ‘국민 영웅’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동포애의 힘과 ‘힘없는 국민’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동포애의 편차의 한 원인을 역사적으로, 그 중에서도 식민지적, 냉전적 기원을 갖고 형성된 한국 내셔널리즘 고유의 성격으로부터 해명하고자 하였다. 이 역사적 계보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동계 올림픽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내셔널리즘이 오래된 역사를 가진 ‘자연적인 것’이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반대로, 이 계보가 말하는 것은 ‘강한 자’를 내 몸처럼 염려하는 무의식적 경향은 식민지적 상황, 사상대립, 전쟁과 그리고 냉전 속에서 만들어져 온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내셔널리즘은 ‘불행한 자’라는 표현이 더 나을,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약자에 대한 연대 정신이 상당히 누락된 내셔널리즘이라는 것. 그리고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포츠에 대한 지식이 사회에 대한 지식이라면, 스포츠를 대함에 있어 우리가 드러내는 태도의 변화 또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다행인 것은 예전처럼 주모, 여기 국뽕 한사발 주시오. 캬~ 좋다. 하면서[각주:15]  태극기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뒤덥혀 있던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들과 결부되고 개별 구체적인 삶과 결부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너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너일 뿐’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각주:16] 이로써 우리 스스로가 가진 무의식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여겨진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발목 잡는 협회’를 대신하여 ‘밀어주는 협회’가 등장하고, 우리 선수들이 억울한 일 없이 금메달을 따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우리가 가져왔던 강자 편향적 동포애를 계속 유지해 갈 것인가? 아니면 여느 스포츠 스타들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이 사회의 부정의와 불안을 몸소 겪으며 살아가는 ‘불행한 이들’에게로 우리의 동포애의 방향을 전화할 수 있을 것인가? 네이션(민족)을 가리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 공동의 삶을 계속하기를 결정하는 매일 매일의 국민투표라 칭했던 에르네스트 르낭의 말을 기억해보자[각주:17]우리의 동포애는 누구를 위한 투표가 될 것인가?


인천공항에 입국한 외국인들이 사랑한다 말해야 하는 것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1. 심리치료사, 시간강사, 수영강사 등을 하면서 이어나간 고단한 생애를 곰 인형에 눈 붙였다고 비유적 표현을 한 것이다. (2014년 3월 15일 본 논문에 대한 필진 박치현 님의 댓글) [본문으로]
  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162139515&code=980901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703 [본문으로]
  3. 김연아를 과도하게 영웅시하고 그 주변 환경을 과도하게 비하하는 현상은 사실 병리적이다. 피겨 전용 연습장 없는 게 한국이지만, 그녀를 지난 5년간 꾸준히 세계 스포츠스타 수입 10위 이내, 동계 스포츠 선수 수입 압도적 1위 자리에 두고 매해 (상금 제외) 백 수십억씩 가져다 준 것도 한국이다.(그간 많이 비교한 아사다 마오 보다 연 평균 3배 이상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아를 보며 ‘약소’라는 형용사를 계속 붙이는 것은 대중들의 특정한 소망이 과잉 투사된 것은 아닐까? [본문으로]
  4. 그가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에 처음 대표선수로 선발될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국가대표 감독 전명규의 ‘라인’에 속해 있었던 관계로 받았던 특혜가 있었음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도 한때는 파벌의 수혜자였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2007년 말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던 전명규의 바람과 달리 성남시청에 입단하면서 그와 틀어지게 되었고, 이후 그는 어느 파벌에도 끼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도 사실이다. [본문으로]
  5. 이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김현주, 2013, [사회의 발견 - 식민지기 사회에 대한 이론과 상상 그리고 실천 1910~1925], 소명출판, 중 3부 1장 참조. [본문으로]
  6. 물론 민족 개념이 1970년대 이후 ‘사회’가 가졌던 의미의 일부를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김동춘, 2002, “사회로서의 민족, 사회이념으로서의 민족주의”, [공간과 사회], vol 28. 참조. [본문으로]
  7. 프랑스 1793년 헌법 제 21조. [본문으로]
  8. 혁명이후 1790년 설치된 구걸근절위원회에서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가 했던 발언이다. [본문으로]
  9. 1940년 전시동원체제의 일환으로 개최된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부산2상(부산상고)과 동래중(동래고) 등 조선학교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심판의 ‘장난질’로 일본인 학교에게 우승기를 수여하자 분노한 학생들이 주최 장교인 노다이와 경남지사, 각 학교의 일본인 교사, 일본인 경찰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한편, 시내를 행진하며 <황성옛터>와 <아리랑>을 부르고 “조선독립만세”, “일본인 죽여라” 등을 외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부산학생항일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부르지만, 전시체제에의 동원을 위한 대회에서의 패배에 대한 분노를 ‘항일’로 볼 것인가를 두고는 논란이 존재한다. http://www.busan.go.kr/04ocean/0403person/02_05.jsp [본문으로]
  10. 조관자,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 [본문으로]
  11. 관련된 제헌헌법 조항은 다음과 같다. 사기업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18조)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데 각인(各人)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84조). 그리고 광물 기타 중요한 자원은 국유로 하고(85조),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고(86조), 중요한 운수, 통신, 등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고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 하에 두며(87조),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에 의하여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또는 그 경영을 법률로써 통제, 관리할 수 있다(제88조). [본문으로]
  12. 제헌헌법의 사회주의적 성격과 1954년 개정을 통한 자유민주주의로의 방향전환에 대해서는 박명림, 2008, “헌법, 국가의제, 그리고 대통령 리더십 : ‘건국 헌법'과 ‘전후 헌법'의 경제조항 비교를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집], vol. 48, no. 1. 참조. [본문으로]
  13. 1794년 국민공회에서 바레르Bertrand Barére de Vieuzac)가 했던 연설이다. [본문으로]
  14.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의 한 구절이다. 직접 인용은 한나 아렌트, 홍원표 옮김, 2004, [혁명론], 한길사. 2장 '사회의 문제' [본문으로]
  15. 국가주의+히로뽕을 ‘국뽕’이라 부른다. [본문으로]
  16.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너는 대한민국이다” 광고와 “당신은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당신은 김연아입니다.” 비디오 클립은 http://blog.naver.com/yrlove0801/130185869192 참조 [본문으로]
  17. 에르네스트 르낭, 신행선 옮김, 2002, [민족이란 무엇인가], 책세상.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