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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의교회 건축 논쟁과 성전의 의미


종교적 진정성에 대한 하나의 탐구


*제 5회 카이로스 콜로키아 발표문_ 2010.6.12 연구공간 공명


먹보에_술꾼(연구집단 카이로스 대표)

 

일반적인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성전”(사랑의교회 어느 청년)

 

  우리는 이 진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청년처럼 성전을 강력하게 옹호할 것인가, 아니면 건축을 비판하는 소위 개혁적개신교인들처럼 성전을 부정하고 건물을 주장할 것인가? 혹은 건물성전의 화해(?)를 모색해야 하는 것일까?

 

  본 연구의 관심사는 교회, 건물, 교회건축, 사랑의교회, 성전 등의 의미가 사랑의교회 구성원들 자신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공유되는지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고직한 선교사의 발화는 한국교회 신앙문화의 전형으로서 이 시작점이 되기에 유용(?)한 것 같다. 고 선교사는 사랑의교회를 공식적으로 대변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건축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교인의 입장에서” “부르심도 있고해서” “기획홍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진술이나 교신도라는 용어까지 창조해가며 교역자와 평신도의 교량 역할을 해보자고 생각했다는 수행모순적 발언들, 그리고 건축은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라는 뉘앙스는 그가 처한 한국교회의 종교문화적 제약 속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1. 성전 담론의 대비


  <복음과 상황> 5월호의 특집좌담: 사랑의교회 건축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펴보자. 우선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고 선교사는 건축의 정당화할 때 일단은 교회 외적 요소에 많이 의존한다. 중소교회 청년대학부 활성화(Young2080), 국제제자훈련원, 옥한흠, 장애인사역연구소, 예수원, 대천덕 신부님 아들 벤 토리 신부님, 위키(WICI, 크리스천 지도자 싱크탱크), 복음주의교회재정책임위원회(미국의 회계 감사 기관), 정감운동 등이 사랑의교회의 진정성을 보증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화해 준다. 그 다음에 적극적인 담론 차원에서의 공세를 펼친다.

 

1. 고직한 선교사의 담론 구조

사랑의교회(신앙)

건축반대론자(비신앙, 세속)

현실(주의), 차선책(대안이 없기 때문) (3)

(성경적)이상주의, 극단적인 선악문제로 봄,

현실성 없음, 지나친 논리 비약, 지나침, 극단적인 비판, 많은 분들이 우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3),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제한,

하나님의 능력의 여지 제한, 고정관념

엄청나게 토론, 고민, 신뢰

무례함, 모독, 매도함, 싸잡아서 판단, 단선적

하나님나라의 원리와 원칙

자신들의 관점, 자기 관점,

바깥 세상, 세상 법정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은혜

자기 의, 정죄함, 경영논리

협업과 분업, 창의적, 창의력

창조의 다양성 부인, 창조적 상상력 없음,

획일화된 틀 속에서 자의적으로 해석

(괄호 안의 숫자는 어휘가 등장하는 빈도)

 

대비를 위해 백 교수의 담론 구조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2. 백종국 교수의 담론 구조

자신의 입장

사랑의교회

복음주의적 원칙(정체성/태도) (6)

상식

온건(2)

협업과 분업(복음주의적 분업)

전도의 문, 도시 전도의 효율성

공공성

최악의 선택

부정직

(건축에)동원

몸집, 규모, 성장논리, 초대형, 비만, 대형마트, 멸종한 공룡, 생명력 쇠퇴,

2100억짜리, 너무 많은 돈, 엄청난 돈, 큰 돈

싹쓸이

비민주성

불법성

논점 이전

집단 이기주의, 개교회 이기주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음

위기

변질


  고 선교사는 자신의 입장, 이상주의현실주의통합”(2회 등장)을 강조하면서 균형을 표방하는 전형적인 복음주의적 수사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고 선교사는 백 교수의 복음주의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이상주의라고 사실상 평가절하한다. 고 선교사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신의 섭리라는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신앙논리 하에서 설득력을 갖고자 한다. 반면 상대방은 하나님 대신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섭리) 대 인간(의 생각)을 대립시키는 방식은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는 상당히 전형적인 구도이다.

 

사랑의교회는 수만 명의 성도들이 함께하기에 건축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왜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건축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오정현 목사, “건축에 대한 변일부 발췌, 밑줄은 필자 강조).

 

김 목사의 설교가 불만인 교인들도 있었다. 한 교인은 "김 교수님의 강의(?) 내용은 소위 진보주의자들이 교회의 영향력을 은밀히 쇠퇴시키고자 했던 전략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지식이 최고라는 잘못된 확신으로 꽉 찬 분이 대예배 강단에 서서 편향된 메시지를 계속 전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는 글을 남겼고, 어떤 교인은 "예배가 예배다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았기에 이렇듯 조금 시끄러웠나 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봅시다"는 글을 남겼다(뉴스앤조이 20100416() 13:53:12 유연석 기자).

 

고 선교사는 상대방을 하나님 대 인간이라는 제로섬 게임의 이분법적 프레임에 집어넣은 다음, 자신과 사랑의교회 측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입장에 놓음으로써 그 대비를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구체적으로는 민주성이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체들의 연합체”, “도시에 대한 책임”, “도시변혁의 책임”, “도시에 남는 교회”, “오염과 소음(이 있더라도 감수)”, “엄청난 과업”, “부담”, “결단”, “전도 열정”, “목숨을 걸면서”, “자기혁신”, “자기부인”, “청지기”, “공공성”, “돌을 맞는 것조차 사랑으로 감내, 고 선교사는 이러한 어휘들을 통해 사랑의교회가 누구보다 사회나 세상 사람들에 대해 희생과 책임을 다 하고 있음을 역설하는 동시에 사랑의교회의 책임성/비판자들의 무책임(비판)함을 암묵적으로 대립시키고 있다. 이러한 도덕적 우월성 주장은 사랑의교회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사례만 들어보자.

 

반대하시는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지금 주장하는 것을 잠시만 접고 교회와 협력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편하고자 한다면 건축 안해도 됩니다. 담임목사님께서도 청년부 대학부 기드온 연학집회에서 말씀하셨지만 목사님 편하게 사역할려면 새롭게 교회를 신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그게 편합니다. 그러나 사랑의교회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많은 희생과 결단이 요구 되지 때문에 이번 건축을 한 것이고 고 담임목사님, 교역자, 재직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 심지어 대학청년부 리더와 전체 교우님들까지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하셨습니다. 반대하시는 분들은 조금이라도 이러한 헌신과 건축의 의미 그리고 왜 우리교회가 건축이 필요한 지 조금이라도 아신다면 교회의 입장에서 공동체의 입장에서 두번 세번만 다시 생각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ㄱㄷㅎ, 사랑의교회 건축위원회 게시판 80번 게시물 일부 발췌, 밑줄은 필자 강조)

 

피해망상이 자신을 중요한 사람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반면, 과대망상은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개개인의 차원에서 건축을 찬성하는 사랑의교회 교인들은 피해망상적 증상을 보일 수 있지만 집단적 차원에서는 자신들의 헌신이나 희생과 같은 어휘를 동원하여 진정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다분히 과대망상적이다. ‘과대망상이라는 표현은 단지 근거없는 비난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의교회의 과대망상은 심리학적 개인에게 나타나는 병리현상과 같은 것이 아니라, 매우 객관적인 맥락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으로서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 사회의 기대를 선교와 구령의 열정으로(덧씌워) 내장하는 것, 스스로에게 부여한 그 의무와 욕망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있는 구체적 재료(material)가 바로 사랑의교회’ ‘성전이다. 따라서 이 성전은 반드시 건축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현실의 타자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타자를 위한다고 믿는 강한 자의식을 매순간 확인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수치를 생산하는 내면 대신에 강한 자의식만을 가진 것이다(김홍중, 2009:68). 이 가상의 타자는 주체가 무슨 짓을 해도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그래서 주체는 수치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수치를 모른다.

 

스놉의 본질은 그 외적 태도의 천박성이 아니라 그가 종속되어 있는 욕망의 메커니즘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 그는 과도하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데,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김홍중, 2009:87).

 

이것은 욕망과 욕구를 구분하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구도와 유사하지 않은가. 욕구의 주체가 대상과 직접적 관계를 맺는 것과 달리, 욕망의 주체는 언제나 매개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김홍중, 2009:86). ‘사랑의교회라는 브랜드나 성전은 신이나 타자의 매개자로서 욕망된다.


또한 고 선교사는 백 교수가 제기한 대형교회의 양적 성장주의/하나님 나라의 질적 성숙의 구도를 메가처치/메타처치의 구도로 바꾸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양적 성장이냐 질적 성숙이냐 하는 사랑의교회의에 대한 비판의 경계를 무화 내지 모호하게 만들고 교회의 이상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도입하려고 한다.

 

3. 백종국 교수의 교회 분류체계

부정적 교회의 모습

긍정적 교회의 모습

교회의 양적 성장주의, 매개의 변증법, 정체성 변질

하나님 나라와 성도의 질적 성숙

 

4. 고직한 선교사의 교회 분류체계

메가처치

메타처치(로서의 메가처치)

본당부터 크게 지어놓고 대중동원, 성장추구

성장DNA, 풍요로움, 성실성, 생산력,

갱신(을 통한 성장추구)

 

  고 선교사에 의하면 메타처치인 사랑의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어쩔 수 없이, 반드시 성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성장DNA는 결정적 수사라고 할 수 있다. 양측 모두, 대화 속에서 성전이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하지 않고, 여러 논쟁적인 사안들 중에 일부인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징적 코드를 구성하는 요소의 핵심에는 성전에 대한 해석이 주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즉 이들 간의 논쟁은 일차적으로는 기독교 어휘를 놓고 벌어지는 해석상의 갈등인 것이다.

고 선교사와 백 교수 간의 선호 어휘 및 담론 구조를 보았을 때, 이들은 동일한 상징적 코드를 토대로 특정한 해석을 공식화하고 경쟁적인 주장을 내세운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있다. 고 선교사의 어휘는 개신교적 맥락에서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는 반면 백 교수의 어휘는 개신교적 맥락과 사회적 맥락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실상 고 선교사는 백 교수의 입장을 단선적이며 세상적인 논리로 비판하게 된다. 따라서 같은 논쟁의 장에 있고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듯 보이지만 다른 규칙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등 애매한 지점이 나타난다. 즉 동일한 집단 내의 상징투쟁인가, 아니면 내부와 외부자 간의 헤게모니 투쟁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2. 신학(이론)과 신앙(실천), 믿음과 의례가 결합된 문화적 대상으로서의 ‘성전’


  이제 성전용어 사용에 대한 사랑의교회 측의 합리화(reasoning)에서 개신교인을 개신교인으로 만드는 논리, 사랑의교회 교인을 사랑의교회 교인으로 만드는 논리를 엿보고자 한다. 이 작업은 진정성이 발화와 텍스트에서 구현되는 맥락과 방식에 주목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는 성전은 의미화 실천(signifying practice), 즉 사랑의교회 내부에서 유통되는 모든 담론, 즉 목사의 설교와 미디어, 중심인물(리더)들의 발화, 공식적인 문서들을 통해서 계열화된다. 이 글에서는 몇 가지 공식적인 문서들을 살펴볼 것이다. (추후에 담임목사의 설교, 평신도들의 언행을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제목: 성전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하여

건축과 관련하여 성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교회는 다른 어느 교회 못지않게 복음을 바르게 알고 가르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교회이며,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까지 적용되게 하려고 제자훈련의 길을 애써 가고 있는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는 공간을 구약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거나 이원론적 세계관의 패러다임으로 성속을 구별하겠다는 의식으로 성전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성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구약적이고 유대교적인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에, 쉽게 건축을 하면서 적절한 의사소통을 위하여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성전건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생각하시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도들이 모여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서의 특성을 나타낸 실용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건축위원회.(사랑의교회 건축위원회 게시판 1번 공지, 밑줄은 필자 강조)

 

예배당에서 이른바 쉐키나의 영광을 경험한 신자들은 그 예배당을, 사랑의교회 교인들의 경우에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성전 개념이 아니라, 사랑의교회라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성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나 개개인만이 교회가 아니라, 집단적 (종교적) 실천-예배-의 기억이 담긴 예배당을 여러 성전-“하나님이 거하시는 모든 장소”-들 중에 하나인 성전으로 인식하게 된다.

 

쉐키나의 영광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서만 쉐키나를 경험한다는 뜻으로 한 것은 아니에요. 쉐키나의 영광은 지금 북적거리는 예배당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고,, 중계된 예배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죠. 만일 졸면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쉐키나의 영광은 새로 짓는 공간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거예요(고직한, 복음과상황 대담).

 

뒤르켐은 집단의 이념이 특정한 상징에 부착되어 있는 현상을 표상(representation)’한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교회 혹은 성전은 종교경험의 공동체적 표상이다.[각주:1]

 

종교경험이 표상화됨으로써 나타나는 공동체는 여타 공동체와 다르지 않은 공동체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종교경험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종교공동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 테면 교회, 카할, 움마, 승가, 가족 등은 각기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 불교, 유교 등의 서로 다른 종교경험의 공동체적 표상에 대한 호칭들이다. 이 같은 종교공동체에 대한 이해는 다만 그 공동체의 형성원리라든가 속성 또는 기능의 파악을 위해 유효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이 사회적 표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은 그것을 빚은 경험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에 대한 이해가 정당한 것인지 혹은 적합하지 않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하기도 한다(정진홍, 2000:142~143).

 

다만 이것은 추상적인 층위에서 작동하는 원리가 아니라, 특수한 사랑의교회적(?) 종교경험이 사랑의교회라는 특수한 성전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결국 교인들에게 있어서 사랑의교회’(브랜드)성전은 등가물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등가라는 것은 이중적 담론체계라고 할 수 있다.


현대 한국개신교인에게 있어서 교회건축물은 일종의 토템처럼 기능한다. 물론 인류학의 고전적 정의상 토템이란 특정한 동식물과의 동일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집단적 상징이라는 점에서 볼 때 성전은 현대 한국개신교인의 토템으로 보인다. 가령 잉꼬 토템을 가진 보로로족이 잉꼬에 대해 갖는 의미와 유사하게 대형교회 교인들은 성전’(건축물)에 대한 이중적 언어 게임을 수행한다. 퍼시(W. Percy)에 따르면,

 

보로로족은 자신을 문자 그대로 잉꼬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으며(왜냐하면 보로로족은 다른 잉꼬와는 짝지으려고 하니 않기 때문에), 혹은 그들이 진술이 거짓이거나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또한 마찬가지로 과학적으로는 거짓이지만, 신화적으로는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보로로족은 정말로” “잉꼬이며, 적절한 의례적 맥락이 부여되면, 다른 잉꼬-보통 나무에서 직접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잉꼬가 아니라, 그 자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잉꼬-와 짝지어질 수 있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그는-내 생각에-잉꼬를 그들의 토템으로 간주하는 씨족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는 잉꼬이며 또 종교적 관점이 보여주는 현실의 근본적인 본질에 의해서 그 씨족에 속한다는 사실에서 일정한 도덕적이고 실질적인 결과가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잉꼬이다(기어츠, 2009:151~152, 밑줄은 필자 강조).

 

잉꼬의 정의, 그와 더불어 보로로족의 정체성은 인류학자가 정립하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잉꼬라는 상징적 기표를 체화한 보로로족의 개별 정체성은 보로로족의 집단정체성과 불리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건축물이 성전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외부인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랑의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달려 있다. 교인에게 성전건축물이 토템이 된다는 것은 성전이라는 어휘가 관계맺고 있는 의미의 망 속에서 그들의 삶을 해명하고, 성전과 붙어있는 교인들의 기억들과 그 이야기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경험은 상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며, “일정한 상징의 테두리 안에 포함된다(아니면 갇히게 된다)”(버거, 1981:59). 다시 말해 성전건축물을 교인 자신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상징물로 간주하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신자 개개인들도 하나의 성전인 것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찬성론자들은 반대론자들이 신자 개인만을 성전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즉 반대론자들이 교회건축물-특히 사랑의교회라는 개별 건축물성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사랑의교회라는 건축물성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곳은 자신들의 신성한 경험과 실천이 배어있는 곳이다.

 

() 우리몸만 성전이다. 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모든 곳은 성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좀 똑바로 읽읍시다. 우리 몸만 성전이다. 라는 극단적인 발언은 비성경적입니다. 이단들이나 해대는 말이지요... 우리 몸만 성전이다! 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이유가 바로 교회 분열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이영희(가명), 사랑의교회 건축위원회 게시판 119번 게시물의 댓글).


신자들이 성전을 말하고 성전을 경험하는 맥락은 항상 거룩한 예배의 경험과 결부되어 있다. ‘성전은 단지 언급되고 회자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종교적 경험과 기억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예배를 통해서 실천되는 개념이다. 건축물이라는 기표와 예배드리는 거룩한 장소라는 기의의 결합은 성전으로 명명될 때에 완전히 융합되고 완성된다. 마치 가핑클과 민속방법론자들이 펄서를 과학자들의 실험과 연구 활동 그 자체’, 즉 발견자들의 연속된 대화의 계보와 이런 대화 중에 조작되는 기기의 조작 에서 보이는것으로 개념화된 하나의 문화적 대상(cultural object)’으로 보듯이(김경만, 2004:312), ‘성전은 단지 사랑의교회 교인들이 단지 콘크리트 덩어리를 구성주의적 의미에서 의사소통적 메커니즘과 정치 과정을 통해서 성전으로 단순히 합의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실천들-특히 신을 만나는 예배-을 체화(경험)하는 상황 안에서만 성전으로서 의미부여된다는 발생적 근원을 강조함으로써 해석될 수 있다. 고 선교사의 발언들은 성전이라는 용어도 다른 일상적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종교적 영역(교회) 내에서 행위자의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적절한맥락에 재배치되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민속방법론에 따르면, 이것이 이론가에게 ()합리적인가의 여부는 여기서는 별개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교인들의 성전개념은 그들의 종교적 수행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성전이 성서적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신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신자들에게 거룩한 예배의 경험을 가져다 준, 그들의 신성한 경험과 실천 속에 배태된 성전이 구약의 성전일 필요는 없다. 심지어 구약적 의미의 성전이 아님을 신자들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신성한 경험을 공유한 신자들 간에는 성전이라는 용어가 공유된 경험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실용적인 의미로 사용되기에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적절한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하다. ‘성전용어를 문제 삼는 방식은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이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외부인-인류학적 의미에서 ‘member’가 아님을 것을 자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외부인의 비판은 냉소일 수밖에 없다.[각주:2]


다시 말해 신성한 종교적 경험을 공유한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며 이를 전제했을 때에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엄청나게 토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이라는 용어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고 선교사의 주장은 사랑의교회 내에서 공유되고 당연시된 종교적 태도와 지식을 의문시하게 되었을 때 교회 내의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음을-실제로는 교회라는 집단이 유지될 수 없음을 무의식적으로 고려한 주장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건축에 동원하려는 부정직한 메타포라는 백 교수의 비판적 해석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각주:3] 


만일 사랑의교회(교인들)성전이라는 용어를 성찰해서 예배당과 같은 용어로 대체하게 된다면, 건축을 설득하고 헌금을 동원하기도 전에 사랑의교회에 소속감을 가진 구성원과 그리스도인’-특히 사랑의교회의 경우에는 제자로서 동원내지 호출하기조차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교회 내부의 건축 비판론자에게 건축의 당위를 강조하다가 뜬금없이 건축 홍보물을 보았을 때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냐는 천연덕스럽고 순진무구한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교인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각주:4] 그렇지 않다면 사랑의교회 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어느 블로거의 한탄처럼 건축에 문제제기하는 블로그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교회를 해하는 것이다.[각주:5] 이렇듯 사랑의교회라는 성전에 대한 애착과 신성한 기억은 사랑의교회 교인들에게 개신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정서의 근간으로서 작용한다. 제자훈련은 제자를 만들고, 사랑의교회는 사랑의교회교인을 만들며, (대형)교회는 성전숭배자를 양산한다.


또한 사랑의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성전’(체제와 그 담론)은 내면적 갈등을 소거하거나 봉합하고 진정성(眞正性, authenticity)[각주:6]을 보다 쉽게 생산한다. 가령, 정치인들에게서 진정성은 자신들의 불의한 행위에 대한 항변의 진실을 대중들이 용서의 차원에서 받아주기를 기대하는 전략적 수사(우석훈,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일 수 있지만, 신자들에게는 전략적인 동시에 실존적인 수사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구조적 위치감각에서 오는 의식적 전략과 체화된 종교적 아비투스에서 오는 실존적 순진무구함을 구별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성장 내지 대형화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과 기존 공간의 협소함을 해결하려는 기능적 필요(구조적 압력)와 개개인의 종교적 욕망은 성전이라는 신학적 의미(종교문화)에서 결합하고 성전이라는 장소(물적 공간)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취된다. 한국교회의 부조리한 구조와 신학(신앙)성전담론에서 융합된다. 즉 담론과 실천적 차원의 종교문화와 물적 차원은 마치 보로로족의 잉꼬에서 만나듯이 실제로 성전에서 결합한다.


결국 한국교회 스노비즘에는 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속물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이 오직 전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깊이나 내면은 표면으로 호출되어 노출된다. 그것은 과시이며, 형식이며, 게임이다. 그리하여 순수한 속물의 세계는 키치의 세계이다. 가령 차를 마실 때에 중요한 것은 자신이 느끼는 고유한 풍미가 아니다. 속물에게 중요한 것은, 그 차가 얼마나 좋은 차로 평판이 나 있는가, 어떤 자세로 그 차를 마시고, 감탄사는 어떻게 발화해야 하는가 등을 규정하는 형식 즉 다도일 뿐이다. 속물에게는 실존이 없다. 고통도 쾌락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매개된 것이기 때문이다. [] 속물의 자살이 아무리 진정한 자기자괴처럼 보여도 그것은 사실상 타인지향적인 그리하여 비어 있는 퍼포먼스(할복)에 불과한 것이다. 코제브는 말한다. “그리하여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일본인도 원칙적으로는 이 순수한 속물주의에 의해서 무상의 자살알 행할 수 있다.(김홍중, 2009:59~60).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적어도 일본의 경우) 기독교가 내면을 만들어주긴 했지만, 이제 교회는 개인과 사회의 불화를 관리하고, ‘성전은 이 관리의 주인기표(master-signifier)가 된 것은 아닐까? 예수시대에 성전체제가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했다면, 오늘날에는 지배적 상징으로서의 성전이 개신교인들의 내면을 갉아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성전’-대형교회 건축물의 차원과 종교적 의미의 차원 둘 다-는 진정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물적이고 종교문화적인 토대가 되어 버렸다.

 

 

결론을 대신하여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속물은 형식화된 가치에 집착하는 존재이고, 동물은 욕망(desire)이 사라지고 욕구(need)만 남은 존재이다. 속물에서 동물로의 이행이 허구적 큰타자에 대한 욕망마저 사라짐으로써 완수된다고 할 때, (억지로 의미를 찾으려 했던 필자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한국교회 성전담론에서 성전의 의미 그 자체도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최소한의 성전과 같은 기독교 전통의 형식적 가치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성전에 대한 사랑의교회를 비롯한 한국개신교인들의 신학적 의미부여와 수사는 아즈마 히로키가 속물의 모델로 찾은, 일본의 오타쿠들처럼 큰타자의 죽음을 부인하기 위해 내용보다는 형식에 강한 집착을 가지는 큰타자의 기능부전을 인식하면서도 아닌 것처럼 허구적 이야기를 만들면서 형식에 집착하는 속물성(보다 더한 동물성)의 현상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한 발 더 내딛을 지점은 어디일까? 가령 사랑의교회의 성전예배당으로 교정’ ‘해 준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나의 논지대로라면) 아니 애초에 교정이라는 비판이론가적 접근은 가능한 것일까? 지금 나의 작업 역시 성전 숭배자들에게는 성상파괴주의라는 서구 근대적 망령으로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경만. 2004. “과학실천에 대한 민속방법론적 접근”. <과학지식과 사회이론>. 한길사.

김홍중. 2009.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클리퍼드 기어츠. 2009. “<문화의 해석>. 까치.

박치현. 2010. “신자유주의 주체성의 사회학: ‘속물인가 자기계발 주체인가”. <문학동네>.

아즈마 히로키. 2007.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이승철. “우리, 포스트모던 동물들!” (http://www.a-act/act/act.html)

정진홍. 2000. <종교문화의 이해>. 청년사.

제프리 알렉산더. 2007. <사회적 삶의 의미>. 한울아카데미.

피터 버거, 1981 <이단의 시대>.

<복음과상황> 20105월호.

뉴스앤조이 인터넷 기사.  

  1. 특정 상징과 집단적 이념(집합의식) 간의 부착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문화로 단지 합리적(reasonable)으로 ‘인지’되는 안정적인 구조는 아니다. 양자 간의 당연시된 부착의 고리가 성찰적으로 문제 제기될 때 나타나는 구성원들의 당황, 분노 같은 감정적 반응은, 사랑의교회 건축사건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교회 안팎의 건축비판론자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표출되는 건축옹호론자들의 분노는, 교회 집단 내에서는 이견을 억압하고 눈치보게 하는 분위기로, 교회 밖에서는 더 큰 싸움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 때문에 보다 근원적인 구조는 감정의 구조라고 보는 소위 ‘감정의 사회학’을 주창하는 학자들이 있다(콜린스 <사회적 삶의 에너지>, 바바렛 <감정의 거시사회학>을 보라). [본문으로]
  2. 뉴스파워 사설 “사랑의교회 건축, 정말 악한 일인가? : 작은것만이 선은 아니다”에 따르면, 소위 “진보적 성향이나 개혁을 자처하는 이들”은 큰 것(대형교회, 부자교회)은 악으로, 작은 것‘만’을 선한 것으로 보는 “냉소적인 시각”과 “기계적 도식”에 빠져있다. 이처럼 건축 옹호론자들은 건축 비판론자들을 선/악 이분법적 프레임에 가둠으로써 그들의 주장이 나이브하고 편협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전략을 취한다. [본문으로]
  3. 박용규 교수(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는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심포지엄 “사랑의 교회 30년 평가와 전망”(2009.11.27)에서 사랑의교회의 '성공적인 건축 준비와 헌금 약정'이 교인들의 '내 교회 의식'과 '교회 사랑 의식'이 견고해진 결과를 낳았다고 해석했다. 물론 의례가 집합의식을 고양하고 연대를 창출하지만, ‘성전’은 교인들의 의식 속에서 이미 의미와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작동한다. [본문으로]
  4. 세계와 열방을 섬기기 위해 불가피한 건축이라는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못하시는가요 물론 교회 건축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선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하지만 형제님 교회 브로슈어를 보신뒤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으신가요(뉴스앤조이, 백정훈 기자, “백기사들의 공격과 절필 선언 : 사랑의교회 건축 비판한 글 올렸다가 중단한 한 교인의 사연” 중에서 네이버 블로그 갈무리 인용) [본문으로]
  5. 뉴스앤조이, 백정훈 기자, “백기사들의 공격과 절필 선언 : 사랑의교회 건축 비판한 글 올렸다가 중단한 한 교인의 사연” [본문으로]
  6. 김홍중은 진정성의 정치화, 공적 지형으로의 발전을 의미하기 위해 원래의 한자 ‘眞情性’을 ‘眞正性’으로 변경한다(김홍중, 2009:48 각주 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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