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부기고

[외부기고] 언어, 소통, 혁명 [김상범]


1.

'안녕들' 대자보는 그동안 무의미/무가치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던 '안녕'이라는 기호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반복되어서 사용되다보니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여겨졌던 이 기호에 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안녕?"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이 '안녕'한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사람들은 '타자'와의 근원적인 조우나 근원적인 만남을 회피해왔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타자'와의 깊은 유대관계를 파괴함으로써 '타자'의 안녕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자신의 안위와 안녕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왔던 우리는 과연 '안녕'했던가? '안녕들' 대자보는 이러한 질문으로 우리의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이것이 우리가 '안녕들' 대자보에 폭발적으로 반응했던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발적 반응은 '각자도생'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적인 명령에 굴복할 수 없으며, '사회적 안녕' 속에서만 '개인적 안녕'이 있을 수 있다는 사람들의 인식과 이러한 '사회적 안녕'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낮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아왔던 '사회적 안녕''안녕들' 대자보는 높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어떠한 의미체계와 가치체계가 성립하는 것은 광대한 무의미와 무가치의 영역을 토대로 삼아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가 변화하는 것은 의미/무의미, 가치/무가치의 경계선 자체가 변화할 때, 즉 무의미/무가치 했던 것이 의미/가치를 획득하거나 높은 의미/가치를 지녔던 것이 무의미/무가치한 것으로 변화할 때이다.

현실적으로 발화되는 기호의 의미와 가치가 맥락과 상황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면, 잠재적 언어의 세계에서 각각의 기호들은 무수히 많은 잠재적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무의미''무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잠재적 언어를 현실화시켜서 맥락과 상황에 맞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이다.

따라서 어떤 무의미하고 무가치했던 기호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 받는 것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힘을 어떤 하나의 인격이나 개인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환원은 또 하나의 개인숭배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 무엇일까? 이 대자보에서 우리는 '타자'와의 연대와 사회적인 소통을 촉발하는 힘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주현우 개인의 내면의 표현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의해 강력하게 배제되고 추방되고 파괴된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다중들의 힘(권력)의 표현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거나 국유화함으로써 작동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것은 더 이상 구성적 힘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다중의 역능은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자본은 이렇게 구축된 것을 해체시키거나 그것에 기생함으로써 작동한다.

'안녕들' 대자보는 공통적인 신체와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강력한 힘을 보여주었다. 주현우라는 하나의 특이성은 다른 특이성과 공명하고 소통했고, 이러한 특이성들은 공통적인 의미와 가치를 생산해내었다. 오늘날 이러한 소통을 통한 공통적인 것의 구축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것이 되고 있다. '국가의 전복'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고 지속이다.

 

2.

사실 이러한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다중의 힘과 역능의 표현은 2008년의 촛불시위로 나타났다. 혹자는 촛불시위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의적인 시위였다고 비판하지만, 우리는 왜 이 시위에서 '헌법 제 1'가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헌법이 단순히 법조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행을 통해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라면, '헌법 제 1'는 대의적 권력에 의해 실제로는 죽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중들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언표 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고루하고 상식적인 언표가 아니라, 그 언표 자체의 수행적 효과로서 헌법 자체를 재발명하고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언표였던 것이다. 촛불을 통해 표현된 것은 다중의 제헌(구성) 권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다중의 제헌(구성) 권력은 공통적인 언어와 공통적인 신체를 구성했고, 이러한 언어와 신체의 구축을 통해서 (이명박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슬픔의 수동적 정서는 기쁨의 능동적 정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적인 것'의 구축은 결코 국민주의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각각의 개인들은 특이성을 잃지 않았으며, 다중은 이러한 특이성들의 소통과 배치를 통해서 자신을 끊임없이 구성하고 재구성해내었다.

혹자는 촛불시위가 제도적인 것의 외부에서 정치제도에 개입한다는 점을 비판했으나, 제도라는 것이 그 자체로 정당성을 확보하기는 어렵고, 어떠한 제도가 새롭게 생겨나거나 재발명되는 것은 제도적인 것 외부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비판은 옳지 않다.

법과 제도 외부에 존재하면서 법과 제도를 구성하는 자들을 사람들은 주권자라고 부른다. 이런 생각은 칼 슈미트에 의한 것으로, 그에 의하면 법과 제도를 효력정지 시킬 수 있고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실체가 존재하는데, 그는 이를 주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슈미트에 의하면 이러한 실체로서의 주권에 의해 법질서, 혹은 제도적 질서는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격적, 초월적 실체를 가정하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주권의 작동은 언제나 그에 복종하거나 저항하는 다중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슈미트의 생각 중에서, '법 질서, 제도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은 법과 제도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릴 필요는 없다.

법 질서나 제도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은 세력관계, 즉 주권과 다중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법 질서나 제도적 질서로는 완전히 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슈미트는 이러한 '관계''실체'화하여 초월적인 것으로 상정한다. 나는 이러한 슈미트의 주장을 '사회적 관계'를 일종의 물()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적 물신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이러한 '정치적 물신주의'를 극복하여 내재적 관계를 통해 권력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권과 다중의 관계에서 적극적인 것은 언제나 다중이다. 주권의 폭력과 억압, 통제는 다중의 반란을 막으려는 '역반란'이라는 '반응'의 형태로 나타난다. 2008년의 촛불 시위에서 다중의 반란은 '소통'을 통해서 강화되었다. 권력은 이러한 '소통''유언비어 유포'의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다중의 반란을 무력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이러한 이미지 속에서도 한 줌의 진실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소통''직접 경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주워듣거나 '퍼온 이미지'를 말하거나 전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떠한 '기원'. '실재'도 사라지게 만드는 인터넷 공간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다. 왕조의 멸망 직전에는 기원도, 실제적 '근거'도 없이 떠도는 말로서 '참요'가 유행했다. 이러한 '참요'는 낡고 부패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수행적 효과'를 가졌고, 이러한 '수행적 효과'의 집적은 왕조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나는 2008년 당시 인터넷 공간에서 유포되는 말들이 '참요'의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부패한 세력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었고, 수행적으로 거대한 공통의 신체를 구축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보여줬다.

 

3.

2008년의 촛불 시위로 가시화된, 공통된 것을 구축하는 다중의 힘은 '안녕들' 대자보를 통해서도 표현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언어와 소통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다중들의 힘의 결집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소통공간에는 이러한 다중들의 적극적인 힘만 존재해왔던 것은 아니었다. 반응적인 힘들도 존재해왔다. 이른바 '일베'라고 불리는 '일간베스트저장소'는 이러한 반응적인 힘들이 서식하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이러한 반응적인 힘들은 현행적인 인식과 존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현행적인 권력을 옹호해왔다.

혹자는 '일베'가 촛불시위에 유토피아적 열정을 가지고 참여했다가 결국 체념한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분석이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일베'의 고유한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인 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될 때 반응적인 힘으로 전화된다.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적극적인 힘은 체념에 의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됨으로써 니체가 경멸해 마지않는 '무리동물'을 형성하는 반응적인 힘이 되었다. 이러한 '무리동물'들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소수자의 '적극적인' 활동에 대해 폭력적으로 '반응'하거나 냉소주의를 유포함으로써 적극적인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움직이고 구성하는 힘,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권력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에게 있다. '일베'의 반응적인 힘들은 '구성된 권력', 즉 국가에 충성하지만, 이러한 국가조차도, 구성하는 권력, 즉 다중들의 제헌권력에 의해 생산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헌권력의 형성은 언어와 소통의 힘에 의해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언어와 소통이 '일베'와 같이 반응적인 힘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의 적극적인 힘은 언어활동과 소통을 통해 매서운 신자유주의와 극우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공통적인 것''공통적인 신체'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공통성'을 지속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글_김상범님은 고등학교 때 주로 이과계열이 집중된 과학고를 졸업한 후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이공계전공자이지만, 지금은 인문학 공부를 위해 긴 휴학을 택하여 인문학 공부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