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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는 가톨릭 주교들과 종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Practical Reason)

종교와 성직자는 결국 자신의 존재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물질적경제(적 조건)를 은폐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에 대해 주교들은 웃으면서 이렇게 답한다

“(허허)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지요하지만......” 


주교들은 종교의 세속적(경제적) 진실을 폭로하려는 부르디외의 질문에 대해 웃으면서 비교적 쿨하게 인정하는 듯 보인다. 종교의 세속적(경제적) 측면을 부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르디외는 주교들의 웃음에 주목한다. 그는 이 웃음을 동반한 주교들의 애매한 태도가 종교의 세속적(경제적) 진실에 대해 종교인들이 거리를 두는 방식(성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종교의 세속적(경제적) 차원에 대한 종교인들의 '거리두기(부정된 경제)'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즉 종교에 대한 부르디외의 특정한 입장이 담긴 비판적인 질문에 대한 주교들의 웃음은 부르디외의 주장을 인정하는 제스처인가아니면 부정하는 제스처인가? 다시 말해 여기에서 주교들은 종교에 대한 부르디외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항하고 있는 것일까? 


부르디외는 종교의 세속적 진실을 폭로하는 자기의 진지한 질문에 대해 주교들이 웃어버림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은폐된 (세속적이고 경제적인진실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웃음은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체화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들이 체화한 믿음이란 종교의 세속적 차원을 가볍게 여기는 반면 종교의 내적 논리를 훨씬 더 진지하게 취급하는 성향(아비투스)이다. 이러한 종교성(종교 아비투스)을 통해 성직자들은 자신들을 세속(경제)의 논리로부터 차별화하고 "순수한" 종교인으로서의 카리스마를 행사한다/할 수 있게 된다. 즉 성직자들은 이러한 습속을 통해 세속성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종교적 권위라는 상징적 이익을 얻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 웃음의 기반을 "오인"이라고 보았지만, 주교들의 입장(종교적 신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교들이 보인 쿨한 척하는 애매한 태도의 배면에는 사실상 부르디외와 같은 종교 비판자에 대해 결코 쿨하지 않은 엄격한 진리주장이 들어있다.[각주:1]


따라서  사실상 주교들의 웃음은 종교를 폭로하려드는 부르디외의 입장(사회학적 지식이나 비판이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 다름 아니다다시 말해 주교들의 웃음은 부르디외의 사회학적 폭로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 자신들의 특수한 동기독사일루지오를 의심할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동시에 양측 모두 각자의 일루시오와 상징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주교들의 웃음은 이론가의 해방적 지식에 대한 일종의 비웃음(거리두기)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인들(특히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종교의 세속적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부르디외의 폭로에 대해 부르디외 만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기껏해야 그런 측면이 있다고 인정하는 척할 뿐 결코 그 장(과 장의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날 마음은 전혀 없다.[각주:2]


주교들의 (세속적 차원을 인정하는 듯한 쿨한웃음에서 우리는 종교의 (상대적자율성과, 종교의 세속적 차원이 종교 고유의 내적 차원과 완전히 하나로 결합된 종교의 이중적 논리를 엿볼 수 있다. 


부르디외는 종교의 세속적 진실에 대한 주교들의 부정(웃음조를 띤 부분적 인정)을 부정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종교의 진실에 대한 오인(일루시오)를 깨뜨리려고 했다그러나 부르디외와는 전혀 다른 장에 속해서 그 논리와 감각을 체화한 행위자들은 부르디외의 진지함(행위자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비판이론적 지식에 대한 일루지오)에 대해 진지하지 않음(종교 고유의 순수성과 초월성에 대한 궁극적인 믿음)으로 응수할 뿐이다.[각주:3]


주교들이 부르디외의 주장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주교들이 몸담고 있는 종교라는 사회(적 공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믿음에 근거한다사회가 곧 신이며신에 대한 믿음은 사회에 대한 믿음에 다름 아니기에 그들의 믿음은 신성한 종교와 세속적인 경제정당성과 지배의 교묘한 결합 부르디외에 따르면종교의 이중적 진실”- 으로서 행위자들의 육체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상징적 지배의 과정(상징폭력의 관철)은 물리적이고 강제적인 폭력과는 달리지배자와 피지배자들 간에즉 상징투쟁에 참여하는 구성원들 간에 집단적인 조율동의(consent), 협력자발적 공모(complicity, collusion)라는 아비투스와 장의 조화로운 맞춤(fitting)의 과정 속에서 행사된다이러한 공모는 앞서 카빌의 사례와 같이 고의적으로 속고 속이는 것이 아니라구성원 모두가 장 내의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장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집단적 기만”(collective deception) 속에서 가능해진다이 메커니즘은 단순히 피지배자만이 지배자의 모든 지배논리를 알면서도 고의적이고 계산적으로 속아주는 것이 아니라피지배자가 속아준다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집단적으로 이미 정당화된 앎을 통해 체화된 구조적문화적 한계 내에서 속아주는 것으로 정의(definition) 되는 것이며 동시에역시 속인다는 의식이 없는 지배자와의 공모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그런데,

 

상징적 행위가 가시적인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이런 종류의 마법적 효율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강제나 명령 행위를 따르는 사람들이 복종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도 복종해야 한다는 감정을 갖도록 하는 데 필요한 성향을 사전 작업을 통해 그들 내부에 생산해 놓았어야 한다이런 작업은 흔히 가시적이지만 어쨌든 망각되고 억압되어 있다상징적 폭력은 '집단적 기대들'과 사회적으로 주입된 믿음들에 토대하기 때문에 복종들로 지각조차 되지 않는 복종들을 강요하는 그런 폭력을 말한다마법이론처럼 상징적 폭력 이론은 믿음의 이론에 기초한다보다 잘 말하면 그것은 지각 및 평가의 구조들을 갖춘 행위자들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화 작업곧 믿음 생산의 이론에 기초한다이런 구조들은 행위자들로 하여금 어떤 상황이나 담론 속에서 새겨진 명령들을 지각하게 해주고그것들을 준수하게 해준다(Bourdieu, 1998a: 103).

 

따라서 상징폭력은 기만당한 의식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지배구조의 산물이자 그 구조에 맞게 조정된 성향즉 아비투스에 기반을 둔다상징폭력에서 나타나는 자발적 공모는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당하는 사람이 동일한 아비투스를 공유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아비투스는 이미 조정되고 적응된 성향이며이 성향 속에서 지배와 착취는 당연한 것으로 오인(misrecognized)된다이 때 중요한 것은이처럼 상징폭력을 정당화하는 아비투스가 장(field)의 무의식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산물이라는 점이다장은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상징권력곧 상징폭력을 독점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는 장소(site)로서 차별적이고 구별짓는 감각인 아비투스를 구축한다장은 교육체계나 문화적 배경을 통해 습득되고 체화된 아비투스에 의해서 상징폭력이 관철되는 오인과 공모의 현장이다이 공모의 현장에서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할 것 없이 의도적인 기만자나 사기꾼이 아닌 진정성 있는 확신범들 부르디외와 주교 모두 만이 존재한다행위자들은 이 공모를 의심은커녕자신 역시 그러한 공모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에 자신들의 행위의 동기와 전략을 마치 투명하게 보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투쟁의 상황을 인지하고 또한 그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전략을 선택한다장은 투쟁의 암묵적 규칙을 더욱 강화하고그 규칙의 정당성을 아비투스의 형태로 장 내 참여자들의 신체 속에 철저하게 믿음(belief)의 형태로 각인(embed, inscribe)시킨다이 과정 속에서 규칙과 이 규칙에 대한 맹목적 신앙(illusio)의 역사적 구성은 망각되고 은폐된다.[각주:4] 


그래서 이 아비투스는 마치 주교들의 웃음처럼 규칙들이나 상징권력의 합법성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마저 상대화하거나 부정할 정도로 강력한 지배의 효과를 수행한다정당화된 상징폭력은 어떤 궁극적 신앙이나 통념(doxa), 그리고 장의 범주를 몸으로감각적으로인지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궁극적으로 부르디외 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한 비판(이론)들은 주교들이 부분적으로 인정을 하는듯한 제스처(웃음)를 취하게 할 수 있을지언정, 웃음을 완전히 멈추고 정색하게 하여 그들의 믿음과 실천을 바꾸기는 어려운 것이다.[각주:5]

먹보에_술꾼



  1. 물론 이것은 부르디외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양자의 대화는 각자가 속한 장의 아비투스 간의 적대이며 동시에 각자의 장에 대해 갖는 환상(일루시오)들 간의 충돌이다. 통약불가능하고 상호침투할 수 없는 일루지오들 간의 충돌인 것이다. [본문으로]
  2. 부르디외는 이 상황 자체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 장으로부터 상징폭력을 당하는 증거라고 여길 것이다. [본문으로]
  3. 물론 부르디외 역시 주교들의 태도가 부르디외 자신의 비판이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여길 것이다(김경만, 2005: 117). 즉 주교들이 아무리 미소를 머금고 반박할지라도 부르디외의 눈에 그 미소는 진실에 대한 “집단방어기제”의 반쪽 미소로 보일 것이다. 이른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부정에 대한 부정” 논리는 이론가의 인식론적 특권을 선험적으로 전제하는 것이기에 부르디외의 진리주장은 여전히 독단적인 상징폭력에 머무르게 된다. [본문으로]
  4. 부르디외의 "상징폭력론"처럼 강력한(완고한) 비판이론도 이론 그 자체의 내적/논리적 힘만으로는 종교적 믿음을 굴복시키기 어렵다. 그의 비판이론은 일상행위자(종교)들의 일루지오를 해체시킬 수 없다. 부르디외의 일상행위자(종교) 비판은 일루지오들 간의 충돌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부르디외를 비롯한 비판이론가들은 글들이 벗어날 수 없는 학문장의 일루지오와 학자적 아비투스에 기반한 인식론적 특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5. 부르디외의 "상징폭력론"처럼 강력한(완고한) 비판이론도 이론 그 자체의 내적/논리적 힘만으로는 종교적 믿음을 굴복시키기 어렵다. 그의 비판이론은 일상행위자(종교)들의 일루지오를 해체시킬 수 없다. 부르디외의 일상행위자(종교) 비판은 일루지오들 간의 충돌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부르디외를 비롯한 비판이론가들은 글들이 벗어날 수 없는 학문장의 일루지오와 학자적 아비투스에 기반한 인식론적 특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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