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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trans-post-christianities

근본적 정통주의의 철학적 배경

-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의 부활 -

*1st Cairos Colloquia 발표문

김동규 |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1. 들어가며: ‘새로운 신학’을 공부하는 즐거움

 새로운 신학적 경향을 배운다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는 기존의 신학적 입장들이 보지 못한 부분이나 기존의 신학적 입장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파헤쳐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신학적 경향을 배운다는 것은 매우 유용한 일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러한 작업은 기존 신학적 지형에 위협을 가하는 작업이다. 지금도 여러 신학적 입장들이 자신의 입장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판국에 또 하나의 입장이 끼어든다면 그 전쟁터는 더욱 격렬해지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한국의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신학적 입장의 도입은 매순간 큰 파장을 일으켜왔다. 한 예로 네덜란드 개혁주의 세계관이라는 입장의 도입은 한국교회 내의 이원론적 분위기를 타파하는 훌륭한 저격수 역할을 했다. 또한 이러한 개혁주의 세계관 역시 재세례파 등의 신학적 입장이 대두되면서 공격을 받는다. 이에 관한 논쟁들이 실제로 한국교회 내에서는 얼마만큼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일정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 분명 교회와 신학, 사회의 변화에 일말의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다만 여기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여러 신학적 입장들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소개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치열한 논쟁 속에서 서로 발전하고 있는지가 아닐까 한다. 다양한 신학적 입장이나 교단들 간의 교류가 부족한 상황에서, 특별히 제도권 내에 있는 학자들 간의 대화와 대결이 미미한 상황에서 사실 얼마나 제대로 된 신학적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우리의 당면 과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서 또 하나의 신학적 운동과 흐름을 소개하는 일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도움이 되는 일일까? 한편으로는 이 물음에 회의적인 생각이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여전히 필요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새로운 또 하나의 입장이 들어옴으로서 적어도 우리는 신학적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만큼은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입장이 우리의 상황 속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현실이라면 이러한 작업은 더욱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나는 다소 생소한 신학적 경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근본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이다. 이것은 1990년대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주로 공부하고 활동한 존 밀뱅크, 그래험 워드, 캐더린 픽스톡이 일으킨 신학적 운동내지는 경향이다. 이 가운데 존 밀뱅크는 자신의 책 『신학과 사회이론Theology and Social Theory』을 통해 근본적 정통주의의 단초를 보여준 이후, 급기야는 1990년대 말 『근본적 정통주의: 새로운 신학Radical Orthodoxy: A New Theology』이란 책을 워드와 픽스톡과 더불어 편집하여 냄으로서 근본적 정통주의의 일종의 좌장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밀뱅크를 위시한 이들의 입장은 이후 1990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파되어서 이제는 북미와 유럽 전역에 그 영향을 미치면서 이른바 포스트모던 신학의 한 축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도 이 입장이 극히 미미하게나마 소개는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심층적으로 논의되고 전파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근본적 정통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는 그 근본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20세기 초반에 칼 바르트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상당 부분 그 통찰력을 이어받은 것 등에서 보듯이, 신학사상의 배후에는 철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본적 정통주의 역시 철학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근본적 정통주의는 오히려 자신의 철학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매우 열심을 낸다. 왜냐하면 거기서부터 이들은 정통주의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논문은 근본적 정통주의의 철학적 배경에 집중하여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근본적 정통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일정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철학적 배경을 곧장 검토하기 전에 한 가지를 우선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근본적 정통주의에 대한 정의(definition) 문제이다.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논의가 전개되면 필경 우리는 이 입장이 토대로 삼는 철학적 배경이 왜 나왔는지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근본적 정통주의 자체가 너무나 생소한 것이므로 이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바로 ‘정의의 문제’라는 우회로를 거친 다음 철학적 배경을 검토하는 길로 들어설 것이다.


2. 왜 ‘근본적’인가?

 근본적 정통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 우선 번역어의 문제를 거론해야겠다. 왜냐하면 용어의 번역을 통해 이 입장에 대한 기본 이해와 정의가 그 자체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Radical Orthodoxy를 근본적 정통주의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Orthodoxy를 정통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정통주의라는 말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 널리 통용되고 있는 말이기에 이론의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Radical Orthodoxy가  또 하나의 신학적 입장으로서 그 특유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Radical이란 말이다. 김성원 교수가 이를 ‘급진적’으로 번역한 바 있고, 통상 이 말 자체를 급진적으로 번역하는 것은 대체로 당연시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맥락에 대한 의미의 변화에 주목하면 ‘근본적 정통주의’라는 신학적 입장을 지칭할 때만큼은 Radical을 근본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한다.

 왜 그런가? 급진적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급격하게 이루려고 하는,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를 두고 쓰는 말로 정의된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정치나 사회의 구조를 매우 빠르게, 곧장 변화시키려고 하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활용된다. 그렇다면 급진적 정통주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통주의를 급격하게 이루어보자는 말인가? 일단 의미상 급진적이라는 말과 정통을 수호하자는 식의 보수적 냄새를 풍기는 정통주의라는 말의 조합 자체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어색하다는 이유만으로 ‘근본적’이라는 번역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번역하려면 여기에 타당한 이유가 근본적 정통주의라는 신학적 입장의 의미에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근거를 나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근본적 정통주의를 발흥시킨 대표적 인물로 존 밀뱅크, 그래험 워드, 캐서린 픽스톡을 들 수 있다. 그들은 근본적이란 말의 의미를 해명하면서, 이 말을 제일 먼저 “교부들과 중세의 전통, 특별히 모든 인식을 신의 조명으로 이해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사용코자 한다. 만일 Radical을 급진적이라고 번역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의 첫 번째 전통으로 복귀하려고 시도하는 이러한 그들의 의도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된다. 또한 우리는 Radical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radix라는 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뿌리나 근원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원적인 의미에 비추어 봐도 ‘근본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급진적’이라는 번역보다 더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근본적 정통주의는 기독교의 신조들이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비롯되었으나 현대에 와서 이들의 유산을 부정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근본적 정통주의의 입장은 기독교 사상사의 근본을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로 보고, 이들의 유산을 새롭게 복원시켜 정통 기독교의 새로운 기초를 놓으려는 신학적 감수성 내지는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제 문제는 그 내용이다. 그들의 신학의 내용이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파헤쳐보기 위해 우리는 그들이 부활시키려고 하는 철학적 유산을 검토해야 한다.

 
3. 근대성 비판과 새로운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주의

(1) 근대성 비판

 특정 신학, 또는 철학적 입장들은 통상 그 입장보다 선행하는 어떤 입장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 정통주의도 마찬가지다. 이 진영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주적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밀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개진한다. 이들이 주요 상대자로 삼는 것은 다름 아닌 근대성의 철학적 기획이다. 이들은 근대성이 담고 있는 철학적 기획이 세속화의 양상을 매우 급속하게 가져왔다고 보면서 그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보는 근대성은 무엇이며 그 비판적 양상은 무엇인지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일단 그들은 근대성을 세속화를 일으킨 주범이라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세속화는 하나님과 이 세계를 극단적으로 분리시키고 배제하는 경향을 말한다. 중세에 이미 하나님과 세계의 분리가 시작되었고, 근대로 넘어와서 인간의 자율성을 극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 세속화의 폐해라고 보는 시각을 근본적 정통주의 진영에서도 대체로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근본적 정통주의 진영의 비판의 핵심은 바로 근대성이 보여주는 “신성과 초월의 배제”이다. 즉, 근대가 펼친 세속화는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간의 극단적인 분리와 신적인 것, 초월적인 것의 배제가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로부터 신학적/정치적인 자유주의와 중립성의 신화가 배태되었으며, 이러한 입장들은 신학적이고 기독교적인 사고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문제의식에서 근본적 정통주의의 철학 비판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가? 기본적으로 근본적 정통주의가 근대성을 비판하고 이들을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들의 입장은 분명 탈근대적(postmodern)이다. 단, 이들이 근대성 비판과 극복의 철학적 배경을 현대철학자들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찾고 있다는 점이 여타의 포스트모던 신학과는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이들은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에 기인하는 철학적, 신학적 입장들이 곧 기독교의 정통적인 사상 배경을 이뤄왔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들이 근대의 극복을 소위 말하는 탈근대 철학이 아닌 고대와 중세의 철학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 이들 사유의 핵심이자 독특성이라 할 것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기대고자 하고, 복원하려고 하는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가 대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2)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회복

 기독교 전통 속에서, 특별히 개혁주의나 문화변혁을 강조하는 전통에서 플라톤은 대체로 이원론자로 해석되어 왔다. 이데아와 현상계를 구분하여 궁극적인 것은 이데아의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이 현실 세계는 이데아의 모사에 불과한 열등한 세계로 보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플라톤의 사상이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종교적 색채를 부여받게 되었고,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까지 전해졌다고 본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플라톤적인 이원론자임과 동시에 이 세상의 가치를 평가 절하한 인물로 간주되기 쉽다. 특별히 네덜란드 개혁주의 진영에 속해 있는 리차드 미들톤과 브라이언 월쉬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이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희랍의 자유/필연의 이원론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구분으로 나타났다. . .

 이원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궁극적인 신학적 정당성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플로티누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이다.

 플라톤주의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원의(혹은 영적인) 영역과 시간의(혹은 물질적인) 영역 사이의 분리를   믿었다.

 근본적 정통주의자들이 이러한 플라톤/플로티누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이원론적 성격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전통적인’ 플라톤과 ‘새로운’ 플라톤을 구분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규정하는 전통적인 플라톤 철학의 성격은 무엇이고, 또 새로운 플라톤 철학의 성격은 무엇인가? 

 앞서 지적한 바대로 ‘전통적인’ 플라폰 철학은 “세계 내 존재인 인간에 대한 환원주의적, 이원론적 이해”를 부각시키는 입장이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특별히 철학은 죽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우리가 신체의 감옥을 벗어나야 참된 인식을 맛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점이 밝혀졌어. 우리가 언제고 뭔가를 순수하게 알려고 한다면, 우리는 몸에서 해방되어야만 하며 사물들을 그 자체로 혼 자체에 의해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지.” 오랫동안 우리는 이와 같은 신체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절하에 근거해서, 플라톤적 철학과 이 철학을 어떤 형태로든 수용하고 있는 신학 역시 신체와 신체에서 비롯되는 욕망이나 정치, 경제 등의 현실적인 것들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그 내용이 전개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근래의 학자들은 플라톤을 체화와 내재성을 평가절하시키는 이원론자로 읽어내는 방식에 도전하게 된다.” 철학에서는 바디우가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신학에서는 근본적 정통주의가 그 선두에 서 있다. 근본적 정통주의자들은 내재주의나 환원주의적 유물론을 “허무주의적 존재론”으로 평가하고, 오히려 초월에 근거를 두려는 철학이 신학에 더 어울린다고 주장한다. “모든 지점에서 영적인 지식을 부여하는 초월이 없이는 자연은 자연일 수 없다”는 너무나도 강한 주장에서 보듯이 이들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이 초월적인 존재에 밀착되어 있지 않을 경우 허무주의에 빠진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근본적 정통주의의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새로운 플라톤주의이다. 지금부터 이들이 제시하는 플라톤 철학의 근간을 알아보도록 하자. 그들에 의하면 플라톤은 신체나 물질을 절대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았다. 일단 『파이드로스』의 다음 구절에 주목해보자.

반면, 새로운 입회자, 즉 지나간 것들을 많이 본 사람은 아름다움을 잘 모방한 신 같은 모습의 얼굴이나 어떤 몸의 생김새를 보면, 처음에는 (몸을) 떨고 지난날 겪었던 여러 가지 두려움 가운데 어떤 것이 그를 엄습하지만, 그 다음에는 신을 볼 때처럼 경외심을 품고, 그가 만일 격렬한 광기에 대한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마치 신상이나 신 앞에서 그렇게 하듯 아이에게 제물을 바칠 걸세. 아이를 바라볼 때, 경련 뒤에 오는 신체 변화가 그렇듯, 땀을 흘리고, 겪어본 적이 없는 열기가 그를 사로잡네. 왜냐하면 눈을 통해 아름다움에서 유출되는 흐름을 받아들이면 열이 나고, 그 광채에 의해 날개의 타고난 힘이 솟아나기 때문인데, 열이 오르면, 지난날 딱딱하게 막혀서 싹의 발아를 방해했던, 날개의 싹 언저리 구멍들이 녹아내리고, 영양분이 흘러들면 날개의 깃이 부풀어 올라 뿌리로부터 영혼의 형체 전체로 내리뻗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지난날 영혼 전체에 날개가 달려 있었기 때문일세.

 이 구절에서 눈여겨볼 것은, “물리적인 외양이 인식과 철학적 상승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비록 플라톤이 영혼과 신체를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눈을 통해 아름다움에서 유출되는 흐름을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상승 작용을 언급하는데서 보듯이 우리의 신체를 통해 영혼의 상승을 도모하는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두고 픽스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이드로스』에서 현실적인 연인과의 만남은 형상에 대한 기억을 자극하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 즉, 이 구절에서 사랑하는 아이를 볼 때 우리는 이데아의 형상을 상기가 일어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현실적인 것이 초월적인 것에 참여하는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플라톤 철학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근본적 정통주의자들은,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적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보다는 신적인 것, 초월에 관한 참여 문제를 더 중요시한다. “아름다움에 눈길이 가면. . . 환희를 느낀다”는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현실적인 아름다움은 초월로의 상승에 기여한다. 즉, 참여(methexis)라는 것이 일어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참여는 물질세계에서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 철학에서 물질세계의 배제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고, 이 물질계가 어떤 식으로 초월에 참여하는가 하는 문제가 플라톤 철학의 주요 관건이 될 뿐이다. 근본적 정통주의 진영에서는 바로 이러한 플라톤 철학의 초월과 초월로의 참여라는 정신이 기독교 신학과 잘 부합되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교부들의 지지를 얻었다고 본다. 그들이 보기에 플라톤, 신플라톤주의,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는 철학흐름은 언제나 초월을 배제하지 않았고, 오히려 물질계를 초월에 밀착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근본적 정통주의가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여 단순히 플라톤주의자로 남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새로운 플라톤주의-기독교이다. 이 점에서 근본적 정통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주목한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 철학의 초월과 참여의 사상을 누구보다도 잘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조망에 있어서 플라톤의 참여의 정신을 기독교적으로 승화시켰다. 이제 본격적으로 근본적 정통주의의 아우구스티누스 해석에 대해 고찰해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다른 것과 맺는 지향적 관계의 핵심부에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삶이 달라진다.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인지, 아니면 사물들에 대한 사랑인지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 특유의 사랑의 질서(ordo amoris)에 의해 그가 말하는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도 구분된다.

두 사랑이 두 도성을 이루었다. 하느님을 멸시하면서까지 이르는 자기 사랑이 지상 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까지 이르는 하느님 사랑이 천상 도성을 만들었다. 전자는 스스로 자랑하고 후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한다. 전자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고 후자는 양심의 증인인 하느님이 가장 큰 영광이 된다. 전자는 자기 영화에 겨워 자기 머리를 쳐들고, 후자는 자기 하느님께 “당신이 나의 영광이십니다. 내 머리를 쳐들어 주십니다”라고 말씀드린다. 전자에서는 그 제후들과, 그들이 멍에를 씌운 민족들 모두에게도 지배욕이 군림하고 있다. 후자에서는 지도자가 훈계하고 아랫사람이 복종하는 가운데 애덕으로 서로 섬긴다. 전자는 그 세도가들이 자기 세력을 사랑한다. 후자는 자기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린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근본적 정통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찬 천상의 도성을 곧 에로스가 충만한 공동체로 간주한다. 여기서의 공동체의 에로스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함축한다. 이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비롯된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처럼 “육적인 조건이 전혀 없이 인간성 자체를, 아직 완성되어야 할 것 또는 이미 완성된 것으로서 사랑하여야 마땅하다”고 말한 것에 비추어 근본적 정통주의자들은, 이러한 사랑에 기초한 욕망의 작동방식을 규명하여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이끌어내고, “적절하게 재구성해내는 장소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자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이런 배경하에서 근본적 정통주의자들은 윤리학이 아니라 윤리 자체로서의 에로스적 공동체인 교회를 세상의 대안,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그들에게 교회는 신적 사랑이 창궐하고 있는 평화의 도시와 같은 것이다.

 또한 근본적 정통주의자들은 사랑의 질서에 근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극대화시켜서 “리비도의 경제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에로스”의 영역을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이는 현대철학의 욕망이론에 대한 도전으로서, 워드는 “에로스를 성과 연결시키는 매듭을 풀고”, 기독교 신학의 욕망이론이 “어떻게 세속문화, 즉 유혹의 문화 속에 있는 욕망의 작동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여기서 길게 서술할 수 없지만, 워드는 욕망을 결여의 차원에서 사고하는 모든 욕망이론을 거부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에 기대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결여나 필요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일 뿐이라며 사랑 자체는 결여라는 작동원리를 벗어난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인간은 욕망의 존재”들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욕망도,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해 있고, 우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욕망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초해서 워드는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구속”을 기독교의 “욕망의 경제학”이라고 본다. 이러한 새로운 욕망의 경제학에 기초한 인간 이해는 근대의 개인주의적이고, 자아중심적인 인간 이해를 벗어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간은 개별자로, 또는 이 세계의 토대로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욕망과 결부되어 있는 가운데 그 참된 존재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 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이다. 또한 존재만이 아니라 인식에 있어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특유의 ‘조명’에 대한 입장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것은 믿을 대상이고 어떤 것은 인식할 대상이라는 확신을 주는 빛이 무엇인지 찾아보라는 대답만 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이 빛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이요. 공간의 넓이로는 개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맹세할 것이다. 이 빛은 찾는 사람들에게 어디에나 즉시 나타나며 이 빛보다 확실하고 밝은 것이 또 없다고 설명할 것이다.

영혼 안에 내재하고, 영원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조명이 없으면 인간의 인식도 불완전하다. 이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의 인간의 인식 및 자기인식은 데카르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인식 역시 초월적인 존재와 결부되어 있을 때 제 기능을 발휘한다. 근본적 정통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존재와 인식에 대한 견해에 근거하여 데카르트식의 자율적이고 1인칭적인 주체를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인간 주체로 대체하려고 한다. 

 지금까지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압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근본적 정통주의는 플라톤 철학의 참여의 정신을 극대화시켜서 근대의 세속성을 극복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세계와 인간을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질서에 기초해서 이해한 것을 토대로 하는 가운데 바로 그 ‘초월’의 관점에 근거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정립해내고자 한다.


4. 결론: 참여의 존재론을 향하여

 근본적 정통주의가 근대성을 비판하고 정립해내는 입장은 곧, 참여의 존재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참여의 존재론은 물질계를 부정하는 플라톤주의가 아니라 물질계가 초월적인 것에 참여 또는 관여하고 있음으로서 모든 존재자들이 은총을 입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보는 존재론이다. “창조된 실재의 모든 양상은 창조자에게 참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이들에겐 “세속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망상에 불과하다. 이처럼 자율적이고 중립적인 이성을 통해 존재할 수 없는 세속화를 이룩하고자 한 근대의 기획은 근본적 정통주의자들에겐 전적으로 부정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초월으로의 참여’를 주장하는 참여의 존재론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모든 영역이 초월적인 것에 결부되었다면, 실제적으로 이들의 철학함과 신학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다시 말해 여기서 비롯되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그들은 개혁주의와 유사한 목소리를 낸다. 근본적 정통주의는 이 세상에 초월에 근거하는 신학과 관계없는 영역은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 정통주의는 “오로지 비-허무주의적 관점, 심지어 유한한 실재를 지탱해줄 수 있는 그런 관점으로 간주되는 신학적 관점으로 개별적인 문화적 영역을 다시 파악하는 것”을 일차적인 지향점으로 삼는다. 즉, 그들은 “모든 분야가 신학적 관점을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근본적 정통주의는 모든 학문이나 삶의 영역을 초월적인 함축을 충만하게 내포한 신학으로 구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구성이지 연관이 아니다. 그들은 세속의 영역과 신학을 연관시키려고 하는 입장은 절충주의적인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근대가 낳은 중립성과 세속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신학을 통해 삶의 영역을 그 자체로 구성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복원시켜 고안해 낸 근본적 정통주의의 참여의 존재론이라는 입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내가 보기에 이들은 초월적 관점에 기초를 두는 신학에 대한 무한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모든 영역이 신적/초월적 영역에 참여하고 있고, 이를 확실하게 보여주겠다는 이들의 주장은 신학에 대한 엄청난 자신감이 없이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중세 스콜라철학의 입장과는 좀 다르기는 하지만, 신학을 모든 학문의 머리 위에 군림시키려는 의도에 사로잡혀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도 이들은 그 근거를 일차적으로 플라톤 철학에서 찾고 있다. 신학에 무한한 자신감을 보이면서도 그 사상적 근거를 플라톤의 철학에서 찾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신학의 철학에 대한 의존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신학은 그 자체로 순수한 신학인가 일종의 철학적 신학 내지는 신학적 철학인 것은 아닐까? 이 점에서 그들은 신학을 최종근거로 삼고자 하지만, 달리 말하면 참여의 존재론이라는 자기들만의 신학적 철학을 최종근거로 내세운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근본적인 역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참여의 존재론을 무작정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삶과 문화의 신학적 함축과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존재론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기이하고 독단적인 형태의 존재론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점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참여의 존재론은 신학이 과연 얼마만큼 넓은 영역에서 그 궁극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가 하는 문제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단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근본적 정통주의는 일종의 신학으로서의 사회학, 인간학, 정치학, 인간학 등을 탐구하는데 매우 큰 열심을 보인다.

 아울러 플라톤-신플라톤주의-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로 이어지는 참여의 존재론에 관한 철학이야기(narrative)는 또 하나의 효과를 가져다준다. 그것은 밀뱅크의 표현대로, “개혁파 가톨릭주의”(reformed Catholicism)란 기묘한 조합을 탄생시킨다. 그들에게 기독교의 정통은 참여의 존재론이라는 이름 아래 플라톤/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해 있는 교부들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로 이어진다. 통상 가톨릭에서 이러한 신학적, 철학적 사상의 역사를 해석할 때 그 귀결은 자연/은총의 이원론적 도식을 일반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근본적 정통주의는 영역적 의미에서 이원론적 성격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모든 존재자의 초월으로의 참여를 이상적인 모형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원론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일반 가톨릭주의와는 다른 “개혁파 가톨릭주의” 내지는 “대안적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내세운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에큐메니컬적 신학의 단초를 발견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근본적 정통주의는 주목할 만한 흐름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그들의 입장이 던져주는 극단성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 사상사에 관한 새로운 철학이야기를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읽어내는 그들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현대유럽철학이나 현대분석철학뿐 아니라 고대와 중세의 유구한 철학적 전통이 담고 있는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게 된다. 또한 이들이 강조하는 참여의 존재론에 근거한 신학의 확대는 고립적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학에 근거한 새로운 욕망이론이나 교회론, 정치학 등을 정립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현대사상과의 대화를 등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탈근대 철학에 담겨 있는 세속성이 무엇인지를 또한 밝혀냄으로서 그것이 왜 대안이 될 수 없는지를 보여주는 일에 적극성을 보인다. 하지만 과연 세속성이란 틀만으로 탈근대와 근대의 다양한 철학적 기획을 싸잡아 비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간다. 하나의 틀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단순화라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 점에서 이들의 참여의 존재론에 근거한 철학적/신학적 기획은 확고한 자신감과 더불어 일종의 오만함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은가? 중세의 철학이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만들어버렸듯이 다양한 학문 분야를 자기들의 시녀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의혹과 비판거리로 인해 근본적 정통주의를 곧바로 배격할 수는 없다. 그들이 쏟아내는 무수한 작업량과 여타 신학적 입장과의 다양한 대화를 우리는 보다 더 치밀하게 연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가혹한 비판은 그 다음에 이루어져도 충분하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비판 이전에 그들의 통찰에서 배우고 성찰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이들과의 대화이지 대결이 아니다.

제 1회 카이로스 콜로키아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