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진/최경환

제3회 카이로스 포럼 "공공의 적, 공공의 신" 종합토론 정리+현장사진


발표가 끝난 이후 토론을 통해서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정리되면서 수정된 부분도 있고, 더 분명하게 드러난 것도 있었습니다. 토론 시간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을 적어 봤습니다.


1. 이시윤 선생님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비판하는 이들의 논의, 즉 ‘배제된 목소리를 포함해야 한다’든가, ‘대화를 방해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들에 대해서 하버마스는 오히려 적극 수용할 것이라 말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본래 하버마스가 가지고 있던 이상적인 공론장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버마스는 토론과 합의 뿐 아니라 투쟁과 갈등의 담론까지 수용합니다.


2. 하버마스가 18세기 부르주아 공론장을 부각시켰던 것은 그것을 이념화하거나 이상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공론장이 그 순간 잠시나마 그들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가 아닙니다. 즉 하버마스에게 중요한 것은 제약 없는 담론들의 충돌이라는 목표이지 부르주아 공론장이라는 역사적 현상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논점을 약간 벗어난 것일 수 있습니다.


3. ‘하버마스에게 타자라는 개념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이고, 어떻게 나타나는가?’ 라는 어려운 질문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버마스는 타자를 아주 당연하게 상정하고 논의를 시작합니다. 의사소통 합리성이라는 것이 대화 당사자가 없인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니깐요. 하지만 여기서 타자란 이미 생활세계를 공유하고 대화의 조건에 들어온 이들을 말하기 때문에 애초에 목소리가 없는 이들, 말을 할 수 없는 이들은 대화 상대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에게는 레비나스나 데리다가 말하는 전적인 타자에 대한 논의는 부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생각에 따른다면, ‘굳이 공론장이 필요한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가 없는 자들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찾아주고 회복시켜 주겠다는 하버마스와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는 어쨌든 모든 이들을 공론장에 참여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데, 오히려 ‘목소리를 가짐’과 ‘목소리 없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거기에서부터 정의를 도출하려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냐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습니다.


5. 또 다른 질문으로는 ‘공론장이 없는 공공성을 상상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특별히 한국사회와 같이 공론장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어떻게 공공성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역시 어려운 질문이라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6. 하버마스는 토론을 통해 학습효과를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 대부분 싸움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학습효과는 일어난다는 것이 발표자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른 이들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 합의를 도출해 내고 결국에는 제도화까지 성공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대화는 당사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학습의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7. ‘공론장에 참여하기 어려운 하위주체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주제화하는 과정에서 가해지는 폭력은 어떻게 버텨낼 것인가?’ 라는 물음도 제기되었습니다. 또 의도적으로 공론장에 나오지 않으려는 소수자들은 어떻게 할 것이며, 이들을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냐는 질문도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 과정을 무시하고 대화에 참여하기를 꺼려한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 질 수도 있습니다. 역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까 언급했던 레비나스나 데리다에게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8. 한국에서의 공론장은 대화를 통한 상호 학습과정이나 의견의 교류, 혹은 합의나 충돌이 아닌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일방적인 권력 구조에 의한 세력 형성으로 변질 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즉, 교회 내 목사와 성도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가 공론장에서도 여전히 존속하여 단일한 의견만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죠. 역시 한국이라는 상황은 하버마스가 씨알도 먹히지 않는 특수한 공론장이라는 생각에 한 숨만 나왔습니다.


9. 마지막으로, 공론장이라는 공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공론장은 마치 특정한 주체가 특정한 장소에서 ‘누가 참여하느냐 배제되느냐?’를 논의하는 장소가 아니라, 대화 당사자들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발현되는 그 무엇입니다. 다수의 당사자들이 참여해서 함께 만드는 것이 공론장이지, 대화 이전에, 참여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공론장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할 수 있는 사건이자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