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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최경환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과 공공신학



*이 글은 <기독교철학> 19호(2014)에 실린 논문입니다. 초고는 제3회 카이로스 포럼(2014.8.2) 공공의 적, 공공의 신: 한국개신교는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최경환(현대기독연구원 연구원, 남아공 University of Pretoria, M.A(Dogmatics&Christian Ethics) full research 과정)


I. 서 론


  이 논문은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rbermas)의 공론장 개념을 통해 공공신학이 전유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며 그 한계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통해 오늘날 공공신학의 과제와 방법론은 무엇인지를 재고해 보고자 한다. 공론장의 발생과정에 대한 하버마스의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연구는 비판적이고 규범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 공론장에서 도출된 공론이 어떻게 정치적인 세력으로 집결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당시에 존재했던 공론장이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했고, 공론장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을 제한된 정치공동체의 동료들로 간주함으로 다양한 시민들의 의지를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zer)와 아이리스 영(Iris Young)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비판하면서 주변화되고 배제된 자들을 위한 대안적인 공론장을 만들고, 기존의 공론장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제도적 장치들과 편견들에 저항했다.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오늘날 공론장의 범위와 참여의 당사자들을 보다 급진적으로 확장하고 증폭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시민권에 대한 개념이 점차 확대되어 초국가적 세계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이러한 비판은 더욱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1) 공공신학이 다루고 있는 ‘공공성’은 무엇이며, 왜 ‘공론장’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살펴 본 후 2)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3) 이를 둘러싼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4) 마지막으로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을 공공신학이 어떻게 수용하고 적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마치도록 하겠다. 



II. 공공신학의 ‘공공성’과 ‘공론장’


  오늘날 ‘공공성’이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지난 30년간 민주주의 담론과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 속에서 ‘공공성’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그만큼 이 대중적인 단어가 다원화되었다는 말이고, 이로 말미암아 그 개념과 의미가 모호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공적이라는 말은 사적이라는 말의 반대말이다. 삶의 한 측면은 분명 사적인 영역이고, 이 영역은 거의 대부분 은밀하고 친밀한 영역들이다. 이 영역은 공공선이나 보편적인 복지와 같이 타자와는 무관한 영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삶이 공적인 견해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사적인 주장이 공적인 의견으로 둔갑해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지 알게 되면 공공성이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모호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공적인 것’은 ‘국가적인 것’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공론장은 거리시위라든가 촛불집회와 같이 광장에서 시민들이 자신들의 공적인 의견들을 함께 형성하고 표현한 것, 그리고 국가나 경제에 대한 저항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암묵적인 가정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공적인 논쟁, 공적인 만남, 공적인 투표, 공적인 조직 등 공공성에 기여할 수 있는 수많은 실천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공적인 것’은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국가에 대한 책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국가에 충성하고 봉사하기 위해 이러한 공적인 삶을 제공하고 내구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국가는 공적 서비스, 공중 보건, 공공 교통, 공적 사회복지, 공교육과 같은 것을 유지할 책임이 있다. 오늘날 공공성에 대한 담론이 주로 민영화와 시장화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형성될 때, 여기에는 대부분 공공성을 어떤 특정한 속성이나 주체와 연관지어 논의하는 경향이 있다. 즉 ‘누가 공공성의 주체인가?’를 따져 묻는다. 이 경우 국가에게는 공익을 담당해야 할 의무가 있고, 국민들은 공공성을 국가의 책임으로 귀속시키려 한다. 공공성의 담지자는 국가가 되고 거기에 정의라는 가치를 부과하게 된다.


  여기에 공공성의 개념이 가지고 있는 내적 모순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공공성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참여를 통해 국가가 생산하고 주도하는 정책이나 의견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자발적인 결사체의 결과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제시하는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이념적인 선전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다. 또한 공공성을 단순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통의 가치나 공동선으로만 이해할 경우, 그것은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목적 지향적 가치 체계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공공성은 오늘날 시민들이 어떠한 협박이나 위협으로부터 벗어서 서로 비판적인 논의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적인 삶이자, 여론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도출되는 그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적인 삶을 위한 투쟁은 건강한 시민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고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건강한 토대이자 지표가 된다. 


  공공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에게도 ‘공공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공신학에서 말하는 공공성은 복음, 교회, 신학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영역인 공적인 삶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신학은 창조, 역사, 문화, 사회, 인류 전체를 포괄한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위치와 부르심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은 전통적으로 다양한 신학적 주제와 이슈들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교회의 증언과 공적인 역할, 그리고 공적인 삶과 관련된 다양한 물음이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공적인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교회의 사회적 형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주로 다룬다. 이러한 세 가지 주제들은 전통적으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이슈들이었고, 이 모든 형식들이 공공신학에서 다룰 수 있는 것들이다. 후버는 교회가 항상 사회와 정치라고 하는 환경으로부터 초연하게 떨어지려 하면서도 실제로는 얼마나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한다. 한 지역교회의 교인은 자신이 속한 교회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지역사회의 구성원이자, 국가의 시민으로서 존재한다. 인간의 다양한 존재양식과 사회적 멤버십은 서로 교차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럼으로 자신이 알든 모르든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공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처음부터 공적인 삶에 관여했다고 할 수 있고, 공공신학은 세상과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공공신학을 정의하면 여기에서의 공공성은 공론장이라든가 민주주의적인 삶의 핵심인 공공선과 같은 특별한 이상으로서의 아젠다를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한다. 공공신학의 과제를 단순히 교회와 세상의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것으로 규정하거나, 신학은 항상 대중을 상대로 공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동안 기독교세계관이나 기독교사회윤리가 다루던 내용과 변별점이 사라짐으로 그 정체성이 모호해질 수 있다. 따라서 공공신학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는 그보다는 훨씬 실재적인 인식을 제공해야 하는데, 예를 들어, 공적인 삶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과 사회적 형식, 자기 이해, 그리고 교회가 공적인 삶과 세상 속에서 함께 구성해 가는 삶의 다양한 방식들이 여기에 속한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보다 직접적으로 교회와 신학이 민주주의 이후 공적인 영역들에 끼치는 영향을 양방향으로 연구함으로 자신의 관심영역을 좁힐 필요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가 공론장에 참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 탐탁해 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이에 대해 적절한 비판의 근거와 이유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여전히 공적인 영역에 종교가 관여하는 것에 대한 어떤 규범적인 비판을 제시한다든가, 적절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는 모호한 영역으로 남아있다. 다시 말해, 공론장에서 종교의 역할과 지위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참여의 형식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이론적 성찰이 부재하다고 할 수 있다. 공공신학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공론장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공론장 속에서 서로 다른 종교적인 주장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III.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


  오래 전부터 사적인 영역과 구분되는 공적인 영역으로서 ‘시민들의 집단체’ 혹은 공적인 재산, 공적인 업무와 관련해서 ‘국가에 귀속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res publica’라는 단어는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 광장이나 공연장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문화적 퍼포먼스라든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유통시키는 대중, 즉 시민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론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공간, 즉 커피숍이나 클럽에서 부르주아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과 논쟁을 나누면서 공적인 생각이나 의견을 교환하는 공간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 이후 ‘공공성’에 대한 담론은 공적인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여론을 형성하는 공간적인 의미로 좁혀지게 되는데 하버마스는 이를 ‘공론장’(public sphere)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시켰다. 


  공론장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대부분 하버마스가 자신의 교수자격취득논문으로 쓴 『공론장의 구조변동』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근대 서구 사회에서 발생한 공개된 토론장으로 설명한다. 18세기 이후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새롭게 도시의 시민 계급이 부상하고 부르주아 시민 계급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그동안 국가가 주도하거나 특정 지식인들이 생산해 낸 담론과는 다르게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두터운 공공적 의사소통망을 형성했다. 이들은 자발적인 결사체를 만들어 사회생활의 정치화를 이끌어 냈고, 신문을 통해 여론을 만들어 냈으며, 언론자유와 검열에 대한 저항투쟁을 만들었다. 여기서 공론장은 어떤 특별한 공적 장소나 실행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공적인 의견들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정치세력이나 시장에 저항할 수 있으며, 동등한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서로 비판적인 논의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하지만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단순히 공론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탄생이 아니라, 그 곳에서 시민들이 어떻게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고 수렴하는지, 즉 공정한 의사소통의 조건 속에서 사회구성원간의 상호존중과 연대적 책임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규범이 어떻게 도출되는지였다. 하버마스는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들이 공적인 논쟁을 통해 모두의 관심사로 전환되는 방식과 실천적인 정당화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 주목했다.  


  ‘사회적인 것’은 한편으로 삶의 재생산이 사적 형태를 띠게 됨에 따라 독립적 영역으로 구성될 수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사적 부분의 총체로서 공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사적 개인들 상호교류의 일반적 규칙은 이제 공적 관심사가 되었다. 사적 개인들이 이 공적 관심사를 둘러싸고 공권력과 벌이는 투쟁 속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은 정치적 기능에 도달한다. 공중으로 결집한 사적 개인들은 사적 영역으로서의 사회를 정치적으로 허용하는 문제를 공적 주제로 만든다. 


  하버마스는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공적인 의견들이 수렴되고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을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는 과정에 빗대어 설명한다. 사회가 합리성을 갖추게 되는 것은 의사소통을 익히고 배움으로 진화하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다. 이러한 배움의 매커니즘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서로 경쟁하는 결사체들과 생활형식들이 비판과 수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합의를 도출하고, 공존의 지혜를 배우는 곳이 바로 공론장이다. 따라서 하버마스가 공론장의 탄생을 추적하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그것의 발생학적 기원을 탈맥락화시켜 공론장의 규범적 내용이 역사 내재적일 뿐 아니라 보편적 동의라는 도덕적 원칙 아래 종속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의 이념과 공론장 안에서의 정당화 양식의 개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세계관이 더 이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관된 사회적 질서와 규범으로 보편화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사회구성원들은 정당한 사회비판의 규범을 도출해 낼 수 없고 서로의 전제들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민주주의와 사회비판 기획의 규범적 토대로 그 유명한 ‘의사소통 합리성’ (communicative rationality)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하버마스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알려진 ‘의사소통 합리성’은 한마디로 ‘실재는 주체성의 해석이라든가 개별자에 의한 형식이 아니라 의사소통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상호이해를 통한 대화와 실천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언어행위를 통해 매개되는 실천을 통해 생활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규범적 합리성이 펼쳐지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이 세상에 대해서 이러 저러한 해석과 설명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한 상호주체성에 의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사소통 합리성과 생활세계(lifeworld)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세계는 단순히 의사소통 과정의 배경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공통의 이해와 가치를 도출할 수 있는 근원적인 원천이자 근거이다. 


  하버마스는 모든 당사자들이 평등하게 공론장에 접근 가능해야 하고 어느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가 있다. “특정한 집단이 명확하게 배제되는 공론장은 불완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공론장이 아니다. … 공중은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이 속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고려에서 선취하고 있다.” 이렇게 공론장의 가장 중요한 특징 두 가지는 바로 ‘공개성’(open)과 ‘접근가능성’(accessibility)인데, 이는 정보가 모두에게 공개되어야 하고,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권력의 감시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공론장에 접근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이 두 가지 특징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생활세계이며, 그곳에서 공공성을 도출하는 원리를 의사소통 합리성으로 규정함으로 스스로 모순을 만들어 냈다. 왜냐하면 이 생활세계를 공유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진리주장이나 타당성 논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사소통 합리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화자와 청자가 서로 의미가 동일한 언어적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전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데, 하버마스가 제시하고 있는 합리성의 기준에 적합하지 못하거나 다른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공공성이라는 가치가 공개적이지도 접근가능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가 공론장의 발생과정을 부르주아 시민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발생사를 통해 규명하고, 그 작동방식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보편성이라는 이름 뒤에 감추어진 지배계급의 합의과정을 정당화한다든가, 특정한 집단을 배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수행한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하버마스는 부르주아들이 형성한 공론장과 거기에서 도출된 의견들이 자신들의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인해 일방적인 방식으로 여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위험을 모르지도 않았다. 애초에 하버마스의 기획은 공론장을 통해 정치적 저항과 해방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민들의 공론장은 “지배일반이 해체되는 질서”이며, “정치적으로 기능하는 공론장은 권력 그 자체를 토론”에 부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가 공론장에 대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통해 기대했던 것은 다름 아닌 “체계명령이 생활세계 영역으로 식민적으로 침범하는 것을 민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었다. 화폐와 행정권력으로 상징되는 근대국가의 권력장치에 맞서 사회통합의 연대력을 형성하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생활세계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 이를 통해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것이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함의하고 있는 바다.  


  사이토가 말한 것처럼 “공공적 공간은 공사의 경계를 둘러싼 담론의 정치가 행해지는 장소이지, 공공적인 테마에 관해서만 논의해야 하는 장소가 아니다. 무엇이 공공적인 테마인가는 의사소통에 선행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론장을 통해 합의된 공공성은 ‘정치적인 것’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거나 지향해야 할 이상이나 이념도 아니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담론투쟁이라는 사회화 과정 이전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럼으로 공공성은 공론장을 통해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불쑥 튀어 나오는 의견들과 욕구들이 비판과 경합을 통해 걸러지고 다듬어진 진화의 산물이며 고난의 결정체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하버마스는 시민들이 정치적인 주체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 것이고, 그 속에서 합의를 도출해 내는 내적 논리와 윤리적 정당성을 규범화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치 질서는 바로 이러한 공론장에서의 공정한 절차와 과정을 통해 배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적인 토론과 절차적 합리성은 우리들의 의지(voluntas)를 이성(ratio)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하버마스는 비록 오늘날 이러한 공론장의 비판적인 기능과 평등한 참여의 원칙이 축소되어 이전과 같을 수 없다고 아쉬워하면서도, 18세기의 부르주아 공론장이 여전히 비판적인 공적 참여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버마스가 비록 그의 후기 저서에서는 공론장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지만, 이러한 개념들을 보다 확장해서 발전시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는 사회의 합리화에 대한 규범적 관념들, 인간들의 삶이 함께 구성된다는 의사소통 행위론, 정치와 법과 도덕성, 그리고 공공선, 수용과 배제의 공적 실천들의 근간이 되는 공적 담론의 윤리를 강조했다. 한마디로, 그가 주장하는 것은 토의를 통한 형성과 정보의 보존, 다름과 타자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공적 의견 교환이었다.



IV. 하버마스의 비판자들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 사회의 공론장이라고 불리는 구조적 변혁에 대한 하버마스의 역사적이며 구조적인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18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공론장은 하버마스의 연구와는 달리 다양한 주체들에 의한 다양한 공론장이 존재했다는 연구결과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은 하버마스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인정하지만, 그가 사용한 개념들을 다르게 사용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가 현대 민주주의를 비관적으로 보는 관점을 비판한다. 하버마스는 이제 더 이상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처음의 공론장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현대의 대중매체와 인쇄술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인터넷이나 휴대폰, 그리고 사람들을 연결하는 집단적인 세력에 대해 무지했으며, 이를 무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버마스의 프로젝트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은 그가 공론장을 지나치게 규범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는 점에 있다. 공론장에 대한 그의 규범적인 이상은 관념적이거나 실현불가능한 방식이고, 더불어 신체화, 실천, 행위, 상징, 재현, 이미지, 욕망과 같은 현대적인 개념들의 중요성을 인지하기에는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토의적이며, 반성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시 말해,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에는 감정과 신체성, 미디어의 비판적 중요성과 공공선을 향한 인간들의 갈망과 공동체의 삶을 위한 매개체를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나왔다. 이들은 오늘날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에 직면해서 공론장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재고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하버마스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공론장을 이데올로기화했기 때문에 진정한 공론장은 실제로 참여에서 배제된 다양한 계층과 민중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공론장은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 공간은 잘 훈련되고, 평균적으로 부르주아 남성이라는 주류 계층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공간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계층은 통치에 적합하도록 표준화되었고, 이들을 ‘보편적인 계층’이라 명명했다. 그럼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문화와 공론장의 결사체는 하나로 뭉개져 버리고 말았다. 


  프레이저의 비판처럼 하버마스는 실제로 모두가 평등하고 동등하게 공론장에 참여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 할 수 있는 공간을 상정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부르주아 공론장을 이데올로기화시키고, 동시대의 주변인들과 타자들을 공론장에서 배제시켰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의사소통 합리성은 실제로 논의의 전제가 유사한 자들끼리 주고받는 토론이기 때문에 이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공론장과 공동체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다. 하버마스가 추구하고자 한 이상적인 공론장은 갈등과 경합은 축소시키고 로고스중심적인 토론과 소통을 통한 조화와 균형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비전은 삶을 위한 투쟁과 모순을 감추고 결국 공론장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에게는 의사소통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없는 타자들과 그 타자들의 다양한 삶의 양식들을 인식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차원에서 도덕성을 논의할 때에는 삶의 특수한 형식을 다루기가 어렵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절차적 정당성에 근거한 윤리는 다양한 시민들의 욕구와 삶의 양식을 구현해야 하는 구체적인 상황과 현실에서 연대와 협력을 구성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프레이저는 불평등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정치적 발언권의 불평등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르주아 공론장의 근본적인 특징들에 도전하고, 이에 대한 저항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하위주체인 저항적 대중들의 확산이 계층화된 사회 속에서 새로운 대항 공론장을 창출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진정한 공론장은 참여 당사자들이 비록 출신과 주어진 조건이 다르다 할지라도 마치 그들이 사회적, 경제적 동료인 것처럼 여겨줄 때 가능하다. 따라서 대안적인 공론장은 주변화된 여성,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 빈곤층, 종족적-인종적 소수자, 종교적 소수자들을 수용하고, 그들을 동등한 동료로 공론장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공론장을 ‘서발턴 대항공론장’(subaltern counterpublics)이라 부르고, 이들을 통해 기존에 논의되고 있는 공론장과 대등한 대항담론을 창출하고자 한다. 이 대항담론은 자신들의 정체성, 관심, 그리고 필요에 대한 새로운 의제를 제시함으로 정식화된 논의들을 전복시킨다. ‘서발턴 대항공론장’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기존의 공론장으로부터 후퇴해서 이를 재결성하는 것이고, 둘째는 보다 넓은 공론장을 만들기 위해 여론을 훈련시키고 기초를 새롭게 세우는 것이다. 이 두 기능의 변증법이 해방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프레이저에게 참여란 바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공론장에서 말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공론장은 어떠한 문화적 표현의 형식도 용인되고 수용될 수 있는 호혜의 공간이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녀가 제시하는 공론장은 사회적 평등,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참여적인 민주주의가 결합된 공간이다. 


  또 다른 여성 정치철학자인 아이리스 영 역시 기존의 공론장에서 배제된 자들을 통해 공론장을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한다. “공론장은 민중과 권력의 관계를 가장 우선적으로 다룬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이 반대 세력과 책임이라는 가치를 제대로 담아내는 장소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를 살펴봄으로 공론장의 건강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영이 제시하는 공론장은 민중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배경과 관심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소이다. 그녀는 공론장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설득하는 정치적 의사소통 형식을 포괄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대안적인 공론장은 침묵을 강요당한 민중들이 공론장에서 잃어버린 자신들의 목소리를 주체적으로 발화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요된 침묵과 배제의 상황으로 인해 억압을 당하고 해를 입은 집단이 어떻게 자신들의 고통을 공적인 자기표현과 연관련시킬 수 있을까? 스토리텔링은 부당한 취급을 받은 존재의 삭제된 경험과 정의에 대한 정치적 논의 사이에서 이러한 경험을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곤 한다. 


  따라서 영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에 ‘사회적인 것’을 추가해서 그 의미를 보다 크게 확장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그녀는 사회적인 것을 ‘성가신 것’, ‘귀찮은 것’, ‘어질러진 것’이라는 의미의 “messy”를 사용해서 표현한다. 사회의 갈등과 투쟁의 요소들을 감추거나 덮어두지 말고 보다 더 분명하고 활발하게 드러냄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분출시키자는 것이다. 영은 사회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선 국가가 시민사회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공적 담론은 보다 더 “성가시고,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고, 장난스럽고, 감성적으로” 만들어 한다고 말한다. 


  결국 공론장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 어떤 내용을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공적 담론의 진정성은 포괄성의 범위와 그것을 실현시키는 참여자의 동등성을 얼마나 비판적으로 구성하고, 이를 제대로 구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이는 하버마스가 제시한 공론장의 조건이었던 ‘개방성’(open)과 ‘접근가능성’(accessibility)를 보다 급진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프레이저는 공론장의 규범성을 ‘포용성’(inclusiveness)과 ‘동등한 참여’(equal participation)라는 두 개의 기준으로 재설정한다. 공론장은 공공성에 대한 다양한 담론투쟁의 다양성을 모두 수용하고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하며, 누구든지 동등하게 수용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V. 공공신학과 공론장


  공공신학의 정체성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은 그 개념 규정의 모호성만큼이나 다양하다. 공공신학의 목적, 신학적 근거 혹은 ‘공공성’에 대한 의미 규정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공신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 자체가 공공신학에 대한 담론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이자, 그 내용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신학자들이 공공신학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방식 자체가 신학적 공론장에서 하나의 의미 있는 신학활동이면서 동시에 실천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공공신학’이라는 말은 마티(Martin Marty)가 1974년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eibuhr)의 사상을 연구한 논문(Reinhold Niebuhr: Public Theology and the American Experience)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티는 이 논문에서 니버가 이후에 전개된 모든 공공신학을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이 용어는 다시 트레이시(David Tracy)에 의해서 차용되었는데, 1981년에 출판된 ‘유비적 상상력’(The Analogical Imaganation)이라는 책은 이 분야에 하나의 기념적인 작품이 되었다. 트레이시는 신학이 다른 분과학문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고 대화할 수 있는지를 질문했고, 신학이 어떤 의미에서 공적인 담론에 학문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트레이시가 밝히고자 한 것은 공적인 삶 속에서 신학이 단순히 윤리적인 이슈들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학문으로서의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신학이 공적인 담론 속에서 허용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트레이시는 이러한 신학적 아젠다를 통해 어떻게 기초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실천신학이 진정한 공적 담론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특별히 리차드 니버와 하버마스가 이러한 아젠다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트레이시에 따르면, 대화 당사자 간에 (속임수가 없는) 진정한 대화와 의사소통을 통한 비판적 이성의 해방적인 능력을 강조한 하버마스의 실천적 이성은 신학의 공공성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특별히 트레이시가 제시한 신학의 공적 영역은 ‘교회, 학문, 사회’ 인데, 모든 신학은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유의미한 담론을 제공해야 하고, 이들의 관심사를 포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학의 공공성은 특정한 전통이나 도덕성이 아닌 비판적인 기준을 갖춘 보편성을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 “신학이 보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것이 단순히 진리를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적인 신념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논증의 형식을 취해야만 한다.”   


국내에 널리 소개된 스택하우스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공공신한 연구소장으로서 공공신학을 가장 대중적으로 소개한 신학자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신앙은 철학이나 타종교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의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진정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신앙이 비판적인 검증을 통해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인간이 창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섭리의 은총 속에서 그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이 모든 것이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공적인 영역으로 나가야 하며, 이 세상의 영혼과 문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   

  스택하우스에게 진정한 신적 현실은 반드시 보편적 현실이어야 하고, 신학자는 이 현실을 보다 간문화적인 연구를 통해 적절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신학은 윤리, 법, 사회의 각 영역에서 모든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스택하우스는 보편성과 합리성을 공공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삼는다. 공공신학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형식을 가져야 함으로 이는 개인적인 경건이나 교회 중심의 신학이 아닌 교회와 공론장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스택하우스가 말하는 공공신학은 기독교의 진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변증적인 성격을 취하게 된다.   


  따라서 트레이시나 스택하우스에게 ‘공공성’은 ‘보편성’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처럼 쓰인다.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합리성이라는 검증 기준을 통과해야 하며, 합리적인 언어로 번역 가능해야 한다. 공적인 학문의 영역에서 신학은 과학적인 방법론을 선택해야 하고,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방법으로 신앙의 확신을 만들어야 하며, 이러한 논증은 논리적 정합성, 일관성이라는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보편성에 근거한 공공신학을 오히려 정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트레이시처럼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위탁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전통과 유산을 추상화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 공동체에 정직하지도 않고 비판적인 태도도 아니라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태도는 학문의 영역에서도 전혀 정직한 태도가 아니다. 이들은 신앙의 언어가 합리적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위험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신학이 공론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들과 다른 공공성과 합리성, 그들과 다른 현실 이해를 진지하게 수용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만약 이 과정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공공신학은 자신들의 주장과 세계 이해를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고집스럽게 관철시키려는 권력의지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신학의 보편성이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해소되고 설명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찰하지 않는다면 공공신학은 소통과 대화를 강조하다가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하거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소명이 세상의 현실을 압도하는 전체주의적 기획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반면, 공공신학을 보편성과 합리성, 세속화,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맥락에서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와는 달리, 신앙과 공적인 삶의 관계를 보다 갈등적이고 투쟁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그루치(John W. de Gruchy), 꾸프만(Nico Koopman), 말루레케(Tinyiko Sam Maluleke)와 같은 남아공의 신학자들은 보편성에 근거한 공공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신학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저항 담론에 집중한다. 이들은 공공신학이 사용되고 있는 맥락과 상황을 강조함으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신학의 초월성을 비판한다. 따라서 이들은 보편적인 공공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꾸프만은 남아공이라는 상황 속에서 공공신학은 경제정의, 보건복지, 인종주의, 범죄와 생태학과 같은 사회적 이슈들을 적절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아공에서 공공신학은 억압과 탄압의 역사로부터 논의를 시작해, 해방 이후 남아공의 민주화를 위한 권력과 사회재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뤄야 한다. 즉,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해방 담론이 민주화 이후의 다양한 공적 이슈들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 변혁, 혹은 재구성 되어야 하는지를 다각도로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남아공의 신학자들에게 공공신학의 과제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국가 질서에 저항하고 새롭게 국가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루치는 남아공의 공공신학이 북미의 공공신학과 다른 점은 고통 받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들을 돕기 위한 신학을 전개하는 것, 그리고 공적 영역의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말한다. 또 다른 남아공 신학자인 말루레케는 보다 근본적으로 “과연 공공신학이 오늘날 남아공의 현실을 담아내기 위한 가장 적합한 신학인지를 근본적으로 물어야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 땅에 여전히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폭발하고 있는데, 과연 공공신학이 이들에게 어떤 대안과 대답을 제공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 그는 공공신학이 지나치게 보편적이고 통합적이며, 지나치게 포스트모던적이고 사해동포적이기에 이러한 현실을 다루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말루레케가 지적한 것처럼 아직도 투쟁의 상황 속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공공신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공공신학이라는 용어가 이런 투쟁적인 의미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런 관점은 오늘날 평화롭고 민주적인 조건 속에서만 공공신학을 연구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본래 하버마스가 기획한 공론장은 역사적인 발생과정으로부터 떼 내어 공론장의 규범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고, 이러한 공론장은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이라는 해방적 이념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갖고 있었다. 시민들의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토론은 그 자체로 해방적인 기능을 공론장에 내재화시킨다.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의 의미가 본래 어떠한 협박이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시민들이 서로 비판적인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공적인 삶을 만들기 위한 끊임없이 투쟁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남아공 신학자들의 논의를 하버마스의 공론장과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스미스(Dirkie Smit)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통해 시민들의 자유와 존엄성을 파괴하는 남아공의 국가 질서와 경제 정책을 비판한다. 그에게 공공신학은 인종주의의 비합리성을 비판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감춰진 억압의 형식들을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스톨라(William Storrar)와 아더톤(J. Atherton)과 같은 영국의 공공신학자들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으로부터 공공신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도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적극 수용한다. 스톨라는 공공신학이 공적 이슈에 대한 공적 의견들이 서로 순환하면서 정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하버마스의 개념을 수용하지만, 공론장에 대한 영의 비판을 수용해서 공공신학의 목회적 과제는 “이야기와 통곡을 통해, 그리고 비판적인 사회 분석과 신학적 성찰을 통해, 배제되고 침묵을 강요당한 다양한 억압자들과 주변화된 이들의 공적인 분노를 표출시키고 치유하고, 구성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교회의 사명은 낯선 자들을 만나는 것이며, 선한 시민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구촌 공론장에서 선한 이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찰하고 이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목회적 공론장은 의사소통 합리성의 다양한 형식과 다원주의를 환영하고, 동시에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함으로 버림받은 공공성을 다시 회복하고자 한다.   


아더톤 역시 영의 대안적인 정의론을 수용하고 이를 공공신학과 연결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신학자들이 공론장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자들에게 집중함으로 “포용성을 향한 편견”(a bias for inclusivity)을 공리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편견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편견이며, 이들을 위한 사회와 이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는 공공신학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내용들이 결국에는 차이와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연대와 연합의 정치체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공공신학의 가장 큰 과제이자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을 담아 낼 수 있는 ‘구별된 연대’(differentiated solidarity)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며, 공론장의 주변부와 주변화된 이들을 기독교와 어떻게 연결해서 재구성할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이다. 결국 공공신학의 중요한 테마는 보편성과 특수성, 차이와 연대를 어떻게 적절하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전적인 물음으로 다시 회귀한다. 


VI. 결론  


  공론장은 본래 이기주의나 개인주의에 대항해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 없이 접근 가능한 공동의 공간을 이상적인 이념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공론장에서 정상적인 시민이라고 간주되는 특정한 집단이 정의의 당사자로 상정되고, 이들이 말하는 공공성은 그 밖의 다른 주체들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많은 경우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는) 소수자는 정의의 원칙에서 배제되고 정당한 권리조차 박탈당하며, 자신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드러낼 수 없는 분리와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정상인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각되어 결국에는 공론장 뿐 아니라 공동체에서도 추방당하게 된다. 여기에서 배제와 추방의 논리로 사용되고 있는 공공성은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거나 다수가 공감하고 있는 가치를 좋은 것이라고 섣불리 인정해 버리는 천박한 공리주의에 다름 아니다. 공론장에서 포용이 아닌 배제의 원리가 작동하는 순간 공공성은 폐쇄적인 집단적 배타성으로 돌변하게 된다.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그래서 공공성의 경계에 대한 끊임없는 담론투쟁으로 이어져야 하며, 공론장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접근을 급진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사이토는 이런 의미에서 공공성은 ‘욕구 해석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정치는 어떤 필요나 욕구를 공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가족 등에 의해 사적으로 충족되어야 한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의 정치이다. 공공성은 바로 이러한 ‘욕구의 정의’를 둘러싼 담론투쟁이어야 하는데, “새로운 욕구 해석의 제기는 새로운 자원의 배분을 청구”하기 때문이다. 개개인들의 욕구가 모두 법정적인 언어로 번역이 된다든가, 합리적인 언어로 해소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하나의 권리가 되어 공론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되고 수용된다면 기존의 공론장에서 배제를 경험한 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이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정당한 분배라든가 공정한 정의의 원칙에 포섭되는 절차적 합법성 이전에 자신들의 욕구가 대중들에게 승인되고,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목소리로 인정을 받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론장은 다양한 상황 가운데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무시당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의사소통 합리성’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유연하고도 넉넉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론장의 중요한 정치적 가치는 바로 ‘배제에 대한 저항’이다. 즉, 공론장은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공간이며, 사회가 만들어 낸 은밀한 배제의 구조로부터 밀려난 자들을 위한 자리까지 마련해 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이토는 외부로부터 부여된 자신의 정체성과 필요에 저항하고 사회적 편견과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삶의 존재 방식을 긍정적으로 다시 설정하고, 다시 해석하는 것이 바로 대항적 공론장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프레이저는 흥미롭게도 대항적인 공론장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브룩스-히긴보탐(Brooks-Higginbotham)의 연구를 소개하는데, 그녀는 1880년부터 1920년까지 미국에서 흑인 여성들이 자신의 공론장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분석한다. 브룩스-히긴보탐에 의하면 그 시기에 흑인들은 투표권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백인들로부터 배제를 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대안적인 공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흑인교회였다는 것이다. 공론장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흑인들은 교회에서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었고, 다양한 목소리를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암울했던 미국의 공론장의 역사에서 교회가 한 줄기 희망을 제공했고, 흑인들의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공공신학은 구체적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새롭게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신학을 구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교회를 통해 가시화된다. 그리고 교회는 사회 속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위해 대안적인 공간을 새롭게 창조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을 넘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고 하나님의 은총(선물)을 세상에 증언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낯선 자로 존재하며, 동시에 낯선 자들을 맞아들이는 장소가 된다. 우리가 공론장에서 만나는 낯선 자들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의 정체성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게 해 주며,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개방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타자의 자리에서 타자의 권리와 자유를 변호해 주고, 그들의 차이를 인정해 주려는 노력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공적 사명일 것이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보편적인 로고스의 폭력을 폭로하고, 공론장으로부터 박탈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목소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참고문헌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