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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Francis

춤이 된 세월호

 

 

 

  작성자: Francis

1. 들어가며

 2014416일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후 국내외의 많은 곳에서 시위와 집회, 온라인상에서의 운동과 광화문광장에서의 유빈아빠의 단식, 김홍술, 방인성목사의 40일 단식과 일반시민들의 릴레이 단식, 영화인들의 성명서 발표, 문인들의 팽목항 방문등 많은 시민들과 단체들이 각자 모습으로 세월호 사건의 정의로운 처리를 위해 힘쓰고 있다. 이런 여러 모습들은 단순히 시위와 집회라는 고전적 개념으로만 틀 지우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무엇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다른 이름은 또한 어떤 의미를 줄까? 

 

2. 사회의 춤

춤을 추상적 움직임의 연속이라고 이해한다면, 사회에서 계속 이어지며, 공명하는 모습은 사회의 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춤은 한을 풀어내는 살풀이 춤이라고 볼 수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계획되지 않은, 그러나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으로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즉흥 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춤인가가 아니라, 춤으로 발현되는 바로 그 무엇이다.

세월호 사건과 그 처리 과정에서 드러난 국가의 민낯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이 경험한 무시(disrepect)의 경험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자리 매김을 했다. 이 사건 이후에 더 많은 국민들은 국가가 국가적 재난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처리 과정 중에 있는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이 트라우마는 개개인이 다양한 모습으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이어지며, 공명하는 이야기와 몸짓의 춤은 이 직간접적인 트라우마로부터 프로이트가 말한 삶을 견디어내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사회의 춤은 세월호 사건의 정의로운 처리를 촉구하는 동시에 세월호사건과 이 처리과정으로부터 비롯된 트라우마를 견디어내는 처방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이 이중적 의미는 단순히 집회와 시위라는 법권리의 용어가 담지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의 춤은 세월호 사건을 중심으로 세월호 사건의 당사자와 비당사자, 국내인과 국외인, 성인과 비성인, 부모와 비부모등 여러 차이에 있는 봉합되지 않는 이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라끌라우의 말을 거칠게 빌리자면 접합연쇄’(chains of equicalence)를 창출하는 힘이 된다. 세월호 사건의 정의로운 처리는 이념적 대립이 형성되는 장이 아니기 때문이, 오히려 다양한 계급과 차이를 지닌 사람들이 계속 이어지며 공명하는 연대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 정의로운 처리는 무시를 반박하는 도덕적 반론이기도 하다.

 

3. 다시 헌법을 펴보자

   헌법은 총130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자.

7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10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29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 경우 공무원 자신의 책임은 면제되지 아니한다.

30조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

37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국가권력의 작동방향을 설정하고 있는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은 위에서 보듯이 국가로 하여금 국민의 보호책임을 여러 조문에서 여러 차원으로 부과하고 있다. 그리고 헌법의 수호를 위해 헌법재판소를 두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헌법재판소와 헌법 사이의 영역이다. 즉 위헌에 이를 정도는 아니지만, 헌법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경우이다. 즉 헌법의 최고 보장은 아니지만, 헌법의 위반까지 이르지 않은 영역, 즉 헌법 위반에 가까이 이르렀지만, 헌법위반의 문턱을 넘지 않은 헌법의 제대로 된 작동이 아닌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헌법재판소는 무용지물이다. 사실 헌법과 헌법실현의 국가의 책무사이의 간격을 보충하는 것이 정당에 부여된 책무이다. 그리고 선거를 통하여 이 책무에 대하여 심판을 한다. 하지만 선거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겨우 4년 또는 5년에 한 번 주어진 어떻게 보면 형식적인 권리이기도 하다. 형식적인 권리를 실질적인 권리를 만들기 위해, 이 위임된 권한을 철폐하는 권리인 탄핵이나 주민소환제도등이 활성화되는 것이 민주주의 내실을 다지며 제도차원에서 실질화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대한민국 법체계 안에서 이런 권리들은 매우 미약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 중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책임을 묻는 방법밖에 없다. 이 정치적 책임은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공무원의 사임 등이 최소한의 방법이지만, 사표를 냈던 위기관리책임자 중 한 명인 총리는 위기상황을 추슬러야 한다는 코메디 같은 이유로 슬며시 사임한 총리를 복귀 시켰다.

이런 일들은 나름 앞에서 제시한 그러한 코메디 같은 이성적 근거를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이 이성적 근거지음이 정말 이성적 근거지음인가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 주장이 얼마나 빈약한 주장인지는 이미 많이 논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헌법책무에 반하여 주장되는 이와 같은 이성적 주장들이 사실은 국민구성원의 대화를 가로막는 아도르노의 용어의 빌리자면 동일성의 강제로 변환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국가경제활성화, 국가안전, 민생법안 처리등은 사실 세월호 사건과 아무런 관련성도 없고, 따로 처리할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을 통해 국가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국가의 본질인 국민을 폐기처분하는 행위는 국민 없는 국가통치권자를 위한 국가를 지향하는 70년대 독재의 시대와 무엇이 다른지 많은 국민으로 하여금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런 의구심에 대한 대답의 책임은 언제나 정권을 가진 자에게 있으며, 여당에게 있다. 국민은 물을 자유가 있으며 정부와 여당은 답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침묵과 배제 그리고 동문서답은 이어지고 있다.

 

4. 국가의 춤

이런 차원에 이루어지는 모습은 마치 국가의 고장 난 춤을 보고 있는 듯하다. 사실 고장 난 춤은 실패한 춤으로서 춤으로 성립하지 못한다. 국가의 춤은 질서의 춤으로서 관람하는 국민으로 하여금 예측가능한, 한 사회의 이상향인 헌법을 준수하는 춤을 출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춤은 시민의 춤과 달리 즉흥춤으로 이루어 질수 없다. 시민의 춤과 달리 국가의 즉흥춤은 자의적인 춤이고 혼자 추는 독재의 춤이기 때문이다. 시민은 자유가 있지만, 국가는 자유가 없다.

사실 춤은 cogito와 같은 생각하는 자아를 넘어선 새로운 자아상을 제시한다. 생각하는 자아는 춤을 출 수 없다. 생각하는 자아는 이드에 충실한 자아이고, 이드에 충실한 자아는 국가의 차원에서 법에 집착하는 자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법에 집착하는 자아는 법실증주의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법의 형식적 적용에 집착하는 자아이다. 하지만 춤은 초자아와 이드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세월호의 정의로운 처리를 위한 수사권과 기소권의 보장은, 특별법을 필요로 한다. 이 특별법은 현재 없는 법이다. 하지만 정의로운 처리를 향한 열망 즉 초자아의 요구는 법의 형식적 수호가 아니라, 헌법이 지향하는 이상향의 가치에 맞게 새로운 법을 입법하게 만든다. 사실 현재에도 무수히 많은 법이 새로 입법되거나 수정 폐지되고 있다. 따라서 세월호 특별법이 왜 가능하냐가 아니라 왜 이 법은 새로 입법될 수 없는가? 를 물어야 한다. 법의 형식을 고집하는 국가의 몸짓인 저 고장난 춤, 법형식을 전면에 내세워 법의 실질적 내용인 정의를 외면하는 국가의 저 몸짓에, 사회의 춤과 시민의 춤이, 저 이어지며 공명하는 아름다운 몸짓이 춤이 되어 묻고 있다.

사회의 춤에 국가가 들어와 함께 춤출 것인지, 아니면 아무도 박수치지 않는 기이한 몸짓을 혼자 아름다운 춤이라 여기며, 무대에서 사라질 것인지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