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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사유의 치밀함과 탁월한 수사학이 결합되어 있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이 책의 구성과 서술은 (보드리야르의 개념을 이용하자면) 합리주의적 도식주의가 '내파'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시대에 걸맞게, 학술 논문 식으로 되어있지 않다. 이 글에는 추상적인 논의와 구체적인 문화비평이 마구 뒤섞여 있는데, 어쩌면 이것은 철학과 문화비평 사이의 '구분'을 사라지게 한다는 점에서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주장하고 있는 '비구분'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드리야르는 이 책을 통해서 급진적인 사유실험을 전개하는데, 급진적 사유실험은 단순히 태도의 '과격함'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치밀한 지성을 요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실험은 보드리야르에 의해 세련된 문체로 표현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추상과 구체의 뒤섞임이 이론적 능력이나 글쓰기 능력의 빈곤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상과 구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높은 수준의 이론적 능력과 이것을 세련되게 표현할 줄 아는 글쓰기 능력에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가 분석하고 있는 수많은 구체적 문화현상을 보여주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미로에 빠뜨리게 할지도 모르므로 이 글은 <시뮬라시옹>에서 나타나고 있는 추상적인 논의의 얼개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작성되었다.

 

2.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스펙타클의 사회>와 연관 짓지만,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스펙타클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의 기 드보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디어-권력이 사회를 '무대의 사회'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보드리야르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러한 '무대적인 것'은 폐기되고 있다고 말한다.

보드리야르는 기 드보르의 "TV가 우리를 소외시키고 수동적인 '관객'으로 만든다"는 주장에 대해 TV라는 매체는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 주체와 대상, 목적과 수단, 원인과 결과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히 주체와 대상의) 비구분 속에서 원근법적인 '전체투시적인(, 무대적인) 체계'는 사라지고 대립되는 두 극의 구별 속에서만 생산되는 의미 또한 사라진다. 전체투시적인 체계의 사라짐은 TV가 절대적인 시선을 확보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TV가 무기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감시 통제의 전체투시적 장치"에서 "저지시스템"으로 TV 시스템이 새롭게 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저지 시스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정보이다. 당신이 사회적인 것이다. 당신이 바로 사건이며, 당신과 관계되어 있으며, 당신이 말을 가지고 있다."(장 보드리야르, 하태환역, <시뮬라시옹>(민음사, 2001),p.71)

 

따라서 이것은 절대적인 조작인데, 이것은 TV라는 주체가 대중이라는 대상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작의 주체/대상을 결정지을 수 없는 조작으로서의 절대적 조작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대중 자신이 대중을 조작하는 데에 어느 정도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 투시적, 원근법적 체계의 사라짐은 재현의 질서가 붕괴되고 시뮬라시옹의 질서가 그것을 대체함을 뜻한다. 더 이상 진실은 원근법적으로 재현된 진실이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 '절대적인 조작'의 산물인 '조작적인 진실'이다. 대중매체는 이러한 '절대적인 조작' 안에서 실재를 파생실재로 변환시킨다. 그리고 오늘날 이러한 대중매체에 의해 재현되어야 할 '진짜 실재'는 사라졌고 오직 '조작적 실재'로서의 파생실재만이 남았다.

 

"실재는 이제 조작적일 뿐이다....실재는 대기도 없는 파생공간 속에서 조합적인 모델들로부터 발산되어 나온 합성물인 파생실재이다."(p.16)

 

3.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권력은 '구별' 혹은 '대립'을 통해서 의미를 생산해냄으로써 작동하는데, 오늘날 이러한 '구분'은 파괴되어 항들이 서로 겹쳐서 미분화된 상태를 향하게 되므로, 권력은 치명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나 대립은 의미의 생산을 가능케 함으로써 권력을 작동시키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보드리야르에게 있어서 유일한 저항방식은 "의미의 거부"이며 이것은 대중들이 이미 행하고 있는 것으로서, 대중들은 '무응답'하고 "거울처럼 의미를 흡수하지 않고 되돌려 보"냄으로써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p.153)

다시 '구별'의 문제로 돌아가 보면, 권력은 '구분'을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구별이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권력은 '허구의 구별'을 생산해낸다. 물론 실재와 시뮬라크르의 구별도 이러한 구별에 속한다. 권력은 오직 '실제' 범죄만을 처벌할 수 있고 범죄의 시뮬라크르, 범죄의 시뮬라시옹은 처벌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 범죄'는 이미 발생하기 이전부터 대중매체의 의례를 통해 반복적으로 보여진 것이 정확하게 또 한번 반복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시뮬라크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실재와 시뮬라크르를 구별할 수 없고 실재 자체는 하나의 시뮬라크르이다. 뿐만 아니라 보드리야르는 법과 질서 자체가 하나의 시뮬라크르 라고 주장한다.

권력이 이러한 실재/시뮬라크르의 허위적 구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은 기호학적으로 표현하면 '실재'로서의 지시대상이 존재한다는 허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이제 '파생실재'로서의 인위적인 지시대상을 생산함으로써 작동하기 시작한다.

 

"대상과 실체가 사라져버린 그곳에, 그들에 대한 형상적인 부활이 행해진다. 물질적 생산의 광란과 평행한 상위 단계에서 실재와 지시물의 광적인 인위적 생산: 이렇게 나타난 것이 우리가 해당하는 단계 속에서의 시뮬라시옹이다."(p.28)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생산된 실재와 지시물은 파생실재이자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권력은 이러한 '광적인 생산'을 통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권력은 한정된 실재와 한정적인 지시물적인 것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 반면에, 시뮬라크르는 진짜실재와는 무관하게 무한히 증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뮬라시옹의 이처럼 무한한 연쇄적 발발 위에서는, 실재의 중력 법칙에는 더 이상 복종하지 않는 무중력의 성운 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p.57)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권력은 치명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시뮬라시옹의 과정 속에서 자본조차도 일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자본은 사실성을 썩도록 만들고, 추상의 과정 속에서 지시물적인 것을 파괴함으로써 작동해 왔지만, 오늘날 이러한 사실성과 지시물의 상실 속에서 자본은 위기를 맞는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은 오늘날 인위적인 사실성을 주입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성의 기호들만을 증폭시키며 시뮬라시옹의 유희를 가속화할 따름"(p.58)이다.

 

4.

이것은 오늘날 한국의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자연스러움''인위적이지 않음', '현실성'을 가장하지만, 이러한 지시물적인 것과 사실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지시대상과 '실재'가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사실성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대중매체 또한 "사실성의 기호를 증폭시키며 시뮬라시옹의 유희를 가속화"한다.

또한 우리는 오늘날 대중매체에 의해 '자연스럽게' 참여하라는 또는 '자연스럽게' 말하라는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꾸밈 없는 인터뷰, 자연스러운 말, 청취자 전화, 모든 방향의 참여, 자연스러운 말을 하라는 협박"(p.145)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역설적으로 '자연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의 기호'를 생산해내는 시뮬라시옹의 과정 속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짜 '자연스러움'을 생산해내는 것은 역설적으로 진짜 '자연스러움'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은 한국적 상황에서 이른바 가식과 허위의식, 그리고 문화에 의해 구축된 나를 넘어서, 자연스럽고 '진실한' 자아를 찾으려는 '강신주 현상'을 통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참여'가 사실상 의미를 연출하기만 하면서 의미를 소진시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참여가 생산해내는 것이 '자연스러움'의 효과를 자아내는 시뮬라크르이자 파생실재의 지겨운 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5.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매체들은 대중들의 조작에 있어서 권력의 편인가, 혹은 의미의 제거에 있어서, 의미에 가해진 폭력 속에서 그리고 미혹 속에서 대중들의 편인가?"(p.151)

 

지금까지의 우리의 논의를 살펴보면, 대중매체는 조작적 진실을 생산해낸다는 점에서는 권력의 편이고, 의미를 사라지게 한다는 점에서는 대중들의 편인 것 같으나, 현대사회에서 권력과 대중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조건을 이루기에, 권력의 편과 대중의 편은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대중매체는 양 편 모두에 속하면서도 양편 모두에 속하지 않는다.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조작하며, 아무도 이러한 진행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뫼비우스적이고 순환적인 어떤 논리에 따라 체계의 내적인 시뮬라시옹과 체계의 파괴적인 시뮬라시옹을 운반한다."(p.151)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에서 대중매체를 논할 때, 맥루한의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공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공식은 매체가 담는 내용보다 매체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인데, 보드리야르는 충분히 급진적인 이 공식을 끝까지 밀어 붙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공식은 "한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실재의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것으로의 매개적 운반자"(p.149)로서의 매체 자체의 증발을 의미한다. 따라서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공식은 매체 자체의 종말 또한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의 종말은 "즉각적인 유일한 하나의 모델만이, 동시에 메시지와 매체 그리고 <실재>를 생산한다"(p.148)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델 속에서 매체와 (파생)실재는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매체와 실재가 차후로는 그 진실 속에서 서로 분리 불가능한 단 하나의 성운이기에..."(p.149)

 

6.

이와 같이 <시뮬라시옹>에서 나타나고 있는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철저히 '비구분'의 사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기호체계'의 차원에서 원인/결과, 주체/대상, 능동/수동등의 상호 대립하는 것들의 구별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것은 담론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대립되거나 반대되었던 담론들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서로 섞인다.

 

"모든 지시물적인 것은 그들의 담론을 순환적이고 뫼비우스적인 강박 속에서 섞는다....옛날에 역사에 대한 담론은 자연의 담론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힘을 취하였고, 욕망의 담론은 권력의 담론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힘을 취했다. 오늘날 그들은 그들의 기표들과 시나리오들을 교환한다."(p.52)

 

이처럼 보드리야르의 '비구분'의 사상 속에서 '뫼비우스'라는 단어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것은 한 극과 이에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극이 실제로는 구별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 정치에서 좌파는 우파를 대신해 체제의 '정상성'을 회복하라고 외치며, 우파는 좌파의 슬로건을 훔쳐 와서 선거에 활용한다. 좌파와 우파라는 양극은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는 것이다.

 

7.

그런데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다음이 이미지의 연속적 단계일 것이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p.27)

 

이렇게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구별'짓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통시적/시대적 구별'은 필요한 것이고, 논리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재현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와 시뮬라시옹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의 단계는 순수 재현의 사회에서 순수 시뮬라시옹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거치는 단계들이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마지막 문장에서 '시뮬라크르''사실성''구별'짓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사실성은 인위적인 것과 무관한 원초적 사실성이라고 볼 수 있고,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사실성은 존재하지 않지만,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것과 연관된 파생사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보드리야르가 실재와 시뮬라크르들이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오늘날의 실재가 사실성을 갖지 않고, ‘파생사실성을 가지기 때문인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또한 시뮬라크르를 다음과 같이 구별짓기도 한다.

우선 첫 번째로: "이미지, 모방, 위조 위에 세워지고, 조화로우며 낙관주의적이고, 신의 이미지에 따라 자연의 이상적인 회복과 그 이상적인 제도를 목표로 하는 자연적이고, 자연주의자들의 시뮬라크르들."(p.198) 이러한 시뮬라크르들에는 유토피아가 대응한다. 이것은 서구 기독교적 전통에서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의 요청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로: "에너지와 힘 위에, 기계에 의한 물질화 위에, 그리고 모든 생산시스템 속에 세워진 생산적이고 생산주의자들의 시뮬라크르들-끊임없는 에너지의 해방과, 세계화 그리고 지속적인 팽창의 프로메테우스적 목표."(p.198) 이러한 시뮬라크르에는 본래적 의미의 SF와 근대적 산업자본주의가 대응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조차도 '생산력의 해방'을 외친다는 점에서 두 번째 종류의 시뮬라크르의 질서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종류의 시뮬라크르들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세 번째 종류의 시뮬라크르들은: "정보, 모델, 정보통신학적 게임 위에 세워진 시뮬라시옹의 시뮬라크르들-완전한 조작성, 파생실재성, 완전한 통제 목표"(p.198)이러한 시뮬라크르에는 이른바 '탈근대적인' 정보 자본주의가 대응된다.

각각의 시뮬라크르들의 질서는 목표로 하는 것이 각각 다르게 존재한다. 그리고 첫 번째에서 두 번째로,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이동할 때마다 이러한 목표로 하는 세계와 이른바 '현실세계' 사이의 거리가 감소한다.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것은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이므로 '목표로 하는 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거리는 두 번째 종류의 시뮬라크르의 질서에서 거리는 현저하게 감소한다. 왜냐하면 이 두 번째 시뮬라크르의 질서는 "생산의 실제 세계를 과도하게...투영"(p.199)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 번째 시뮬라크르의 질서에서는 이러한 '거리'가 완전히 제로가 된다. , 세 번째 시뮬라크르들의 질서에서 목표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생산해내고 이러한 목표와 일치하지 않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은 정보통신학적인 의미에서 프로그램 되어 있고, 이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는 실제의 우발적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뮬라크르들의 질서에 의한 프로그램 속에서 권력의 내파는 예정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은 통제회로의 과다 증식에 의해 스스로 내파한다.

이러한 세 번째 시뮬라크르들의 질서가 지배적인 현대사회에서 상상을 통한 자연적인 것이나 인위적인 것의 재현 또는 투영은 끝나버렸다. 따라서 재현적 상상세계는 사라졌고, 모델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파생실재를 생산해내는 시뮬라시옹의 사회가 바로 현대 사회인 것이다.

 

8.

이처럼 보드리야르는 급진적인 사고를 전개하고 있지만, 우리는 보드리야르의 사유실험을 더욱 급진화시켜야 한다. 보드리야르의 사고에 있어서 의미=권력, 무의미=저항이라는 등식들이 성립하는데, 이것은 타당한가? 이렇게 의미무의미를 선험적으로 구별짓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기호들 사이의 구별을 통해 의미를 생산해내는 권력 이전에, 의미의 영역과 무의미의 영역을 구별 짓는 원()권력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기호가 이러한 의미의 영역, 즉 무의식적, 의식적 관심의 지평에 등록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기호는 무의미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관심의 지평으로서의 의미의 영역에 속한 기호만이 다른 기호들과의 구별을 통해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지평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의미와 무의미를 구별 짓는 권력으로서의 원()권력이다. 이렇게 의미와 무의미를 나누는 것 자체가 권력에 속하므로 우리는 무의미=저항이라는 등식을 유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저항은 끊임없이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시뮬라시옹>에서 전개되고 있는 비구분의 사상을 더욱 급진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글_ 김상범: 고등학교 때 주로 이과계열이 집중된 과학고를 졸업한 후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이공계전공자이지만, 지금은 인문학 공부를 위해 긴 휴학을 택하여 인문학 공부에 힘쓰고 있다. 

*외부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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