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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최경환

본회퍼 현상

 

 

본회퍼는 상당히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로부터 극단적인 세속화 신학자들까지(심지어는 무신론자들) 다양합니다. 최근 30년 동안 본회퍼는 복음주의 주류권에 상당히 안정적으로 정착한 신학자로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렇게 복음주의권에서 본회퍼를 소비하는 현상은 상당히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신학적 이론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그가 기독교 사회참여의 롤모델로 주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나를 따르라신도의 공동생활을 통해 본회퍼를 접한 복음주의자들은 그의 복음주의적 열정과 제자도에 매료되어 세속화 시대에 기독교 신앙의 가치와 본질을 붙잡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Haynes, 2004:10)

 

하지만 본회퍼의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을 면밀하게 분석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리차드 위카트(Richard Weikart)너무도 다양한 디트리히 본회퍼”(So Many Different Dietrich Bonhoeffers)라는 글에서 복음주의자들의 본회퍼 해석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합니다. 그가 제시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Georg Huntemann. The other Bonhoeffer: An evangelical reassessment of Dietrich Bonhoeffer. Baker Books, 1993.

    Eric Metaxas. Bonhoeffer: Pastor, martyr, prophet, spy. Thomas Nelson Inc, 2010. (한역: 에릭 메택시스, 디트리히 본회퍼, 포이에마)

    Mark DeVine. Bonhoeffer Speaks Today: Following Jesus at All Costs. B&H Publishing Group, 2005. (한역: 마크 디바인, 본회퍼의 삶과 신학, 한스컨텐츠)

    Joel Lawrence. Bonhoeffer: A Guide for the Perplexed. Bloomsbury Publishing, 2010.

 

이들은 대부분 본회퍼의 신학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부족하고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정보도 부정확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취향(복음주의)에 따라 본회퍼의 사상을 간추려서 해석한 전기들입니다. 매택시스와 디바인의 책은 국내에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는데 이에 대한 위카트의 비판은 사실 민망할 정도로 날카롭습니다. 이들은 역사적인 정보에 있어서도 부정확한 것이 많이 있고, 특히 본회퍼의 신학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특별히 매택시스는 본회퍼를 지나치게 히틀러의 암살자로서 묘사함으로 그의 중요한 신학적 요소들을 모두 간과했습니다. 그는 독일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고, 아니 아예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비난을 받습니다. 반면 위카트가 본회퍼에 대한 보다 공정한 해설서로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Ferdinand Schlingensiepen.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Martyr, Thinker, Man of Resistance. Bloomsbury Publishing, 2010.

    Sabine Dramm. Dietrich Bonhoeffer: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Hendrickson Publishers, 2007. (한역: 자비네 드람, 본회퍼를 만나다, 대한기독교서회)

    Stephen R. Haynes and Lori Brandt Hale. Bonhoeffer for Armchair Theologians.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이들은 본회퍼의 지적배경과 사상적 계보를 비교적 정확하게 추적하면서 본회퍼가 얼마나 자유주의 신학에 가까운 신학자인지를 보여줍니다. 본회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독일의 근대철학과 신학에 대한 배경지식과 함께 본회퍼가 이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혹은 급진적으로 해석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본회퍼는 헤겔, 니체, 키에르케고어, 딜타이, 하이데거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바르트와 불트만의 신학과 깊은 조우를 했습니다. 그는 이들의 사상을 자신만의 색깔로 만들어 낸 독창적인 신학자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없이 본회퍼의 사상과 생애를 복음주의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오독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실존주의 철학(키에르케고어)의 깊은 영향 아래 쓰여진 책입니다. 여기서 본회퍼의 일차적인 관심은 산상수훈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1934년에 본회퍼가 그의 동료에게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자네는 이걸 알아야 하네. 아마도 자네가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산상수훈을 설명한 전체적인 핵심은 바로 결정(decision)에 관한 것이야” (Dramm, 2007:81). 본회퍼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성서본문이 어떠한 본질적인 윤리적 원칙이나 고정적인 도덕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결단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비네 드람(Sabine Dramm)에 의하면, 본회퍼는 (그의 신학적 멘토인 바르트를 따라) 보편 화해론을 수용했고, 영육 이원론을 거부했습니다. 윤리학에서 본회퍼는 모든 인간은 신체를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존재한다. 신체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과 인간이 된다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 (Bonhoeffer, 2005:186)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세속화를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인 최초의 신학자입니다 (Dramm, 2007:103, 211). 그는 바르트의 신학이 보수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을 지적했으며, 불트만의 신학(비신화화)이 보다 급진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쯤 되면, 본회퍼를 향한 복음주의자들의 사랑은 허수아비를 짝사랑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본회퍼를 열정적으로 소비하는 현상은 그들에게 현시대를 진단하고 분석할 수 있는 신학적 틀이 부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책임 있는 시민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적 확신과 역할모델이 결핍되었기에 생긴 현상이 아닐까요? 본회퍼를 자세히 읽어보면 당시 유럽의 부르주아 중산계급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우월의식과 자만심, 그리고 국가와 권위에 대한 강한 확신이 보여 깜짝 놀라곤 합니다. 이 사람이 정말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가장 급진적인 정치신학을 가지고 있던 신학자였는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는 지나치리만큼 보수적인 루터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었고, 민중들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꿈꾸기 보다는 강력한 주권을 가진 통치자를 통해 권력을 승계하는 엘리트주의를 끝까지 견지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모습들이 있는 그대로의 본회퍼입니다. 우리가 보고 싶은 모습과 갖고 싶은 이미지들을 본회퍼에게서 뽑아 낸다면 그건 진정한 본회퍼가 아닐 겁니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하나의 신학사조와 특정한 신학자를 우상화 하느라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위대한 신학자라도 다양한 흔적과 과오를 남기면서 살아갈 텐데 그걸 하나의 중심사상이나 개념으로 모두 설명해내려 한다면 그것처럼 재미없고 과도한 학문적 오만이 어디 있을까요? 다양한 얼굴과 다양한 생각을 보여주는 신학자야말로 정말 매력적이고 연구해 볼만한 신학자가 아닐까요?

 

 

     Dietrich Bonhoeffer. Ethics (Dietrich Bonhoeffer Works, Vol. 6).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5.

     Stephen R. Haynes. The Bonhoeffer Phenomenon: Portraits of a Protestant Saint. Minneapolis:    Fortress, 2004.

     Sabine Dramm. Dietrich Bonhoeffer: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Hendrickson Publishers, 2007.

     Richard Weikart. “So many different Dietrich Bonhoeffers.” Trinity journal 32.1 (2011): 6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