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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사이-Be-評

한국교회의 전도문화 재고

* [날마다 주님과] 2008년 1-2월호 기고문

                                                                                         이원석ㅣ카이로스 회원,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교회의 사명은 크게 보아 예배와 선교, 두 가지로 나뉜다(이 글에서는 전도와 선교를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겠다). 모이면 예배하고, 흩어지면 선교한다. 그런데 구심적 사명(예배)과 원심적 사명(선교)은 그 궁극적 동기에 있어서 동일하다. 예배건 선교간 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는 목적을 위해 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하는 선교는 더 이상 선교가 아니다.

그런데 근래 한국교회의 선교 문화가 하나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상당한 거리가 있다. 노방 전도가 됐건, 해외 단기 선교가 됐건 간에 사회로부터 좋은 평가 받고 있는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샘물교회 피랍 사건이나, 어느 승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찍은 사진 유포 등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도대체 선교에 열심을 내는 만큼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한국교회의 위상실추로 인해 선교를 접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선교는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하달된 것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마태복음 28장18~20절) 본회퍼가 “세상의 교회와 말씀의 교회”라는 예언자적 설교(출 32:1-35)를 통해 외쳤듯이 말씀을 떠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선교는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우리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있다.

 

바닥으로 추락한 한국 교회의 선교 위상

 

그러나 위기는 기회다. 우리의 난처한 상황은 우리의 사명을 새롭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작금의 상황을 기회로 삼아 무엇이 본질적 문제인 지를 고민해야 한다. 표면에 드러난 사건은 일종의 징후일 따름이다. 질병(문제)의 본질을 파악해야 적확한 처방(해법)을 내놓을 수 있다.

일단 전도와 관련하여 우리의 태도는 실용주의적이다. 목적과 수단이 어울리는 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 브루너는, [자연과 은혜]에서, 목회자가 전도의 내용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지만, 그 방법 때문에 지옥에 갈 수도 있다고 했다. 옳다. 한국 기독인들 중에 전도의 방법으로 인해 죄를 쌓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본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23:13). 어쩌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전도 문화를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바리새인도 그 삶의 외양은 훌륭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기에 “의와 인과 신”(마태복음 23: 23)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이다. 행위의 엄정한 준수에 집중하다 그만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지금의 한국 교회의 전도와 연결시키면 전도에 대한 강박이 과도한 나머지 전도자의 마음을 상실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상명령이냐 전도강박이냐

 

전도에 대한 강박은 어느 정도 인본주의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라는 사고방식. 혹 지금 전도하지 않으면, 저 영혼은 지옥 갈지도 모른다는 조급증. 이제까지 옳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조급증과 강박증이 바로 무례한 기독교를 용인하도록 만들고 있다.

언젠가 전병욱 목사는 비기독인의 머리를 벽에 들이박아서라도 회심시켜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실로 존귀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것이 있다(예정의 문제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따라서 실제 발생하는 결과는 터진 머리와 흐르는 뇌수뿐이다. 만일 전병욱 목사의 말이 옳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기독인이나 비기독인이나 모두 인격체이다. 결코 비기독인들을 대상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전도의 중심을 전도 행위에 두지 말고, 전도 대상인 비기독인에 두어야 한다. 즉 행위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한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성서 해석도 바뀐다. 전도와 관련하여 흔히 운위되는 말씀이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이 구절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상대에게 전하기 좋은 때를 기다리지 말고, 지금 당장 힘쓰라는 것이다. 친구가 비행기에 올라가기 전에 복음을 전하려다 매번 기회를 놓쳤는데, 결국 비행기 사고로 인해 두 번 다시 그 친구에게 전도할 기회가 없더라는 식의 예화를 종종 들었을 것이다. 과연 이것이 옳은 해석이고, 정당한 적용일까?

 

전도 행위에서 전도 대상으로

 

이를 위해 우리 주님에게 눈길을 돌려보자.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모본으로 삼아야 한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도 모름지기 그분을 통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 전도는 어떠하셨던가? 요한복음 앞부분에 잘 나와 있다. 한밤중에 니고데모는 다짜고짜 예수님에게 쳐들어왔다. 거듭남의 도리가 궁금했으나 남들의 이목이 두려웠던 탓이다. 우리 주님, 졸린 눈을 비비며 거듭남과 성령님의 관계를 말씀해주셨다.

수가성에 살던 우물가의 여인은 어떻던가? 그녀는 갈증이 나서 우물물 좀 달라던 예수님의 요구에는 아랑곳 않았다. 처음에는 민족주의적 반감으로 인해, 중간에는 영적 갈망으로 인해, 마지막에는 메시야를 소개하려는 마음으로 인해. 하여간 이래저래 예수님은 자신의 육적 목마름을 무시하고, 그녀의 영적 목마름을 해갈해주기 위해 생명수의 가르침을 주실 수밖에 없었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수면 시간을 무시했고,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의 생리적 요구를 간과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때가 전도자의 형편을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다. 결코 상대의 상황을 무시하고 복음 전파에 힘쓰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례한 전도이다.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의 형편을 챙기지 않고, 상대의 상황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법이다(마태복음 7:17). 행위보다 존재가 선행한다. 전도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전도하기에 적합한 때를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전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