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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김승수

텅 빈 기표로서의 '국가'-'정치'와 세월호 이후의 감정 경험


                                                                                                     


박근혜라는 인물이 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녀를 직접 본 적 없고 만난 적도 없지만, (1)박근혜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며, (2) 그녀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임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그녀를 직접 보거나 만난 적이 없다. 즉,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나도, 물리적으로 한 번 만나거나 보지도 못한 박근혜라는 인물이 이 세계 내에 존재함을 믿으며, 그 인물이 우리가 속한 정치적 공동체(국가)의 최상위 지도자임을 믿는다.

 

어떻게 단 한 번 직접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인물을 우리가 속한 정치적 공동체의 지도자로 자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동시에,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믿고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무엇보다, 나는 어떻게 단 한번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우리', '국민'으로서의 '우리', 라고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이전에 직접 만나거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과 광장이나 거리에서 모였을 때, "따-다-따-닥닥" 박자를 맞추면 "대~한~민국!"이라 함께 외칠수 있을 거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즉, 우리는 어떻게 직접 본 적도 만나 보지도 못한 사람들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인가?


국민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의 공유를 이렇듯 낯설게 보며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 혹은 '국민'이라는 것에 어떤 '상상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층위가 있으며, 이런 상상적인 것을 통한 그 구성원들 사이의 매개와 연결이 국가 체제의 작동과 재생산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라는 점이다(베네딕트 엔더슨). 즉 국가가 그 구성원들을 상상적인 수준에서 '국민'이라는 상징symbol으로 한 데 모을 수 없다면 제 국가는 스스로의 시스템을 유지할 수도 재생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둘째, '국가'라는 개념과 함께 소환되는 상상적인 것들은 특정한 의례들을 매개로 물질적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국민에 결부된 특정한 감정들, 심상적 이미지들, 감각들, 기억들을 느슨하게나마, 하지만 상당히 구조화되고 의례화된 형태로 공유한다.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단순한 다섯 박자의 북소리(따-닥-따-닥닥!)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외치게 되는 '대~한~민~국'의 그 음율, 그 박자, 올라가는 손동작이야말로,우리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일체감'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이다. 이는 '국민'들이 처한 각기 다른 상황과 사회적 위치와 소득수준, 정치적 입장들을 넘어선다. 탈맥락화, 탈역사화되어 주체들을 부르는 주술적 소리(따-닥-따-닥닥!)에 반응하고 마는 우리 몸의 그 자동성이야말로, '국민'이라는 상징을 각 구성원들에게 '진정한 것'으로 경험시키는 권력 장치의 효과이다. 셋째, 이런 상상/상징적인 것들과 여기에 결부되는 감정, 감각, 기억들의 공유와 교환이 상당 부분,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 2008년 촛불 집회, 그리고 작년의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들을 떠올릴 때, 미디어를 통해 본 모종의 시각적 이미지와 그 때 느꼈던 감정-감각들을 떠올리며, 이러한 심상적 이미지나 감정-감각의 기억들은 우리의 '국민'됨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매개물이다.

 



 

앞서 언급한 2002년 한일 월드컵, 2008년의 촛불집회, 작년의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적/정서적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자신에 대한 이해-감각-기억을 생성, 수정, 공유하는 계기 였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국민들의 정신 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국민/국가'를 하나의 주체로 성공적으로 호명하였고, 잠시나마 국민들이 그 하나됨을 경험하고 스스로 목격하는 환상적인 '스펙터클'로서의 사건이었다면, 2008년의 촛불 집회나 작년의 세월호 참사는, 그러한 '환상'이 깨어진 틈으로 도리어 '국가'의 '외상적 실재'를 봐 버린, 그리하여 그 외상을 다뤄가는 가운데 '국민'이라는 집단체가 '분열적 주체'가 되어가는, 그런 사건들이었을지 모른다. 특히 세월호 참사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이유에서든(우리는 아직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자국민을 포기하고 죽도록 놓아 둘수 있는 괴물과 같은 국가의 실체를 보아 버린, 즉 구성원들을 대한민국 '국민'이란 이름으로 붙잡고 있던 국가(라는 상징)의 허구성을 보아버린 한국 사회는, 쉬이 봉합할 수 없는 이 외상과 씨름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 외상에 반응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일 것이며, 양가적일 수 있다. 다만 국가라는 대타자the big Other와 더불어 우리의 현실을 지탱해주던 상징계the symbolic가 무너져내리는 상황 속에서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의 삶과 정신은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다.[각주:1]거칠고 조악한 방식이지만, 세월호 참사가 가져온 대타자와 상징계의 붕괴에 대처하는 몇몇 두드러진 사회 구성원들의 반응을 유형화하고, 대중문화와 우리의 생활세계 가운데 심화, 구체화되고 있는 어떤 '감정의 구조structures of feeling(레이몬드 윌리엄스)'랄 만한 것들을 아래와 같이 묘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정치적,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외상 봉합. 지젝이 자주 지적하듯 모든 초월적 가치들이 해체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즉물적인 대타자는 국가이다. 일부 애국주의자들과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붙들어 온 국가라는 '대타자'-'아버지'-'신'이 무너져 내리려 하자, 유기불안에 떨며 직접 그 외상을 봉합하려 한다. 리퍼트 주한 미 대사를 위해 위무제를 행한 일부 개신교인들처럼, 자국보다 더 강한 국가(미국신이라는 국가-신)를 섬기기도 한다 (국가적, 종교적 식민 경험은 이토록 강력하다). 대타자에 대한 의존성과 두려움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근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점을 냉소할수 있겠으나, 이들의 유기불안과 두려움은 실상 우리 일반의 것이기도 하다. 한 때는 한국 대중 문화에 '아버지'란 존재가 거세되어 드라마 주인공은 항상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거나 무능력한 아버지를 둔 시절도 있었거만, (이미 진행되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갈망과 인정, 애정 표현은 세월호 참사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한다. 한편, 일부 집단과 개인들은 '파국'처럼 보이는 상황의 원인을 자신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 사회적 약자로 돌리는 가운데, 두려움, 불안과 혐오를 주된 정서로 폭력을 자행한다. 위에 열거한 현상들은 실상, 세월호 참사를 통해 현실에 틈입한 국가의 그 외상적 실재-국가 없음-를 어떻게든 마치 보지 않은 것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되돌리려는, 복구하려는, 혹은 보상하려는, 무의식적 노력들은 아닐까.



 



 

 



 

 


 

 


 


 

 

둘째, 최규창이 '계몽적 희생자'http://cairos.tistory.com/261들이라 일컬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같은(하지만 이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 윤리적 주체로의 성장. 이들은 세월호 참사라는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 사회와 정치 그리고 국가와 세계 (심지어 신)에 대한 기존의 인식까지 급격히 뒤바꿔지는, 진정 윤리적 '주체'로 서는 경험을 한다. 이들은 우리의 현실 사이로 삐져나온 '국가'의 '괴물'과 같은 실체를 보아 버렸지만, 외상을 회피하거나 미봉하지 않고 이 틈에 손을 넣어 파헤치는 방식과 같이 정면으로 맞선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들이 '진리/진실'에 대한 강력할 열망(사적 손해와 희생, 목숨을 감수하게 만드는 정도의 열망),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라는- 하지만 여전히 유예되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보다 더욱 이 땅에 진리와 정의가 임하고 진실이 드러나길 바라는 공동체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은 진리를 선취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러한 면에서 옳다 (반면, 정치적,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진리'의 편에 있다 주장하지만, 막상 그들이 붙잡는 것은 '환상'이다. 현실사이로 틈입한 실재-외상적 진실-을 직면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사건'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윤리적 '주체'로 서 보지 못한다). 윤리적 주체들의 주된 정서는 분노와 동시에 죄책감일 것이다. 이 사건의 책임에 있어, 이들은 스스로 자유롭다 생각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든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국가'와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무관심하게 공모했던 자기 일상의 (비)정치성을 깨닫고 새롭게 재편한다. 그렇게 이들은 윤리적 주체로 거듭난다. 물론 그 지속성과 효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셋째, 타락한 자유주의자들의 냉소. 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 틈입한 국가와 우리 자신에 대한 실재를 목도한 후 어떻게든 이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들의 진지한 노력들을 쿨하게 비웃는다. "국가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머(세상 사는 것이 원래 그렇지 머)"라는 읊조림과 함께, 그 외상을 적극적으로 덮지도 그렇다고 직면하여 파헤치지도 않은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로 나르시시즘을 유지한다. 계속해서 해오던 일(상)을 별 문제 없이 해나간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도의적으로 안타깝게 여기면서도(그리고 잠시 국가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구조적 여건으로서의 이 사회, 국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체념때문이다. (이는 실상 이들이 경험으로 터득한 일리일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 사회 시스템에 공모하고 있다는 의식, 그 부조리와 모순에 내 책임 또한 있다는 의식에는 이르지 않는다. 혹은 이르더라도 죄책감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냉소'하는 이들로부터는 이웃에 대한 연대의식/책임의식을 찾기 어렵다. '죄책감'은 단말마처럼 느끼고 사라진다. "유가족들은 안타깝지만, 이 사회는 계속 돌아가야 한다. 나도 살아야한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냉소는 아직도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퍼덕이는 근본주의자들과 윤리적 주체들의 뜨거움을 향한다. 이들은 어떤 재앙이 일어나도 아무일도 없었던 마냥 계속 되어야만하는 자본주의의 '생산-소비'의 순환 속도와 '타자에 관여하지 않음'이라는 속류 자유주의의 '쿨'함을, 몸 속 깊숙히 체득한 이들이다. 그 '쿨'함은 그렇게 타자에 대한 극진한 관여에 이르지 못하고 체념과 나르시시즘에 머무르고 만다.

 

넷째, 끼인자들의 무(기)력함. 적지 않은 수의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 가운데,국가가 그 명시적 존재 이유(국민을 보호하는 것!)를 부정하는 것을 '실시간(live)'으로 목겼했다. 골든타임이 지나가는 것을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보면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도울수가 없음을 뼈저리게 경험했어야 했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릴 뿐. TV 스크린 앞에 하염없이 지켜볼 뿐(이러한 의미에서 고도로 발달된 한국의 디지털 미디어 환경은 집단적 트라우마 경험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일상에서도 지속되고 확인된다. 모든 이들이 세월호 유가족 옆에서 함께 지내며 같이 운동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이 생계 때문이든, 물리적 거리 때문이든. 동시에 자신의 일터와 생활세계에서도 세월호 참사에서 본 그 부조리와 모순을 보게 되고, 슬프게도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국가에 대한 분노와 유가족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 죄책감이 깊어질수록, 이들은 무기력해진다. 이들은 실재를 애써 회피하며 환상으로 도망가는 근본주의자도 아니고, 쉬이 냉소하는 저급한 자유주의자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윤리적 주체로 서버린 듯한 '유가족 당사자 혹은 관계자'도 아니다. 국가와 자본주의의 외상적 진실을 깨닫고 윤리적 주체로 서고자 하는 의도와 결단을 계속 되뇌어보지만, 직접 운동하는 주체로 설수 없는 각박한 현실의 조건들 가운데 '탈진'하는 느낌으로 가득차고 만다. 무엇보다 스스로가 이 현실에 '타협'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채무감'만 커져 간다. '죄책감'이 커져만 갈 때 이들의 주된 정서는 이웃에 대한 '삼감'의 마음과 아무것도 변하지 변하는 현실에 대한 '무력함'이다. 이게 지속되면 무기력해진다. 이는 김신식(말과활 2015년 2-3월호, p. 52)이 지적하는, "정치적 주체를 내향적으로 만드는" '온건함'이라는 감정과도 닿을지 모른다. 이들 또한 자기 "안의 수많은 이웃이라는 문지기를 마음속으로 미리 신경쓰면서, 소진되어 버린다."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며, 그에 빗대어 자기의 파렴치와 염치에 골몰한채, 끊임없이 삼가고 삼가 자기 안에 갇힌다. 김영민(동무론, 한겨레)이 애통해 하듯 이웃의 몸을 향해 자기 몸을 끄-을-고 나아가 다가가는 그 극진한 움직임을 이루지 못한 채. 이들은 타자에 대한 지극한 삼감으로, 자신에 대한 지극한 회의와 반성과 함께, 자기 생각 안으로, 정신 안으로 침잠해 버린다. 그렇게 '성찰성'은 독이 되어 돌아온다.

 

위에 분류된 유형들은 서로에게 배타적일 수 없다. 인간은 모순되고 양립될 수 없는 태도와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사는 존재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자이면서 때로는 무기력해질 수 있다(실상 근본주의자의 열심은 이 무기력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도 촉발될 수 있다. 자신의 헌신이 경험케 하는 '살아있음'의 과잉을 반복함으로써 무기력함/의미없음에 틈을 주지 않으려는, 그런 종류의 열심 말이다). 윤리적 주체라 자신하는 이들도 잠자리에 들기 전 문뜩,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체제와 그 상징계의 회복력 앞에 무기력함을 느끼고 무력해질지 모를 일이다. 무기력함을 경험하는 자들도 쉬이 근본주의자들을 냉소할 수 있으며, 어느 순간을 계기로 윤리적 주체로 서 있을지 모르니깐 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심화되는 이 모든 감정들과 유형화된 반응-태도들이 '독재'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먼저, 우리의 상황은 '독재'라 부를 만 한 것인가?



 



 


현 한국의 상황을 '독재'라 부르기 어려울 듯 하면서도, 박근혜 정부의 소름끼치도록 자아성찰적인 기자회견, 자애로운 공권력 행사, 세심하고 성실한 감시 전략과 표현의 자유 침해 등을 보면 일견 '아버지 시대'로 돌아간듯한 묘한 기시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독재'라는 말은 작금의 국가권력의 통치방식을 모두 설명해주지 않는다. 정치적 행위나 대화 과정을 번거롭게 여기고 국민들을 '행정' 대상으로 만든 이명박 정부의 통치방식을 박근혜 정부도 일부 계승하고 있으며, 이 두 정부를 거치며 국민들이 길들여진 혹은 체념케된 상황 때문이다. '말과활(20152-3월호, 가장자리)' 이 가장 최근 기획으로 '정치의 죽음'을 주제로 삼아 '()/()정치화'하는 사회적 존재들에 대해 사유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인문 무크지 '#hash tag 구멍'편 의 여는 글(문강형준, 장치와 구멍, 북노마드)이 체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동물적이고 순응적인 '-인간(호모 사케르)'을 만드는 권력 장치로서 자본주의-민주주의를 사유하는 아감벤을 길게 논하는 것도 위와 같은 한국 사회의 맥락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현 정치적 상황은 아마도 '준 독재적' 국가 권력과 '탈/반정치화'되고 있는 시민 사회가 공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친 인상비평으로 나누어 본 세월호 이후의 한국 사회의 인간 군상들과 감정의 구조들은, '국민'이라는 단일 이름으로 소환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든 이데올로기/대의들이 무너져 가는 가운데 '국가'라는 대타자마저 무너져 버리는 '외상적 실재'를 어떻게 다르게 감당해 나가는가를 이해해 보기 위한 조약한 인식틀이다.

 

세월호 참사로 '국가'라는 상징의 허구성이 드러난 이후, 그 비어버린 대타자의 자리를 '국가권력'-'신'-'아버지'의 삼 항에게 어떻게든 회복시켜주려는 여러 무의식적, 집단적 노력들이 이루어져 왔다. 정치적,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가부장적 질서를 흐뜨리는 것으로 간주되는 '성소수자들'과 국가를 전복시키는 것으로 간주되는 '종북'에 대해 증오와 폭력을 가한다. 대중의 무의식적 불안과 결핍, 욕망에 가장 민감한 예능 프로그램과 광고 그리고 영화 매체는 더욱 가족을 찾고 아버지를 위로한다. 가족과 자신의 생존과 행복만이 유일한 인생의 목적인 세대에게 '정치'란 사치이며 '낯섬'이다. 가족 단위를 넘어 체제의 불합리와 모순을 지적하고 변혁과 개선을 요구하는 여러 사회운동과 세력들의 그 '호전성-뜨거움'에 질색하는 '쿨'한 자유주의자들은 '다양성'을 이야기하며 짐짓 점잖은 척 하거나 '냉소'하며 세상을 비웃는다. 너도 옳고 나도 옳은, 혹은 너도 틀리고 나도 틀린. 이들의 세계 속에서는 '다양성'과 '관용' 혹은 '냉소'와 '조롱'이 자신을 '쿨'하게 만들어 준다. 아무에게도 깊이 관여하지 않은 채, 그 어떤 것에도 헌신하지 않은 채, 그렇게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사회적 흐름에 기여한다. 자기관리와 계발에 몰두하며 그렇게 통치되는 삶, 관리받는 삶에 순응한다. 반면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며 죄책감까지 느끼는 이들은, 이웃들 앞에서 스스로를 삼가다가 종종 스스로의 '성찰성'에 갇혀 자신의 정신세계 안으로 침잠한다: '나 같은 것이 나서서 뭘 할수 있겠어.. 내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있나…' 안타깝지만 나를 포함한 이런 부류도 탈정치화하는 흐름에 기여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설수 있을까? 그 이론적 기반은 무엇이며, 실천적 전략은 무엇이 있을까? 지금 나는 답할 역량이 없다. 공부도 부족할뿐 아니라 무엇보다 나도 무(기)력함에 빠져있다. '망했어'라고 혼자 읊조리곤, 자기도 모르게 확인한 패배의식에 더 우울해지고 마는, 흔한 청년들 중 한명이다. 다만 이 글을 쓰면서 나와 주위 사람들이 갖는 감정과 (타인들에 대한) 어떤 태도들을 '이론적 언어'로 사유하여 '사적 경험을 공적 언어로 전달(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세월호 이후의 우리의 감정 경험들에 대해 공적으로 논해볼 수 있는 어떤 개념어들과 밑그림들을 소개할수 있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런 방식으로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삶에 기여했음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글_김승수(CAIROS 회원)

  1. 1. '대타자the big Other'와 '상징계', '외상적 실재'와 같은 개념어는 '지젝'에 대한 이현우의 주해(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2011, 자음과 모음)로부터 도움을 얻었다. 실재계the real-상징계the symbolic-상상계the imaginary와 대타자에 대한 지젝의 설명을 이현우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상징계란 체스 혹은 장기의 규칙 같은 것이다. 어떤 말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는 이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상징계는 '현실'을 관장한다. 상상계는 '기사'가 '메신저'로 불릴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상적 게임의 세계다. 규칙을 떠나서, 혹은 규칙을 무시하고 말이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 따위는 상상계에 속한다. 물론 이 상상적인 것이 공유되고 새로운 규칙으로 수용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상징계로 등록될 수 있다. 장기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걸음마하는 아이가 다가와 판을 뒤엎는다든가 하는 '예기치 못한 침범'이 바로 실재다. 그것은 게임을 한 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실재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자체다(pp. 22-23)." -이런 의미에서 9.11이라는 스펙터클이 미국 주도의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적 상징계에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었다면,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희생자들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보아야 했던 세월호 참사의 스펙터클은 국가권력과 그 아래 재편된 신자유주의적 상징계에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라 할 수 있다. 한겨레 특집의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물음은, 어찌됐든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던 이 게임의 판 자체(상징계)가 정지되고 무효화되던 그 범상치 않은 순간을 잘 반영하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멕시코에선 티브이 드라마를 가공할만한 속도로 찍는다고 한다. 매일 25분짜리 에피소드를 찍어대는데, 배우들에겐 미리 대본을 받아보고 연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 멕시코 방식은 이어폰을 활용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배우가 즉석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자, 이제 뺨을 한 대 갈기고 그를 증오한다고 말을 해. 그리고 껴안아!" 지젝이 보기엔 바로 이런 것이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the big Other'이다. 이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 상징적 차원 혹은 상징적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를 재볼 수 있는 일종의 척도다. 대타자가 단일한 대행자agent로 인격화되거나 사물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언제나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혹은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신이 인격화의 예라면, 내게 명령을 내리고 나의 삶을 바치도록 만드는 자유니 공산주의니 민족이니 하는 대의cause는 사물화의 예이다. 요컨대 우리의 현실을 관장하고 조정하며 인도하는 '신', '자유', '공산주의', '민족' 등등이 모두 대타자에 속한다. 우리가 '소타자small other'라면 이 소타자(개인)들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대타자가 끼어든다 (pp. 26-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