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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trans-post-christianities

토머스 머튼의 『명상이란 무엇인가』

- 영적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기 -


이원석ㅣ카이로스 회원


머튼, 그는 가톨릭 영성사에 빛나는 거목이다. 그의 삶과 재능은 영성을 중심으로 활짝 만개했다. 문자 그대로 교회를 위한 선물이다.
우리는 머튼의 작품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머튼의 현실은 나웬의 이상이다. 나웬이 바라던 경지를 머튼은 살았다(물론 나웬의 말년을 염두에 둔다면, 과장된 표현일 지도 모른다).

물론 머튼이나 나웬 모두 직관적이고, 따라서 그들의 글은 모두 핵심을 찌른다. 나웬과 머튼의 저작이 대부분 그 두께가 얇은 이유이다.

그런데 둘이 겨냥하는 과녁이 다르다. 나웬의 글은 우리의 현실을 되새기게 해준다. 반면 머튼의 글은 우리가 가야할 곳을 곧바로 보여준다. 그의 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 도전을 경험한다.

 

머튼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명상이란 무엇인가』는 문자 그대로 묵상이 무엇인가를 다룬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묵상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아는 Q.T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다. 30분이라는 짧은 -원칙상 조용한(quiet)- 시간으로 만족하는 인스턴트 영성 프로그램은 머튼이 말하는 수동적 명상은 커녕 그 전제로서의 능동적 명상에도 다다르지 못한다(수동적 명상과 능동적 명상의 관계는 돈오와 점수의 관계에 상응한다).

머튼은 그 특유의 부드러우나 힘이 있는 필력으로 수동적 명상, 즉 하나님에 의해 사로잡히는 상태를 잘 그려낸다. 그 상태를 정서적 황활경의 상태나 행복한 자아 포기의 상태로 착각하지 말라. "영혼은 그것들[자기를 스쳐 지나는 모든 것들] 하나하나에서 즐겁든 즐겆지 않든간에 하느님을 사랑한다." 머튼이 인용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교훈이다.

바로 이것이다. 나의 의지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합치되어있는 상태이다(나는 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분을 믿는다"는 상태라고 부른다). 바울이 "주 안에서 부족하나마 고"한다던 자기 생각이 오늘날 성서에 기록되어 하나님 말씀으로 읽히는 것은 바로 이런 상태에서 가능하게 된다. 

 

능동적 묵상은 우리의 몫이나, 수동적 묵상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하는 것으로 충분한다. 단지 그 이후에 올지도 모를, 하나님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사실 그렇게 분명치도 못한)에 놓였는 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 지를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동적 명상 상태의 참된 매력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상태는 우리의 갈망에 부응하여 찾아오기 때문이다. 주님은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주시지 않는다.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고 반드시 주셔야 한다는 의무가 그분에게 없고, 우리의 열망이 강하다고 그것을 반드시 얻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우리에게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그러므로 자신에게 정직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분이 아니시다.

 

내가 이 간결한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바로 상기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동기 부여와 간결한 지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