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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사이-Be-評

한국 보수 교회의 선교에 대한 비판적 성찰

기독교는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10월 25일 언덕교회 선교심포지엄 발표문

 

정정훈 | 연구집단 CAIROS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0-16)

 

 

1.선교, 우리 모두의 고민

 

아마도 모두 공감하지 싶은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지배적 선교 행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가난한 제3세계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이 호화생활을 하거나 선교지에서도 선교사들이 교파에 따라 서로 갈등하는 등의 오래된 문제부터, 인터콥 등과 같은 선교단체의 활동으로 인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공격적이고 안하무인격의 선교행태는 사회적 문제거리가 될 정도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주류 기독교 대중들은 그런 문제 자체를 부인하거나, 문제가 좀 있더라도 선한 일을 위한 약간의 역기능 정도로 치부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주류 기독교에 비판적인 이들은 절망, 환멸, 냉소적 태도로 점점 선교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된 ‘지상명령’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아무리 이 땅의 교회가 행하는 선교의 현실이 부정적이라고 해서 선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언덕 교회에서 선교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 한 것도 그러한 고민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선교전문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에 대한 어떤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대안을 제시할 만한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왜 ‘한국교회의 대안적 선교방향’을 모색하는 토론의 자리에 이 글을 제출하는 만용을 감히 부리고 있는 걸까. 그러나 이 글을 청탁한 분이 내게 한국 보수교회의 선교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기독교의 선교가 ‘이러이러 해야 하는데 이러저러해서 문제다’라는 규범적 진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역량 밖의 일이기도 하다. 다만 비판적 인문학/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한국 보수 교회의 선교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의 원인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보수 교회의 선교를 검토한 이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개인적인 견해의 수준에서나마, 한국 교회의 선교가 성경에서 말하는 선교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선교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기

 

나는 기독인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는 세 가지 핵심적 차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차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기독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관계의 차원일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독인의 평생 동안, 아니 영원토록 중심적인 관계이다. 이 관계를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이라는 용어로 달리 표현할 수 있을 것 이다. 두 번째 차원은 다른 기독인과의 관계이다. 기독인은 결코 홀로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언제나 다른 기독인과 더불어 공동체 속에서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이 차원이 바로 교제 혹은 공동체의 영역이다. 세 번째 차원은 비기독인들-불신자나 타종교인-과의 관계이다. 기독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독인은 언제나 비기독인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차원이 ‘선교’의 영역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선교의 개념을 다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폭넓게 선교를 재정의 하자면, 선교란 바로 ‘기독인이 비기독인과 의식적으로 형성하는 관계 일반’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자. 여기서 A는 기독인이고, B는 기독인이 아니다. 이때 A에게 자신이 기독인이라는 사실 별다른 의미가 없고, 또 그에게 B가 기독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지 않을 때 A가 B와 맺는 관계는 기독인이 비기독인과 맺는 관계가 아니다. A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분명하게 자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B를 비기독인으로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때 A와 B의 관계는 기독인이 비기독인과 의식적으로 형성하는 관계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과 상대방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을 때 A는 기독인으로서 비기독인인 B와 선교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관계를 맺는 주체인 자신을 기독인으로 인식하고, 관계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을 비기독인으로 분명히 규정하면서 기독인이 비기독인과 형성하는 관계가 바로 ‘선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행위이건, 가난하고 소외된 비기독인에게 구제와 봉사의 손길을 내미는 활동이건, 비기독교적 사회제도와 공공정책을 변화시켜가는 기독교NGO의 운동이건, 다른 나라의 비기독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건 모두 선교의 차원에 포함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3.선교 혹은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

 

그렇다면 선교는 단지 저 멀리 외국에 나가 타문화권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그곳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활동이나, 아니면 기독교 NGO을 설립하고 거기서 사회와 문화를 변혁하기 위해 벌이는 활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모든 기독인이 매일의 삶 가운데 비기독인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아주 일상적인 영역으로까지 선교라는 개념은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외선교사/사회선교사와 같이 전문적으로 ‘선교’에 헌신된 이들만이 아니라 나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도 선교적 맥락에 동일하게 놓여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교적 관계가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양상은 어떨까? 즉, 기독인이 비기독인과 관계 맺는 방식은 어떠한가? 최근 몇 년간 나는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인이나 불신자들에 대해서 매우 무례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나는 전에 이러한 사태를 『복음과 상황』에 기고한 어떤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 적이 있었다.

 

“불교국가 태국으로 단기선교를 떠난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곳에서 불상의 목을 배어버렸다고 한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서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를 우상을 섬긴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셨다. 또 다른 대형교회 목사님은 촛불집회의 배후가 사탄이라고 주장하셨고, 어떤 선교사님은 이슬람이 한국을 이슬람화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을 학살할 것이라고 근거 없는 주장을 펴고 계신다. 이런 모습 속에서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디 이뿐이겠는가.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사랑'에 반하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많이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과연 이런 사건들과 발언들이 일부 몰지각한 이들의 극단적 일탈행위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촛불집회의 배후를 사탄이라고 말한 목사는 여전히 세계최대 교회를 좌지우지 하는 위치에 계시고, 서남아시아 쓰나미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 목사님은 세계최대 감리교회의 목사이다. 그런 발언을 하고도 그들이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 교회 교인들 대부분이 그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대중들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저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 가득 찬 평신도에 의해 사찰과 불상이 훼손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에 비판적인 방송국 앞에서 데모를 하고 있으며, 구령에 열정에 가득한 이들이 무슬림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타종교와 불신자들에 대한 배타적이고 무례한 태도는 이미 한국 교회의 대중들에게서도 쉽게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와 다른 이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조금만 상식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오히려 증오와 폭력의 정서가 더욱 쉽게 발견되지 않는가?”(「신학의 빈곤」, 『복음과 상황』,2009년 3월호)

 

왜 복음에 충실하다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신앙이 없거나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이렇게 무례를 범하고 또 심지어 그들에게 증오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는 데,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를 연구해온 비판적 인문학/사회과학의 논의들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관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동일자란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특성이나 속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집단이다. 동일자는 자신과 다른 특성이나 속성을 가진 이들을 타자로 규정하면서 양자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설정한다. 일단 동일자에 의해 타자가 상정되면, 타자는 동일자에 비하여 결함이나 결핍을 가진 존재로 규정된다. 동일자에 의해 타자가 구별되고, 그리하여 타자가 결핍과 결함을 가진 존재로 규정되는 과정을 통해서 동일자는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존재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상적이고 규범적 존재인 동일자와 결함과 결핍을 안고 있는 비정상적 존재인 타자라는 관계의 쌍이 설정된다. 이 관계에서 동일자는 타자에 대해서 우월한 존재가 되고, 타자는 동일자가 보기에 열등한 존재이자 문제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적 타자들은 정상인들의 교정 작업 통하여 정상화되어야 할 존재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나타난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항상 권력관계로 나타났다. 가령 비서구인들(타자)을 정복하고 식민화한 서구인들(동일자)은 자신들이 비서구의 야만인들(비정상성)을 문명화(정상화)하는 소명을 실천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이와 동일한 구도가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비이성애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관계에도 작동해 왔음을 많은 비판적 인문학/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 정상적 동일자와 비정상적 타자라는 관계의 구도가 기독인과 비기독인의 관계에 대한 한국의 주류적 보수 기독교인들의 인식 속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기독인이라는 동일자와 비기독인이라는 타자의 구도. 기독인에게 불신자나 타종교인이란 죄인들, 다시 말해 타락한 자들을 의미한다. 보수적 기독인들에 의하면 비기독인은 그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로 인해 영원한 지옥불의 심판을 받을 죄인들이다. 반면 기독인이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기독인들은 자신들을 정상성의 범주에, 그리고 타종교인이나 불신자와 같은 비기독인들은 비정상성의 범주에 위치시키고 있지 않은가. 비판적 인문학/사회과학에서는 어떤 존재를 그의 존재 그 자체로 비정상적이고 문제 있는 자로 인식하는 방식을 일컬어 ‘인식론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비기독인에 대한 보수 기독인의 인식은 ‘인식론적 폭력’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때 죄나 타락과 같은 개념은 비기독인들의 비정상성, 그들의 결함이나 결핍을 지칭하는 ‘기독교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인들이 자신을 정상성의 범주에 속한 존재로, 비기독인들을 비정상적 범주에 속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니 기독인이 비기독인과 맺는 관계는 동일자와 타자의 구도 속에 형성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존재인 기독인들은 비정상적인 비기독인들 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저 타락한 죄인들인 비기독인들을 동정하거나 혹은 무시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독인과 비기독인의 관계가 타자와 동일자,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구도 안에서 성립되고 있으니 이 관계를 일컫는 다른 용어인 선교 역시 타자에 대한 동일자의 무례하고 무시하는 태도 혹은 기꺼해야 동정하는 태도에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단지 동일자가 타자를 깔보고, 무시하는 것만은 아니다. 동일자는 타자를 깔보고, 무시하는 만큼이나 또한 타자를 두려워한다. 동일자는 언제나 타자를 자신의 순수성(purity)을 침범하여 오염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두려움은 또한 타자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가령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주의적 증오는 항상 흑인들에 대한 공포를 수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그리스도인들을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비그리스도인에게 두려움과 증오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그들이 어느 듯 우리의 순수한 신앙을 오염시키고,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아지면 우리를 위협하고 박해할 것이라는 상상적인 두려움을 우리는 타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익숙한 교리대로, 우리가 배워온 바대로 믿지 않는 이들이라면 그들은 우리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내부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멘탈리티가 우리에게 배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들'을 배제하거나 정복하려고 할 뿐이다.”(「신학의 빈곤」, 『복음과 상황』,2009년 3월호) 그래서 보수적 기독인들은 타자들을 자신에게 동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거나 아니면 배척하고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밖에 파악할 뿐, 차이를 타자화하지 않고 상호 인정 가운데 공존해야할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여기에 보수 교회의 선교가 봉착한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4.그래도 딜레마는 남는다

 

비판적인 인문학/사회과학은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가 갖는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동일자와 타자를 나누는 경계를 해체할 것을 제안한다. 그 어떤 순수한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어떤 정체성도 다른 정체성에 비하여 우월하거나 특권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동일성은 항상-이미 타자성을 그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순수 동일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 모두는 항상-이미 타자들이란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차이들의 상호인정이나 평등을 강조한다. 백인이 흑인보다, 남성이 여성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보다, 서구인이 비서구인 보다 우월하거나 정상적이지 않다. 그 모든 정체성 범주는 서로에 대한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비판적 인문학/사회과학의 해법이 과연 보수 기독교에도 단순하게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보수 기독교에서는 결코 구원받은 자와 죄인이라는 서로 다른 범주가 상호인정 가능한 ‘차이’에 그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진리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이들, 그들이 아무리 선하고 정의롭고 윤리적으로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진리라고 보수적 기독인은 주장한다. 그런 기독교의 진리주장은 비기독인이 관점에서 독단이다. 기독인은 항상-이미 비기독인에 대해서 ‘인식론적 폭력’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마치 가부장적 남성이 여성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 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남성에게 복종해야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인식론적 폭력을 저지르듯이, 기독인은 비기독인을 단지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갈 존재로 단정하는 인식론적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진리주장이 독단주의적이고 비기독인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이라고 해서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의’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는 기독인에게 가치 평가의 영역이 된다.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죄인인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경계는 결코 해체될 수 없고, 두 가지 정체성이 상호 인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 기독교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동일자와 타자의 구도 속에서 인식할 수밖에 없는 논리를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항상 비그리스도인을 비정상적 타자로 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타종교에 구원이 없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모두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보수적’ 기독인인 한, 비기독인들에게 보수 기독인들은 어쩔 수 없이 독단주의자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으며, 비기독인들을 비정상의 범주에 위치시키는 인식론적 폭력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보수 기독인들은 타자에 대한 실제적인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존하는 위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보수적 기독인의 신념 상 비기독인을 타자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지 말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곤란한 딜레마를 언제나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리고 이 딜레마가 선교를 다시금 성찰하게끔 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5. 선교적 삶, 즉 ‘찌꺼기’로 사는 삶

 

내 생각에는 아마도 보수적 기독인들의 이러한 딜레마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결코 완벽하게 해결 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딜레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수도 없지 않겠는가. 선교는 보수적 기독인들에게 지상명령이다. 비기독인들과 어떠한 형태든 간에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에서 보수 기독인들은 비기독인들을 여전히 타자로 설정하고 그 타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신념과 신앙에 대해 폭력이 되지 않는, 혹은 최대한 덜 폭력적인 선교의 방식을 찾을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이 지점에서 기독교 선교의 최초 시점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다시 말해 성경에 기록된 선교의 모습 속에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보수적 신앙의 태도에 가장 걸 맞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최초의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질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주류였다. 앞에서 말한 동일자와 타자의 구도에서 보자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타자의 위치에 있는 존재였다. 유대 사회에서도, 로마 사회에서도 기독인들은 비정상적 존재로 규정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는 유대교에 의해 신성모독자의 혐의로 처형당했고, 로마정부에 의해 반란 선동자 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유대교 입장에서 기독교인은 신앙적 정상성을 벗어난 비정상적 이단이었고, 로마사회의 입장에서 기독교인는 로마 제국 질서의 위대함에 순응하는 시민적 정상성에서 벗어난 비정상적 위험세력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 사회에서도, 로마 사회에서도 동일자의 권력에 의해 배제되고 차별받는 타자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인들은 그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 즉 주류가 될 수 없었다. 주류의 자리는 언제나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존재로 인정되는 동일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당시 기독인들은 오늘날의 동성애자, 불법이주민, 장애인 등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초기 기독교 선교가 행해졌다는 것은 오늘날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의 과업을 수행하는 자신의 처지를 ‘만물의 찌꺼기’와 같다고 한 바울의 표현(고4:13)을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곱씹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바울이 말하는 ‘찌꺼기’란 바로 당시 사회 속에서 타자화된 기독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바울의 시대에는 그 어떤 사회적 권력도 갖지 못한 소수자가 바로 기독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 없는 타자들, 혹은 소수자들이 권력을 가진 동일자들, 다수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비기독인들에게 어떤 사회적인 위협이나 폭력으로 다가올 가능성은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세상의 주류이다. 세계적으로도 기독교권 국가들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고, 한국 사회에서도 그리스도인들, 특히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정상적 존재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차라리 주류와 다수자의 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인들이 비기독인들의 신념이나 신앙을 틀렸다고 말하고, 그들이 심판받을 죄인이라고 정죄할 때, 그것은 하나의 위협으로 비기독인들에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리스도인이 사회적으로 타자와 소수자의 자리에 있을 때, 기독인의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진리주장이 실제적 폭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최소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리더가 되어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의 주류적, 다수적, 지배적 위치를 지향하고 그 자리를 획득하게 되면 될수록, 오히려 기독교의 선교는 기독교의 타자들에게 위협과 자의적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진리라고 믿는 보수적 기독인들은 바울을 본받아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며 제시하는 형상은 바로 ‘만물의 찌꺼기’이다. 그것은 기꺼이 타자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 나아가 적극적으로 타자-되기를 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보수 기독인들이 바울과 같이 찌꺼기의 삶을 살아 갈 때, 적극적으로 타자-되기의 삶을 구현할 때, 기독인이 비기독인과 의식적으로 형성하는 관계인 선교가 비기독인에 대한 기독인의 폭력으로 나타나게 될 가능성이 가장 최소화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