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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성서와 인문학의 조우

바울복음 혹은 총체성과 특권에 대항하는 보편성의 정치학

- 알랭 바디우의 바울 독해를 중심으로 -  

CIROS 포럼 | 신학적 전회? 현대철학자들 성서를 읽다 - 발표 2


   


                                                                                            정정훈 | 카이로스 회원, 서울산업대 강사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1.난감한 시도


이것은 참으로 난감한 시도이다.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1)을 기독교적 담론의 장에서 다시 읽는 다는 것은. 바디우가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정초한 바울을 독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상 기독교라는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바울 복음의 ‘내용적 층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바울 복음의 다양한 용어들에 대한 기독교 전통의 해석들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오히려 바디우는 그런 기독교 전통들로부터 바울을 탈각하려고 할 뿐이다. 다시 말해, 바디우의 바울읽기는 바울의 복음을 기독교로부터 탈영토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디우가 애써 기독교로부터 탈영토화해낸 바울을 기독교에 재영토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그 작업이 난감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바디우의 탈-기독교 신앙적 바울해석이 기독교 신앙에 가지는 의미를 묻고자하는 이 글의 문제의식 자체가 처음부터 바디우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논의를 기독교에  재영토화려는 시도를 하지만 나는 정작 기독교를 그렇게 잘 알지 못한다. 바디우의 바울 논의에 대한 성서학적 재해석을 할 처지도 못된다. 내가 기독교에 대해, 혹은 성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평신도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난감한 시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 난감한 시도를 시작하고자 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것은 바디우가 읽어내는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처한 전도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사유의 자원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가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은 아마도 들뢰즈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로서 일 것이다.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이 사실은 일자의 철학이며 그런 면에서 들뢰즈는 자신의 비판과 달리 플라톤주의자라는 바디우의 주장은 상당히 논란이 된바 있다.2) 그러나 바디우는 단순히 들뢰즈에 대한 비판가에 머무는 철학자는 아니다. 그는 현재 프랑스 철학계에서 그 사유의 폭과 밀도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루이 알튀세르의 지도를 받았고, 이후 68혁명 기간 중 알튀세르의 모호한 태도를 비판하며 마오주의에 가담하게 된다. 또한 샤르트르와 라깡에게 강력한 지적 영향을 받았다. 이후 그는 칸토어와 폴 코헨의 집합론을 중심으로 한 수학이론을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위한 자원으로 삼아 그만의 독특한 존재론을 펼쳐가며 철학자로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게 된다.

특히 그는 소위 포스트주의라고 통칭되는 지적 조류 이후 폐기되다시피 한 ‘진리’, ‘보편’, ‘주체’ 등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유하며 그 개념들에 새로운 규정들을 부여하고 있다. 바디우는 문화적, 인종적, 계급적 특수성에 기초한 정체성의 정치, 그러한 특수성으로서 차이에 비판적이며3) 보편주의를 역설하고, 그러한 보편성이 진리를 경험한 주체들에 의해 전투적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철학자이다. 그러나 진리, 보편, 주체 등의 개념을 통해서 그가 말하는 것이 포스트주의 이전에 그 개념들이 의미했던 것으로 단순한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개념들을 전혀 새롭게 해석하여 다시 작동시키고 있다. 우리는 바울에 대한 그의 독해를 살펴봄으로써 그와 같은 개념들이 바디우에 의해 어떻게 새로이 사유되는 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에서 바디우는 화폐의 질서 하에 있는 자본주의를 추상적 보편성이 지배하는 상황으로, 특수한 정체성에 입각한 정체성주의를 상대주의적 차이가 지배하는 상황으로 파악하며 사도 바울을 1세기 로마제국의 상황 속에 이 두 가지 지배논리와 싸운 투사라고 말한다. 나는 바로 추상적 보편성(총체성의 지배)과 정체성에 입각한 상대주의(특권의 지배)가 오늘날 한국 교회를 전도시키는 상황-상태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바디우가 『윤리학』이나 『조건들』에서 지적하는 진리를 특정한 조건에 ‘봉합’함으로써 발생하는 ‘악’의 문제가 한국 교회를 심각하게 병들게 만들고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바디우의 바울 독해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상황이 왜곡되고 전도된 원인을 규명하고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모색하고자 한다. 이는 어쩔 수 없이 바디우의 철학에 대한 일종의 오독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시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진리를 억압하는 지배의 욕망에 물든 지금과 같은 상태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오독의 위험은 무릅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사건을 경험한 이후의 내가 그 사건에 계속해서 충실할 수 있는 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2.은총의 유물론자, 혹은 정치철학자 바울?


다시 한 번 확인하자. 바디우는 결코 기독교인이 아니다. 바디우는 바울이 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바디우는 유물론의 관점에서 바울을 최초의 보편주의의 이론가로서 읽어낼 뿐이다. 이런 관심에서 그는 바울의 서신들을 읽어간다. 바디우는 성서비평의 성과를 수용하여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만을 바울의 진본 텍스트로 인정한다.4) 그는 이 서신들에 대한 독해를 통해 자신의 철학이 바울의 종교적 언어 속에서 선취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치 짜라투스트라가 니체의 철학적 페르소나였던 것처럼, 바울은 바디우의 철학적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바디우는 바울에게서 진리의 보편적 전달을 위해 결코 중단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충실하게 싸우고 있는 투사의 모습을 발견한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진리의 투사라는 형상이 바디우가 주목하는 바울의 모습이다. 바디우는 투사로서 바울의 형상에서 그리스도교 주체의 독특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주체성은 바울 당시 지배 담론들의 주체적 형상들과는 다르다. 그 지배 담론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의 철학적 담론과 유대의 예언적 담론이다. 지배 담론으로서 그리스의 철학적 담론이란 ‘총체성의 담론’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지혜(소피아)를 중심으로 한 담론이다. 이때 지혜란 ‘로고스를 존재와 짝지음으로써 세계의 고정된 질서를 전유하는 것’이며, 주체는 ‘자연적 총체성의 이성 안에 위치’하게 된다.(83) 그리스 담론은 우주적 질서와 관련된 것으로서, “퓌시스(존재의 정돈되고 완결된 전개로서의 자연)를 이해할 수 있는 소피아(내적 상태로서의 지혜)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총체성의 담론”(83)인 것이다. 그리스 담론의 반대편에는 유대 담론이 있다. 바디우는 유대 담론을 ‘예외의 담론’이라고 칭한다. 즉 유대인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예외적 존재들이며 신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을 선택했다는 표징들을 주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그런 의미에서 특권적 민족이다. “예언적 표징, 기적, 신에 의한 선택이란 자연적 총체성을 넘어선 초월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유대 민족 자체가 표징인 동시에 기적이며 선택이다.”(84)

바디우는 이 두 가지 담론들이 모두 지배의 담론들이며, 그것은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즉 두 담론은 ‘지배라는 동일한 형상의 두 측면’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적 총체성에는 단 하나의 결여만을 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유대교에서는 기적이라는 예외적 표징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적 총체성의 질서의 쌍으로서만 유대인의 예외적 특권, 즉 그 총체성의 질서로부터의 예외라는 특권이 작동한다. 그 결과 이 담론들은 모두 보편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어느 한 쪽도 다른 한 쪽이 없이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총체적 질서와 그 여백으로서 예외는 한 쌍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들은 하나의 법에 의한 지배를 성립시키는 담론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합당한 지위를 부여하는 유사-보편적 법5)의 지배이건, 특수한 존재자에게 예외적 특권을 부여하는 전능한 입법자의 지배이건 말이다. 이 담론들의 체제에서 세계를 정초하는 ‘존재’로서 실재는 법적 상태로 나타나게 된다.

바울이 자신의 적으로 삼았던 두 지배적 담론이란 바디우의 용어로 다시 말하자면 ‘상황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 상태(état de la situation)라는 용어는 바디우의 존재론으로부터 나온 개념이다. 바디우의 바울 해석은 철저하게 존재론에 대한 그의 사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디우의 바울 독해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략하게나마 바디우의 존재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6) 바디우는 ‘존재’를 일자로 이해하는 철학적 전통을 거부한다. 그에게 존재란 그 어떤 통일성(즉 일자)도 거부하는 순수 다수(le multiple pur)이다. 그런데 이 순수 다수를 그는 공백(vide)으로서 사유한다. 순수 다수 혹은 불안정한 다수에게는 그 어떤 원자적 실재성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다수는 그 근본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어떤 질서로 완전히 통합해낼 수 없는 것이고, 그것에 임의적 질서가 부여된다고 하더라도 그 질서 내에서 완전히 나타내지지 않는 채로 존속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상황 내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불안정한 순수 다수는 그 자체로는 실재성을 가질 수 없다. 실재성은 이 불안정한 순수 다수에 어떤 안정성이 부여되어야 나타날 수 있다. 바디우는 안정성이 부여된 다수를 상황(situation)이라고 명명한다. 다시 말해 상황이란 불안정한 다수가 셈을 가능케 하는 어떤 구조를 받아들여 성립한 것이다. 상황이 성립하면 다수는 이제 셀 수 있는 것이 되는데, 그 다수를 세는 것을 현시(présentation)라고 한다. 현시되어진 안정된 다수성이 바로 상황이다.

바디우는 이를 칸토어의 집합이론에 기초하여 설명한다.7) 집합이론이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많은 존재자들을 셈하기 위해 칸토어가 발명한 수학의 분야이다. 어떤 조건에 의하여 그 대상들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의 모임이 집합이다. 집합이 주어지면 그 집합의 원소들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원소들을 식별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현시이다. 그러나 모든 집합에는 현시되지 않는 요소가 있다. 바로 공집합(le vide)이다. 즉 상황 내에서도 현시 불가능한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집합, 즉 공백은 현시의 구조를 완결 짓지 못하게 만드는 불안정의 요소로 남는다. 집합이론에서 공집합을 셈하기 위해서 부분집합을 구한다. 부분집합을 구하여 보면 공집합이 포착되어 셀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조화된 상황 내에서 현시되지 않는 공백을 세기 위한 두 번째 셈을 바디우는 ‘상황 상태’(état de la situqtion)라고 부른다. 두 번째 셈이 행해지면 상황을 이루는 요소들은 재현(re-présentation)되고 상황의 구조 역시 재구조화된다. 상황 상태란 공백을 재현하고 고정할 목적으로 상황을 특정화하여 관리하는 권력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상태’(état)는 곧 ‘국가’(E'tat)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집합이론이 보여주듯이 부분집합을 세어 공집합을 원소로 하는 새로운 집합, 즉 멱집합을 구하여도 그 집합 역시 또 다른 공집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공집합은 모든 집합에서 재현 불가능한 것, 그리고 고정 불가능한 것, 제거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총체성과 예외성이라는 것은 유대 담론과 그리스 담론이라는 담론적 상황을 재현하고 관리하는 담론의 상황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은 그리스 담론과 유대 담론이라는 지배의 담론과는 다른 세 번째 담론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담론이다. 바디우는 앞의 두 담론들이 결국 ‘하나의 법’에 의한 지배를 구축하고 실재를 이 법과 연결시키는 ‘상태적인 것’(étatique)인 반면, 바울의 기독교 담론은 상태의 법이 아니라 사건을 실재로 삼는 보편적 평등의 담론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지배의 담론들을 아버지의 담론으로, 그리고 보편적 평등의 담론을 아들의 담론으로 명명한다. 아들의 담론은 법이라는 상태적 실재가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실재에 기반하고 있다. 즉, 이 세계에 어떤 궁극적인 것(즉 ‘존재’)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건일 뿐인 것이다. “사건 그 자체로부터, 비-우주적이며 탈-법적인 사건, 어떤 총체성에의 통합도 거부하며, 어떤 것의 표징도 아닌 사건 그 자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어떠한 법칙도, 어떤 형태의 지배-현자의 지배든 아니면 예언자의 지배든-도 가져오지 않는다.”(85)

바울에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바로 그 사건의 이름이다. 사실상 바울의 서신에는 소위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의 생애, 그의 가르침, 그의 기적들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오로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을 강조할 뿐이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예수의 죽음보다도 그의 부활이 바울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바디우는 바울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든 것은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사건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초월적인 장치들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바울 본인에게도 사건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다.”(129)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은 그리스인이건 유대인이건 상관 하지 않고 모두를 평등한 아들들로 만든다.

여기서 ‘사건’이라는 용어가 바디우의 바울 해석을 꿰뚫고 있는 관건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실제로 바디우 역시 ‘사건의 철학자’이다.8) 그렇다면 바디우에게 사건이란 무엇인가?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공백에 대한 논의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사건이란 어떤 상황 내에서 공백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상황 속에서 현시되지 않았던 것이 섬광처럼 돌발하는 것이 사건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존의 시스템 안에서 자리 없는 것, 비-존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의 출현, 그것이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은 기존 시스템, 즉 상황의 질서나 법칙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상황을 규정하는 법칙과 질서에 어떤 단절, 중단을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사건은 결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상황의 법칙과 질서를 중단시키며 돌발하지만 곧 사라지는 불안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이란 단지 어떤 해프닝에 불과한 것인가?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은 단지 돌발했다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건은 그것을 경험한 ‘어떤 자’9)를 주체로 부른다. 사건의 돌발이 가져오는 상황의 중단은 사건과의 만남을 통해 성립한 주체에 의해 계속될 가능성이 열린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란 사건의 효과이며, 주체는 사건의 효과를 지속시키는 자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사건 이후 등장하여 사건에 계속해서 충실한 주체를 투사라고 부른다.

바디우는 바울에게서 이러한 사건 이후적인 주체, 즉 투사-주체를 발견한다. 사실 모든 상황은 자신의 법칙을 따르는 주체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담론은 현자=철학자를 자신의 주체적 형상으로 제시하며 유대 담론은 예언자를 그것의 주체적 형상으로 내세운다. 반면 바울은 이 두 주체 형상에 대립하여 사도라는 주체의 형상을 제시한다. 사도란 그리스도라는 사건이 진정으로 일어났음을 그 사건과의 만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선언하는 자, 그리고 그 사건이 모든 이를 평등한 아들로 만드는 사건임을 선언하는 자이다. 바디우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란 사건의 보편적 효과를 선언하고 모든 이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사도라고 주장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사건 이후적 주체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체는 분열된 주체이기도 하다. 사건이 주체로 부르는 어떤 자는 원래 상황 속에 포함된 존재였다. 즉 그 어떤 자는 상황의 법칙과 질서의 지배 아래 놓여있었으며, 그 지배적 법칙에 예속되어 그 법칙과 질서를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자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러나 사건이란 바로 그 상황의 법칙과 질서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상황을 개시하는 보편적 열림의 가능성이 사건이다. 그래서 사건과 마주친 어떤 자는 이제 기존의 상황과 단절하게 된다. 그는 더 이상 기존 상황의 법칙과 질서의 단순한 담지자나 대행자가 아니게 된다.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 안에는 어떤 분열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이 분열을 통해 주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바울이 이러한 분열을 명쾌하게 정식화했다고 말한다. 분열된 주체의 정식은 “~이 아니라 ~임”이다. 즉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4:7) 등과 같은 바울의 언급들이 보여주는 바가 바로 분열된 주체의 정식이다. 여기서 “~아니라”는 기존 상황의 법칙과 질서와의 단절을 의미하며, “~임”은 새로운 세계로의 열림을 의미한다.

기존의 상황 속에서는 결코 포함되지 않았던 공백의 돌발로서 출현하는 사건은 그 상황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적 논증도, 표징에 의한 확증도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은 '결정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주체는 사건이 일어났음을 선언한다. 그래서 사도가 선언하는 사건이란 그리스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유대인에게는 추문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도의 선언을 통해 결정 불가능한 사건은 현존하는 것이 되며, 사건은 명명된다. 바울은 그 사건을 복음이라고 명명하고 그것이 진리10)라고 선언하였다. 사건에 대한 주체의 충실성을 통해 결정 불가능한 것이었던 사건은 진리로서 상황 속에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는 사건 이후 상황 안에 나타나게 되며,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사건 이후적인 것이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해야하는 것은 분열된 주체의 구조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기존 상황과의 단절도, 새로운 상황으로의 전진도 중단 없이 계속되어야하는 과정일 뿐이지 완료된 것이 아니다. 기존 상황과의 단절도 계속되어야하고, 새로운 세계, 혹은 시대를 열기 위한 투쟁 역시 계속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이는 구원이 어떤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과정,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디우는 구원, 즉 사건에의 충실성이라는 과정은 세 가지 차원에서 진행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믿음, 사랑, 희망이다. 믿음이란 사건이 자신을 주체로 세웠음에 대한 확신이다. 사건과의 만남을 통해서 어떤 자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사건과의 만남은 철저하게 은총이다. 그것은 자격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순수한 증여이며, 권리와 무관한 선물이다. 사건은 소속, 자격, 정체성, 차이 따위의 특수성을 모른다. 사건은 그러한 특수한 차이와 상관없이 어떤 자를 주체로 부른다. 사건이 자신을 주체로 만들었음(주체화)에 대한 확신을 바디우는 '믿음'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 즉 사건에 의한 주체화는 철저하게 독특한(singular) 차원이다. 그러나 바디우는 이것이 곧바로 보편적(universal)인 것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체화가 모든 이에게 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하며 이 진리를 모든 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사랑'이다. 다시 말해, 사건 이후의 진리가 보편화되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이다. 사랑은 그리스도교 주체, 구원받은 주체에게 새로운 법, 문자적이지 않은 법이 된다. 이 법은 모든 특수성과 차이를 너머서 모든 이를 진리로 부르라는 충실성의 명령이다. 즉 그것은 주체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새로운 법이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진리를 보편화하고자하는 노력이기도하다. "진리의 사건 이후적 보편성을 끊임없이 세계 안에 기입하고 이 보편성이 주체들을 삶의 길에 합류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법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사랑의 임무이다."(170)

진리의 보편적 전달에는 시련이 따르게 된다. 그것은 기존의 상황과 단절해야 하기 때문에 상황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진리의 보편적 전달은 투쟁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시련은 진리의 보편주의에 언제나 동반되는 것이다. '희망'이란 이 시련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해 계속 충실할 수 있는 주체의 확고부동함이다. 그것은 전능한 군주적 신이 최후의 날에 믿지 않는 자를 모두 심판할 것이고, 믿는 자는 군림하게 될 것이라는 '원한 감정'에 입각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현재적이다. 희망은 사건 이후적 주체성의 한 양상이다. 시련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리에 충실해가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시련을 통해 오히려 더 충실한 주체가 되어가는 양상이 바로 희망이다. 이상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희망의 의미이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롬5:3-5, 공동번역)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디우는 이상과 같이 해석된 바울의 사유를 은총의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유물론이란 물질을 '존재', 혹은 실재로 이해하는 범박한 철학이 아니다. 바디우에게 유물론이란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인 것에 의해 결정된다"(129)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즉 구원받은 주체란 사건이라는 객관적 실재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고, 구원은 주체의 충실성에 의해 계속되는 과정 것이 유물론의 중핵이며, 사건은 그 어떠한 자격(정체성, 특수성, 차이)과 상관없이 어떤 자에게 도래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은총이라는 것이다. 은총으로 주어지는 사건과의 만남이 어떤 자를 진리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바디우가 바울을 통해 읽어내는 은총의 유물론이 또한 보편주의의 정치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바디우에게 보편주의란 총체성의 위계적 자리 할당을 분쇄하며, 그 어떤 특수한 정체성의 특권적 예외도 폐지하는 평등의 보편주의이다. 사건은 그것이 보편적 평등, 즉 아버지의 지배를 폐기하고 아들들의 동등성을 구축하는 것으로 나아갈 때만이 진리가 될 수 있다. "사건은 그것이 보편적인 아들-되기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왜곡된 것이다. 그러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자녀로서의 동등성을 갖게 된다."(97)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류를 평등한 형제로 만드는 것이며, "지배자를 축출하고 아들들의 평등을 정초"(117)하는 것이다. 특수성과 정체성에 입각한 지배에 대항하여 모든 인류의 평등을 보편화하는 투쟁이 바울의 투쟁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보편주의란 평등의 정치철학이기도 하다. 평등의 보편성이라는 바울의 정치철학은 「고린도전서」3장 9절의 ‘데우 수네르고이’, 즉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표현에 집약되어 있다. 이제 지배자의 형상은 폐기되었으며 그 대신 진리의 공정 속에서 함께 노동하는 평등한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모든 평등은 하나의 노동에 함께 속해 있는 평등이다. 진리의 공정에 참여하는 자들은 논란의 여지없이 그러한 도정의 동역자들이다.”(117)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그 어떤 종족적이고 공동체적인 특수한 정체성과 관계없이, 진리에 의한 모든 이의 보편적 평등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정치철학의 핵심인 것이다.



3.한국교회, 그 전도된 상황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한국 교회라는 상황은 전도되어 있다고 하였다. 기독교가 바울적 기원을 가진 것이라면 그것은 우주적 총체성의 담론이나 예외적 특권의 담론과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우주적 총체성과 예외적 특권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한국 교회라는 상황은 총체성과 특권의 담론적 상황-상태의 지배아래 있으며, 이는 자신의 보편주의적 기원이 적대했던 것을 오히려 추구하는 전도된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가?

먼저 한국 교회의 특권담론을 살펴보자. 유대적 특권담론은 유대민족이 선택된 집단이라는 관념에 기초한다. 우주를 통치하는 신이 자신들만을 특별히 선택했다는 선민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신은 유대민족에게만 창조질서에 예외를 부여하는 기적을 행한다. 신은 유대민족에게만 특별한 복을 베푼다는 선민의식은 정확히 한국 교회의 신앙적 기조와 일치하지 않는가? 이제는 재론하는 것조차 식상하기 그지없는 기복신앙의 문제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예외적 특권담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를 믿으면 현세에서는 축복받고 내세에는 구원받는다는 신앙. 예수 믿으면 돈 잘 벌고, 건강하고, 성공한다는 한국교회의 대중적 신학노선11)에는 신이 기독교인들만을 특별히 사랑하고 축복한다는 예외적 선택의 논리가 깔려있는 것이다.

신의 예외적 선택 안에서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는 존재이다.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 안에서 조차 이 특권 논리는 작동한다. 더 많이 헌금하고, 더 열심히 교회봉사하고, 더 오래 기도하고, 더 자주 예배드리는 자가 더 큰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는 바디우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대화된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신앙 노선에는 그 어떤 평등주의나 보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더 축복받아야 하고, 비기독교인은 지옥 불에서 영원히 불타야한다는 구별과 차등의 논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는 당연히 신의 선택을 받은 우월한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을 다스려야한다는 지배의 논리로 귀결될 뿐이다. 그리고 이 특권적 지배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은 사탄적인 것일 뿐이다. 아마도 우리는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주류 기독교 집단에서 예외적 특권담론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보수교회 내에서 기복신앙이라는 대중신학 노선에 가장 비판적인 조류가 아마도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진영일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네덜란드에서 발원한 신칼빈주의에 영향받은 입장이 기복신앙 노선에 가장 대극적으로 보인다. 이들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들은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고 통치하시는 신의 주권을 강조하며 세상 모든 것이 신의 주권아래 복속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대해 무책임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이원론이라고 비판하며 세상의 모든 영역에 신의 주권을 확장해야한다고 강변한다. 학문의 영역에서 학자로, 정치의 영역에서 정치가로, 경제의 영역에서 경제인으로, 문화의 영역에서 문화인으로서 기독교인은 신의 통치를 실현해가야 한다.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특수적 영역들을 기독교 신앙의 질서로 변혁하고 총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의 기독교를 ‘세계 정복적 기독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입장은 세계에 하나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에 따라 각 영역에 적절한 자리를 할당하는 그리스적 총체성 담론과 매우 닮아 있다. 이 노선은 바디우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스화된 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2) 주류 복음주의의 총체성 담론은 일견 한기총류의 예외적 특권담론과 대치되는 듯 보이나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기독교를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고자하는 점에서 그것과 닮아있다. 세계 전체가 기독교적 원리에 의해 재단되고, 평가되고, 배치되고, 운영되어야한다는 것이 결국 세계 정복적 기독교가 주장하는 담론의 요체이지 않은가. 세계를 편성하고 운영할 수 있는 근본 원리(로고스!)가 말씀(로고스!)에 있으며 그 말씀을 ‘맡은 자’들이 기독교인이기에 기독교인이 세계를 편성하고 운영하는 자가 되어야한다는 지배의 논리로 연결되지 않는가. 결국 그리스의 현자, 혹은 철학자가 세계 변혁적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인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런 면에서 세계 정복적 기독교는 기복신앙적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지배의 욕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전도된 기독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봐야할 것은 한국 교회의 교리주의이다. 바디우는 악이 발생하는 몇 가지 계기 중 하나를 진리를 하나의 진리생산 공정에 봉합하는 것에서 찾은 바 있다.13) 그는 진리가 유일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리는 복수적이다. 그리고 각각의 진리는 제한된 힘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의 진리가 자신만을 유일한 진리로 표방하고 그 진리만이 상황을 지배해야하는 전능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 악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억견(doxa)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진리의 가능성은 억압되고 닫혀버린다.14)

나는 한국 교회에서도 이러한 진리의 봉합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가 교리에 봉합되어버린 것이다. 성서를 특정한 교리들의 체계로 재단하고 그러한 교리들만이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교리의 체계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비 진리, 아니 진리의 적으로 간주하는 현상이 보여주는 바가 정확히 이러한 봉합이 아닌가. 이러한 교리에 의한 봉합 이후 기독교는 단지 교리들을 되 뇌이고, 반복하고, 단순 적용하는 역사로 굳어져버렸다. 교리에 반하는 모든 주장은 이단이고, 사설이며, 위험한 것이고, 불순한 것으로 낙인찍히고 배제되었다. 그것도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렇게 해서 더 이상 기독교에서는 진리가 출현하는 거점일 수 없게 된 것이다.



4.찌꺼기 - 기독교 주체의 형상

사실 나는 바디우에게 전적으로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철학에 대한 의문점도 있고, 또한 그의 바울 독해, 성서 읽기, 기독교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다. 기본적으로 나는 바디우가 우화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들-가령 부활의 역사성, 예수의 삶과 가르침 등-을 단지 우화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바디우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해도 바디우와 다른 점이 많다.15) 바디우의 철학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바울이해를 완전히 수긍하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디우를 읽고, 바디우의 바울이해에 대한 글을 쓴 것은 이 글의 초두에서 밝혀 듯이 그의 바울 독해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전도된 상황을 돌파하는데  유효한 자원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지배의 욕망에 의해 추동되고 있고, 그 결과 진리의 보편주의와 평등주의를 상실하고 폭력적으로 타자를 배제하고 지배하려는 전도된 상황에 처해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디우가 말하는 바울의 보편주의, 즉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는 평등한 아들됨의 진리와 그 진리의 보편적 전달을 위해 투쟁하는 진리의 주체는 곱씹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이 제시하는 기독교 주체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세상(상황) 내에서 현시되지 않으며, 적절한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잔여와 같은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고전 4:13, 표준새번역)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상황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려한다. 아니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지배하기 원하며 그 상황 내에서 가장 지혜롭고 강한 자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소유했다고 상상하는 원리에 의해 상황을 총체화하려 하거나 상황 내에서 자신들의 예외적 특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이해를 가능케 하는 교리체계를 우상시하고 있다. 총체성이, 특권이, 그리고 교리가 자신들을 지배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정확히 바울이 말한 기독교 주체의 모습과는 반대되는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고전1:27)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상황 내에서는 그 존재조차 포착될 수 없는 것들을 선택하셨고, 그를 통해 상황을 지배하는 존재하는 것들의 지배를 폐하시는 분이다.(고전1:28) 기독교 주체는 근본적으로 약한 존재이다. 그는 공백에 맞닿아 있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이 비존재와 같은 존재, 기존의 상황 안에서는 포착되지도, 현시되지도 않지만 그 상황을 지배하는 권력을 전복할 수 있는 공백-사건과 조우한 존재가  바로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한 상실의 결과가 바로 지배에의 욕망으로 가득 찬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바디우가 제시하는 바울의 사유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기독교인이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 가를 내게 보여주었다. 바디우의 바울 이해는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점들을 내게 열어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찌꺼기의 주체성을 수용해야한다. 그리스도교 담론의 대상은 오로지 이러한 낮춤을 대면할 때에만 갑자기 출현할 수 있다.”(111) 바디우의 『사도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는 하나의 ‘설교’였다.

1) 알랭 바디우 저, 현성환 옮김, 『사도 바울』, 새물결, 2008. 이후 이 책에서 직접 인용할때는 본문 안에 (   )로 쪽수만 표기하기로 한다.


2)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은 그의 저서인 『들뢰즈-존재의 함성』(알랭 바디우 지음,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1)에 집약되어 있다. 들뢰즈 생전에 이미 그는 바디우와 논쟁을 했던 적이 있었고, 둘 사이에는 팽팽한 지적 긴장이 형성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서문에서 바디우가 밝히고 있듯이 그것이 반드시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둘은 차이만큼이나 유사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둘을 가르는 분명한 차이일 것이다.


3) 철학적으로 볼 때 이러한 지적 조류는 진리를 한낱 언어적 구성물이거나 문화적 관습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사유들을 말한다. 바디우는 이러한 조류들이 철학의 고유한 적인 소피스트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보며 비트겐슈타인 학파와 니체의 노선을 대표적인 현대의 소피스트로 파악한다. 바디우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이들의 사유를 전선으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건들』(알랭 바디우 저, 이종영 옮김, 새물결, 2006)의 1장 “철학 자체”를 참조할 것. 특히 p.79, p.100


4) 그의 바울 논의는 바로 이 서신들에 국한된다. 바울의 전기적 자료들을 담고 있는 「사도행전」의 경우, 바디우는 그것이 친로마적 의도와 신화적 무용담으로 각색된 이데올로기적 저작으로 평가하며 자신의 바울 연구에서 그것을 제외시키고 있다.


5) 총체성이란 유사-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총체성의 체계에서 각각의 존재자들은 위계화된 체계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할당받는다. 가령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보여주는 철학자-군인-상인의 위계화된 신체가 이를 드러내준다. 반면 바디우가 말하는 보편성이란 존재하는 자들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6) 바디우의 존재론은 그의 주저 『L'Etre et l'événement)』에 집약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바디우의 존재론은 그의 국내 제자들이 바디우를 소개하기 위해 쓴 글들을 참조하였다. 내가 참조한 글은 다음과 같다. 서용순, 「집합론을 통한 진리의 사유」, 『철학의 혁신과 혁신의 철학 - 알랭 바디우』,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 2008년 가을학술특강 자료집, 2008; 서용순, 「철학의 윤리, 진리의 윤리」, 『사회와 철학』제13호, 2007; 서용순, 「바디우 철학에서 공백의 문제」, 『라깡과 현대정신분석』8권 2호, 2006, 서용순; 서용순, 「철학의 조건으로서 정치-알랭 바디우의 진리철학을 중심으로, 『철학과 현상학 연구』제27집, 2005; 박정태,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 소개」, 알랭 바디우 저, 박정태 옮김,『들뢰즈-존재의 함성』, 이학사, 2001


7) 바디우에게 수학은 존재론을 사유하기 위한 고유한 학문이다. 수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바디우의 논의로는 『조건들』의 3장 “철학과 수학”의 ‘1.철학과 수학’을 참조할 것.


8)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이후를 사유했던 철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사건이다. 들뢰즈, 데리다,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이 그러한 사유의 대표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역사도 주체도 없는 어떤 체계로서 구조 가운데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사유하고자 하였고,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구조 내의 어떤 공백의 지점들을 통해 구조의 변화가능성을 이론화하였다. 구조 밖의 초월적 존재의 개입이 아니라 구조 내부에서 변화의 필연성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내재주의자였고, 그러한 내재적 변화를 그들은 모두 ‘사건’이라고 불렀다. 바디우의 사건론 역시 이러한 지적 흐름의 자장 가운데 있다고 하겠다.


9) ‘어떤 자’에 관하여는 바디우의 『윤리학』(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의 4장 “진리들의 윤리학”을 참조할 것. 특히 p.58-62.


10)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실재적 과정을 '진리'(하나의 진리)라고 부른다.", 바디우,『윤리학』,p.55


11) 나는 이러한 담론들이 신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시적으로 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성서에 대한 특정한 해석틀인 신학이 대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을 나는 대중신학이라고 명명한바 있다. 대중신학에 대해서는 졸고,「신학의 빈곤 : 포스트2007 시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복음과 상황』221호. 2009년 3월호) 참조 


12) 반드시 신학적으로 신칼빈주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적 원리에 의한 세상의 재구조화를 주장하는 대중신학 노선들은 모두 그리스화된 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주류 복음주의는 총체성 담론을 추구하는 그리스화된 기독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조류 역시 대중신학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생각한다.


13) 바디우는 악은 진리의 왜곡에서 의해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사건이 공백을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충만함을 호출한다고 생각될 때 발생하는 시뮬라크 혹은 테러로서의 악, 둘째 진리에의 충실성이 쇠퇴하면서 발생하는 배반으로서의 악. 셋째 명명 불가능한 것을 명명하는 것, 즉 하나의 진리를 전능한 힘으로 간주할 때 발생하는 파국으로서의 악이다. 이 글에서는 마지막 악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자세한 것은 바디우의 『윤리학』중 5장 “악의 문제” 참조.


14)바디우는 진리가 생산되는 공정들은 복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러한 공정들은 과학, 예술, 정치, 사랑으로 제시한 바 있고 철학은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생산된 복수적 진리들의 공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의 차원에서는 철학 자신이 진리를 생산하는 유일자라고 주장하거나, 네 가지 공정 가운데 오로지 하나의 공정만이 철학을 생산할 뿐이라고 주장할 때 악이 발생한다. 그는 하나의 공정에만 진리 생산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봉합이라고 말한다. 바디우,『조건들』, p.82-100. p.103


15) 하지만 그것은 내 개인적 신앙 고백일 뿐, 객관적이고 학문적 논리로 검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