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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상징투쟁과 권력의 시각으로 읽는 한국 개신교 5


5-1. 개신교인의 종교 아비투스: 아비투스로서의 종교성과 공리주의적 성향들의 체계

 

‘종교성’(religiosity, religiousness)은 신자의 종교적 능력과 실천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다. 종교성은 기본적으로 종교를 신앙하는 “한 개인의 종교적 성향”(religious disposition)으로 정의된다(한내창, 2001).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내면화된 믿음 체계나 태도를 의미하기도 하고, 종교적 정체감이나 애착도, 의례나 조직 활동의 참여 정도 등을 의미하기도 하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교성을 개인 내면의 ‘성스러움’(김종서, 2006:168 각주 11번)이라고 설명하는 방식도 일관된 개념으로서 그다지 만족스러운 정의는 아니다. 문제는 개인의 내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스러움’(being religious)(노길명․한내창, 1997:111)을 어떻게 측정하고 이론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른바 종교성을 총체적․다각적 시각, 이른바 ‘다차원적(multidimensional) 구조’로 보자는 주장은 종교사회학계의 종교성 정의의 곤혹스러운 현실을 반영한다. 현재까지의 연구들에서 종교성을 측정하는 지표의 대강을 요약․종합하자면 다음과 같다. 종교 소속(affiliation), 종교적 투신(commitment) 혹은 열성도, 의례와 집단 참여 빈도, 교리 지식의 정도, 헌금의 열성도, 이념적 차원이나 종교적 정향 등. 이러한 지표들은 교리의 습득과 같은 지식적 차원과 종교적 궁극적 가치와 이해관심의 문제인 신념적 차원, 그리고 행위자의 수행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종교성의 다양한 차원들을 포착하기 위해 다양한 지표와 척도들을 제안하고 있다(김병서, 1995; 한내창, 2001을 보라).



이러한 종교성에 대한 연구들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특정한 맥락에서 드러나는 종교적 실천들을 변수화하고 종교성의 지표로 삼는다. 이는 결국 종교성이 표출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으로 측정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종교적 실천들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한 종교성이란 종교적 맥락에 따른 구체적이고 다양한 실천들을 표상하는 종교성의 지표들과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성이 외부의 물적 조건과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의 단순한 반영은 아니다. 종교성, 즉 기복신앙과 같이 개신교의 특정한 종교적 성향을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만 보는 외부주의적 관점은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 정체성(예컨대 복음주의)과 아닌 것들을 어떻게 구별해 내며 어떻게 신앙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동시에 신앙적(종교적)이지 않은 것들을 배척해 내는 능동적 분류행위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종교적’(개신교적)이라는 것은 종교적인(개신교) 언어를 구사하고 종교적(개신교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종교인(개신교인)들의 집단적 자기규정이다.


종교성은 주관적 종교적 경험이나 의례와 같은 행위의 의미들이 표면화된, 즉 측정 가능해진 것이지만(또 신자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이며 의도적인 종교적 성향의 표현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객관적 종교문화와 구조적 요인, 즉 종교장의 논리에 의해 구조화된 인지체계이자 체화된 성향들의 체계이라는 점에서, 또한 사적인 행위규칙이 아니라 간주관적인 의미체계 하에서만 행위자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집단적이고 문화적인 규칙들을 준수할 수 있는 능력인 아비투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개별자 아비투스(individual habitus)는 집단을 표현하고 반영하는 한에서 내재화된 구조의 주관적이지만 비개인적인 체계, 지각, 개념, 행위의 공통적 도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동일한 계급 구성원들의 단일한(singular) 아비투스는 다양성을 지닌 동일함의 원리인 동형성(homology) 관계 안에서 통일된다. 성향들의 각각의 개별적 체계는 계급과 그 궤적 안에서 그 입장의 단일성을 표현하는, 다른 체계들의 구조적 변형이다(Bourdieu, 1990:60). 마찬가지로 개인의 종교성(individual habitus)은 종교장과 조응된 집단 아비투스(group habitus)의 편차 내에서 이해된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행위자들의 (의식적․무의식적) 실천(practice)과 그것의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 장(field)과 더불어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도입했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실천을 “객관화된 생산물과 역사적 실천의 육화된(incorporated) 생산물 간의, 구조와 아비투스 간의 변증법이 이루어지는 장소(the site of the dialectic)”(Bourdieu, 1990:52)라고 규정한다. 즉 실천은 구조화된 동시에 새로운 구조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자의 실천은 구조에 종속되기만 한 것도, 완전히 창조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실천이나 신앙적 담론과 같은 종교적 생산물들도 ‘초월적’이고 ‘선험적’(이라고 주장되는) 순수한 종교적 경험을 재현함으로써 자율적 이념으로서 개신교의 신념 및 가치(체계)의 탈맥락적 진리성을 보증하고 정당화하는 ‘신학’적 차원으로 환원할 수도 없고, 외부의 물적 조건과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의 단순한 반영인 이데올로기만으로도 볼 수 없다. 종교적 성향들도 구조화된 동시에 구조화된 실천을 낳는다. 예컨대 개신교 장과, 개신교 장과 상동적인 외부 장들(전통종교문화의 장, 경제장, 정치장) 그리고 사회적 세계 하에서 구조화된, 구원이나 복을 추구하는 개신교인들의 아비투스는 ‘복음주의’나 ‘기복신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복음주의적인 실천이나 기복적인 신앙행위를 낳는다. 가령 복음(Gospel; Good News)을 영적인 것으로 보거나 복음전도(evangelism) 및 복음화(evangelization)를 중시하는 복음주의자들의 태도와 실천, 그리고 복음의 현세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기복신앙(health-wealth Gospel 혹은 번영신학)[각주:1] 등은 구원이나 복에 대한 종교적인 욕망과 기대를 현실의 객관적 조건에 맞추는 개신교 행위자의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기복적 아비투스의 산물이다. 최종철(1996a; 1996b)은 이러한 개신교인의 전통적인 종교적 성향의 원형을 ‘무속신앙’(한국적 천년왕국주의)에서 찾고 이것이 ‘현세적 공리주의’ 아비투스를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 전통적 성향이 서구의 내세지향적이고 종말론적인 ‘천년왕국주의’[각주:2] 신학의 특성과 친화성을 가짐으로써 “저 세상 지향적인” 근본주의 종교아비투스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현세지향적 성향과 내세지향적 성향의 모순을 “현세 지향적 근본주의”라는 이중 구조로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인의 종교 아비투스는 현세지향적이든 내세지향적이든 구체적인 방향을 가진 성향 그 자체라기보다는 개신교장과 행위자가 처한 사회적 맥락 가운데에서 방향성을 드러내게 하는 성향들의 체계(system of dispositions)이다. 바로 서구의 사회적 맥락과 신학 하에서 형성된 내세지향적 종교 성향과 한국의 사회적 맥락과 전통 하에서 형성된 현세지향적 종교 성향이라는 각각의 성향들을 당대의 사회적 환경 하에서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 일관된 실천의 방향을 제시하는 체계가 종교아비투스인 것이다. 즉 현세지향적 종교성이든 내세지향적 종교성이든 개신교인의 종교성이란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개신교인의 종교아비투스가 산출하는 지표적(indexical) 실천인 것이다. 예컨대 독재‧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개신교인은 내세지향 및 현실도피적인 종교성(영혼구원의 복음)을 발전시키고 유통(전도와 교회성장)시킴으로써 권력의 비호와 야합 아래 유무형의 이득을 취했다. 반면 절차적 민주화를 달성한 ‘87체제’ 이후에는 정치권력의 압력이 없어졌으므로 더욱 적극적인 현세적 실천강령(사회참여 및 사회적 책임의 신학)을 강조함으로써 이득(사회적 신뢰라는 상징자본과 교세 위축을 돌파)을 획득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확보됨에 따라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는) 내세지향적 복음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적어졌던 것이다.[각주:3]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처음부터 내세지향적 종교성을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현세의 삶을 위해 내세지향적 신앙을 (무의식적으로) 전략적으로 발전시켜 왔으며 내세지향을 통해 진정으로 현실적인 이익을 취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각주:4] 내세지향적 종교성에 대한 다음의 설명은 평신도의 무의식적이지만 종교적 보수주의에 부합하는 전략을 시사한다.



예컨대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에 나섬으로써 따를 수 있는 불편함과 고통에 대해서는 쉽게 외면하고 그러한 일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만, 개인의 성공과 명예를 획득하는 일에는 적극 나서며 그러한 것을 곧바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신앙의 세계에서는 고통의 문제 역시 취사선택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성공을 추구하는, 다시 말해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의 걸림돌만이 ‘불가피한’ 고통일 뿐, 사회적 빈곤과 정치적 박해 등은 ‘피할 수 있는’ 고통이 된다(최형묵, 2002:87).


신자는 성향들의 체계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특정한 고통을 피하는 (개신교 장의 종교적 보수주의가 부여한 감각을 사용함으로써 주어진 혹은 가용한 자원 내에서 적절한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결국 현세지향적이거나 내세지향적 실천은 한국 개신교인의 본질적이고 고정적인 성향이 아니라,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특정한 사회적 맥락 하에서 주어지는 가능성의 영역 내에서 현실에 적합한 실천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전략적으로 선택되는 한국 개신교인의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종교아비투스의 산물인 것이다._먹보에술꾼(CAIROS 연구원)

  1. 한국적 ‘기복신앙’과 서구-미국적 현상인 ‘health-wealth Gospel'은 동일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구원과 복음의 현세적 이익을 강조하는 신앙문화이자 메시지라는 점에서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한다. [본문으로]
  2. 천년왕국주의는 크게 전천년왕국주의, 후천년왕국주의, 무천년왕국주의로 구분된다. 여기서 최종철이 주장하는 내세를 강조하는 한국 개신교인의 신앙은 주로 전천년왕국주의와 관계가 깊다. ‘전(前)천년왕국주의’는 하나님과 메시야가 다스리는 천년왕국이 도래하기에 앞서(前) 예수가 재림하여 세상을 불로 심판한다는 근본주의 신학의 종말론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 인류의 끝없는 타락으로 종말이 온 후에 신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사상으로 역사의 암울한 미래상을 그리고 있다. 인류문명과 현세의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에 내세를 지향하게 된다. 반면, 진보사관인 ‘후(後)천년왕국주의’와 대비된다. 한편, 무(無)천년왕국주의는 세상의 종말에 앞서 천년왕국이 없다는 신학적 입장이다. [본문으로]
  3. [본문으로]
  4. 최형묵(2002)은 이러한 내세지향적 신앙을 “타계적 복음화의 신학”이라고 정의한다. “타계적 복음화의 신학은 저 세상에서의 영혼의 구원을 강조한 까닭에 현실의 문제를 등한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타계적 복음화 신학의 진정한 효과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게 하기보다는 현실의 모든 문제를 개인화‧내면화하는 데 있다. 그것이 ‘타계적’이라는 것은 현실의 모순관계를 은폐시키는 한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8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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