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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상징투쟁과 권력의 시각으로 읽는 한국 개신교 ②
 

2. 핵심 개념들의 유기적 관계로 보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사회이론
 
 

본고는 한국 개신교 혹은 한국교회를 상징권력과 상징투쟁, 상징재 시장의 관점에서 보기 위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의 이론을 차용하였다. 그의 이론이 종교(특히 개신교)를 분석적으로 연구하는데 있어 최고(the best)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문제의식을 만들어준 그의 선생들-고전 사회학자들이나 지금까지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현대 사회학자들을 비롯한 이론가들과 상당한 정도의 '호환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발전 가능성이 높은 이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평가의 이론적 근거를 지금 여기서 당장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의 서술 속에서 발전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본격적인 연재에 앞서 연재글의 이론적 틀거리가 되어줄 부르디외의 핵심 개념들의 유기적 관계를 개괄하고자 한다.


부르디외의 이론의 출발점-이론적 전제는 사회적 공간(social space)이다. 사회 공간(social space)은 사회 세계를 실체론적(substantialist) 방식으로 생각하는 경향과 단절하고 관계적(relational)인 원리로서 이해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다(Bourdieu, 1998:31). 행위자들은 이 사회적 공간 내에 위치지어져 있으며 객관적 구조나 제도는 이 공간의 역학 관계로부터 파생한다. 이 사회적 공간의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세계가 바로 장(field)이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행위자들의 (의식적․무의식적) ‘실천’(practice)과 그것의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 ‘아비투스(habitus)’와 ‘장(field)’ 개념을 도입한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실천을 “객관화된 생산물과 역사적 실천의 육화된(incorporated) 생산물 간의, 구조와 아비투스 간의 변증법이 이루어지는 장소(the site of the dialectic)”(Bourdieu, 1990:52)라고 규정한다. 즉 실천은 구조화된 동시에 새로운 구조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실천에 대한 부르디외의 강조는 행위자들의 의미세계와 실천의 논리에 대한 ‘객관주의’(objectivism)와 ‘주관주의’(subjectivism) 접근이라는 양자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드러난다. 부르디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객관주의가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는 구조의 실재론(realism)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객관주의는 객관적 관계들을 집단의 역사 바깥에서 이미 구성된 실재로 취급함으로써 이 관계들을 실체화(hypostatize)할 때 그런 결과에 도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회 세계의 필연성(necessity)에 관해 설명할 수 없는 주관주의에 빠져서도 안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실천으로, 완료된 작업(opus operatum)과 작업방식(modus operandi) 간의, 즉 객관화된 생산물과 역사적 실천의 육화된(incorporated) 생산물 간의, 구조와 아비투스 간의 변증법이 이루어지는 장소(the site of the dialectic)로 돌아가야 한다.(Bourdieu, 1990:52)

객관주의(구조주의)와 주관주의(실존주의) 사이에서


부르디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등으로 대표되는 구조주의가 연구자의 인식론적으로 우월한 위치(the bird's eye view)를 상정하는 ‘지식인(중심)주의’(intellectual[ocentr]ism) 또는 ‘학자적 관점’(the scholastic point of view)임을 비판한다.(Bourdieu, 1990:30-41을 보라) 예컨대 구조주의 인류학의 ‘참여관찰’(participant objectivism)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거리는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용어상의 모순만이 아니라 참여관찰이 표방하는 객관주의는 행위자의 실천을 감지하는 데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주의는 일상에서 분류하는 주체이자 동시에 분류당하는 객체인 행위자의 맥락화된 의식적․무의식적 실천을 포착하지 못하여 역사를 ‘주체 없는 과정’으로 환원하고, 행위자들을 단순히 구조의 담지자인 ‘문화적 얼간이’(cultural dope)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행위자의 일상적인 실천과 의미세계는 집합적으로 당연시된 가정(take-for-granted assumption)이나 신체에 각인된 실천감각(embodied practical sense)을 바탕으로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맞게끔 지속적으로 성취(ongoing achievement)되기 때문에 이론적 개념으로는 남김없이 포착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모델’(지도상의 선)을 ‘현실’(실제 길거리)로 대체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Bourdieu, 1980:67).[각주:1]

동시에 부르디외는 실존주의민속방법론(ethnomethodalogy)을 ‘주관주의’라며 비판한다(Bourdieu, 1990:42-51을 보라). 왜냐하면 이들은 행위자의 주체적 실천이나 창조적 의지만을 강조하는 반면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이론은 생활세계(life-world)의 경험의 탈정치화된 단순한 묘사나 기술(describe)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행위자들의 당연시된 믿음이 어떻게 당연시 됐는지를, 혹은 사회적으로 임의적인 분류도식이 어떻게 구조화 되고 유지 및 재생산되는지를 포착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부르디외는 현상학적 혹은 해석학적 사회학의 전통에서 강조하는 행위자의 의미세계를 중시하면서도 그것의 사회적 조건(social connditions)에 대한 설명을 통해 행위자의 실천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려고 한다.[각주:2] 다시 말해 행위자의 실천은 구조에 종속되기만 한 것도, 완전히 창조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자의 실천과 이 실천이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의 생산․재생산 및 변형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맥락인 장과 그 장의 논리를 내재화한 아비투스의 조응(encounter) 관계를 이해해야만 한다.

장의 이미지 1 : 모빌-네트워크 모델

행위자들이 속한 특정한 사회적 구조나 맥락인 “장은 개인들이나 제도들에 의해 점유된 위치들(positions) 사이의, 객관적인 관계들 간의 지배와 종속, 협력 혹은 대립의 연결망”(Bourdieu, 1996:231)이므로 “위치들의 속성은 그 공간 내에서의 다른 위치들에 의존하며, 위치 점유자들의 특성과는 독립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Bourdieu, 2004a:125). 그리고 위치는 장 내에서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는 ‘제자본의 총량’(the global volume of capital)과 ‘구성비’에 의해 결정된다. 즉 장은 객관적인 위치들이 구조화되어 있는 동시에 장 내에서 통용되는 특수한 자본의 불균등한 분포 상태인 것이다. 이 위치는 행위자들에게 제시된, 그러나 해당 장의 논리를 체화한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객관적인 ‘가능성의 공간’(the space of possible)[각주:3] 내에서 위치 점유자의 ‘성향’(dispositions)과 그가 소유한 ‘자본’, 그리고 ‘사회적 궤적’(trajectory)에 따라 투쟁을 위한 차별적인 실천의 ‘전략’(strategy)과 그에 따른 ‘입장표명’(position-taking, 문화산물)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장은 ‘이해’(interest)와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을 위한 ‘투쟁’(struggle)이 일어나는 ‘사회적 공간’(social space)이다. 모든 장에서는 다른 장의 그것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그 장만의 특수한 내기물(stakes)과 게임의 규칙(rules), 그리고 그에 따라 세력을 유지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이 있다. 이 때 행위자들, 특히 지배자들이 지배의 정당성(legitimacy)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투쟁에 동원하고 활용하는 모든 ‘수단’이자 ‘소유물’이 바로 자본(capital)이다. 자본의 유형을 도식적으로 분류하자면 문화자본, 사회자본, 경제자본, 그리고 상징자본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부르디외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은 기능하는 장에 따라 그리고 각각의 장에서 효력을 발휘하도록 변형되기 위해 다소간의 비용을 치른 후에 다음의 세 가지 기본적인 형태로 가장된 채 자신을 드러낸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돈으로 변환되며 재산권의 형태로 제도화될 수 있는 경제자본,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경제자본으로 변환되며 교육적 자질의 형태로 제도화되어 있는 문화자본,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경제자본으로 변환되며 사회적 의무로 구성되어 있고 고상함을 나타내는 신분의 호칭과 같은 형태로 제도화되는 사회자본이 그것이다(Bourdieu, 2007:65).


특히 문화자본은 권력의 원천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문화자본은 체화(embodied)되거나 객관화되거나 제도화된 상태로 구분된다. 상당히 오랜 시간과 노력의 직접적인 축적과정을 통해 체화된 문화자본은 보통 문화나 교양이라고 불리우며 지식, 취향, 안목, ‘사회적으로 구성된 욕망’(libido)이기도 하다. 이것이 다름 아닌 ‘아비투스’(habitus)이다. 또한 경제자본이 충분히 인정되지 않는 모든 시장에서 자본으로 인식되지 않고 ‘오인’(misrecognition)의 효과에 따라 권위나 정당한 능력으로 인식된다(Bourdieu, 2007:246-247). 한편 객관화된 상태의 문화자본은 예술작품이나 경제자본같이 상속하기 쉬운 물질적 형태나 문화적 상품을 일컫는다. 또한 제도화된 문화자본은 학위와 자격증과 같이 법적으로 보증된 형태로서 행위자들의 능력 차이를 더욱 부각시키는 힘을 갖는다.

그리고 사회자본은 상호 인식이나 인정이 제도화된 관계, 즉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이 됨으로서 획득되는 자본으로 학연이나 지연과 같은 ‘인맥’ 개념에 가깝다. 이를 테면 한 사람이 소유한 사회자본의 총량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연줄망의 범위와 그것에 연결된 각 사람의 문화, 경제, 상징 자본의 총량이다(최종철, 1996b:63). 사회자본에서 중요한 점은 연결망에 속한 행위자들 간의 최소한의 동질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징자본은 문화, 사회, 경제자본과 직접적으로 전환될 수 없는 인정, 권위, 명예, 위신과 같은 것이면서 또 다른 층위를 갖는다. 문화자본, 사회자본, 경제자본이든 간에 이러한 자본들은 각 장 내에서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질서를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오인되고 상징적 힘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상징자본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Bourdieu, 2007: 각주 3번을 보라). 결국 자본이란 경제적 자본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형태나 체화된 형태로 축적된 노동”(Bourdieu, 1986:241)을 모두 포괄하는 ‘자산’(property)과 같은 개념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경제적’ 실천의 ‘객관적’ 진리, 즉 ‘적나라한 자기 이익’과 이기적 계산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경제에서는 심지어 ‘경제적’ 자본조차도 그 진정한 원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상징자본은 이렇게 부정된 자본이다. 그것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으며, 즉 자본으로 오인된 것이다. 상징적 자본은 경제적 자본이 인정되지 않을 때 종교적 자본과 더불어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자본 형태이다(Bourdieu, 1990:118).

다시 말해 상징자본은 직접적으로 경제자본으로 전환(conversion)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자본의 가치조차 장 내에서 행위자들에 의해 상징적 차원에서 인지되고 유통된다는 점에서 모든 자본의 상징적 작동원리를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인정, 권위, 명예, 위신과 같은 상징자본은 장에 속한 행위자들에게 정당한 것으로 승인(오인)됨으로써 그들에게 상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즉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을 수반하는 자본이다.

이러한 (각 장에 고유한) 상징자본의 축적은 장의 자율성(autonomy)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해 자본 개념은 개별 장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내적 논리와 연관된다(선내규, 2008:547). 부르디외에 의하면,

어원에 따르면 자율적이라는 말은 자체적인 법칙, 자신의 고유한 질서(nomos)를 가진다는 것, 자기의 기능의 원리와 규칙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고유한 평가의 범주들이 작동하는 세계인데, 이 범주들은 이웃한 소우주에서는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중략]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수한 법칙이며, 평가의 원리이자 궁극적으로는 배제의 원리인 법칙이다.(Bourdieu, 2000a:52; 이상길, 2002:191에서 재인용)

즉 다른 장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배제의 원리’인 특수한 논리와 특수한 자본이 바로 해당 장의 자체적인 법칙과 검열효과를 가능하게 한다.


장의 이미지 2 : 등고선

결국 각각의 장에서만 통용되는 특수한 자본과 그것의 불균등한 분포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의 경계와 불평등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권력지형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본은 장이라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며, “장이 무엇인지, 그것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지 등을 논의하는 것과 어떤 종류의 자본이 그 안에서 작동하는지, 어떤 제약 안에서 기능하는지 등을 논의하는 것은 동일한 것”(Bourdieu and Wacquant, 1992:98-99)이다. 왜냐하면 자본은 권력과 지배의 원천이자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과 권력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율성은 장의 규칙에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정도 혹은 상징적 지배를 승인하는 정도인 검열효과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상대적 자율성은 외적인 결정력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과 장에 고유한 상징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정도로 측정될 수 있다. 장에 진입하는 신참자나,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노력하는 행위자일수록 역설적이게도 장의 특수한 내기물에 대한 헌신(입장권)이 요구된다. 즉 행위자가 게임의 규칙을 체득하고 실천감각을 갖추는 만큼, 장에서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기회(운신의 폭)와 내기물을 알아채고 그에 따르는 적절한 행동전략(처세)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검열이 눈에 띠지 않게 작동하고 있다는, 즉 행위자가 지배권력을 승인(오인, misrecognition)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장의 검열효과는 행위자의 실천과 문화산물에 작동한다. 즉 행위자의 실천과 문화산물이 사회․경제적인 외부조건의 직접적 반영의 결과물이 아니라 장 내부의 권력구조와 논리에 의해 일정정도 중개되고 굴절되며 재해석된다는 것이다. “문학이나 과학 등의 문화적 생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 내용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처럼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연결하는 사회적 콘텍스트만으로도 불충분”하다(Bourdieu 2002b:22).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혹은 굴절능력을 보유한 장은 행위자의 실천이나 생산물에 대한 사회․경제적 환원주의 해석(외적 분석)이나, 상징체계의 완전한 자율성을 순진하게 따르는 논리(내적 독해) 사이의 양극단을 매개한다(Bourdieu, 2002b:242).

이해(interest), 상징자본 혹은 상징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이러한 투쟁은 모든 장에서 권력과 보다 많은 자본(capital)을 소유한 기득권자들(orthodox)과 이 권력에 대해 도전하는 상대적으로 적은 자본을 가진 세력들(heterodox) 간에 벌어진다. 행위자들은 장에서 합법적인 권력(상징폭력)의 독점을 위해 투쟁하는데, 장의 지배자는 통념(doxa)을 의심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보존의 전략을, 피지배자는 전복의 전략을 택하게 된다. 장 내에서의 투쟁은 물리적인 방식뿐만이 아니라 비물리적 방식으로도 일어난다. 예컨대 예술장에서는 ‘예술적 정당성’의 독점을 위해 투쟁한다. 여기서 예술적 정당성이란 권위를 갖고 스스로 예술가라고 말하거나, 누군가에게 그 칭호를 부여할 수 있는 권력의 독점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승인권의 독점이다. 이러한 작가나 장르에 대한 ‘정의내리기’는 정당성 확보를 위한 상징투쟁의 한 모습이다(현택수, 2002:30).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투쟁 상황은 공통된 믿음과 집단적 ‘공모’(complicity, collusion)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장에 따라 다소간 완전하게 내기물들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생산하는 데 공헌함으로써 유희(play)의 재생산에 공헌한다. 새로운 신참자들은 유희 가치의 인정, 그리고 유희 기능 원칙의 (실천적) 앎이라고 하는 장에의 입장권을 지불해야만 한다. 즉 그들이 유희를 얼마나 신봉하고 있는가, 유희에 대해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가에 따라 장에의 입장이 허용되는 것이다. 그들은 전복의 전략을 지향하지만 극단적인 전복은 장에서 추방당할 위험이 있는 만큼 그들의 전복적 전략은 특정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을 연속적인 무대로 해서 이루어지는 부분적인 혁명들은 유희의 근본 자체, 근본적인 공리, 유희 전체가 근거하고 있는 최종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Bourdieu, 2004a:128).


즉 대립하는 진영들 간에 장에서 추구하는 목표(stakes)나 ‘신성한’ 가치에 대한 암묵적인(implicit, tacit) 합의나 공통의 이해관심(interest)이 전제되어야 한다. 심지어 게임의 규칙에 대한 믿음은 게임의 주도권을 가지고 신념체계(system of belief)를 생산․주입하는 행위자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바꾸려고 투쟁하는 행위자들에 의해서도 강화된다. 정당성의 독점을 위한 투쟁은, 그것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그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공헌한다(Bourdieu, 2002a:226). 장은 바로 이러한 장 내 행위자들의 당연시되고(taken-for-granted) 공유된(shared) 지식이나 믿음(doxa)에 의해 성립된다. 이것은 일종의 게임의 규칙(rule)에 대한 신뢰로서 게임의 참여자들은 이 규칙을 준수(rule-following)함으로써 승부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규칙을 바꿀 수 없는 게임과는 달리, 장에서는 투쟁에 의해 게임의 규칙이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장 내에서는 게임의 규칙 자체가 내기물이기 때문이다. 규칙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게임에 대한 감각(feel for the game)을 체화(embody)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게임 참여자는 제한된 바둑판에서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면서도 무한하게 생성될 수 있는 기보(棋譜)에 따라 원하는 적재적소에 바둑알을 놓을 수 있는 능력(ability)이 있다. 이것이 아비투스이다. 이는 이성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네트를 향해 뛰어가고 있는 테니스 선수의 순간적인 결정”(Bourdieu, 1990:11)과 같이 무의식적이고 반(反)성찰적인 행위이다.[각주:4] 그리고 바둑에서 이기기 위해 바둑에서 동원할 수 있는 규칙과 자원(바둑알과 실천적 지혜)을 이용하면서도 그 규칙에 지배받는 것이다. 이것은 사적인 행위 규칙이 아니라 집단적인 규칙을 집단적으로 내면화한 것으로서 몸에 배어있는 ‘감’(sense)이다.[각주:5] 따라서 말로 할 수 없고, 언어화되지 조차 못한 상징적 질서(doxa)와 상징폭력의 자발적(automatic) 승인의 비자발적 메커니즘(오인)을 보여준다. 부르디외의 오인은 베버의 ‘정당성’ 개념을 발전시킨 것으로서 다른 점이 있다면 베버의 정당성이 지배권력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자발적 승인이라면 오인은 자발적 승인을 비자발적인 과정으로 받아낸다는 점이다(이상호, 2002b:169). 이것이 바로 실천의 성향체계(system of disposition)인, 특정한 사회적 영역인 장의 지배적 인지․평가도식이나 분류체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구조화된 구조’(structured structure)인 아비투스(habitus)이다. 동시에 이 아비투스는 분류하는 행위자를 분류하는 체계이자 ‘구조화하는 구조’(structuring structure)로서 행위자의 위치와 그가 소유한 자본, 그리고 사회적 궤적과 더불어 일상적인 맥락 속에서 행위자들의 구체적인 실천의 전략을 생산해낸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발생론적 도식들(generative schemes)이라는 획득된 체계로서, 아비투스는 특정한 그것의 생산조건 안에 내재한 모든 사고, 행동, 지각들의 자유로운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아비투스를 통해서, 구조(아비투스는 구조의 산물)는, 기계론적 결정론의 경로를 따라서가 아닌, 실천이 발생하는데 초기에 설정된 제한들과 한계들 안에서 실천을 지배한다. 이 무한한 그러나 엄격히 제한된 발생적 능력은 보통의 이분법적 대립(아비투스라는 개념이 넘어서고자 하는 결정과 자유, 조절화와 창조성, 의식과 무의식, 혹은 개인과 사회)에 머물러 있는 한 이해되기 어렵다. 아비투스는 사고, 지각, 표현, 행위들이라는 산물을 발생시킬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기 때문에(그것의 한계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상황지워진 그것의 생산조건에 의해서 설정된다), 그것이 발휘하고 조건지어지고 조건지우는 자유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의 창조와 거리가 멀고, 이는 본원적 조절의 단순한 기계적 재생산도 아니다(Bourdieu, 1990:55).




따라서 마치 지휘자 없이 자발적인 협주(orchestration)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특정한 행위자의 모든 실천과 작품은 의식적으로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지 않아도 서로 객관적인 조화를 이룬다(Bourdieu, 1990:53). 이는 행위자의 실천과 그 전략이 장이라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조건 하에서 이해(interest)와 상징자본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계산(calculation)된 것이 아니라 필드의 논리에 순응하고 구조화되었지만 열린 성향 체계인 무의식적이며 반(反)성찰적인 아비투스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행위자의 전략은 개인의 순수한 주관적 의지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진 운명도 아니다. 아비투스는 행위자들의 객관적 이익에 상응하는 전략들, 그러나 의도적으로 그 목적을 위해 취해진 것은 아닌 전략들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특정한 아비투스를 보유한 장 내의 행위자들은 스스로 자신이 장의 논리에 희생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Bourdieu, 2004a:133), 실천감각인 아비투스에서 발생하는 전략에 따라 특수한 이윤의 최대화를 추구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장의 변동과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비투스의 관성 때문에 나타나는 ‘지체효과’(hysteresis effect) 때문에 행위자의 전략은 실패할 수도 있다.

결국 아비투스는 (주체적) 의식과 무의식의 양자택일, 목적론(teleological description)과 기계론(mechanistic description)의 양자택일을 거부하는 개념이다(Bourdieu, 2002a:239). 그래서 부르디외는 행위자의 전(前)성찰적 경험이 “실천 속에서 아비투스와, 아비투스와 공명하는 장 사이에 성립된 즉각적인 조응(encounter) 관계, 즉 실천감각(practical sense)을 통해 당연하게 여기게 된 세계”(Bourdieu 1979:68)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각주:6]

이러한 투쟁 상황과, 장과 아비투스의 즉각적인 조응은 장의 특수한 이해(interest)나 가치와 게임의 규칙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차단한다. 이것이 바로 결코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는 ‘상징폭력’과 ‘오인’(misrecognition)의 메커니즘이다. 그렇다고 해서 ‘올바른 인식’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이 오인인 이유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속이는 것이 아닌 ‘집단적 기만’(collective deception)이며 (다른 장에 속한) 장의 외부자의 관점에서 그 장의 내기물이나 가치는 납득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물신’(fetish)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장들 간의 일루지오는 ‘통약불가능’[incommensurability]하다)

이렇게 장과 아비투스 사이의 ‘존재론적 공모’(김경만, 2005:110)를 토대로 하는, 장 내의 경쟁관계에 있는 모든 집단이나 행위자들이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게임의 정당성(legitimacy)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집단적 신념(belief)의 총체가 바로 일루지오(illusio)[각주:7]이다. “너무나도 자명해서 언어화되지도 못하는 것, 억압된 것, 그리하여 ‘억견’(doxa)[각주:8]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각주:9](Bourdieu, 2004:128)이며 게임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의 헌신(investment)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일루지오가 없다면 모든 문화 생산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온 참여자 자신들의 믿음이나 인지․평가도식이 기껏해야 ‘임의적인 기반’(arbitrary foundation)을 가진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김경만, 2008:46). 다시 말해 “신성한 것은 신성한 것에 대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정초된(well-founded) 환상’이다(선내규, 2008:550). 따라서 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 장에서 행해지는 게임이 정당하다는, 그리고 ‘할 가치가 있는’(worth the candle) 게임이라는 참여자들의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김경만, 2008:45). 또한 공통의 내기물을 놓고 벌이는 투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게임에 대한 믿음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이 믿음을 근거로 벌어지는 투쟁은 투쟁의 내기물에 대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야만 하게 되는데, 이 때 일루지오의 자기-준거적(self-reference)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 예컨대 이 특성은 신용(credit) 행위의 지속적인 재생산 과정에서 드러난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확실한 것은 인정의 힘이라고 하는 이 유통지폐의 궁극적인 보증을 모든 신용 행위들의 궁극적 보장이 될 중앙은행의 일종인 교환 관계들의 망, 그를 통해 이 지폐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교환 관계들의 망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소용없다는 것이다.(Bourdieu, 2002a:304)


따라서 일루지오는 게임 기능의 조건인 동시에 게임의 산물이다(Bourdieu, 2002a:301,303). 결국 실천의 합리성 원칙이 아니라 가치와 선호에 근거한 몰입과 이해관심을 나타내는 일루지오는 장의 안 밖의 행위자들을 구별해주고 장의 경계를 결정하는 핵심 개념이 된다. _먹보에술꾼(CAIROS 연구원) 

* 본 연재는 아래의 두 논문을 기초로 블로그 연재에 맞게 수정/보완하였습니다.
* 2008.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이론을 통한 종교의 이해: 한국 개신교 장(Protestant field)을 중심으로". <서강논집(11회 서강논문상 우수논문집)>. 21집. 서강대학교대학원총학생회. 146~180쪽.
* 2009. "한국 개신교에 대한 사회학적 이해: 피에르 부르디외 사회이론의 종교사회학적 함의". 서강대학교 사회학 석사학위논문

 

  1. 이것은 “규칙은 정식화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과 동일한 맥락이다. 김경만에 따르면 이러한 실천감각은 “하나의 명확한 규칙의 집합(a set of explicit rules)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김경만, 2008:48). [본문으로]
  2. 부르디외는 행위자의 전성찰적 경험이 장과 아비투스의 존재론적 공모에 기인한 것임을 폭로함으로써 게임 참여자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기획이 과연 얼마나 성공적이었지를 평가하는 것은 본고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논증은 김경만,『담론과 해방』(궁리, 2005), 3장을 보라. [본문으로]
  3. “가능성의 공간”은 위치(작가)와 입장표명(작품) 간의 기계적 결정관계를 피하기 위한 개념으로서 “집단의 작업에 의해 축적된 유산”(Bourdieu, 2002a:310)이며 이에 근거해 행위자가 위치를 취할 수 있는-“자리잡기”(Bourdieu, 2002a:315)의 잠재적 공간이다. [본문으로]
  4. 버거와 루크만(Berger & Luckmann, 1990)은 이러한 즉시 사용 가능한 지식을 ‘저장된 지식’(stock of knowledge)과 ‘처방적 지식’(recipe knowledge)로 구분한다. 한편 가핑클(H. Garfinkel, 1985)은 “임기응변식으로 즉석에서 해치우는”(playing it by ear) 행위라고 설명한다. [본문으로]
  5.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그리고 규칙을 따른다고 믿는 것은 (실제로)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규칙을 ‘사적으로’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규칙을 따른다고 믿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될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Wittgenstein, 1994:128. 202절). 물론 인간 사회 내에서 한 개인이 사적인 행위 규칙에 몰두한다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규칙을 파악하는 것과 언제 그 규칙을 올바로 따르는 것인가를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가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Winch, 1990:33). [본문으로]
  6. 슈츠(Alfred Schutz, 1972)에 의하면 “사회(생활)세계가 바로 자연적 태도의 세계”이고 버거(Berger, 2001)에 의하면 ‘전형화된(typified) 세계’이고 ‘오케이 세계’(OKay world)이다. 마페졸리(Michel Maffesoli)에 의하면 일상생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개념이 아비투스이다. “보통 이 세계관이 무의식적이고, 하나의 관점으로 바로 인식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그것은 대체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체득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비투스라는 말(O. Spengler와 M.Mauss)은 각 개인 속에 그 형체를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사회전체를 구성하는 이러한 존재방식과 행동 및 사유방식을 적절하게 고려한 것이다.”(1997:91-92) 스미스(Philip Smith)도 아비투스가 슈츠의 ‘생활세계’(life-world)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2008:234). ‘자연적 태도’(natural attitude)는 행위자들이 그들이 공유하는 지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 즉 ‘판단중지’(epoché, bracketing)한다는 점에서 장과 아비투스의 존재론적 공모를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자연적 태도가 가핑클이 지적하듯이 사회성원들의 부단한 노력, 고된 노동의 결과라는 점은 사회구조나 오인된 권력이 무의식적이지만 그렇다고 기계적이거나 수동적이지는 않은 행위자의 실천의 성향체계(아비투스)를 통해 생산․유지된다는 점을 보여준다.&#10; [본문으로]
  7. 부르디외는 illusion(환상)이라는 용어 대신 의도적으로 illusio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장의 게임에 대한 행위자의 몰입은 내부자적 관점에서 볼 때 단순한 "환상"이나 "환영"으로 치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8. 최종철은 『구별짓기(上,下)』(새물결, 2005)에서 ‘doxa’를 ‘통념’으로 번역했다. [본문으로]
  9. 이것은 민속방법론의 ‘당연시된 지식’(take-for-granted knowledge)과도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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