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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상징투쟁과 권력의 시각으로 읽는 한국 개신교 ③


3. 한국 교회 종교재(religious goods)의 생산자인 성직집단의 상징권력

  한국의 개신교의 경우, 중국성서의 번역을 통해 자생적으로 성립한 일부 집단을 제외하고는, 제도적 종교로서 개신교를 한국에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주체는 미국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강인철, 1996:85). 한국 개신교의 여러 교파의 정착 및 분열, 그리고 이로 인한 교단의 제도적 성립은 선교지역의 분배나 한국교회에 대한 외국의 선교헌금 형태의 지원금이라는 실질적 이익과 같은 미국 개신교 교파와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예컨대 선교사들을 통해 해외 개신교 교단들로부터 들어오는 선교헌금은 단순히 개별교회나 성직자(담임목사)들의 안정적인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자원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근대문명의 표상인 병원이나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한국인을 계몽하고 지역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했다. 즉 한국 개신교장의 성립은 한국 선교에 이해관계를 가진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배운 한국 목회자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물질적․문화적 수혜를 받는 한국인들과 한국정부에 의해 추동되었다. 심지어 한국 개신교의 보수와 진보라는 이데올로기 지형조차 보수적인(근본주의) 미국 선교사들의 개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점차 초기 한국 개신교의 지배계층이었던 선교사들의 종교자본이 ‘토착성직층’에게 상속되고 선교사들이 세운 신학교를 통해 성직자의 자체적인 재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개신교 장의 발전 내지 진화는 토착성직층, 즉 한국인 목회자들의 이해관계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보수적인 미국교회의 물질적․문화적인 자원을 통해 보수 교파와 보수적 종교성의 성장이 결정되었던 것이 점차로 보수적 신앙인들이 여러 종교적 자원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와 같은 이해에 직접적으로 활용하고 동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컨대 ‘기독당’을 통한 정치참여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주관한 ‘시청 앞 기도회’ 같은 사건들은 축적된 종교자본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의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 교회라는 종교집단을 통해 (세속)사회에 대한 개신교인의 권력과 목회자 개인의 이익을 일치시킬 수 있는 이해관계자 집단의 출현을 보여준다.         


  종교재의 1차 생산자들은 기본적으로 종교 엘리트나 종교 전문가로 표현되는 목사들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는 루터(Martin Luther)의 ‘만인사제설’과 칼뱅(Jean Calvin)의 ‘직업소명설’에 근거해 천주교의 ‘성직자(사제 혹은 제사장)’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목사(목회자)’의 칭호를 부여한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서의 그들의 실제적인 권력과 권위, 그리고 신학교육과 안수를 통한 합법적인 임명은 그들을 ‘평신도’가 아닌, ‘평신도’보다 종교적 능력(영성)이 뛰어나고 문화자본과 상징자본을 가진 집단으로 인정되기에 ‘성직자’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국회조찬기도회를 12지파로 나누고 목사 국회의원을 제사장 지파인 ‘레위 지파’에 배정하는 행위는 목사를 특수한 계층인 성직자로 인식하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즉 한국교회에서 목사는 신학적으로는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구약성서의 유대교) ‘제사장’이 아니라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평신도 가운데 ‘말씀전하는 장로’직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도 ‘목사’를 평신도 중의 한 직분이 아닌, ‘성직계층’으로 개념화한다.

목사의 카리스마는 예배 집례용 가운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성직자의 특성은 그들의 개인적 특질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 내에서 “행위자들이 점유한 위치들 간의 객관적 관계의 구조에 의해서 구별”된다(Bourdieu, 1987:121). 상징 시장 내에서 평신도의 종교적 필요를 제공하는 성직자들은 “구원재(the goods of salvation)의 생산과 재생산, 분배의 수단”(Bourdieu, 1987:129, 1991:23)에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투쟁을 한다. 교회는 종교재와 서비스(구원과 성스러움)에 대한 경영을 전문가(성직자)의 소규모 인적자원 내(pool)에서만 합법화함으로써 독점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가령 목회자나 교회의 지도자는 (당연하게도) 신학대학교를 나온 신학생들 가운데서만 선발된다. 이러한 제도적 권위(문화/교육자본)가 뒷받침된 종교적 권위는 일반적으로 평신도의 종교적 필요와 만나는 변론인(practitioner)의 능력의 산물이다. ‘종교적 카리스마’는 목사의 상징자본이 된다(최종철, 1996a:63). 예컨대 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신정론(theodicy)은 사회변증론(sociodicy)”(Bourdieu, 1987:129; 1991:19,22; 최종철, 1996a:66)으로서 평신도를 비롯한 성직자의 믿음은 종교장 내에서 저변에 있는 동학인 정치적 관계를 승인하는 데에 입각한다(Bourdieu, 1991:14, 20, 25).  곧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는 성직자 개인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능력이 아니라 오인된 권력으로서 개신교 장 내에서 신자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승인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성직자의 영적권위는 성직자의 의견, 설교 등이 이해관계를 초월해 있다는 평신도의 믿음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또한 성직자의 제도화된 종교자본은 카리스마가 일상화된 것이다. 성직자의 상징자본은 설교권[각주:1], 집례권[각주:2], 축도권, 치리권[각주:3] 등의 제도화된 형태로도 주어진다. 강인철에 의하면,

최근 개신교지형의 역동적 변화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종교권력’의 관점이 필수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목사의 권한을 장로의 권한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분리하여 목사에게만 ‘치리권’을 귀속시키고, 당회의 존재를 절대시함과 동시에 당회 의장인 담임목사(위임목사)를 부목사 등 여타의 종속적인 목사들과 차별화하고, 담임목사의 임기를 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개별 교회 신자들의 합의만으로는 권고사면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등 개별 교회 수준에서 작용하고 있는, ‘독특하게 한국적인’ 성직자 권위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백종국, 2003:86-111). 이런 제도적 장치들은 권위주의적 교회문화를 조장하는 요소들, 예컨대 서열화된 교회 직제,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예배 양식, 배타적 군림의 상징인 교회공간 배치, 권위주의적인 교회생활언어와 성서번역본, 평신도들의 비주체성(최형묵, 2003:45-57) 등과 결합하여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직접 교회를 설립했거나 수십 년 동안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직을 유지해온 목사들은 개별 교회 수준에서 얼마든지 ‘합법적인 종교적 독재’가 가능하며, 은퇴 후에도 원로목사라는 신분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다.(강인철, 2004:29)



예컨대 개신교에서 평신도는 설교를 할 수 없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신학․교리 상, (가톨릭) 공교회 전통에 의한 해석을 거부하고 신자 각자에게 성경에 대한 해석권이 주어졌다.[각주:4] 실제로 교회에서 성경공부 시간에는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여 이야기할 시간들이 주어지고, 성경 위에 군림하는 그 어떤 권위도 부정될 수 있다고 말해지며, 올바른 성경 해석에 따른 성경적 가치관에 따라 공동체의 현안들과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평신도는 공예배[각주:5]의 설교권을 가질 수 없다. 평신도 개인이 성경을 해석하고 어떤 특정한 현안에 대해 성경 해석에 따른 처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할 때, 평신도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정당성(일종의 권위)은 개인적인 묵상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국한될 뿐이다. 즉 평신도의 성경 해석이나 종교 경험의 해석은 공예배에서 설교될 수 없고, 목사의 해석(상징생산물)만이 유통될 수 있다. 만일 공예배에 강대상 위에서 평신도가 발언할 기회를 얻는 경우, 그것은 ‘간증’은 될 수 있을지언정 ‘설교’는 아니다. 평신도 간증의 내용이 실제로 설교와 하등차이를 보이지 않는 성경과 종교 경험의 해석이라 할지라도 교회(혹은 개신교 장)에서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간증으로서 정의되고 분류된다. 즉 설교를 신의 말씀으로 만드는 것은 개신교 장이라는 맥락에서 교회의 권위구조와 상징폭력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권에서 목사의 지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리하고 올바른 해석을 보증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담보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설교권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지 않으며 목회자의 지위, 즉 문화․학력자본에서 파생한다. (담론의 힘은 담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온다) 또한 설교권을 포함한 목회자의 지위(제도적이고 상징적인 권력)는 개신교 신앙의 상징적 실재를 생산하기 때문에 이것의 부정은 당연시된 일상적 신앙생활에 대한 혼란을 초래하며 교회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것이 된다. 결국,

모든 교회는 화합지향적이고(unitive) 애매모호한(ambigious) 종교적 담화를 생산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이 때 교회가 모든 계급에 내재한 사회갈등을 상징의 수준에서 은폐하고 대체하고 초월하는 보수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다(Maduro, 1988:221).

의례(ritual) 역시 성직자들의 상징권력을 뒷받침하는 도구나 수단인 제도화된 종교자본이다. 김상기(2004)에 따르면,

의례가 기능하고 작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례가 정당한 것으로 제시되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져야만 하는데, 거기에는 관련된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과 그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자격으로 행동함을 정확히 보여줄 수 있는 통념적인 상징들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2004:249).

성직자들은 신과 인간, 경전과 평신도 사이를 매개하는 문화번역자로서 신학이라는 문화자본을 가지고 임의적인 전유를 통해 평신도들에게 복종과 헌신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신자들을 지배한다. 


  1. 예배, 성찬식과 같은 개신교 의례를 주도할 권한. [본문으로]
  2. 모든 신자와 신앙공동체(교회)에 신을 대리하여 축복할 수 있는 권리이다. 바울의 목회서신서의 안부인사말이 이 전통과 교리의 성경적 근거라고 주장된다. [본문으로]
  3. [본문으로]
  4. 종교의 최종적인 권위를 가톨릭 공교회와 교황이 아니라 성경 자체라고 주장했던 종교개혁자들의 모토는, 성경해석의 주체를 공동체와 전통에서 이성과 신자 개개인에게로 옮기는 것이었다. 물론 성서에 대한 평신도의 해석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루터나 깔뱅 등 개혁자들마다 입장이나 강조점이 다르다. [본문으로]
  5. 개신교 전통과 교리에 따라 승인된 의례 절차를 갖추어 수행하는 공식 주일예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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