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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고문대와 라디오 - 김근태와 이근안을 두고 기억하고 싶은 두 가지 말 [황용연]

지금 '재야'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 용도는 아마도 이른바 "환단고기"를 자주 들먹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겠지만, 20여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사회에서는 '재야 민주화운동'이란 단어가 꽤 익숙했었다.

이 때 '재야'라는 단어는 1차적으로는 의회정치에 참여하지 않거나 의회정치 밖으로 내몰린, 정치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의미가 확장되어, 당시의 의회정치가 다루려 하지 않거나 다루려 하더라도 힘에 부쳐 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들, 당시 '민중'이라고 지칭되던 사람들의 고통에 관계된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 그래서 제도권 정치 안의 야당보다 더 강성인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의 사회운동은 이 '재야 민주화운동에 그 뿌리를 두거나, 혹은 '재야 민주화운동'과 관계맺고 있던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시작/성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011년이 끝나가던 시간에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한 김근태 전 의원(이하 직함 생략)은 이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상당히 큰 족적을 남긴 사람 중의 하나이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의 전 기간을 통틀어, 그는 재야 민주화운동의 실질적인 살림꾼의 역할을 감당해 낸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가 생명의 끈을 마지막으로 붙잡고 고투하던 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금 아프게 했던 그가 당한 고문, 그것은 그가 재야의 살림꾼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란 조직을 만들고 일하는 과정에서 당한 일이었다. 1988년 이후,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더 넓어진 의회정치의 공간에 참여하게 될 때, 김근태는 상당히 나중까지 재야운동에 남아 있었다. 나중에 의회정치에 입문할 때는, '재야'의 이름표를 달고 의회정치에 입문한 거의 마지막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근태가 "마지막 재야"가 되어가던 시간은 동시에 "재야 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가 점점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 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김근태가 '마지막 재야'가 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점이기도 했고.

"재야 민주화운동"이 사라진 자리에는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운동"과 "민중운동" 등의 단어가 등장했다. 이런 현상은 분명히 한국 사회운동의 발전의 한 결과였고, 어느 정도는 '재야 민주화운동'의 발전적 해체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재야 민주화운동'이 사라진 이유는 의회정치로의 흡수, 주로 "민주당계 정당"으로 지칭되는 정당으로의 흡수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사회운동을 해 온 사람들이 의회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충분히 권장될 수 있는 일이며, '재야 민주화운동' 출신의 많은 정치인들은 '민주당계 정당' 내에서 '좋은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김근태 역시 그런 '좋은 정치인' 중의 한 명이었고. 하지만 과연 '재야 민주화운동' 출신 인사들의 정치 참여가 그에 걸맞는 독자적인 전망을 의회정치 안에 창출하는 데 성공했는가라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서 대답이 쉽게 긍정적으로 나오기는 힘들 듯 하다. 아니, '재야 민주화운동'의 힘이 가장 강했을 1987년 말, "비판적 지지"와 "후보단일화"로 너무 쉽게 분열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분열의 내용까지도 곱씹어 본다면, 애시당초 그런 '독자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나 자체를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런지.
 
여기서 조금 엉뚱하게도 이근안이 김근태를 고문하면서 했다는 말 한 마디를 곱씹게 된다. 지금은 내가 널 고문하지만, 나중에 민주화란 게 되면 내가 이 고문대 위에 올라와 줄 테니 그 때 날 고문하라고 했다는 말.
 
물론 이 말은 이근안이란 인간의 밑바닥을 그대로 보여 주는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말을 할 때 이근안은 나중에 실제로 자기가 고문당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 싶다. 오히려 너 같은 놈은 영영 나 같은 사람에게 고문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폭력의 과시에 가깝지 않았을지.
 
물론 민주화가 된 후 이근안은 고문대 위에 올라오긴 커녕 자기 집에 숨었다. 그리고 설령 이근안이 고문대 위에 올라왔어도, 이근안을 용서했다는 김근태는 이근안을 고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이런 질문을 묻게 된다. 저 악마같은 말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이, 과연 '용서'일까? 김근태가 이근안에게 했다는?
 
저 악마같은 말은 결국 이런 뜻을 담고 있으리라. 어차피 세상은 두 '패거리'의 싸움이 아니겠냐는. 지금은 '우리 반공 패거리'가 이기고 있으니 우리 맘대로 하는 것뿐이니, 억울하면 '너희 민주화 패거리'가 한 번 이겨서 너희 맘대로 해 보라고. 그렇다면 아마도 이런 질문을 이어서 던져야 할 것이다. 이런 말을 듣기 싫은 사람들 스스로가 과연 '민주화 패거리'에서 벗어나 있는지. 김근태의 영전에 헌정된 '민주주의자'라는 칭호는 혹시 그 '패거리'의 나름 찬란했다는 과거에 대한 향수인 것은 아닌지. 이명박을 종종 '아키히로'라고 부르며 아예 '한국인'인 것도 할 수만 있으면 인정하기 싫어하는 모습은 이근안이 상상하는 "자기를 고문하는 김근태"의 모습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는 모습은 아닐런지.
 
이런 질문을 가슴에 품고, 김근태가 고문당하면서 느꼈다는 다음 말을 읽어 본다. 
 
"정말 미웠던 것은 라디오 소리였습니다. 고문당하는 비명소리를 덮어씌우기 위해, 감추기 위해 일부러 크게 틀어 놓는 그 라디오 소리, 그 라디오 속에서 천하태평으로 지껄이고 있는 남자 여자 아나운서들의 그 수다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고문도 참기 힘들었겠지만, '라디오 소리'가 미웠단다. 천하태평으로 지껄이고 있는 남자 여자 아나운서의 수다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단다. 한 마디로, '고문당하는 자신'과 동떨어져 돌아가는 '세상' 자체를 견딜 수 없었다는 이야기. 아나운서는 이근안처럼 자신을 직접 고문한 것이 절대 아니고, 그냥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인생'을 산 것일 뿐인데도, 그것이 고문당하는 김근태에게는 '견딜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경험은 비단 김근태의 것만은 아니며, 폭력을 통해 세상과 단절된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경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인생'을 산 것일 뿐인데 그것이 어떤 다른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은 여전하지 않은가? 혹은, '민주화 패거리'(예를 든다면, '통합'이란 단어를 자기 이름에 담고 있는 두 정당 같은)를 잘 키워 주면, 그런 세상을 면할 수 있는가?
 
앞의 질문에 긍정하는 사람들은 꽤 많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앞의 질문에 긍정하는 사람들 중에도, 아마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하던 노무현 정부 때는 만만하니까 잘도 싸우더니, 대놓고 폭력 쓰는 이명박 정부가 되니 무서워서 끽 소리도 못 하냐?"라는 말들을 종종할 것 같다. 물론 이런 말들을 종종 듣는 사람들은, '기륭전자'와 '동희오토'와 '유성기업'과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 등지에서 '끽 소리'를 많이 질러 왔겠지만 말이다.
 
하긴, 민중신학이란 걸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그런 "끽 소리"는 언제나 듣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듣는 사람들'은 오히려 '착한 패거리'에도 끼어 있지 못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더라가 되긴 하지만._황용연(미국 GTU 박사과정. 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대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