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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갱그리

강신주 이후, 다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느 날인가 무심결에 타임라인을 손가락으로 쭉쭉 내리다가 발견한 포스트를 보고 한 점에서 손가락을 멈춰세웠다. 한때 서울시에서 주도하여 설치된 ‘남녀 평등 신호등'에 대한 만화[각주:1]였는데, 2009년에 그려진 것이 최근 남녀 평등 신호등 철거와 함께 다시금 이슈화 되고 있었다. 이 만화를 처음 접한 나는 그야말로 당혹스러웠다. 내가 이 만화를 그린 이의 팬이라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문제의식 자체를 폐기하는 이 만화의 반박 방식에서였다.



만화에서 논란이 되었던 신호등, 비상구 안내판과 같이 그림으로 안내하는 공공 표지를 일컬어 ‘픽토그램'이라 한다. 픽토그램은 본래 EC(European Community)에서 유럽 스탠다드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고, 지금은 유럽에선 EU, 국제적으로는 ISO 표준으로 규격화되었다. 협회에서 제작한 후 Clear Sign 캠페인 등과 같은 캠페인과 시행령 등을 통해 ‘국제 표준'으로 확산시켰다. 실제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양으로 ‘남녀평등 표지판'을 만들고자 했던 오스트리아는 EU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즉 픽토그램은 ‘만들어진 표준'이다. 특정 협회에서 기획되었고, 그 협회에 속하지 않는 국가라하더라도 이제는 순종하고 있으며, 이것은 세계 전반의 공공 기표를 쥐고 있는 하나의 권력이기도 한 것이다.


그린이는 아이에게 ‘사람'을 그려보라고 했을 때 픽토그램과 닮은 추상적인 아바타를 그린다고 했고, 그것이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실이 아니다. 일단 픽토그램에는 여자와 남자 표기가 분명히 다르게 있고(화장실 표기 및 보호자 표기 참조) 이에 따를 때 신호등과 비상구에 있는 표기는 명백한 생물학적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누구나 사람이라고 안다'라고 해서 그 그림이 ‘상징'인 건 아니라는 점이다.  대충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 추상화가 아니듯, 사실성이 배제된 그림이라고 해서 상징일 수는 없다. 상징은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화의 단계를 거쳐 만들어지며, 필연적으로 구조적인 의미를 담는다.[각주:2] 이것도 결코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픽토그램은  정당한 문제 제기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녀평등 신호등’이 올바른 방법이라는 말은 아니다. ‘남녀평등 신호등'은 그야말로 여성 문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빚어낸 결과였다. ‘왜 공공 표기의 표준은 남성인가'라는 문제의식은 분명 성평등을 둘러싼 투쟁들 속에서 뻗어 나온 정당한 질문이었지만, 그것이 행정적 영역에 가닿는 순간 그 질문은 ‘여자도 신호등에 넣자’라는 편협한 실행문으로 인코딩된다. 초기의 문제의식 안에 있었던 ‘남성' 외의 주체들, 즉 남성이나 여성으로 수렴할 수 없는 다수의 젠더들은 더 이상 이 실행문 속에 없었다. 오히려 생물학적 남성/여성의 구분을 다시금 재확인하는 계기만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이 행정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앞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남녀평등 신호등 반대 만화처럼 ‘(그 표준은 남성이지만)우리는 저것이 남성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라고 사람들의 눈을 돌리게 했고, 또한 ‘신호등에 여성을 넣어봤지만 별 도리 없었어.’ 라며 문제의식 자체를 침묵시킨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상황은 ‘강신주 현상'과 유사하다. 강신주를 필두로 하는 자아성형산업의 가장 큰 기반은 ‘모든 나쁜 것으로서의 자본주의'[각주:3]이다. 대항마로서 거대한 ‘자본주의'라는 흐름을 앞에 놓아 두고, 그것의 반향으로서 흐름에 휘말리지 않는 ‘강한 자아'로서 자기 자신을 성형하는 것이다. 게다가 수술의 집도의는 자기 자신도 아닌, ‘멘토'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이다. 여기에서 ‘강한 자아'는 그가 성립하기 위해 반드시 ‘자본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강신주 현상의 핵심은 “구조는 이렇다, 하지만 바꿀 수 없다, 허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구조는 보편성을 가져가고, 자아는 그 자신만의 특수성을 독점한다. 강신주의 멘티로서 우리는 보편성에 대해서는 미뤄둔 채, 실천적 영역을, 그 중에서도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실의 답은 간단해진다.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공공 표기의 표준이 왜 남성이여야 하는 지 고민한다면, 당장에 여성도 신호등에 그려넣는 것처럼 말이다.


강신주의 프레임을 거쳤을 때, 너무나 복잡했던 문제들도 마치 명쾌하게 풀어지는 것 같은 이 신비로움은 자아의 '너무나' 평화로운 합일 안에 있다.  강신주 현상에서 ‘자아'라는 단어는 ‘실천적인 영역'을 다른 말로 일컬은 것이다. 강신주는 대립하는 것이 자본주의와 자아라고 보지만, 실제 멘티들이 부딪히는 삶의 문제는 사유와 실천의 대립이다. 멘티가 자신의 사유와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강신주는 이 간극을 구조와 개인 사이의 대립으로 치환해버린 채 더 이상 ‘사유하지 말 것'을 종용한다. 최종적으로는 어떤 간극도, 대립도 없이 홀로 남은 실천적 차원의 서로 다른 요소들만이 진열되어 멘티는 이 요소들 중 편리한 쪽을 선택하는 것으로 상담이 종료되는 것이다.


지젝에 따를 때, 사유와 실천 사이의 간극은 반드시 존재하며, 이 두 가지 차원은 서로 투쟁을 지속한다.[각주:4] 그러나 강신주는 이 투쟁을 너무나 손 쉽게 ‘처리'해버린다. 즉 강신주의 문제는 자본주의를 탓하지 않는 것[각주:5]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너무나 분명한(그리고 거대한) ‘적의 모습'으로 구체화시켜 본질적인 문제는 오히려 회피하게 만든 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떠한 대상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해서, 문제의식을 반영할 수 있는 실천의 영역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사유와 실천이 늘 일치했다면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녀평등 신호등을 실패한 행정으로 본다면, 이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성평등의 기표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금 사유해야 한다. 문제의식과 실천 사이의 간극 사이를 맴돌지 않고, 그 투쟁에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강신주의 손 쉬운 논리에 몸을 기대는 것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알려줄 것이다.

  1. 위키트리, 웹툰작가 주호민이 그린 '서울시 신호등'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33916 참조 [본문으로]
  2. 엘리아데 저, <상징,신성,예술> 참조 [본문으로]
  3. 박권일, <인문학자 강신주는 어떻게 문화권력이 되었나> 인용 [본문으로]
  4. 슬라보예 지젝 외 저, 이현우 외 역, <레닌 재장전> [본문으로]
  5. 한영인, <강신주를 위한 변명>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