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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서평] 국가도 자본도 없는 사회 <폭력의 고고학>




우리는 흔히 국가 없는 사회를 미개한 사회라고 부르며, 인류 문명의 유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한사회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러한 진화론적,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은 우리의 두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에 의하면 국가 없는 사회는 불완전하고 미완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성장해야 하고 어른이 되어야[각주:1]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타당한가? 피에르 클라스트르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역사가 연속적이고 필연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하지만, 클라스트르는 이러한 광신적 연속주의를 거부[각주:2]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 있는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와 국가 없는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는 완전히 이질적이다. 따라서 이 두 종류의 사회 사이에는 불연속성통약불가능성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연속성과 통약불가능성은 두 사회 중에 어떤 사회가 더 성숙한 사회인지 판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진화론적 사고방식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국가 없는 사회에는 국가의 맹아적 성격을 띄는 것이 있기는커녕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사회가 분할되는 것을 막는 여러 가지 기제가 존재하며, 이러한 사회로부터 분리된 권력기관이 출현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국가를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기제가 존재한다. (, 사회를 비분화된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국가권력의 출현을 막는 것이다.[각주:3]

더 이상 정치 이하적인 맹아가 아니라 완전한, 완성된, 성숙한 사회들로서의 원시 사회들이 국가를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이 국가를 거부하기 때문이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사회적 몸체가 분할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야만인들의 정치는 권력의 분리된 기관의 발생에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것이고, 우두머리와 권력 행사 사이의 치명적일 만남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출현하는 것은 어떤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사건 때문이지, 합리적인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유로부터 예속성으로의 이러한 이행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지휘하는자와 복종하는 자로의 사회의 분화는 일종의 사고(事故)...라는 것.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역사 탄생의 역사적 계기, 절대로 벌어지지 말았어야 할 치명적 단절, 우리 현대인이 유사한 방식으로 국가의 탄생이라 이름 짓는 이 비합리적인 사건이다.[각주:4]

 

따라서 역사에 있어서 연속주의는 거부되고, 국가의 탄생은 오히려 단절과 불연속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주장은 니체와 <앙띠-오이디푸스>에서의 들뢰즈-가타리의 주장과 일치되는 면이 있다.[각주:5] 니체와 <앙띠-오이디푸스>에 전개된 국가에 대한 사유에 의하면 국가는 금발의 야수라고 불리는 지배자 종족이 원시 공동체에 들이닥쳐서 일순간에세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앙띠-오이디푸스>에서의 들뢰즈-가타리에 의하면 이러한 원국가(原國家)는 처음부터 완벽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고 한다. 따라서 역사에 존재해왔던 국가들 사이의 형식적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국가이건 세속국가이건 전제국가이건 민주국가이건, 자본주의 국가이건 사회주의 국가이건, 지금까지 있어온 것은 오직 하나의 국가였다.[각주:6]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는 이전의 국가 없는 사회와 그 운영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국가 없는 사회가 여러 가지 기제와 장치를 통해 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마도 국가를 경험해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따라서 국가가 국가 없는 사회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에의 욕망과 굴복에의 욕망-권력 자체와 굴복 자체가 아니라-의 내재성에 대항해서 원시 사회들은 그들의 법에 따라 하여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부과한다. 즉 그들의 비분화된 존재에서 결코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나쁜 욕망이 실현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국가를 경험해야지만 국가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재난을 겪어봐야만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유를 상실해 봐야만 자유를 요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각주:7]

 

2.

그렇다면 국가 없는 사회에서 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막는 기제와 장치 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통과의례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인디언 부족에서는 한 개인이 자연에서 문화로 진입했음을 알려주는 통과의례에서 '각인'을 통해 권력의 욕망이나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방지한다.

 

각인의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모든 신체에 똑같이 새겨진 각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너희들은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라고.[각주:8]

 

또 다른 예는, 놀랍게도, 전쟁이다. 사람들은 원시 사회를 폭력에 대항하는 사회, 폭력을 통제하고 코드화하고 의례화[각주:9]하는 사회로 생각해왔다.

 

...호기심 많은 독자나 사회과학자들은 정당하게도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겠다. ...(중략)...“야만인들의 사회생활의 지평에는 폭력이 존재하지 않고, 원시 사회의 존재는 무기를 든 싸움의 외부에서 전개되며, 전쟁은 원시 사회의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작동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이다.[각주:10]

 

그러나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당당하게, “원시 사회들의 존재는 전쟁을-위한-존재[각주:11]라고 말한다. 폭력과 전쟁은 원시 사회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이다. 따라서 전쟁을 제대로 사고하지 않고는 원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클라스트르는 레비스트로스조차도 전쟁을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한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있어서 전쟁은 교환의 실패로 간주되고, 따라서 전쟁은 교환에 비해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클라스트르에 의하면 레비스트로스는 교환의 두 가지 층위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두 층위중 이 두 층위중 하나는 인간 사회를 비동물의 사회로 정립시키는 교환이고, 다른 하나는 상이한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 맺기로서의 교환'인데 전쟁과 상호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후자라고 한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는 교환의 이러한 두 지평을 구별하지 못하면서, 전쟁을 아무 관련도 없는 따라서 그 속에서 전쟁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교환의 단일한 지평에 위치시킨다.”[각주:12]

그러나 항구적 전쟁상태라는 원시 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은 수정되어야 한다. 클라스트르에 의하면 상이한 공동체들 사이의 교환은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서 동맹을 맺기 위한 것이다.

다시 국가와 전쟁의 문제로 돌아가자. 전쟁은 어떻게 국가의 출현을 막는 것일까? 원시 공동체는 타자와의 적대를 통해서 다른 공동체에 대하여 자율적인, 비분화된 전체로서의 우리로 자신을 재생산하고, 이를 통해서 분리된 권력기관으로서의 국가의 출현을 막게 된다.

 

그리하여 전쟁은 원시 사회의 존재의 핵심에 위치하여 사회적 삶의 진정한 동력을 구성한다. 스스로를 하나의 우리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는 분화되지 않고 독립적이어야 한다. 서로 결합된 내적 비분화와 외적 대립은 서로의 조건을 이룬다. 그리하여 전쟁이 멈추면 원시 사회의 심장이 고동치길 멈춘다. 전쟁은 원시 사회의 토대이고 그 존재의 삶 자체이며 목적이다.[각주:13]

 

전쟁은 이렇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비분화된 공동체를 재생산함으로써 공동체들 사이의 차이와 개별 공동체의 고유성을 보존할 수 있게 하는데, 이러한 차이와 고유성을 지키는 것은 원시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교환은 이러한 차이와 고유성을 지워버리는 힘이 있으므로, 원시 공동체는 되도록 교환보다 전쟁을 선택한다. 교환을 통한 동맹은 차라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렇게 전쟁을 통해 보존되는 차이고유성은 국가라는 일자가 출현하지 못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공동체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힘에 대하여 파편화시키는 힘을 출현시킴으로써 이 공동체들을 지배하는 중심이 출현하지 못하게 한다.

파편화비분화’. 클라스트르의 언설은 모순되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의 파편화는 여러 공동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는 힘에 반대되는 힘으로서의 파편화를 뜻한다. 여기서 파편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정치적 최소 단위는 개별 공동체인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 자체는 파편화될 수 없다. 그래서 "외적인 파편화와 내적인 비분화는 단 하나의 현실의 두 측면"[각주:14]일 수 있다.

 

3.

일반화된 교환은 개별 공동체의 자율성과 고유성을 지워 버린다. 따라서 원시 공동체는 자신의 자율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되도록 교환에 의존하지 않으려 하고, 이로 인해 자급자족을 지향하게 된다.

가구적 생산양식은 각 공동체의 독립에의 열망으로 인해 필요에 따른 교환의 위험을 최소화하려고 한다.[각주:15]

 

뿐만 아니라 이 가구적 생산양식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원들의 필요의 총합 이상은 생산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원시 사회의 경제가 생존 경제’, 즉 끊임없는 노동을 통해서 겨우 먹고 사는경제라고 주장하지만, 클라스트르에 의하면 이것은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원시적 생산은 짧은 시간 내에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고, 사람들은 이렇게 필요를 충족시키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원시 사회는 많은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빈곤한 사회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이다.

잉여를 생산하지 않고 축적하지 않는 사회가 바로 원시 사회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서 원시 사회의 열등성을 보려고 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적 편견에 불과하다. 클라스트르는 원시 사회가 국가 없는 사회인 동시에 경제를 거부하는 사회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원시 공동체가 이윤을 남기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시 사회는 이렇게 이윤을 거부함으로써 계급의 분화를 방지한다.

원시 사회가 경제를 거부하는 사회라는 말은 원시 공동체가 자본을 거부하는 사회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원시 공동체는 잉여를 축적하지 않고 교환을 최소화할 뿐만 아니라, 권력자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할 수 없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자본을 거부하는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오히려 원시 사회의 족장은 원시 공동체의 구성원에 의해 착취당한다. 족장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으로 관대함이 있는데, 관대함은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물품을 나누어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렇게 물품을 나누어줄 때 족장에게는 위세가 생기고, 족장은 이 위세를 얻기 위해 자기가 직접 노동하거나 자신의 아내들과 친척들에게 노동을 시킴으로써 이러한 물품을 생산해낸다. 따라서 원시 사회에서는 사회 전체가 족장과 그 주위 사람들을 착취한다.

이렇게 족장에게 관대함이 요구되는 것은 족장이 사회에 대하여 채무를 지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리더는 사회에 대해 빚을 진 상태에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사회의 리더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빚을 결코 갚을 수 없다. 그가 계속 리더인 한에서 말이다. 그가 리더이기를 그만두면, 빚도 소멸된다. 왜냐하면 빚은 오로지 족장 제도와 사회를 결합시키는 관계만을 각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6]

이렇게 채권-채무 관계가 노동에 선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채권-채무 관계는 족장이 권력을 갖거나 행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오히려,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족이고, 부족은 그 권력을 우두머리에 행사[각주:17]한다.

4.

원시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이자 경제 없는 사회=자본 없는 사회이다. 이 공동체들에서는 여러 가지 기제들이 국가와 자본의 출현을 막고 있다. 이제 오늘날의 현실로 돌아가자.

국가와 자본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해서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떻게 국가와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공동체들을 조직할 것인가? 또 어떻게 이 공동체들 속에서, 혹은 사이에서 국가와 자본이 출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는 데에 클라스트르의 저작들은 한 줄기 빛을 던져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의 삶의 조건은 원시 사회로 회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즉 클라스트르가 멈춘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글_김상범님은 고등학교 때 주로 이과계열이 집중된 과학고를 졸업한 후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이공계전공자이지만, 지금은 인문학 공부를 위해 긴 휴학을 택하여 인문학 공부에 힘쓰고 있다.

  1. 피에르 클라스트르, 변지현이종영 옮김,<폭력의 고고학>(율력, 2003),p.149 [본문으로]
  2. <폭력의 고고학>,p.150 [본문으로]
  3. 같은 책, 같은 쪽 [본문으로]
  4. <폭력의 고고학>,p.156 [본문으로]
  5.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원국가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천개의 고원> 12장 참조 [본문으로]
  6.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앙띠 오이디푸스>(민음사, 2000),p.290 [본문으로]
  7. <폭력의 고고학>,p.167 [본문으로]
  8. 피에르 클라스트르, 홍성흡 역,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학사, 2005).pp232~233 [본문으로]
  9. <폭력의 고고학>,p.245 [본문으로]
  10. <폭력의 고고학>,p.246 [본문으로]
  11. <폭력의 고고학>,p.248 [본문으로]
  12. 폭력의 고고학>,p.289 [본문으로]
  13. <폭력의 고고학>,p.292 [본문으로]
  14. <폭력의 고고학>,p.293 [본문으로]
  15. <폭력의 고고학>,p.186 [본문으로]
  16. <폭력의 고고학>,p.197 [본문으로]
  17. <폭력의 고고학>,p.19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