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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마르셀

지금 왜 ‘사회적인 것’인가? - ‘일베’를 통해 보는 '사회적인 것'과 ‘새로운 사회문제’

지금 왜 사회적인 것인가? -일베’를 통해 보는 사회적인 것과 새로운 사회문제

 

마르셀(CAIROS)


*별볼일 없는 글입니다. 하지만 외부에 출판된 원고도, 출판될 원고도 들어 있네요. 마우스 우클릭은 자제를.... 


 

1. 일베, 찌질이들인가 평범한 청년들인가?

 

일베를 보며 많은 이들이 경악하고 있다. 지역비하, 여성비하를 일삼으며 저열한 언어 사용을 마다않는 사이버공간의 문제집단이, 수십일째 단식하고 있는 유족들 앞에서 보란 듯이 피자를 먹으며 폭식투쟁이란 행동을 저질렀다.

일베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틀은 찌질이. 인터넷 공간에서 타자 혹은 약자에 대한 혐오, 멸시, 경멸, 조롱의 언어를 서슴없이 내뱉지만, TV방송과 인터뷰 할 때면 익명을 고집하고 모자이크를 고집하는 이중성을 지닌 이들이기 때문이다. 공개된 공간을 두려워해 이름과 얼굴을 숨기면서도 익명성의 가면 뒤에서는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이들을 '찌질이'로 보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작년 봄, 일베가 공공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시기와 맞물려 번역 출간된 야스다 고이치의 저작 <거리로 나온 넷우익>[각주:1]은 일베와 비슷한 일본의 넷우익 기반 극우단체 재특회(재일조선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를 취재한 책이었는데, 이 책이 재특회 회원들을 일본사회로부터 소외된 아웃사이더로 파악한 것도 일베를 찌질이로 바라보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런데, ‘바깥에는 나올 용기가 없는 이들로 여겨졌던 이들이 20148, 광화문 한복판에 등장했다. 사이버 공간에 머물 것이라는 예측은 어긋났다.

뒤이어 나온 김학준의 논문[각주:2]도 일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일베회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던 그는 말한다. 그들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생각보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삶 또한 '극단'이 아닌 '평범'한 삶이라고 말이다.

일베에 뒤이어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을 달고 광장에 나온 이들이 있다. 해방정국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단체의 재건을 외치는이들의 행태를 보자면, 정말 극단 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이들이 시청 앞에 모여 노란리본을 떼겠다고 하면서 유족들에게 한 말은 꽤나 의아한 것이었다. “생업으로 복귀하라어마어마한 평범함이다. 서북청년단쯤 되면 살인, 폭력 이런 단어들이 등장할 듯한데. 이들이 유족들에게 한 말이라고는 흔하디흔해 지겹기까지 한 '생업으로 복귀하라'였다[각주:3].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 또한 최근 인터뷰에서 말한다. 재특회는 특이한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의 평범한 이웃이라고. 너무나도 일탈적인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이 평범함, 비정상 속의 정상과 극단 속의 평범함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들이 로부터 등장한 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이 없는 공간에서 재특회가 나온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는 여성차별, 지역차별이 없는 데 일베만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공적인 장소에서는 이제 사라지고, 교과서에서도 이제 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족, 친지, 친구들이 모인 사적인 장소에서 전라도 사람에 대해, ‘여성에 대해 비하발언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그런 점에서 일베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게 아니라, 수면 아래의 무언가를 수면 위로 드러냔 것이었다.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나, 민주화 이후의 공적 공간이라는 상징계에서 억압된 실재를 보여주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베로부터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평범함은, 이 사회에 존재하는 타자에 대한 차별과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정도로 그칠 논의가 아니다. 김학준의 논문을 소개한 시사IN 기사처럼, 사석에서 만나면 예의바른 청년들이다 정도로 퍼스낼리티에 대한 수사에 그칠 논의 또한 아니다. 김학준의 논문이 말하듯 평범함은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이며, 또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먼저 일베가 추구하는 평범함에 대해 알아보자. 일베가 추구하는 평범함이란 20대의 젊은이들이 생애 목표로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평범함이란, 좋은 학교를 나와, 정규직 일자리에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하여 가정꾸리며, 내 집을 마련하는 정도다. 누가 봐도 평범하다. 일베 뿐만 아니라 20대 청년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며, 20대 청년을 자녀로 둔 부모 또한 원하는 것이다.

비슷한 청년세대를 연구하고 분석한 정수남의 분석 또한 이를 말해준다. 정수남의 연구에 따르면, 중간계급과 하층계급 청년들에서 나타나는 경험적 현실과 삶에 대한 태도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을 현실에 맞춰 소소하게살아가려 하는 평범한 삶에 대한 열정에 있어 청년들은 동질적이다.[각주:4]

서북청년단이 유족들에게 요구한 '생업으로의 복귀'또한 마찬가지 아니던가? 가까운 사람을 잃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해 생업의 번영을 이루었다는 스토리가 우리 사회에서 어디 특별한 것이었던가? 어려움을 겪어 좌절한 사람에게 그만 슬퍼하고 생업에 복귀하라는 말이 특별한 것이었던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베회원들은 극단적인 일탈적 발언과 행위를 저지르는 동시에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삶의 목표를 추구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이들이 추구하는 평범함으로부터 글을 시작해, 이 평범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특정지역과 여성을 혐오하기에 이르렀다고 가정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는 평범함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이에 이르게 하는 사회적인 메커니즘이 존재하며, 최근 들어 이 메커니즘에 위기가 찾아왔음을 밝힌다. 이어서, 평범한 삶에의 진입 위기 국면에서 일베가 타자혐오에 이르게 된 논리적 계기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평범한 삶을 구성하는 메커니즘을 뒷받침하는 사회시스템, 정상을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사회적인 것의 양태를 분석하고, ‘사회적인 것속에 내재해 있는 문제점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요컨대, 일베의 일탈적 행동이 사회적으로 정상을 구성하는 원리,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연원하는 과정을 파악하는 동시에, 일베의 행동을 통해서 한국에 형성되어 이어져온 사회적인 것과 그 문제점을 파악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평범하기 위한 험난한 길 - 생활보장 메커니즘과 그 위기

 

어쩌면 쉬이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평범하게 살길 원하는데, 왜 그 토록 타자를 혐오하고 멸시한단 말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삶이라는 것이 단순한 통계적 중간값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베를 비롯한 청년들이 원하는 평범한 삶은 한국 사회에 자리를 잡은 생활보장의 메커니즘의 산물로 구성된 평범함이다80년대 후반 한국 사회 민주화 국면에서 경제적 고도성장을 앞세워 온 독재적 국가권력이 생활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민중의 요구에 제한으로나마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와 유사한 일본의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보자. 과거 일본의 젊은 여성들에게 이상적인 남성은 ‘3’(고학력, 고신장, 고소득) 였는데, 지금은 ‘3’(평균, 평범, 평온)으로 변했다는 말이 있다.[각주:5] 언뜻 보면 남성을 바라보는 기준이 크게 변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변한 게 없다. 과거 고학력이고 고소득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평범하고 평균적인 사람이라 일컬어질 뿐이다.

가 되었던 이 되었든, 젊은 여성들에게 이상적인 남성상은 일본형 생활보장 메커니즘과 불가분에 있다. 1960년대 자리 잡은 일본형 생활보장 메커니즘은 높은 경제성장률 속에서 성장일로에 있는 대기업이 고학력 남성들에게 종신고용을 약속하고 또 주택자금 지원 등의 기업복지를 제공하는 것을 주축으로 한다. 계층간 재분배를 위한 사회정책에는 소극적이지만, 지역간 재분배를 위한 토건사업에는 적극적인, ‘작으면서도 큰 정부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일본정부는 제조업과 토건업을 중심으로 저학력자 남성들의 일자리가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여기에 더하여 단지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후 주택공급 정책은 도시 급여소득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주어 자가소유를 촉진함으로써 가정생활을 안정화한다.[각주:6]

여기서 눈치를 챌 수 있을 것인데, 고학력이든 저학력이든 일본형 생활보장 메커니즘은 남성가장의 일자리를 보장하고, 그의 소득을 통해 배우자와 자녀의 생계를 보장하는 시스템이었다. 특히 종신고용을 약속하는 대기업에 용이하게 취직해온 고학력 남성들, 몇 번의 시험을 통한 경쟁에서 승리한 이들 남성에게는 종신고용과 기업복지를 통해 안정된 삶에의 파이프라인이 주어졌다. 동시에, 여성과 외국인 등은 제도적·관습적으로 생활보장으로부터는 배제된다. 따라서, 고학력 남성은 일본형 생활보장 메커니즘을 체화하는 존재였다. 반면에, 여성은 이들에 의존해서 생활의 안정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고, 외국인은 종신고용과 기업복지가 보장되는 일자리에 접근이 불가능했다.

한국의 생활보장 메커니즘에 대한 논의가 별로 진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사례와의 유사성 및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한국의 생활보장 메커니즘도 일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도균에 의하면[각주:7], 1987년의 민주화 국면에서 권력이 중산층을 포섭하기 위해 내놓은 생활보장 메커니즘은 자산형성촉진과 기업복지였다. 정부는 청약제도와 재형저축 등의 제도를 통해 정기적 임금을 받는 이들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재산을 형성·증식하게 하며, 기업은 임금 향상을 억제하는 대신 교육비 보조 등을 비롯한 각종 기업복지제도를 통해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을 보장한다. 둘 다 고학력을 바탕으로 정규직에 진입한 이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정부 또한 중산층을 정의하면서 고졸이상의 학력을 첫 문장으로 쓸 만큼, 생활보장은 학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이 메커니즘에서 여성들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방송사에서 <우리는 중산층>을 방영하고, 다른 방송사에서는 <말로만 중산층>을 방영하며, 국민의 약 70%가량이 자신은 중산층에 속한다고 응답했던 때가 있었다[각주:8]. 이 무렵 형성된 평범한 삶의 외양은 고학력->정규직->결혼->자산조성이라는 생활보장 메커니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유효하다. 80%의 젊은이들이 대학에 가고, 정규직 직장을 얻기 위해 대학졸업 이후 수년간의 취업준비생생활을 하는 것은 결국 고학력과 정규직이 생활보장의 파이프라인임을 말해준다. 요컨대, 일본에서 ‘3이란 실상‘3에 다름없었듯, 한국에서도 평범한 삶은 통계적으로 평범한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경쟁을 뚫고 고학력정규직을 획득하여 생활보장의 파이프라인을 속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기대해봄직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평범함이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평범함에의 기대이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파이프라인의 입구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IMF’위기 이후 비정규직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종신고용의 전망도 사라졌다. 당연히 종신고용의 전망이 존재하는 공무원이나 고시 같은 분야의 경쟁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가뜩이나 좁아진 생활보장을 향한 파이프라인에 진입하려는 이들의 수는 오히려 더 많아진 것이다. 게다가 고교평준화가 사실상 해체되면서 파이프라인에 진입하기 위한 시험경쟁 또한 장기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파이프라인으로의 경쟁을 더욱 격화시킨 것은 민주정부 이후 배제된 이들을 구제기 위해 마련된 제도적 장치들이었다. 일례로, 유색인종과 여성 등 마이너리티의 사회진출을 돕기 위해 1970년대 미국에서 시행되었던 적극적조치(affirmative action)에 준하는 제도적 조치들이 김대중 정부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이 무렵 군가산점제도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오면서 공무원 및 각종 고시에서 제도적인 여성 배제는 사라져버렸다.

청년남성의 입장에서 생활보장 메커니즘으로의 진입이 어려워졌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삶이 불안해진 데 그치지 않는다. 여전히 다수의 여성들이 생활보장의 메커니즘에 진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 파이프라인에 들지 못한 사람은 결혼마저 쉽지 않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이것은 한국적인 사회적인 것의 체계 속에서 인정투쟁에서의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 경제적인 성장기 생활보장을 체화할 수 있었던 청년남성들은 이제 경제권 뿐 아니라 사회권까지 놓칠까 두려워하게 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쟁과 불안만으로는 일베가 보여주는 혐오와 멸시를 설명하기에 무리가 있다. 경쟁에서 승리/패배하면서 자만심, 열패감 같은 것이야 가질 수 있겠지만, 타자를 혐오하고 멸시하는데 까지 나아가는 이유까지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무임승차자라는 말로 타자 혐오의 근거까지 마련해 두었다. 따라서, 생활보장의 메커니즘을 내부를 좀 더 심층적으로 파고들 때 그 원인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사회적인 것의 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심층을 탐색하여 보고자 한다.


 

3.1. ‘사회적인 것’ : 생활보장의 도덕체계와 평범의 정상화

 

일베가 특정 지역인들과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면서 그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물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빈약한 근거를 대는 것이라며 반박가능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거를 갖는다는 것 자체로도 이들이 신뢰하는 일종의 도덕적 체계가 존재한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자신들 나름대로는 특정 지역인들과 여성들이 부도덕하고 부조리하기에 이들은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도덕적 체계는 앞서 설명했던 생활보장 메커니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805월 광주의 유족들을 그토록 비난한 주요한 이유로 이들이 든 것은 이들에게 주어진 유공자제도였다. 여성들을 무임승차자라 부르는 이유는, ‘평범함이라는 생활보장의 메커니즘에 이들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 진입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생활보장의 메커니즘을 둘러싼 도덕적 정당화의 체계를 상정하고 있고, 이에 근거하여 타자를 혐오한다.

그렇다면 이 한국의 생활보장 메커니즘을 정당화 하는 도덕적 체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잠시 서구의 역사를 우회해보자. 사실 어느 시대, 어느 체제, 어느 사회든 도덕적 체계는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근대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도덕적 체계와 생활보장의 메커니즘을 인위적으로 결합시키고자 노력한 이론적 체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세기말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에 만들어진 이론적 원리인 사회적인 것(le social)’이다.[각주:9] 1789년 혁명이후 민주주의와 산업자본주의를 동시에 도입한 프랑스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와 더불어 질서의 주체가 될 사람들을 발견하기 어려운 사태를 맞이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인구의 다수가 빈민상태가 되어, 대의제를 떠받칠 이성적주체가 되기 어렵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인민의 의사를 투명하게 반영하고 합의와 토론을 통해 공통의 의사를 도출한다고 하는 이념도 인민의 의사 자체가 분열되어 있어 합의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같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동시적 과제로 주어진 가운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가 사회적인 것이었다. ‘사회적인 것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제3공화국의 지식인 뒤르켐의 연대주의였는데, 그는 연대개념을 기초로 사회의 상과 개인의 상을 그리고,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정의하고, 이 위에서 사회 및 개인의 도덕체계를 설정했다. 나아가 이것은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에 이르러 국가에 의한 개인의 생활보장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이자 연대체이다. 개인은 타인의 노동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으며, 사회가 과거에 비해 현격하게 분화되어 있는 현대에 이르러 더욱 그렇다. 또한 개인은 사회라는 유기체의 구성원으로 태어나 그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자원을 이용해 살아간다. 그렇기에 사회로부터 부채를 지고 있으며, 이 부채의 상환과 사회의 존속 및 유지를 위해 개인은 노동을 수행한다. 노동을 통해 사회의 유지와 존속에 기여하는 정상적 혹은 도덕적(nomal) 개인들에 대하여, 사회는 이들을 돌볼 의무를 진다. 반대로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개인과 개인을 돌보지 않는 사회는 비정상’이며 ‘부도덕(abnormal)’하다.

사회가 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개인이 노동을 수행하는 한 사회는 이들의 생활을 보장하며, 또 질병, 사고, 실업, 노령 등 개인이 살면서 조우하는 노동능력 상실의 사태를 두고 그 책임소재를 끝까지 추궁하는 대신, 전체로서의 사회의 책임으로 이를 바꾸어 인식하게 하고, 보험제도 등을 통해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구 복지국가의 원리들은 바로 여기로부터 기원한다.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개인이라는 유기체적 사회상, 그리고 노동능력 상실의 책임을 끝까지 추궁하는 대신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진다는 연대체적 사회상이 사회보험(insurance sociale)’제도를 포함, ‘사회적(social)’이라는 형용사로 수식되는 이름을 가진 여러 복지제도들을 뒷받침한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이 헌법을 통해 스스로를 사회적국가라 하는 것도, 이 같은 사회상을 기초로 한 복지국가를 지향한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요컨대, ‘사회적인 것은 생활보장의 시스템을 만드는 동시에 이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론적 체계를 구성한다. 이 속에서 평범한 사람은 단순히 통계적으로 다수인 사람들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상(normal)’의 범주를 이루는 사람이다. 평범(normal)하면서도 도덕적(normal)인 사람 말이다.

 

 

3.2. 한국의 사회적인 것’ : 경쟁기반 생활보장의 도덕체계

 

이 같은 프랑스의 사회적인 것은 한국에 너무 낯선 이야기다. 한국에서 사회가 유기체·연대체라 말한 사람 있었을까?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유행하는, 경쟁의 공간으로서의 사회상을 일상 속에서 반복해서 되새김질 할 수 밖에 벗는 이 곳에서 유기체니 연대니하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로만 들린다. 반공주의가 득세한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를 연상시킨다 여겨지는, 사회적이라는 수식이 붙은 정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대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경쟁만 존재하는 정글이다.” 라는 규정으로 끝내는 것은 다소 안이해 보인다. 연대원리를 통한 사회적인 것은 없을지라도, 사회의 상과 개인의 상, 사회와 개인의 관계, 사회 및 개인의 도덕체계 등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국에서 사회는 연대의 공간도 유기체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경쟁의 공간이다. 이 속에서 개인은 타인보다 더 나은 노동 공간에 진입하기 위해 경쟁한다. 또한 개인은 가족의 구성원으로 태어나 그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자원을 이용해 살아간다. 그렇기에 가족으로부터 부채를 지고 있으며, 이 부채의 상환과 가족의 존속 및 새로운 가족 결성을 위해 개인은 노동을 수행한다. 정상적 혹은 도덕적(nomal) 개인들은 사회의 존속을 위한 노동이 아닌 가족의 존속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인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사회'라는 개념이 쓰이는 방법이 이를 잘 드러내준다. 한국과 일본에서 말하는 '사회인'이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여 가족을 위해 경쟁의 공간 속에서 일하는 개인들을 ‘일컫는다.[각주:10] 그리고, 경쟁을 기본 속성으로 갖고 있는 사회인들의 활동은 사회생활이라 부른다. 이 개념'사회생활'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자주 사용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람들 사이의 연대나 유기적 결합의 공동체를  가리키기 위해 이 단어를 쓰진 않는다냉혹한 경쟁과 엄격한 질서를 말하기 쓰는 표현이 '사회생활'이다. 그 반대항에는 '가족'이 있다. 구인광고에서 쓰는 '가족같은' 이라는 표현은, 냉혹한 경쟁과 엄격한 질서를 면제해주겠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이다. 이처럼 우리가 자주 쓰는 개념 '사회'는 '가족'의 반대말이 되어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의 사회권, 즉 '사회인'으로 인정받을 권리는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다. 취직하여 자리잡고 결혼한 사람이 되었을 때 사회적 발언권은 온전하게 인정되기 때문이다. (정상가족이 아니라는 이유가 발언권을 축소시켜버린 김영오씨의 사례를 보라) 결혼하지 않고 가정을 꾸리지 못하는 것이 청년들에게 위기로 다가오는 이유는, 개인을 인정하는 메커니즘이 가족을 경유하기 때문이다. 또 연대를 약속하지 않는 사회와 달리 연대의 원천이 되는 가족이 없이 젊은 개인들이 사회적 인정투쟁에서의 패배와 사회적 소속박탈의 상황을 방지하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인들은 그렇다면 사회 속에서 어떤 계약을 맺는가? 사회인들은 가족과 일련의 연대계약을 맺지만, 사회와는 경쟁계약을 맺는다. 여기서 비정상’ 및‘부도덕(abnormal)’이 되는 것은 경쟁의 룰을 깨뜨린 사람, 그 중에서도 노력하지 않고 보상(=생활보장)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다. 사회의 유지 존속을 위한 노동수행이나, 노동하는 이들에 대한 사회의 돌봄은 계약사항 바깥의 문제이다.

경쟁계약은 사회인들의 생활에 대한 보상의 근거를 이룬다. , 사회의 존속을 위한 노동의 대가로 사회가 이들에게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더 나은 노동의 영역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생활보장이 주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서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생활보장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기업복지가 발달한 이유도 사회에 대한 공헌과 사회로부터의 보상 개념은 희박한 대신, 기업에 대한 공헌과 기업의 보상이라는 개념은 명확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노동하는 자가 아닌 노력한 자에게 생활보장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도덕체계가 경쟁에서 승리한 이에게 생활이 보장되는 메커니즘을 뒷받침해온 것이다.

일베가 자신들이 혐오 행위를 무임승차자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적 정당화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노력한 사람이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하는 한국의 사회적인 것’에 내장된 도덕체계를 이들이 신뢰하기 때문이. 시사IN의 기사에 등장한 김학준의 글에 따르면, 일베인들의 혐오에는 도덕적인 정의가 존재한다. 여성은 남자를 등쳐먹고, 진보는 국가에 떼를 쓰며, 호남은 뭉쳐서 뒤통수를 친다. 2등시민인 이들이 비주류의 권리를 내세워 기여한 것 이상의 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일하고 노력해온 1등시민이 오히려 희생당하는 것이 현실이므로 2등시민에 대한 혐오는 정당화 된다.

그런데 이 같은 경쟁에 기반한 사회적인 것이라는 인식의 프레임을 가지고 현상을 파악하는 것은 일베 뿐이 아니다. 청년 세대를 다루는 글이나, 청년들이 직접 쓴 글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이야기이. 예를 들어, <우리는 차별의 찬성합니다>의 저자 오찬호는 KTX여승무원들의 정규직 전환요구를 즈음한 수업시간에 있었던 토론에서“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면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라 말했던 학생의 발언을 소개한 바 있다[각주:11]. 여기서도 생활보장은 경쟁의 결과 획득 가능한 노력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김진표 당시 경기도지사 후보가 보육교사 공무원화를 공약으로 내걸었을 때, 서울의 한 명문대학교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와 많은 추천을 받았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사범대나 교대처럼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몇 개월 달랑 교육받은 애들이 지원해서 하는 게 어린이집 교사인데 ... 7만명 모두 공무원화 시킨답니다. 이게 말이야 똥이야.”

 

몇 개월의 교육만을 받은 사람이 공무원이 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는 감각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생활보장은 노력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과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고등학교만 졸업한 공무원이 부지기수였던게 사실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이 만들어지는 근거는 직무의 공공성에 기반하는 것이지, 직무능력자의 능력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다. 학위 있는 사람만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지만, 위 글을 쓴 필자의 인식 세계 속에서의 공무원은 학위를 가지고 경쟁을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무의식적 당위로 설정되어 있다.

요컨대, 일베는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바라는 이들이라는 자아상을 그리면서 경쟁에 기반한 사회적인 것이라는 상징적 세계 속에서 평범을 추구하는 자들이면서 동시에 정상적(normal)이고 도덕적(moral)인 사람으로 스스로를 표상하는 이들이다. 그런 점에서 일베라는 문제는 일베 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쟁에서 승리한 이의 생활이 보장되는 메커니즘을 도덕적으로 정당화 해온 한국의 사회적인 것이 내장하고 있는 문제를 병리적으로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4. 새로운 사회문제와 새로운 사회적인 것

 

이처럼 우리는 경쟁에 기반한 사회적인 것이 가졌던 문제적 속성들을 일베라는 증상을 통해 보고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인 차원에서 보자면 경쟁을 부추겨 고도성장을 이루고 노력을 기준으로 결과물을 차등적으로 지원한다고 하는 한국의 사회적인 것이 상정하고 있는 도덕체계는 생활보장의 파이프라인이 작아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시대, 그리고 부의 대물림이 증폭되는 세습자본주의가 가시화되고 있는 현재 유효기간이 끝났다. 이 '사회적인 것'이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타자 혐오에는 이르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 사회의 타자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조치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양산해왔고, 앞으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제도적 조치의 도입을 막을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경쟁에 기반한 기존의 '사회적인 것'을 폐기한 자리에 '새로운 사회적인 것(le nouveau social)'을 만들 필요성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제도적 차원에서 방향을 전환해 보려 한다. 신자유주의, 세습자본주의로부터의 방향을 전환하여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활을 보장하고 안전망을 제공하는 복지국가로 나아갈 것. 더불어 그간 한국의 사회적인 것이 내장해 왔던 여성과 특정지역인, 외국인 등 다양한 타자에 대한 제도적 및 관습적 배제를 철폐하고 이들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들을 도입할 것 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일부의 외침이 아니다. 최근 수년간의 선거에서 최대 이슈는 늘 복지문제였으며, 최근의 설문조사에서도 앞으로의 정책의 근간으로 복지국가가 가장 바람직하다 응답하는 이들이 많다.[각주:12]

하지만 현실을 곰곰이 살펴본다면 복지국가로 향하는 길이 그렇게 순탄할 것 같지만은 않다. 정부의 의지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내는 문제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기업의 무제한적 이윤추구 견제를 위한 규제 장치를 없애는 일이나 공공성을 근간으로 하는 공기업들의 민영화 정책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사회 안전망이 최소한의 생계도 책임져주지 못해 벼랑에 내몰린 사람들, 극단적인 선택에 이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사회 전반의 관심지원연대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주거교육노후 등을 고려해 보다 현실적인 소득과 보다 많은 정규직 일자리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에 못지않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거나 숙련도 높은 기술, 사회적 인정을 얻을 만한 학력 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소득이 왜 올라야 하며 정규직이 될 이유는 무엇인가 하며 반문하는 목소리 또한 쉽게 들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은, 경쟁에 기반한 '사회적인 것'에 내재하는 도덕적 체계의 영향력 때문이다. 따라서 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태를 앞두고 우리는 국가의 실패혹은 정치의 실패만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는 문제, 즉 연대의 실패 혹은 사회의 실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사회적인 것'의 문제점을 목도하면서 신자유주의 기조에 제동을 걸고 방향을 전환할 국가, 삶의 불안정 속에 존재하는 이들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개입할 국가를 주장하는 데 그쳐선 안된다. 그보다 앞서 필요한 것이 있다. 경쟁에 기반한 사회적인 것을 반성하고 사고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 사람들의 불안정성에 대해 인식하고 문제로 설정하는 것,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론적 시각을 만드는 것, 개인의 삶에 대해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을 부담하겠다는 유대의 의지를 조성하는 것, 이를 책임지기 위한 사회적 조직화를 이뤄내는 것, 국가 개입의 형태와 범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 등이다. 서구 국가들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복지국가에 이르기까지는 이상과 같은 사회적과정들이 먼저 존재했다.

이러한 사회적 과정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자칫 복지정책을 위로부터의 주입으로 끝나게 할 소지가 있다. 선거를 통한 집권을 의식한 정당들이 각종 복지정책을 공약으로 쏟아내는 일이야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흔한 일이다. IMF나 세계은행 같은 신자유주의의 구상을 담당하는 기구들이 시장근본주의의 조절자 노릇을 하며 기본소득프로그램 같은적극적 복지정책의 도입을 지원하기도 한 역사도 찾아보면 드문 것이 아니.[각주:13] 하지만 이렇게 위로부터도입된 프로그램들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삶의 불안정을 안정으로 바꾸고, 사회의 분절화를 방지하며, 사회 구성원들을 소속박탈 혹은 배제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데 있어 탄탄한 토대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따라서 일베라는 새로운 사회문제(la nouvelle question sociale)가 제기 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사회라는 질문(question sociale)을 새로이 제기하고 이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것이다. 원어가 말하듯이 사회문제란 문제(problem)가 아닌 질문(question)이다. 19세기 초 인구의 다수가 빈곤 상태로 전락하고이들의 생활이란 것이 비위생과 폭력으로 점철되었을 때많은 논자들은 이를 가리켜 사회적 질문(la question sociale)이라 불렀다.[각주:14]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둘러싼 수많은 토론의 결과 만들어진 것이 사회적인 것(le social)이다

이에 비추어 보자면, 복지국가라는 이상 을 실현을 위한 제도들은 하나의 답이다즉 문제를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해결책은 무엇인가국가/시장/가족 중 해결의 주체가 될 사회 구성부분은 어디인가 등을 두고 물음을 던지고 답을 제출한 과정의 결과물인 것이다요컨대 사회문제(question sociale),  사회라는 질문을 제기한 뒤 아래로부터스스로 해답을 찾아 고민한 과정의 결과 제출된 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누락된 채 위로부터, 혹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질문은 그 제도적 외양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회적인 것의 내실, 연대의 내실을 구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복지국가의 제도적 외양이 갖춰지더라도 얼마 못 가 기능부전과 재생산의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재생산의 위기라는 말은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의 위기에 국한된 표현은 아니다. 서구 복지국가들이 전성기에 도달했을 무렵, 많은 논자들은 그러한 서구를 가리켜 소비사회라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복지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음을 인식하던 그 무렵 서구 국가들이 스스로 성장의 한계를 선언했던 역사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서구 복지국가가 직면해야 했던 위와 같은 위기상황들을 복지국가 초입에서부터 경험해야 할지도 모른다. 예상컨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자원과 에너지 공급을 확대해왔던 지난날의 복지시스템과 달리 다수의 사람들에게 자원과 에너지 소비 감축을 요구하는 복지시스템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래로부터의 문제제기와 답변, 토론과 동의의 과정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최근의 사례 또한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가 복지국가로의 여정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지난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상급식’, ‘무상보육무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련의 복지정책이 우리 사회에 도입되었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무상정책들이 앞으로 더욱 많은 제도 도입을 위한 마중물역할을 하기를바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사회적 안전장치가 여전히 부족한 우리 현실 속에서 이 정책들은 더 크고 탄탄한 안전망을 만들어내는 데로 이어졌는지, 이를 위해 사회의 구성원들이 흔쾌히 그 부담에 동의할 수 있는 연대의 능력을 만드는 데로 이어졌는지 묻는다면 다소 회의적이다. 일례로, 2014년 선거에서 많은 후보들은 더 이상 무상정책을 앞세우지 않았고, ‘무상을 앞세운후보들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급식이 되었든 보육이 되었든, ‘무상이라는 이름의 정책들은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고 이를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가 기꺼이 부담하려는 연대의식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다. 1980년대 말 도입된 4대보험제에서 알 수 있듯, 다수의 복지제도들은 부담금액과 수혜금액이 불일치한다. 그런데, 사회가 적대관계에 기초를 둔 상상력으로 가득한 곳이라면 부담자와 수혜자가 다르고, 부담금액과 수혜금액이 서로 다른 복지제도들은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것으로 인식되어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연대의식 없는 복지정책의 도입,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 없는 복지정책의 도입은 불가능하다. 요컨대 오늘날 다수의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복지정책이지만, 그에 앞서 필요한 것은 경쟁에 기반했던 '사회적인 것'을 폐기한 자리에 새로이 들어선, 연대의식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사회적인 것에 대한 담론과 지식의 확장이다.

서구의 복지국가 시스템이 위기와 전환기를 맞은 상황, 일베를 비롯한 다양한 병리적 증상과 고도성장과 경쟁에 기반한 과거의 사회적인 것의 유효기간이 다한 상황,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이를 배경으로 우리 사회를 복지국가, 사회국가로 바꾸어나가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주어져있다. 회라는 질문(la nouvelle question sociale)'을 던지고 답을 도출하기 위한 토론을 거듭해야 한 결과 만들어진 '새로운 사회적인 것(le nouveau social)'은 이 과제를 풀기 위한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1.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437181X [본문으로]
  2.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41 [본문으로]
  3.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pvqa&articleno=556&categoryId=10®dt=20140928162001 [본문으로]
  4. http://snuac.snu.ac.kr/?p=14169 [본문으로]
  5.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PxwJ&articleno=380&categoryId=28®dt=20130725230110 [본문으로]
  6. 일본 생활보장론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들을 참조하였다. 오사와 마리, 김영 역, 2009, [현대일본의 생활보장체계], 후마니타스 미야모토 타로, 임성근 역, 2011, [복지정치 - 일본의 생활보장과 민주주의], 논형 현윤경, 2014, [근대 일본 생활보장 시스템에 관한 의미론 연구 : N.루만 관점에서 본 일본사회 신뢰기반의 붕괴],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본문으로]
  7. 김도균, 2013, [한국의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의 형성과 변형에 관한 연구 : 개발국가의 저축동원과 조세정치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본문으로]
  8. 1990년이다. 설문조사 결과는 http://www.yonhapnews.co.kr/society/2013/12/27/0701000000AKR20131227161300017.HTML [본문으로]
  9. '사회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들을 참조했다. 한글 문헌은 . 다나카 타쿠지, 박해남 역, 2014, [빈곤과 공화국], 문학동네, 자크 동즐로, 주형일 역, 2005, [사회보장의 발명], 동문선 프랑스어 문헌 Francois Ewald, 1986, L'Etat providence, Grassier. [본문으로]
  10. 다음의 신문기사 참조. http://www.zeit.de/2014/24/japan-jugend-sex [본문으로]
  11. 관련된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71003 [본문으로]
  12.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1409/e2014090420340348010.htm [본문으로]
  13. 구체적인 내용은 現代思想2007年9月号 [特集=社会の貧困/貧困の社会]를 참조. [본문으로]
  14. 이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Giovanna Procacci, 1999, Gouverner la misère : La question sociale en France (1789-1848), Seuil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