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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서평] 좌절된 소통과 사랑에 대한 역사서, 오민석의 『그리운 명륜 여인숙』을 읽고

 

 

 

여인숙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여인숙에는 호텔이나 모텔급의 숙박업소와는 달리 방 안에 따로 화장실이나 세면실이 없다. 여인숙에 들어온 목적이 무엇이든 이곳에 머물게 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공동화장실과 공동세면실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화장실에 몰릴 수도 있고 세수를 할 때도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이 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곳이 바로 여인숙이다. 하지만 공동공간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여인숙에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투숙객들은 여인숙의 이 같은 공동공간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옆에 사람들이 있더라도 아는 척하지 않고 그저 자기 용무를 끝낸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에 바쁠 뿐이다.

 

사람들이 만나는 “공동의” 공간을 가지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것도 공유되지 않는 모순의 공간이 바로 여인숙이다. 사람이 있으나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남몰래 벽을 만드는 공간, 어쩌면 이 같은 여인숙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더욱 외로울 것 같다. 숱한 거절의 고통 속에서 수없이 받아온 상처의 아픔으로 옆 사람에게 말조차 걸 수 없게 된 인간은 차라리 처음부터 이 공간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외롭고 가여운 인간들이 한 번씩은 밤을 보내고 홀연히 자취를 감췄을 공간이 바로 『그리운 명륜여인숙』(오민석, 시인동네, 2015)일 것이다.

 

『그리운 명륜여인숙』은 거대한 세상뿐 아니라 그 속의 사람들로부터도 단절된 인간들의 작은 일상, 또는 작은 역사를 담고 있는 시집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고원”에 올라 자신을 지나온 분절된 시대를 노래한 시들을 정리한 뒤 그곳을 내려오는 자신을 발견한다. 시인은 이 고원을 내려오며 자신도 한 때 머물렀을 그 공간에 “그리운”이라는 수식어를 남겨놓는다. 시인은 “명륜여인숙 30촉 흐린 빛 아래에서 우린 무엇이 되어도 좋았네”라고 말하며 추억하기에 너무 추웠던 삭풍의 길, 그 아픔의 역사를 그리워한다고 고백하며 “집 아닌 집을 찾아” 다시 걸음을 재촉했던 그날과 그날의 사람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그리운 명륜여인숙」).

 

시집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리운 명륜여인숙』에 실린 산문시에 나타난 하나의 특징이었다. 이 시집의 산문시들은 오민석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초판은 한길사에서 1992년에 출판되었음)의 산문시들과 다른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운 명륜여인숙』에 실린 산문시들은 「일곱 개의 절망의 노래」와 「풍년가」를 제외하고 모두 마침표(.)를 쓰지 않고 있었다.[각주:1] 물론 이 같은 현상들이 산문시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비(非)산문시들에서도 마침표는 사용되지 않는다. 이 시집의 전체 시 가운데서 마침표가 사용된 시는 「일곱 개의 절망의 노래」와 「풍년가」뿐이다. 물론 비(非)산문시들은 행을 바꿈으로써 문장 사이의 의미를 구분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마침표의 사용여부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산문시에서의 마침표 생략은 시인 스스로 유일한 문장 구분의 장치를 삭제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해보였다. 또한 이 시집의 첫 번째 시 「모스 부호처럼 꽃잎이」부터 마지막 시 「삼양라면을 사러가는 우울」[각주:2]에 이르기까지 단 두 편(「일곱 개의 절망의 노래」와 「풍년가」)의 시를 제외하고 모두 마침표가 생략되었다는 점은 이 시집이 이질적인 시들을 적당히 취합한 것이 아닌 모종의 의도적이고 계산적인 구성형태(혹은 전략)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같은 사실은 문장의 종결을 의미하는 문장부호인 마침표의 부재가 이 시집의 시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시적 장치로 기능하고 있음을 뒷받침해준다. 마침표의 부재는 『그리운 명륜여인숙』의 산문시들에 나타난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모종의 경계를 허문다. 마침표가 사라진 산문시들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연속된 문장들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을 일단은 지양한다.

 

[…] 봄밤이 아슬아슬하게 성(聖)과 속(俗)을 오가는 사이 19세기의 바람이 문득 분다 (이상주의자들의 무덤이 즐비하구나) 그래도 사랑은 사랑이므로 나는 망명을 포기한다 모스 부호처럼 꽃잎들이 뚝, 뚝 진다 (「모스 부호처럼 꽃잎이」의 부분)
애인이 슬픈 눈길로 너의 마지막을 들여다보는 것도 잠깐, 그녀는 바로 돌아서 다른 우울을 찾을 것이다 문상 가는 길,
또 하나의 우울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삼양라면 사러 가는 우울」의 부분)

 

이상주의자들의 무덤이 된 19세기의 바람이 부는 봄밤, “나”는 차마 떠나지 못한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는 이상주의자들이 살 수 없는 시대, 또는 타인과 더불어 살고 있음에도 그들과 소통할 수 없다는 모순된 외로움이 편재해 있는 고통의 시대다. 이 고통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전달할 언어조차 그들에게 남아있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다. 그들은 사랑의 전달이 계속해서 실패할 것을 알기에 그저 “쉬발,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욕 섞인 고백을 할 수 있을 뿐이거나 “사랑도 한때는 욕이었음”을 회상할 수 있을 뿐이다(「그리운 명륜여인숙」). 사람들은 이것이 사랑의 고백인지 그저 욕설의 일부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비통한 시대를 살아왔다. 그들은 욕을 동반해서라도 사랑을 말하고 싶은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는 시대는 생명의 꽃조차도 모스 부호라는 기계화된 약호로 전환되는 시대다. “욕설의 시대에도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어마저도 기계화된 세계를 아직도 살아간다. 생명이 없는 기계의 시대 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외로운 우울이 되어 떨어지는 꽃잎, 아니 모스 부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시대의 우울은 시집 전체에서 차이와 반복을 통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시인은 사람들의 고통스런 우울이 사람들 사이의 무너진 소통 그것 자체 때문만이 아님을 「일곱 개의 절망의 노래」를 통해 암시하고 있다. 이 시 속의 사람들은 사람과 사랑뿐 아니라 자기 “집”으로부터의 망명을 선택하게 되어 “집도 없는 짐승들”이 된지 오래며 아무도 “당신의 비애를 눈치채지 못했을”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잃고 “미스 조(23)”나 “김 전무”(57)라는 단순화·수치화된 삶을 유예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시는 시집의 다른 시들과 다른 변별성을 갖는다. 이 시는 유일하게 마침표를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각의 연을 구별해주는 별표(*)부터 1연 다음에 등장하는 무언의 직선 형상을 보이고 있는 연속된 마침표와 빼기(-)표시의 배치형태를 보여준다.

 

이 시는 나머지 시들에 나타나지 않는 의미의 여러 경계 표시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시 속의 사람들은 여전히 우울하고 외로움을 금치 못한다. 그들은 시 제목처럼 무려 일곱개나 되는 절망의 노래 속을 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일곱 개의 절망의 노래」가 마침표, 별표, 빼기표시를 과잉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다시 말해 의미 경계 표시물들을 과잉으로 제시함으로써『그리운 명륜여인숙』의 마침표가 없는 시들의 의미와 그 시들에 나타난 외로움의 역사 속에 모종의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각주:3] 물론 그 시대를 살아왔거나 그 시대를 살아갈 사람, 또는 저 “멀리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늘 그랬듯이 앞으로도 “치욕의 시대,” “거짓의 시대,” “죽음의 시대”일지 모른다(「멀리 있는 사람아」).

 

「풍년가」의 경우 “(KBS <한국인의 밥상>)”의 내용이 제시되는 「풍년가」의 1연에서만 마침표가 사용된다. 이 시의 나머지 연의 경우에는 마침표가 없다. 시인은 이를 통해 국가공영방송 속에서의 삶이 진정한 인간성과 관계가 없는 기계화된 혹은 전파화된 죽은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나머지 연의 내용은 표면적으로 매우 우울해보이지만 시인은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이 우울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기계화되지 않은 진정한 인간성이 살아있음을 암시한다.

 

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우리에게『그리운 명륜여인숙』은 하나의 제안을 한다. 그것은 경계를 허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슬픔과 고독의 역사를 잠시라도 멈추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소통의 회복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것들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세상의 우울함을 계속해서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의 시세계 속에서 나와 당신은 절대 소통할 수 없다. 항상 “당신은 통화중이고” 결국에 “당신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나의 로자」). 나는 당신을 기다리겠지만 나와 당신의 소통, 나아가 사랑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일곱 개의 절망의 노래」라는 한 편의 시를 통해 하나의 절망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나머지 시들을 통해 무수한 희망을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앞서 인용한 「모스 부호처럼 꽃잎이」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자연적 존재마저 기계화되는 세계를 살고 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소통과 사랑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시의 문법으로부터 마침표를 제거함으로써 비록 절망적이고 고통스런 이야기로 가득해 보일지라도 우리의 삶이 소통과 사랑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선(일련의 긴 점이 연속적으로 촘촘하게 나타난 형태)과 점으로 구성된 모스 부호가 인간의 소통과 사랑을 기계화한 물질문명의 제유라고 할 때 마침표(.)의 부재는 모스 부호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점(.)과 선(….)의 부재를 의미한다.

 

생은 늘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나는 지뢰밭에서 잔다, 때로 애처롭고 때로 장엄하다, 육지도 섬마을 어부들 앞에서 백건우가 피아노를, 아, 갈기고 있다, 주황색 바다 노을과 함께 건반이 타들어 간다, 때로 우리가 생을 속인다, 그러니 때로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라 (「먼 바다에 풍랑 일다」의 부분)

 

이 시는 분명 위험으로 가득 찬 지뢰밭 같은 사람들의 가련한 인생을 노래하고 있다. 명시적으로는 분명 그렇다. 마침표의 부재는 때때로 사람들의 이 같은 고통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것도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은 모스 부호라는 상징의 토대인 점(.)을 삭제함으로써 사람들이 고통의 역사를 극복하고 소통과 사랑에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즉 시인은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의 좌절된 소통과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가 소멸된 상태로 묘사될 수 있는 모종의 소통과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절망의 그림자를 통해 희망의 빛을 보여준 것과 같다. “명륜여인숙”을 거쳐 간 사람들은 그 시기가 언제가 되었는가에 상관없이 모두 괴로운 사람들이었다. 꿈을 꾸고 있으나 그 꿈이 좌절될 것을 알고 있었던 망명객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명륜여인숙”에 머물렀던 사람들, 다시 말해 함께 있든 홀로 있든 결국에 외로워질 수밖에 없었던 「베가본드 프롤레타리아」들이 고통과 절망의 「집시의 시간」을 살았음에도 그곳을 「그리운 명륜여인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곳에서의 시간이 그들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 진정한 소통과 사랑의 “역사”였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본질적으로 소통과 사랑에 마침표가 사라진 공간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글_박진우(CAIROS 회원)

  1. 「일곱 개의 절망의 노래」는 문장이 끝날 때마다 마침표가 찍혀있으나, 「풍년가」는 시의 1연에 마침표가 찍혀 있다. 공교롭게도 「풍년가」의 1연의 끝부분에는 “(KBS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 표현이 사용된 1연을 제외한 나머지 연에서 마침표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국가 공영방송 KBS의 방송내용이 은유적으로 사용된 부분에서는 마침표가 사용되었으나 그 외에 일반 서민들의 삶을 묘사하는 나머지 연에서는 마침표가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은 마침표의 사용이 어떤 시적 장치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라고 판단된다. [본문으로]
  2. 「모스 부호처럼 꽃잎이」와 「삼양라면을 사러가는 우울」은 모두 산문시다. 즉 시집의 처음과 끝이 모두 산문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3. 「풍년가」의 경우 “(KBS <한국인의 밥상>)”의 내용이 제시되는 「풍년가」의 1연에서만 마침표가 사용된다. 이 시의 나머지 연의 경우에는 마침표가 없다. 시인은 이를 통해 국가공영방송 속에서의 삶이 진정한 인간성과 관계가 없는 기계화된 혹은 전파화된 죽은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나머지 연의 내용은 표면적으로 매우 우울해보이지만 시인은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이 우울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기계화되지 않은 진정한 인간성이 살아있음을 암시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