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론자들은 세계관을 세계에 대한 특정한 이해의 틀이라는 식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송인규 교수처럼 인식론적 함의를 강조할 수도 있고, 아니면 세계에 대한 지적이거나 감응적인 반응양식의 전반을 강조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이러한 세계관 정의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주체의 세계 내적 위치라는 문제가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수용할만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텍스트들을 좀더 꼼꼼히 확인할 필요가 있지만, 가설적인 수준에서는, 이러한 세계관 정의는 알튀세르 이후의 이데올로기 개념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허위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실재 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다"라고 알튀세르는 정의한다. 개인들은 자신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실재 조건에 대해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 실재 조건과 그들이 맺는 관계는 상상적(imaginary/가상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스피노자의 1종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개인들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가상적인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대중들의 동일성 생산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주목한다.
알튀세르가 개인들이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이데올로기론을 펼친다면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론에서 니체적 계기, 즉 대중들의 열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며 그것이 대중들의 가상적 동일성과 관련이 있음을 강조한다. 대중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동일성(identity/정체성)을 이데올로기 속에서 가상적 형태로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들의 이데올로기론은 그것이 비판당하면 사라질 허위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근본적 조건이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세계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는 결코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지젝의 이데올로기론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다. 지젝에게 이데롤로기란 실재에 의해 상징질서에 뚤린 구멍(즉 봉합불가능한 지점)을 가리는 환상이다.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지젝에게도 이데올로기 없는 세계는 불가능하며, 다만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비판, 환상-가로지르기만이 가능할 뿐이다.
결국 이데올로기란 세계를 이해하는 틀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서 세계는 결코 객관적으로 표상될 수 없다. 세계관이란 것도 근본적으로 세계를 특정하게, 즉 객관적이지 않게, 이해하는 틀이 아니던가? 다만 기독교 세계관은 여타의 모든 세계관들과 달리 자신만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틀이라고주장해왔다. (그리고 여기서 기존 세계관 논의의 비극은 시작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기세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초월적 인식자에 의해 계시된 정보에 의해 형성된 세계관이기에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 가능성이 신으로부터(정확히는 성서로부터) 보증되어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적어도 2002년 이후 한국 기독지식인판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이 단수가 아니라는 것에는 합의가 형성된 것 같다. 그간 기세는 사실상 개세였고, 그것은 특정한 신학적 입장-개혁주의 신학-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요즘에는 기세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이때 기세의 다양성이 인정된다는 것의 함의는 무엇인가? 그건 기독교 내부에서도 세계를 인식하는 유일한 객관적 틀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즉 기독교 내부에서 세계관은 복수적으로 존재하며, 세계관은 상대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 아닐까? 기독교 세계관의 다양성은 결국 모든 기독교 세계관의 상대성(상대주의가 아니다)을 인지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양성이 어떤 층위의 다양성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가설적이지만 나는 그 다양성의 층위는 결국은 신학적 층위라고 생각한다. 가령 한국의 대표적 기세론자들인 송인규, 신국원, 이승구 교수들은 개세를 기세라고 말한다. 그때 개세란 정확히 개혁주의 신학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반면 개세 중심의 기세논의에 강력한 반론을 주장하며 등장한 김기현의 경우는 사실상 매노나이트 신학에 입각한 기세를 주장한다. 그의 기세는 그의 메노나이트 신학의 결과물이다.
개세에 대해 비판적인 세계관론의 또 다른 축에 서있는 양희송의 경우도 그의 복음주의 신학(음...그는 영국 복음주의 성서신학의 관점을 많이 차용하는듯 보인다..가령 톰라이트...)으로부터 도출된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 차이는 신학적 입장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들의 세계관을 규정하는 것은 사실상 신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전이론적 차원이 절대 아니다. 신학이라는 이론적 층위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전이론적' 차원을 오히려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관이 신학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결국 문제는 세계관이 아니라 신학이다.
이는 조금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사실상 세계관이란 신학의 외피에 불과한 것이며, 세계관을 배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학을 배우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의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이란 무엇인가?
그야말로 신에 대한 말함(theo-logia)이다. 이때 신을 말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성서를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세계관을 논의하는 보수신학에서는.
그러나 이때 성서를 근거로 한다는 것은 성서를 특정하게 해석한다는 것을 말하고, 성서를 특정하게 해석한다는 것은 성서 해석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말한다. 성서가 세계의 객관적 진리를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항상 해석자에 의해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언제나 해석은 매우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아직도 신학이라는 것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서 나는 신학이 이데올로기와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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