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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trans-post-christianities

장소 없는 장소로서의 ‘기독교’ [김강기명]

포스트-기독교 주체형성을 위한 한 탐구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칼 맑스,『독일 이데올로기』)


0. 들어가며


“기독교가 문제다.”는 이제 한국사회의 한 상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교회언론회’ 할아버지들의 바램과는 달리 그것은 반기독교를 조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라 기독교가 사회 안에 자리 잡고 실존하는 방식과 내용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현상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지탄의 대상이 되며, 또 다른 모든 현상의 원인이 되는 것은 ‘독아론(獨我論)’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저는 <복음주의>라는 인터넷 상의 한 기독교 클럽에서 활동하는 어떤 분으로부터 쪽지 공세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클럽에서 저는 종종 “성서를 면밀하고 꼼꼼하게 읽어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국이나 지옥은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일관되게 제시되지는 않고 있다.”는 글을 올리곤 했는데, 그 글에 대한 분노에 찬 쪽지였습니다. 요는 “지옥이 없다면 - 놀랍게도 ‘천국이 없다면’이 아니었습니다! - 불신 가족을 전도하기 위해 지금껏 온갖 고난을 감수했던 저의 인생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삶이 끝나는 궁극에서 맞이할 천국과 지옥을, 특히 ‘지옥’을 중요한 위치에 두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독아론 말고도 독아론적 사유와 행동은 세련되게 펼쳐지기도 합니다. “죄악으로 물든 불쌍한 세상을 바꾸자.”같은 선언이 그것이지요. 천당/지옥까지는 아니지만 여기에도 선명하게 교회 안과 교회 밖을 나누는 논리가 등장합니다. 교회를 세상을 바꿀 단독적 주체로, 세상을 바뀌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도식이 작동하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기독교가 세상과 갈등하는 많은 이슈들이나 현장들은 사실 매우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지지만 한편으로는 이 독아론 위에서 중층결정되어 있는 듯합니다.

좀 더 나아가면, 이러한 독아론적 자기규정은 기독교의 갱신 혹은 개혁을 부르짖는 입장들 가운데서도 존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복음의 본질을 되찾자”, “하느님 나라 정신을 회복하자”, “교회의 교회됨을 먼저 추구하자”는 주장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 기독교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다른 정체성을 갖출 것을 촉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정체성 규정의 시도는 좀 더 시원적인 어떤 것을 추구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를테면 초대 교회라든지, 1세기 예수 운동이 오늘날 개혁적 기독교 정체성을 위한 ‘전범’으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 역시 기독교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함으로써 이전의 기독교와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독아론적 전략을 취한다는 점에서, 지탄대상인 이전의 기독교와 ‘내용’에 있어 달라질지언정 ‘형식’에서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복음주의(혹은 근본주의)적 신학교와 교회를 다니다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옮겨온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이런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에큐메니컬’이라는 이름은 단지 어떤 내용만이 아니라 하나의 ‘형식’을 표현합니다. 이어지는 절들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교회 일치’는 그 말이 풍기는 통상적 이미지와는 달리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수한 외부성들 간의 만남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내용이 아니라 형식적 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에큐메니컬’은 어떠한 ‘에큐메니컬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의 실존과 실존을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사태를 두고 한국 교회 진보와 보수가 나뉘어져 있습니다.”는 멘트는 단지 밖에서 바라보는 기자들만의 멘트가 아닌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간략한 스케치를 배경으로 해서, 오늘날 기독교가, 또 기독교의 ‘개혁’이 이러한 ‘정체성 회복’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리고 주-객의 독아론적 도식을 넘어선 기독교적 ‘주체화’가 가능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저는 이것을 일단 포스트-기독교적 주체(형)성이라고 불러보고 싶습니다. 이 논의를  위해 많은 이론적 배경이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충실한 설명을 위해 이 주제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논의를 펼친 두 사람의 사상가 - 가라타니 고진과 스피노자 - 의 사유를 살짝 우회해볼 것입니다.



1. 가라타니 - ‘세계종교들’을 낳은 ‘세계종교’


문학비평으로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하여 <트랜스크리틱>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사상가인 가라타니는 종교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사유를 전개한바 있습니다. 특히 그의 <탐구 2>에 실린 「세계종교에 대하여」는 ‘세계종교’라는 개념을 통해 그의 학문적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타자성’과 ‘교통공간’에 대한 사유를 정밀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라타니의 논의는 오늘 우리가 문제 삼으려는 독아론적 종교와 정면으로 맞서서 전개되기에, 오늘날 포스트-기독교적 주체성을 구상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만하다 하겠습니다.

「세계종교에 대하여」에서 가라타니는 ‘공동체’와 ‘사회’(혹은 ‘세계’)를 구분함으로써 그의 논의를 전개합니다. 공동체는 공통의 언어게임과 규칙을 가진, 대칭적 관계 속에 있는 집단입니다. 이것은 비단 어떤 마을이나 국가뿐만 아니라 자기 대화, 즉 의식 같은 것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즉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동일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1) ‘사회’란 이 공동체의 동일성이 다다르지 못하는 지점, 즉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교환=커뮤니케이션이라는 “목숨을 건 도약”이 수반되는 세계입니다. 이 ‘사회’에서 마주하는 존재는 곧 ‘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라타니는 타자를 이자(異者)와 구분합니다. 이자 역시 공동체의 동일성 바깥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자는 공동체의 동일성, 반복을 위해 요구되며, 때문에 공동체의 장치 내부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를테면 다문화담론이 상기시키는 유형화된 소수자의 이미지들은 타자라기보다는 공동체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이자’라는 것입니다. 타자는 그런 식의 내면화가 불가능한 지점(사회, 혹은 세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논의를 ‘신’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식의 사유가 가능할까요? 통상적인 종교적 사유에서 초월자(신)은 그가 ‘전적 타자’라는 용어로 표현될 때조차도 하나의 ‘이자’로, 절대적인 ‘이자’로 기능합니다. 신은 우리의 동일성에 반대되며 또 그 동일성을 보증하는 존재로 설명됩니다. 결국 초월자는 그 ‘타자성’을 거세한 채로 인간에게 숭배 받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가라타니는 ‘전적 타자’라는 말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타자와의 관계의 절대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키에르케고르가 낭만주의 신학의 바울 해석(종교적 천재 바울)에 반대하여 “천재는 자기 자신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나 사도는 신에게서 받은 권능에 의해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 그 ‘신에게서 받은 권능에 의해’를 사도의 말이 공동체 내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그래서 내재화될 수 없는 어떤 말, 즉 타자의 말(바흐친)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합니다.2) 즉 종교의 ‘초월적인 영역’이야 말로 하나의 ‘내재적인 영역’, 즉 세계라는 것입니다. 즉 ‘초월적 타자로서의 신’은 사실 ‘초월적 신인 타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공동체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집단이나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 강제되는 다양한 구조, 시스템, 문화에 기반한 종교입니다. 공동체는 바깥(外)에 대한 안(內)으로서 있으며, 외부의 혼돈스러운 것(카오스)에 대한 질서(코스모스)로서, 혹은 세속적인 것에 대한 ‘성스러운 것’으로서 있습니다. 게다가 공동체는 그 외부에서 이자를 도입함으로써 활성화를 꾀합니다. 가라타니는 이것이 공희(供犧, 희생제의)의 기능이라 이야기합니다.3) 다른 하나는 ‘세계종교’입니다. 세계종교라 해서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종교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라타니는 그것이 ‘세계’ 관념을 제시하는 종교이며 본질적으로 ‘종교 비판’으로 나타나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지라르와 프로이트는 이러한 세계종교로서의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해 흥미로운 진단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공동체의 종교’인 기독교는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의 죄를 속죄했다는 것을 중심교리로 갖고 그것을 보증하는 성찬제의를 반복합니다. 이것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희생제의입니다. 그런데 지라르는 성서라는 텍스트는 이러한 공동체의 폭력메커니즘을 해체한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비공희적 성격을 강조해야 한다. 예수는 바로 공희가 한창일 때 죽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공희를 거역하며 죽는다.”(<세상의 시초부터 숨겨지고 있는 것>)4)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공희와 그것을 낳는 대립의 종결임을 강조합니다. 가라타니는 더 나아가 복음서에서 그려지고 있는 예수의 ‘종교비판적’ 성격에 주목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혹은 당시 유대주의의 문맥에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는 공동체의 종교를 뿌리로부터 흔듭니다. 그것은 그가 공동체의 종교의 타자들을 찾아냄으로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가라타니는 하나의 공동체의 동일성이 허물어지는 이 영역이 곧 ‘세계’이며 여기에서 세계종교가 기능한다고 주장합니다. ‘세계종교들’은 이 ‘세계종교’를 다시 공동체의 종교로 만듦으로서 성립합니다. 하지만 ‘세계종교’는 ‘세계종교들’에 대한 절대적인 외부로서 계속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프로이트의 ‘유대적인 것’에 대한 논의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저작을 통해 공동체의 종교인 ‘유대교’의 외부인 ‘유대교’를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사실은 비유대인(이집트인)이었다는 대담한 가설에서 출발한 이 저작은 공동체의 종교가 갖고 있는 집단 신경증에 대해 분석한 글입니다. ‘외국인’ 모세는 압제받는 유대인들에게 이집트의 ‘종교개혁’이었던 아케나톤의 유일신 신앙을 제시함으로써 계약을 맺고 그들을 광야로 끌어냅니다. 그러나 야훼라는 민족신을 신앙했던 유대인은 본디 우상숭배금지를 강요한 모세에게 계속 저항하며 결국 그를 살해합니다. 프로이트는 여기에서 집단 신경증으로서의 종교의 모습을 찾아냅니다. 모세에 의해 인솔된 집단, 집단에 의한 모세 살해, 이에 대한 회한과 공포. 이것은 ‘원부 살해’에서 종교의 기원을 찾는 <토템과 타부>의 논의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 텍스트는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정신분석학적 설명 이상의 것을 담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이 종교를 집단 신경증으로 바라보는 그 입장 자체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를 금지한 인간 모세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금지는 어떤 공동체의 신들을 섬기는 것도 거부합니다. 프로이트가 “유대인인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지적인 탐구를 행할 때 이를 제약하는 수많은 편견들을 피할 수 있었다.”라고 자신의 ‘유대인 됨’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어떤 유대교나 유대인 공동체로 환원되는 ‘정체성’이 아니라 바로 이 인간 모세로부터 유래한 유대교의 ‘외부’인 유대교라는 것입니다.5)

가라타니는 왜 이러한 ‘세계종교’에 대해 다루는 것일까요? 그는 이런 논의를 통해 ‘공동체’가 인간에게 당연하고 본래적인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그는 닫힌 사회(공동체)에서 열린 사회로 인류가 이행했다는 통념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교통공간’으로서의 세계 속에 놓여 있고, 이 교통공간으로부터 공동체들이 탄생한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주장입니다. 공동체의 종교들은 일종의 ‘기원적 신화’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은 정체성을 유지하고 타자를 배제합니다. 프로이트가 이 기원적 신화에서 원부 살해의 모티브들을 발견한 것에 대해 가라타니는 이것이 오히려 세계종교 출현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살해당한 ‘원부’는 사실은 ‘사회적인 것’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사회적인 것은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공동체로 끊임없이 돌아옵니다.6) 가라타니의 논의를 따르면 결국 종교가 끊임없이 혁신되는 동력은 이미 그 종교의 기원에 자리 잡은 그것의 ‘외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유는 가라타니의 정치철학적 저작들7)에서 동일성의 공동체인 캐피털-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선 새로운 관계성으로서의 어소시에이션(연합체)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가라타니의 사유는 기존의 종교적 실천이 처한 독아론적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참고점을 제시해 줍니다. 종교의 기원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타자성에 대한 성찰, 결코 홀로는 실존이 불가능한 종교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인 됨의 과제를 어떤 정체성이나 교리에서 찾지 않고,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찾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만으로는 오늘날 기독교가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개개의 실정 종교들 - 말하자면 ‘공동체의 종교들’ - 이 실제적으로 신자들의 삶을 규제하고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 빠져 있습니다. 실제로 천국과 지옥을 믿고, 제의적 반복에 헌신하며, 기독교 전통의 많은 언어들 속에서 삶이 작동하는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세계종교가 작동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해명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물론 종교 자체가 가라타니의 과제가 아니기에, 이것을 해명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17세기에 이미 이러한 과제를 가지고 씨름했던 사상가, 스피노자를 불러 볼 것입니다.



2. 스피노자 - “민주주의”를 낳는 “보편종교”


스피노자 당시의 네덜란드는 칼뱅주의가 하나의 국교처럼 대두되어 있었습니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와중에 세력을 확장한 칼뱅주의는 매우 다종교적이었던 네덜란드적 상황 속에서 이중의 전략을 취하게 됩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독립전쟁의 지도 그룹이며 총독을 배출해 온 오란녀가와 의회를 장악하고 재상들을 배출해 온 정무관파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심각했습니다. 16-18세기에 이르는 동안 이들은 번갈아 가면서 집권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란녜 가문이 적극적으로 칼뱅주의 성직자들과 손을 잡았다면, 정무관파는 종교관용을 옹호하며 비칼뱅주의 세력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칼뱅주의자들은 정무관파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적극적으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원칙 속에서 카톨릭이나 소수 종파에 우호적이었던 정무관파를 공격하고, 오란녜파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 원칙을 해제하고,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어 네덜란드를 칼뱅주의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욕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 와중에 격렬한 종교적 갈등들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 개입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을 쓰게 됩니다. <신학정치론>의 주된 주제는 서문의 제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철학할 자유는 경건함과 국가의 평화를 해치지 않으면서 승인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국가의 평화와 경건함은 이 자유의 억압에 의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논술들을 담고 있다.”8)


스피노자 자신은 <에티카>나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들> 등에서 “신 즉 자연”아라는 유명한 정식으로 표현된 내재적 종교관과 존재론을 일관되게 밀고나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재적 존재론은 직접적인 인간 생활에서 어떤 이데올로기나 도덕 원리, 즉 “너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라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피노자 자신도 에티카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 뿐만 아니라 힘들다.”고 이야기하지요. 내재적 존재론은 앞서 이야기한 가라타니의 ‘세계종교’나 ‘교통공간’처럼 인간의 삶이 자리 잡고 있는 윤리학적 토대를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인간의 삶을 직접 규준하기가 드물 뿐만 아니라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피노자는 그것을 ‘상상’에서 찾습니다. ‘상상’이라는 표현 때문에 그것이 우리가 흔히 쓰는 ‘상상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만, 그것은 인간의 일상적인 지각과 인식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태양이 빛의 속도로 8분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태양이 200피트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지각합니다.9) 저와 옆에 있는 타인 사이에는 전자파, 공기, 세균, 빛의 입자와 파동 등 매우 잡다한 많은 것들이 꽉 채우고 있지만, 우리는 마치 그 공간이 비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신체의 흔적에 따라 생겨난 이미지들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마치 실재적 관념인 것처럼 생각하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상적 관계가 구성하는 삶을 알튀세르나 진태원 등은 ‘상상계’(imaginaire)로 명명합니다.10)

종교는 이 상상계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17세기 네덜란드의 대중에게 있어 종교는 다른 어떤 상상적 관계보다도 큰 영향력을 가진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인간은 자연 안의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을 실재 그 자체의 차원에서 인식할 수 없기에 그것을 목적론적으로 상상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자연 실재들은 자신들이 그러듯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한다고 가정하며, 더 나아가 신 자신이 모든 것을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인도한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고,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11)


또한 인간은 자신들의 모든 환경들을 완벽하게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항구적인 공포를 겪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외부 환경이 나를 급습하여 파괴할지 알지 못하고, 그것이 낳는 공포 속에서 이전에 좋았거나 나빴던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하나의 징조를 찾고, 또 그것을 목적론적 상상과 결부 시켜, 신들이나 하느님의 분노나 축복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론적 상상과 공포에서 나오는 종교는 결코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서 인간의 삶을 규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종교적 상상은 언제나 ‘상상계’로서 제시되며, 구체적으로는 실정 종교의 기호와 제의 체제에 의해 구성됩니다. <신학정치론>의 서문에서 스피노자는 그것이 성직자들에 의해 증폭되며 미신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적합니다. 대중들은 각종 종교 행위에 참여하며, 성직자들의 말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 공포가 사라지기를 희망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미신은 사람들의 자발적 예속을 강화하게 됩다. 사람들은 이제 신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연 현상에서 신의 권능과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을 기울입니다. 여기에서 대중을 영속적으로 통제하고 희망을 부여하기 위한 종교 의례와 성직 제도가 구성됩니다.12)

그런데 이러한 미신은 폭정의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폭정의 버팀목, 그것이 유지되는 최고의 비밀은 사람들을 제어하는 공포와 희망의 메커니즘을 그럴듯한 이름으로 가려서 그들이 마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자신의 예속을 위해 싸우고, 권력자의 욕심을 위해 피와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영예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지 복종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 다양한 기질을 가지고 있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예속을 열망하기 때문에, 그들의 복종은 “하나의 동일한 종류의 의견”을 항상적으로 따르는 안정적인 복종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공포와 희망에 입각한 정념적인 복종이 됩니다. 따라서 대중은 결코 오래 만족하는 법이 없으며, 마치 신처럼 경배했던 정치가를, 어느 순간엔 헌신짝처럼 버리며 멸시하는 일도 종종 일어나게 됩니다.13) 여기에서 항상적인 대중의 복종을 위한 규율들이 만들어집니다. 양심과 신념의 자유를 가로막고, 수많은 교조로 개인의 판단을 철저히 지배하는 수많은 법과 제도들이 그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이런 식으로 편견을 부여하거나 시민의 자유로운 판단을 강제하는 정책은 대중의 자유와, 그것에 기반한 민주주의나 공화정과는 전적으로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14)

따라서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국가와 종교의 이러한 결탁을 끊어 놓는 것을 매우 급박한 과제로 제시합니다. <신학정치론>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정치체는 “각 시민에게 판단의 자유가 완전히 부여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신을 숭배할 수 있으며, 자유보다 더욱 소중하고 귀하게 평가되는 것이 없는 국가”입니다.15) 물론 이것은 이러한 국가가 하나의 ‘초월적 당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중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는 집합적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스피노자가 자유로운 양심과 이성에 입각한 성서연구였습니다. 왜냐하면 특히 17세기의 ‘기독교 네덜란드’에서 미신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대중을 항구적인 예속 상태에 머물게 만드는 것은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성서를 통해 정당화하는 성직자들의 여론몰이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는 성서 해석의 원리가 자연을 해석하는 원리와 달라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정치론>에서 우리는 성서의 고등비평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이 자연을 해석하는 방법과 다르지 않으며, 사실 그것과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성서가 누구에 의해 어떠한 상황에서 기록되었으며 어떤 의도로 쓰여지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다 다양한 판본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어떤 방식에 의해 정경으로 결정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또한 성서는 자연계 바깥의 어떤 초월적인 글이 아니며, 성서의 저자들(특히 예언자들)이 서술하는 하느님 상은 그들 각자의 역사적 환경과 기질 속에서 상상된 하느님 상이라고 말합니다.16) 성서 구절들의 불일치나, 각 권 사이의 차이점이나 서로 충돌하기까지 하는 내용들은 성서가 일관된 신학적 관점을 가진 한 권의 책이 아니며, 성서의 이야기들로부터 어떤 과학적이거나 자연적인 진리를 도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성서를 폐기해야 한다고, 공화국을 위하여 성서를 없애고 모든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이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신학정치론>의 저술 목적은 “철학할 자유는 경건함과 국가의 평화를 해치지 않으면서 승인된다.”17)는 것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즉, 스피노자는 상상력을 통해 구성된 종교가 대중과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통해 ‘경건’의 제자리를 찾아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그러한 성서연구를 통해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윤리적 원칙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성서의 저자들(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신에 대한 어떤 관념적 사변이나 형이상학을 전개하기 위해 성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대중으로 하여금 신에 대한 복종을 촉구하며, 신의 말씀을 참된 삶의 방식으로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했다고 말합니다.18) 따라서 그는 성서와 이성은 모두 신에 대한 참된 인식과 인간의 유대를 낳는 서로 다른 방법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만 성서는 대중의 종교적 상상계를 활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미움과 다툼,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유대로 나아가도록 만들 수 있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성서의 “참된 메세지”를 어떤 구체적인 신 표상과 이야기들로부터 도출하는지는 성서저자들만큼이나 성서 독자들(일반 대중들)역시 다양합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는 그것이 인간의 유대를 헤치고 누군가를 지배하는 담론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절대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다다릅니다.19)

이러한 원칙에 입각한 종교를 스피노자는 “보편종교universal faith”라고 부릅니다. 그가 말하는 “보편종교의 교의”는 기본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종교적 상상계로부터 많은 개념을 빌려온 것입니다.


1. 최고로 정의롭고 자비로우며, 참된 삶의 모범인 신이 존재한다. 2. 신은 오직 하나이다. 이러한 신념이 신에 대한 온전한 헌신, 존경, 사랑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3. 신은 어디에나 있으며, 만물은 그에게 공개되어 있다. 4. 신은 만물에 대해 최고의 권리와 통치권을 가진다. 5. 신의 숭배와 신에 대한 복종은 오로지 정의와 자비, 즉 이웃에 대한 사랑에만 있다. 6. 이러한 삶의 방식을 따름으로써 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사람들만 구원된다. 7. 신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한다. 그것을 믿으며, 그의 마음이 그로 인해 더욱 신에 대한 사랑으로 고무되는 자는, 그리스도를 성령에 의해 진정으로 알며,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있다. (<신학정치론> 14장)


이러한 ‘보편종교의 교의’는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합니다. 특히 6번과 7번 항목은 그가 미신으로 비판하는 종교의 교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보편종교’는 대중의 상상을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는 수단이지, 그가 <윤리학>에서 제시한 바 있는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 아닙니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어지는 논의에서 이 교의들을 해석하면서 여기에 사용된 개념들이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이 실제로 무엇인가, 즉 그는 불인가, 성령인가, 빛인가, 생각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신앙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신이 참된 삶의 모범인 이유가 무엇인가, 즉 신이 정의롭고 자비로운 기질을 가져서 그런가, 아니면 만물이 신을 통해 존재하고 활동하며 따라서 우리 역시 신을 통해 인식하고, 신을 통해 참되고, 정의롭고, 선한 것을 보기 때문에 그런가라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서 어떤 신념을 가지든 상관없다. […] 신이 본질에 있어서 편재한다고 믿든지, 아니면 힘에 있어서 편재한다고 믿든지, 신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만물을 지도한다고 믿든지, 신이 통치자로서 법을 정한다고 믿든지 아니면 그것들을 영원한 진리들이라고 가르친다고 믿든지, 사람들이 자유 의지에 의해서 신에게 복종한다고 믿든지 아니면 신의 뜻의 필연성에 의해서 신에게 복종한다고 믿든지, 선인의 보상과 악인의 처벌이 자연적이라고 믿든지 아니면 초자연적이라고 믿든지. 이와 비슷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취하는가는, 그러한 신념으로 인해 더욱 방자하게 죄를 짓게 되거나 신에 대한 복종이 방해를 받게 되지 않는다면, 신앙과 아무 상관이 없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적 교의들을 자기 자신의 이해에 맞추고, 그것들을 충분한 자신과 확신을 갖고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면 그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들을 스스로 해석할 의무를 가진다. […] 신앙은 진리가 아니라 경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오로지 그것이 고무하는 경건 때문에 경건하고 인간을 구제하며, […] 따라서 최선의 신앙은 반드시 최선의 논증을 보여주는 사람들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의 최선의 행위를 보여주는 사람들에 의해 나타난다.(<신학정치론> 14장, 강조는 필자)


즉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사실상 ‘보편종교’가 어떤 정체성으로 귀속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각각의 종교적 상상계와 실천이 대중들로 하여금 경건 -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 을 고취시키는 한 자유롭게 인정되는 정치체를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종교는 자유로운 삶을 함께 누리는 종교로, 그리고 더 이상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삶의 성찰로, 더 나아가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정치적 가능성을 지닌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정치론>의 후반부에서 스피노자는 두 종류의 정치체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종”의 주제를 강조한 이스라엘 신정에 대한 논의이며, 다른 하나는 ‘절대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입니다. 이스라엘 신정은 절대적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나 내란과 폭정이 끊임없이 악순환하는 형편없는 국가 상태보다는 나은 것으로 그려집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대중의 정념을 통제하기 위해 신에 대한 상상을 동원하여 강력한 법을 세웁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대중이 공포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본분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는 하느님에 대한 상상과 법을 따를 때 얻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상상이 강조되었으며, 이것을 위한 각종 의식과, 부의 분배, 지도권의 분립 등의 제도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 신정은 모세의 죽음 이후 몇 가지의 제도적 허점에 의해 쉽게 붕괴되고 맙니다. 신정은 대중으로 하여금 종교 이데올로기가 불러일으키는 정서에 의한 일치를 체험하도록 하지만, 그것을 자유로운 대중의 결합에 의한 정치체의 구성으로 끌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다른 방식의 정치체의 구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가능하다면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단일체로서 정권을 잡아서 모든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요구되며 어느 누구도 그와 대등한 사람에게 복종하도록 요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20) 스피노자는 이러한 공동체의 원리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며, 이러한 국가의 목적은 “자유”에 있다고 말합니다.21) 여기에서 종교는 이제 ‘복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더 이상 ‘규범’이 아니라 기쁨의 정서로 체험됩니다. 물론 1차적으로 <신학정치론>이 지향하는 현실 정치체는 네덜란드 공화정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논의에서 민주주의는 군주정이든, 귀족정이든, 공화정이든 어떤 정치적 형식을 한계지으며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중의 공통-되기로 나타납니다.22)

이러한 논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실정 종교의 상상계를 선용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각각의 종교적 상상계가 어떤 교의나 제의에 따라 수행되든, 그것을 민주주의 아래에 둠으로써 독단과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도의심과 경건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정치의 종교에 대한 우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됨으로써 오히려 서로를 민주주의를 향해 고양시키는 관계를 맺게 됩니다. 종교 이데올로기가 국가를 좌지우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그 국가의 시민이기도 한 교인들의 삶 역시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민주주의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보편종교’를 권장함으로써 시민들-교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성서를 연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스피노자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사실상 하나의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학정치론>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기보다는 암묵적으로 나타납니다만, 우리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며 실존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마주치는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곧 종교가 개별 상상계의 동일성을 넘어서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종교의 자유인 것입니다.  



3. “장소 없는 장소”로서의 포스트-기독교


서두에서 설명했듯이 한국교회에서 문제적인 것은 사실 내용보다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체성과 동일성에 기반한 독아론적 형식은 에반젤리컬이나 에큐메니컬을 가리지 않고 권위주의와 종교적 ․ 정치적 배제를 낳습니다. 최근 한국교회에서 일정한 주목을 받고 있는 공동체주의적 흐름 역시 이런 가능성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공동체주의는 쉽사리 교통공간으로서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가두는 독아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에반젤리컬과 에큐메니컬이라는 두 공동체, 혹은 그보다 많은 공동체들을 넘어, 현재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하나의 교통공간으로서의 ‘세계’ 그 자체입니다. 공동체의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들을 마주하는 공간, 그리고 그 마주침 속에서 자신 안에서도 결코 동일성으로 귀속될 수 없는 타자를 끄집어 내고, 그것을 소통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기독교가 화석화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이 ‘세계’, 혹은 제가 포스트-기독교라고 부르려 하는 그 장소는 그런 점에서 사실은 ‘장소 아닌 장소’이며, 모든 장소들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동체라는 장소의 논리로부터 벗어납니다. 어떤 이가 교리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그 내용만으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그가 세계성 속에 놓여 있는 한 그는 언제나 타자들과 마주치는 경험을 하게 되며/해야 하며 거기에서부터 그가 가진 ‘내용’들도 계속해서 다시 질문에 붙여지게 될 것입니다.

2008년의 촛불은 그 이전부터 조금씩 대두하고 있었던 포스트-기독교적 주체성이 가시화되는 한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대중의 민주주의가 정부의 권한과 정당성을 거리에서 직접 문제에 붙이는 ‘세계성’이 갑자기 분출하였을 때 거기에서 개별 기독교인들 역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촛불은 개별 공동체들 속에 놓여 있는 기독교인들을 갑자기 세계로 끌어내었고, 그 경험 속에서 많은 고민과 대화들이 오고 갔습니다. 비록 한국 교회 전체로 볼 때 소수라고는 하나, 이전의 에큐메니컬 운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 ‘촛불교회’ 같은 거리의 기독교적 실천들이나 ‘복음주의 클럽’같은 공론장에 참가하는 이들의 수적인 증가는 기존의 한국 기독교의 어떤 주체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포스트-기독교 주체성의 도래를 예감케 합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실천과 공론장의 등장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논리 속에서 성서와 자신, 세계를 바라보도록 하지 않고 그들을 세계 속으로 풀어 넣게 합니다. 그 안에서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성서와 신학을 다시 바라보고, 기존의 공동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희망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 포스트-기독교의 가능성 앞에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기존의 기독교에 계속해서 세계를 제시하는 일입니다. 교통공간으로서의 세계에서 논의되어야 할 의제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기존의 공동체로부터 탈-주체화하도록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양 교육입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자신의 교의를 가지고 신자를 ‘의식화’하는 것과 형식적으로 구별되는 공부입니다. 교양은 세계성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훈련하는 재-주체화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세계를 결정해버리는 ‘기독교 세계관’류의 학술운동이 아니라 성서와 세계, 자신과 타자를 마주치게 하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런 공부를 실제로 실험하고 또 포스트-기독교 교양에 대한 담론을 선도할 연구집단들이 탄탄하게 구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발은 미약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기독교 주체인 ‘그’는 여전히 장로교인이며, 감리교인이며, 개혁주의자이며, 선교단체 간사며, 강남대형교회 교인이며, 기독교 시민단체의 활동가이며, 진보적인 신학교에서 선배들한테 무시당하는 후배이며, 시골교회의 목회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세계’가 놓여 있습니다. 그 세계 속에서 그의 안에 있는 ‘세계’가 끊임없이 호출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로교인이며, 감리교인이며, …이지만 장로교인으로도, 감리교인으로도, …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통해 기독교 역시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이 장소 없는 장소’로서의 기독교의 도래를 저는 요란스럽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_김강기명(CAIROS 연구원)


-이 글은 <제 5회 심원청년신학포럼>(2010.1.29)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1) 가라타니 고진, <탐구 2>, 새물결, 186쪽


2) <탐구 2>, 189-190쪽


3) 가라타니 고진, 「세계종교에 대하여」, <언어와 비극>, 도서출판b, 242쪽


4) 가라타니 고진, <탐구 2>, 196쪽에서 재인용


5) <탐구 2>, 202-203쪽


6) <탐구 2>, 221쪽


7) 대표적으로는 <트랜스크리틱>과 <세계공화국으로>를 들 수 있다.


8)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서문


9) 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리 35 주석


10)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제3권 1호(2008) 참조;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상상(imaginatio)’이나 ‘상상하다(imaginari)’ 또는 ‘이미지(imago)’ 같은 용어들은 매우 체계적이고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불어의 imaginaire(상상계)에 해당하는 imaginarius라는 용어는 매우 적게 나타나며(<에티카>에서는 3번, <신학정치론>에서는 6번) 그 용례 역시 현대적 의미의 '상상계'와는 다르다. 그러나 진태원은 알튀세르를 따라 스피노자의 상상 이론이 데카르트에서처럼 심리학적 범주가 아니라 세계가 그것을 통해 사고되는 범주로 인식되는 하나의 ‘세계’로 나타나기에 ‘상상계’라는 명칭이 합당함을 지적한다.


11) 스피노자, <에티카>, 1부 부록


12) <신학정치론>, 서문


13) <신학정치론>, 서문


14) <신학정치론>, 서문


15) <신학정치론>, 서문


16) <신학정치론> 2장, “예언자가 쾌활한 기질의 사람인 경우에는, 승리, 평화 그리고 여타의 즐거운 사건들이 그에게 계시되었다. 예언자가 우울한 기질의 사람인 경우에는 전쟁, 학살, 그리고 모든 종류의 재난들이 그에게 계시되었다. […] 계시는 ‘상상의 유형’에 따라 달라졌다. 예언자가 교양 있는 사람인 경우에는 교양 있는 방식으로 신의 정신을 인식했다. 정연한 정신을 결여한 경우에는 무질서한 방식으로 신의 정신을 인식했다. […] 점성학을 믿었던 동방의 박사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은 동쪽에서 떠오른 별 하나를 상상함을 통해 계시되었다.”


17) <신학정치론>, 서문


18) <신학정치론> 13장, “성서는 오로지 아주 단순한 교의들만을 가르치고 오직 복종만을 고취시킨다 […] 그리고 신의 본성과 관련해서는 오로지 사람들이 일정한 행위 규범으로 모방할 수 있는 것들만을 가르친다. […] 하지만 보통의 신학자들은 그것들이 신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들의 자연적 빝에 의해 확신할 수 있는 구절들은 은유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자신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들은 그 무엇이든지 글자 뜻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성서는 일반 민중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배운 사람들만을 위해 쓰여졌음에 틀림없다.”


19) <신학정치론> 20장, “인용문”


20) <신학정치론>, 5장


21) <신학정치론> 20장, “인용문”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석사학위논문, 「스피노자의 ‘대중’ 개념의 민중신학적 함의」의 5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