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5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아바타, 그 새로운 종교경험에 관해
<아바타>! 역시나 대단하더군요. 줄거리야 이미 대충 들어 알고 있었고, 역시 예상한 대로 감동적인 해피엔딩이었지만 전혀 실망이 안 되더군요. 어차피 이 영화를 보러 간 것은 줄거리 때문이 아니라 4D 디지털의 테크놀로지를 경험하고 싶어서였으니까요. 누군가가 그랬다지요.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과학이라고. 저 역시 두 시간이 넘게 제 눈 앞에서 쉴 새 없이 펼쳐지는 놀라운 장면들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습니다. 너무나도 실감나는 영상과 사운드, 거기다가 기존 3D에 업그레이드된 4D 플럭스라고 해서 영상에 맞춰 의자가 움직이고 바람이 불어오고,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으니, 한 마디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이 영화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수많은 평론들이 쓰여 졌고, 앞으로도 계속 쓰여 질 것입니다. 영화 전문가도 아닌 제가 영화 자체에 관해 말을 보탤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제가 느낀 것과 그에 관련해서 다른 사람이 한 말 중에 제가 공감한 것들에 대해서만 들려드리겠습니다.
3D 안경을 쓰자, 곧 영화가 시작되었는데, 첫 장면에서는 주인공 제이크 설리가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면 역시 아바타에서 완전한 나비족으로 변신에 성공한 제이크가 눈을 뜨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아바타>는 지각 변화에 대한 영화고, 지각을 변화시키기 위한 선택에 관한 영화다”라는 카메론의 선언이 의미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장치라 생각되더군요. 판도라에 도착한 제이크와 지구의 용병들을 향해 교관은 말합니다. “너희들은 더이상 캔자스에 있는 게 아니야.”(You’re not in Kansas anymore) 이 말을 듣는 순간 화들짝 놀랐지요. 그 늦은 시간에 그것도 일주일 전에 예약하고 며칠 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자랑을 다 하고 와서 영화관 좌석에 앉아 있는 저같은 얼간이를 향해 감독이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3D 안경을 끼고 의자가 들썩거릴 때마다 ‘와’하는 탄성을 지르던 극장 안의 모든 사람들, 그 중에 제가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던 그 시간만큼은 우린 더 이상 지구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판도라에 있었죠!
판도라 위성의 풍경 중 저를 단연 압도한 것은 공중에 떠 있는 할렐루야 산맥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거대한 자기장이 산을 공중에서 지탱하는 일종의 울타리 역할을 해서 산이 떠다닐 수 있다는 ‘그럴듯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런 설명의 과학적 정당성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상상도 못해본 장면이 내 눈 앞에 현실로 펼쳐졌다는 사실이지요. 산맥을 처음 접하는 주인공들에게 헬리콥터 조종사는 말합니다. “다들 자기 표정을 좀 봐야 해.”(You should see your faces) 어느 평론가도 지적했듯이, 제가 봐도 이 대사는 관객을 향한 감독의 조크 같았습니다. “놀랍지? 내가 보여주는 멋진 신세계가 놀라서 다들 입이 다물어지지 않지? 근데,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정말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오니,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역시 판도라가 아니더군요. 영화 속에서 주인공 제이크는 아바타를 통한 자신의 경험을 ‘하늘의 사람들’ 곧 우리 지구인들에게 끝내 공감시켜주지 못한 채, 신비롭기 짝이 없는 판도라의 여신 ‘에이와님’의 힘을 빌려 혼자 판도라의 세계로 영원히 넘어가버렸습니다. 얌체같이 말입니다. (“나도 좀 데려가주지!”) 남식 형이 이 영화 보고나면 사람들이 우울해 한다던데, 저도 보고나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말을 두고 평론가 송경원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인간과 나비족의 하이브리드 기술인 아바타가 제이크의 지각을 변화시켰는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를 함께 그곳으로 데려가기엔 충분치 않았다. 완벽한 리얼리티를 추구했던 이 영화는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올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나는 영화를 봅니다’라는 묵직한 현실의 몸뚱이만을 남긴다.”(「재현하지만 체현되진 않는다」, ≪씨네21≫737호). 요점은 아무리 진짜 같아도 영화일 뿐이라는 자각만이 우리에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허탈한 자각만이 남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4D보다 진보한 기술이 나온다면 이 영화를 기꺼이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조차도 아이맥스에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을 정도이니까요. 그러니 정말 중요한 것은 체험 이후의 자각 이전에 이 영화를 체험할 당시에 겪는 그 감정과 흥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중간 중간에 몇 차례 3D 안경을 벗고 제 주위의 사람들을 잠시 관찰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낀 채 고개를 들고 화면을 뚫어지라 응시하던, 그러면서 뇌를 그대로 터치하는 영화의 이미지로 인해 몸을 주체하지 못하던 저를 포함한 극장 안의 그 많은 사람들. 거기에서 저는 사람들이 바로 이 순간에 구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원이 뭐 특별한 것이겠습니까. 지리멸렬한 일상으로부터 초월하여 유토피아적 공간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 그럼으로써 이 답답한 현실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게 해주는 것, 그게 바로 구원 아닐까요. 여기서부터 저는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최고의 영화 평론가라 할 수 있는 정성일은 <아바타>가 전면에 깔고 있는 헐리우드의 기술결정주의가 더 이상 미학적 시선이 아닌 기술에 바탕을 둔 오감의 활용으로서 영화를 본격적으로 다시 접근하게 만들었고, 바로 그 지점에서 종래의 모든 영화비평을 무력화시켜버렸다고 말합니다. “예술적 경험의 기쁨을 기술적 발명의 놀라움과 맞바꿔칠 때 영화관객은 감상을 포기하고 카메라의 자리에 가게 될 것이다.”(「당신이 즐긴 것은 무엇입니까?」, ≪씨네21≫738호). 정성일이 <아바타> 앞에서 영화 혹은 영화 관람 행위의 의미를 다시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저는 <아바타> 앞에서 종교와 테크놀로지(기술), 혹은 구원과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대해 새삼스레 다시 성찰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평소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종교를 다루는 논의에 많은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종교가 ‘초월성/내재성’이란 고유의 코드를 통해 환경의 ‘우발성’을 관리하는 의사소통시스템이라고 보는 니클라스 루만의 해석에 상당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루만에 따르면, 테크놀로지 역시 ‘초월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기술을 동원해 도구를 만든 것은 인간의 자연적 한계들을 초월해 환경의 우발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적인 증거에 의하면 다양한 기능을 가진 섬세한 도구들의 출현은 장례문화와 동굴벽화의 출현과 비슷한 시점이라고 합니다. 인류역사에서 기술과 종교는 함께 발전한 것이죠.
미국의 역사학자 데이빗 노블(David Noble)이란 사람도 그의 저서 『테크놀로지의 종교』(The Religion of Technology, 1999)에서 테크놀로지 발달의 배후에는 초월성과 종교성이 숨어 있음을 다양한 사료들의 분석을 통해 설득력 있게 논증한 바 있습니다. 그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의 원동력을 근대의 과학적 에토스가 아니라 중세의 신학적 에토스에서 찾습니다. 고대의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기술을 인간 죄성의 표출로 본 반면, 에리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0~877)라고 하는 중세 초반의 사상가는 기술을 ‘신의 형상’의 표출이며 구원의 한 방편으로 이해했습니다. 노블은 현대 서구 생명공학 및 인공지능의 발전사 배후에는 완전함의 추구 혹은 영생의 추구라고 하는 기독교적 에토스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애초부터 기술과 종교는 초월을 향한 열망을 공유하고 있는 인류역사의 보편적 문화현상입니다.
한편, 정성일은 <아바타>를 지지하면서 ‘혁명이 찾아왔다’고 열광하는 그 많은 비평담론 중에서 사실상 혁명의 핵심인 3D 기술과 영화 관람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담은 글은 정작 거의 볼 수가 없었다고 개탄합니다. 신학도인 제 경우에는 <아바타>의 서사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이교적 색채나 자연숭배적 경향, 물활론적 신학의 뉘앙스에 대해 광분하고 있는 개신교 및 가톨릭의 신학자들을 보면서 오히려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바타>가 (영화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공히) 문제적인 것은 사실상 그것이 두르고 있는 서사가 아니라, 그 서사를 실감나게 구현하는 3D 기술 및 그것이 제공하는 새로운 현실 지각의 체험 그 자체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술의 힘이 기성 종교가 제공하던 구원 체험보다 더욱 생생한 구원 체험을 선사한다는 것이 진짜 중요한 문제의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아바타> 체험의 종교적 의미를 두고 성찰하는 것 역시 우리 시대 신학의 새로운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험의 진위나 의미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경험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성일이 영화비평이란 영화를 견딜 수 없는 관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듯이, 저 역시 신학은 종교를 견딜 수 없는 신앙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신학의 역할은 종교와 그 종교를 믿는 신자 사이에 개입하여 신앙 행위의 조건과 목적에 대한 집요한 성찰과 사유를 자극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화 <아바타>를 관람하는 행위가 종교 의례와 동일한 경험 구조, 즉 초월성의 지각을 제공하고 있다면 마땅히 그에 맞게 기술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다시 고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아타바에서 아마존을 거쳐 다시 그곳으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판도라 행성의 토착민 나비는 미국의 북미 인디언을 소재로 했다고 나옵니다. 판도라의 원주민들은 키가 3m에 달하며 뾰족한 귀, 꼬리와 푸른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동족 및 모든 생명체와 유대관계를 맺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이들은 진보된 과학보다 더 위대한 자연의 힘을 믿는다는 점에서 그간 헐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재현되어온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비슷해 보입니다. 어느 평론가는 결정적으로 행성 판도라에서 살아가는 나비(Na’vi)족은 나바호(Navaho) 인디언들에 대한 은유로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나비족이 신성시하는 거대 나무가 자라는 그들의 터전은 마치 나바호 인디언들의 숭고한 성지 ‘모뉴먼트 밸리’를 연상시킨다고 합니다. 공중에 뜬 채 끊임없이 이동하는 할렐루야 산맥은 영락없이 깎아지른 절벽과 기암괴석의 진기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모뉴먼트 밸리의 변형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나바호 자치구역 내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영화에서 강제 이주 위협에 놓인 나비족의 운명과 닮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인디언으로 불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에 익숙한 미국 관객들이나 혹은 헐리우드 서부극에 정통한 영화평론가들이나 나비족이 나바호 인디언이라고 생각하지 일반적인 한국 관객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3아’라는 신조어가 유행하는 것을 보건대, 오히려 한국 관객들은 나비족을 보면서 아마존의 원주민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아바타>를 보면서 <아마존의 눈물>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엊그제 금요일 밤에 심원청년신학포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침 MBC에서 <아마존의 눈물>을 방송하고 있어 너무 잘 됐다 싶더군요. <아바타>를 보고 나서 <아마존의 눈물>이 다시 보고 싶어졌거든요.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DMB로 방송을 시청했습니다. 보다 보니 점점 <아바타>의 나비족들이 오버랩되더군요.
금요일에 방송한 제3부 ‘불타는 아마존'도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저는 프롤로그와 1부만 봤었는데, 2부도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요즘 이 프로그램의 기대 이상의 성공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더군요. 대체로 세 가지의 요인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시청자들이 종래의 연예인 신변잡기로 일관된 예능프로그램에 지긋지긋해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지점을 잘 파고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HD방송에 걸맞는 질높은 영상과 가감없이 보여주는 원주민의 삶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보다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아바타> 돌풍, 그리고 4대강 논란 속 달콤한 독약인 환경 파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더군요. 제가 봐도 일단 제작진이 죽을 고생하면서 공들여 촬영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고, 또 이번 시리즈를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조에족’ 같이 흥미로운 원시부족의 모습도 볼 수 있고, 나레이션을 맡은 비담 김남길의 공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암튼 그렇게 방송을 보다 보니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이 되었는데, <아마존의 눈물>이 끝나고 이어서 MBC에서는 <세계와 나 W>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더군요. 이 프로그램은 국제현장의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시사프로그램인데요. 저도 가끔 DMB로 재밌게 보곤 했습니다. 마침 이날은 ‘재난과 인간’이라는 주제로 특집방송을 했는데요. 바로 아이티를 취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이티에 관한 다큐를 보면서 문득 제가 처음 ‘3아’를 들었을 때 떠올렸던 ‘3아’가 남들처럼 ‘아바타·아마존·아이폰’이 아니라 ‘아바타·아마존·아이티’였다는 사실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비로소 지난 한 주 동안 <아바타>에 정신을 놓고 무엇을 잊어버렸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세계와 나 W>가 보여주는 대지진 이후 아이티의 참상을 영상으로 목격하면서 <아바타>를 봤을 때 경험했던 그 경이로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아바타>를 보고 나서도 한동안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것을 느꼈지만, 그것은 아이티의 참상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영화 <아바타> 앞에서는 영화비평도 신학비평도 무력화되었지만, 그것이 비평 자체의 불가능함을 초래하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영화비평가들이건 신학자들이건(정혁현, 김경재 등의) 비평의 대상을 3D 기술 효과로 잡지 않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을 뿐, 정성일을 비롯한 소수의 비평가들이 뒤늦게나마 그것을 중심으로 영화의 미래와 본질에 관해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리고 분명 대중문화에 관심있는 종교학도들 중에는 저처럼 이 영화의 관람행위 속에서 체현되는 종교적 지각의 차원을 주목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바타> 앞에서 영화비평이나 신학담론의 무력화를 넘어, 그 존재기반의 정당성이 무너질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저 자신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티의 참상 앞에서는 이제 신학담론이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한다면 먼저 회개하라
아이티의 참상을 찬찬히 대면하기 시작했을 때, 특히 <세계와 나 W>에서 2008년 방송분에서 보여준 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면서도 미국산 쌀을 수입해서 먹어야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신세였던 그들이, 그마저도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살 수도 없고 달리 먹을 것도 마땅히 없어 ‘흙’으로 빚은 쿠키(일명 ‘진흙쿠키’)로 근근이 주린 배를 채우며 살아가던 아이티의 그 절대 다수 빈민들이, 매년 여름이면 허리케인으로 인해 이재민이 되어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던 그 가엾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유례없는 대지진으로 인해 그나마 겨우 남아 있던 집마저 다 무너져 내리고 가족과 자식과 이웃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슬픔에 절규하는 모습 앞에서 저는 신학도로서, 아니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과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을 사유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갖고 있던 알량한 신학담론의 정당성과 존재근거가 완전히 흔들리고 무너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아이티의 대지진이 저의 신학적 사유의 지반마저 허무는 충격을 ‘뒤늦게’ 경험했습니다.
방송 중에 이틀간 아무 것도 먹지 못 했다는 육남매의 엄마 카올이란 여성이 등장했습니다. 그녀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세 살배기 막내와 함께 옆집의 허름한 천막에 얹혀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제작진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티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의 가호로 전 살아 있지만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당신들은 겪지 않는다니 정말 기뻐요.” 자신은 죽음의 문턱에 있으면서도 제작진을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제작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녀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자기 자녀들과 동생들을 향해 카메라에다 대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얘들아, 잘 지내고 있니? 잘 지내고 있지? 건강하지? 신이 함께 하셔서 난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 한 가지 걱정은 살 집이 없다는 거야.”
살기위해 흙이라도 먹어야 했던 사람들. 하지만 대지진 후, 흙조차 먹을 수 없는 아이티 사람들의 눈물을 보고 있자니 저는 이번 주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그저 우리 교인들과 함께 한 시간 정도라도 아이티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침묵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결국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기 위해 아바타에서 시작하여 아마존을 거쳐, 아이티까지 여러분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제가 겪은 생각의 여정이 결국 아이티에 이르렀을 때, 저는 고통의 현실 앞에서 신학이 구원에 관해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모험인지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빌라도의 학살로 인해 발생한 억울한 정치적 희생을 두고 사람들에게 먼저 경고합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들에겐 죄가 없다. 그러나 너희도 빌라도의 그와 같은 만행을 계속 기억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똑같은 꼴을 당하고 말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무자비한 심판을 앞두고 무조건적인 회개를 요구하는 김홍도 같은 인간들이 전하는 공갈협박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외려 이는 명백히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정치적·사회적 학살에 대한 저항의 행동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죽은 열여덟 사람에 애도하고 그 가족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너희 역시도 똑같이 희생당하고, 나아가 애도를 받지 못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정치적 희생이 되었건, 자연재해로 인한 희생이 되었건, 피해자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지속적으로 저항과 회복의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너희도 함께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그런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죽음들에 마주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회개하는 것, 즉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그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동참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그들과 함께 우리가 다시 살아감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하고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μετανοεω, 보통 ‘회개하다’로 번역되는 말이지만, 원래는 ‘함께, 후에, 뒤에’ 등의 다양한 뜻을 갖는 μετα라고 하는 접속사와 ‘이해하다, 생각하다, 주의하다, 숙고하다, 검토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νοέο의 합성어입니다. 결국 합성어 그대로 직역하면 메타노에오 곧 회개(하다)라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생각하다’ 혹은 ‘함께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숙고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도저히 답변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혹은 우리는 이 비극적 사태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예수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그 상황에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곧 ‘함께 생각하기’를 명령한 것입다. 회개는 더불어 함께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적어도 우리의 모든 언어가 무력화되고 불가능해지는 아이티 대지진과 같은 사건에 마주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 도달하면서, 마침내 저의 설교 준비는 끝이 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아바타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마존을 거쳐 아이티까지 왔지만, 결국 저는 아이티라고 하는 도저히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주하게 되었고, 그럼에도 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굳이 제가 말을 해야 한다면 그 말은 침묵의 회개여야 한다는 예수님의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회개 이후에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를 또다시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_정용택(CAIROS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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