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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사이-be-評

‘이끼’, 구원의 진실에 관해 참으로 난감한 질문을 던지다…[정용택]


윤태호의 《이끼》, 강
우석의 〈이끼〉


2007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 2008년 부천만화상 일반만화상 수상작, 하지만 이런 이력만으로는 이 작품을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 자, 다시 설명한다. 2008년 8월부터 2009년 7월에 완결되기까지 포털사이트 Daum에서 총 80회가 연재되는 동안, 한국 웹툰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듯, 전체 조회수가 무려 3,600만건을 기록한 웹툰. 게다가 작품이 절정으로 접어들고 있을 무렵, 갑작스럽게 일어난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 사건과 맞물려서 무수한 정치적 해석과 논쟁을 낳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월요일과 수요일로 예정된 업데이트가 몇 시간이라도 늦어지면 그야말로 독자게시판은 난리가 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신드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 바로 만화‘작가’(그는 작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윤태호의 대표작 《이끼》를 말하는 것이다.


《이끼》의 매니아층이 형성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서, 작품이 영화화 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감독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네티즌들은 기대와 설렘 가운데 저마다 스릴러 장르에 일가견이 있는 내로라하는 감독들을 영화 〈이끼〉의 연출자로 추천했다. 그러나 결국 ‘강우석’ 감독이 연출을 맡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대는 곧장 우려와 걱정으로 바뀌었다. 강우석의 전작들로 비추어 보건대, 그리고 원작 《이끼》가 갖고 있는 그 견고한 서사세계와 인간과 사회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예리한 주제의식으로 보건대, 윤태호와 강우석의 만남은 결코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미 기대보다는 불길한 예감을 더 자아내고 있었던 두 사람의 조합은 필연적으로 <이끼>를 2010년 개봉작 중 가장 베일에 싸인 의혹의 프로젝트로 거론되게 만들었다. 지난 6월29일, 영화 <이끼>가 언론에 최초 공개되었고, 이후 몇 차례의 시사회를 거치면서, 작품을 둘러싼 평가의 논란은 더욱 분분해져갔다. 물론 개봉3일만에 관객수 50만명을 돌파했다는 사실은 원작과 별도로 영화는 그 자체로 꽤 재밌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그러나 언제나 비평에 있어 문제는 ‘재미’가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임을 잊지 말자). 

 

이것은 류목형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작 《이끼》가 담고 있었던 복수와 구원의 강렬한 충돌, 선인과 악인의 애매모호한 경계, 인간의 욕망과 이상의 한계에 대한 진지한 물음들이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원작과는 다른 결말을 의도하는 과정에서 이내 그 무게와 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원작에서는 애초부터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사실인, 류해국을 마을로 불러들인 이가 누구이며, 기도원 사람들을 살해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굳이 다른 제3의 인물과 관련된 미스테리로 가져가면서, 결국 그로인해 지금까지의 견고했던 서사 전체가 일순간에 붕괴되는 패착을 낳고 만 것이다. 원작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원작을 뛰어넘고자 했던 혹은 원작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강우석 감독의 그 의도는 충분히 존중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불필요한 의혹만 관객들에게 던져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걸 가리켜 완벽한 사족(蛇足)이라고 해야지 않을까?


예컨대, 만화 《이끼》는 류목형이란 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이야기를 있게 한 인물로서 작품 전체를 아우르고 있지만, 영화 〈이끼〉는 류목형 대신 다른 인물이 서사의 키를 쥐고 있는 것으로 처리함으로써, 원작과는 다른 결말을 이끌어내려고 시도한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이 원작에서부터 영화로 일관되게 이어지는 ‘이끼’의 서사를 결정적으로 붕괴시켜버린 패착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원작에서나 영화에서나 천용덕(정재영)은 외딴 마을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마치 그곳에서 살아있는 신처럼 군림하며 모든 자신의 신민을 통치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왕국의 “시작과 끝”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다닌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거듭 인정하는 것처럼, 그 “시작과 끝을 존재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류목형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바로 이 류목형(허준호)을 사실상 ‘맥거핀’으로 만들어버렸다. 주지하다시피 맥거핀(MacGuffin)이란 스릴러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으로부터 유래한 용어로서,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위장해서 관객의 주의를 끄는 일종의 트릭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단지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독적으론 어떠한 가치도 없는 공허한 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관객들의 입장에선 결국 이 영화에서 류목형이란 맥거핀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울 것이다(그래서 허준호가 ‘특별출연’으로 소개되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원작의 류목형은 그렇지 않다. 그는 단순히 서사의 맥거핀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바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끼가 무엇인가? 이끼는 최초로 육상생활에 적응한 식물이자, 높은 자외선을 비롯한 험난한 우주공간에서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이다. 실제로 이끼는 극단적인 환경을 좋아하고 지구에서도 가장 험한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습한 바위 틈에 몸을 숨기고, 숱한 비바람을 견디며 꽃을 피우거나, 우거진 그늘을 자랑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납작 엎드려 버텨온 생명체가 이끼인 것이다. 원작 《이끼》는 이런 이끼와 같은 한 인간, 곧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끝내는 모든 것을 내던지는 몰락을 기꺼이 선택함으로써 폭력과 희생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했던 류목형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자기 아들 류해국이 맞닥뜨린 모든 사건의 부재하는 원인이자, 궁극적인 해결자이며, 작가가 이야기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온전히 체현한 존재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 진실을 어찌할 것인가?

월남전에서 겪은 살인의 죄책과 상흔을 씻어 구원의 길을 찾고자 했던 류목형은 기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점점 신(神)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원 대신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길을 모색한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그 길을 가기로 했던 기도원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한 후, 용서 대신 잔혹한 심판을 선택한다. 여기서 그는 더 이상 일반적인 종교적 선인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심판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천용덕이라고 하는 자신의 분신을, 즉 악마적인 분신이 태어나는 계기를 제공했고, 다시 자신이 만든 그 악마를 제거하기 위해 칼을 들었다가 결국 남은 모든 것마저 빼앗기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천용덕에 의해 범죄의 왕국으로 변모해가는 것을 전혀 제지하지 못했고, 과거 살인 경력으로 천용덕 손에 이끌려 자신에게 인도돼 참회의 삶을 살고자 했던 전석만과 하성규가 욕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본연의 악인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막아내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구원해낸 영지가 천용덕과 그 무리들로부터 철저히 유린당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듯 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최후의 행위를 기획한다. 마치 예수가 자신을 배신한 지지자들의 죗값을 대신 치르는 것을 넘어, 보다 본질적으론 죄와 벌과 보상의 악순환 자체를 끊어버리는 희생을 감내한 것처럼, 류목형 또한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죽음을 통해 아들인 류해국을 마을에 불러들임으로써, 천용덕의 왕국을 파괴할 수 있는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발생시킨 것이다.


만화와 영화를 포괄하는 ‘이끼'의 모든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보면 신이 철저히 부재하는 가운데 인간의 역사(役事)로만 이루어지는 구원의 서사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성서의 내러티브만으로는 더 이상 구원에 대한 보다 현실적 사유가 어려워진 시대에, ‘이끼'의 내러티브는 구원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첨예한 질문을 우리에게 제기한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운 신학적 텍스트의 출현으로 생각된다.


“니는 신이 될라 캤나? 내는 인간이 될라 캤다!” 영화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듯이, 천용덕이 류목형에게 뱉었던 승리의 외침이자 조롱이다. 신이 된 예수의 길을 따라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려고 했던 류목형과, 그런 류목형을 단지 왕국의 원활한 통치를 위한 ‘종교’적 알리바이 정도로 이용하면서, 한편으론 욕망을 모두 충족하는 인간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했던 천용덕. 한 사람의 길이 철저한 몰락과 포기의 길이었다면, 다른 한 사람의 길은 끝없는 성공과 소유의 길이었다. 전자의 길이 신의 길이라면, 후자의 길은 인간의 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 고전비극의 오디이푸스나 복음서의 예수처럼 류목형은 기꺼이 자신을 몰락시키는 실패를 통해서 마침내 목표의 실현에 도달한 인물이다. 그는 천용덕에게 완전히 패배하는 쪽을 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론 그를 이길 수 있게 된다.


구원을 갈망했던 류목형의 행위가 감행되고 좌절되는 틈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질문이 있다면 바로 그것은 신앙의 진실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류목형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 진실을 어찌할 것인가? 나는 신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길을 따를 것인가? 영화의 관람 여부와 관계없이 원작 《이끼》를 따로 한 번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 그래야 저 난감한 질문과 보다 확실히 대면할 수 있을 테니까._정용택(CAIROS 연구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