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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갱그리

자기 계발을 넘어 만남의 계발(啓發)로 춤 추다


-그래픽노블 <폴리나> 평론




아파도 절대 내색하지마.”


보기만 해도 마음 따가운 말로 <폴리나> 장이 시작된다. 유명 발레 아카데미의 입학 시험을 보러 가는 안에서 어머니가 딸에게 건넨 말이다. 딸은 어머니의 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눈엔  어떤 불만도, 의문도 없다. 소녀는 그저 골똘히 밖을 내다본다.


소녀의 이름은 폴리나. 아카데미의 선생인 보진스키는 차갑고 냉정한 지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언행에 상처 받은 친구들이 온갖 불평 불만을 쏟아낼 때라도 폴리나는 아무 하지 않는다. 묵묵이 지도에 임하는 폴리나라고해서 스트레스가 없었던 아니었다. 그러나 보진스키는 폴리나의 몸으로 표출되는 작은 긴장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다른 동급생보다 일찍 보진스키의 지도를 받게 폴리나가 부족한 수면 시간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연습해야 하는 스트레스로 몸이 뻣뻣해질 때면 보진스키는 놓치지 않고 엄하게 꾸짖는다.


동작이 가벼워야지. 힘들어 보이면 . 힘들어 <보이지 않는> 중요한 거야.”

무용수인 폴리나에게 춤은 소통 가능한 하나의 언어였다. 보진스키는 사실을 매우 알고 있었다. 보진스키가 폴리나에게 감정을 통제하라고 말했던 , 사실 몸짓으로 전하는 의사 소통 과정에 다른 잡음이 개재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옳음'에도 불구하고, 보진스키의 강습은 폴리나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에게 폭력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춤이재미'이거나호기심' 있었지만 춤에 대한 다른 시선들을 보진스키는 한심한 것으로 일축해버렸던 것이다.


춤에 대한 보진스키의 대답은 보진스키만의 것이어야 했다. 춤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발레단 선생의 신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연인이었던 아드리안이 꿈꾸는 역시 아드리안이 지향하던 것이었지 그게 폴리나의 대답이었던 아니다. 그러므로 아드리안의 꿈을 쫓아 따라간 무대는 당연히 폴리나의 대답이 없었다. 따라서 아드리안과 헤어져 폴리나가 베를린으로 갔을 , 그건 누구의 대답도 이식하지 않은 그녀 자신만의의견' 찾는 행로였다. <폴리나>에서 성장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했다.


성장의 출발은 폴리나였지만, 성장은 폴리나 혼자 이룰 있는 아니었다. 보진스키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았더라면 성장은 끝내 미완이었다. 시대 유행하는 자기계발 담론의 멘토들은 언제나 자신을 스스로 조력자로 내세워 다른 이들의 성장을 돕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기준으로 내세워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종용한다. 멘티로 하여금 자신의 태도를 수정하게 함으로써성장' 이룩하는 형태다. 이러한 방식에서는 최종적으로 조력자와 주체가 같은 방식으로 같은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끔 나란히 셈이다. 그러나 <폴리나> 오히려 조력자와 주체가 마주보는 방식을 택한다. 성장에서 자아와 세상의 관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는 조력자와 주체로 만난 스승과 제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서로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지가 중심 테마다. 바로 관계의 재정립을 통해 자아와 세상의 관계도 함께 변화한다. 서로에 맞추어 각자의 시선과 방향을 수정하며 다시금 접점을 찾는 -그러므로  <폴리나> 성장에서 조력자는 그저 가르치고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것이었다.


<폴리나> 보진스키가 보내 비디오를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비디오에는 보진스키에게 지도 받는 폴리나의 모습이 촬영되어 있다. 비디오는 보진스키가 폴리나에게 먼저 내민 수줍은 평화의 손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제자에게 스승으로서의 조언을 부드럽게 전달하면서, 그녀에 대한 애정을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면은 작품 후반부에 나오는 보진스키와 폴리나의 왈츠 신과 더불어 조용히  익어가던 사제 간의 관계가 드디어 만개했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scene)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와는 다르게, 장면은 <폴리나> 다시 읽는 독자에게 <폴리나> 새로 읽을 있는 길을 터준다. <폴리나> 초독은 사제지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나지만,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가 다시 <폴리나> 열었을 , 거기엔 이미 세계적인 댄서로 도약한 폴리나가 학생 시절 자신의 영상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 모습이 숨어있다. 그러므로 새로 펼친 장에서부터는 이제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다. 폴리나가 비디오를 보며 떠올린, 현재의 폴리나와 지난 날의 폴리나의 재회 말이다.


누구나 다이어리를 써보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책상 켠에 쌓아두기 마련인데, 어느 날인가 지난 날의 수첩이 문득 눈에 띄일 때가 있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장을 넘기다보면, 어릴 적의' 타인처럼 생소해지곤 한다. 내가 책을 읽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선 인용구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으로 글을 옮겨적었는 궁금해지고, 귀퉁이에 적어 음악을 다시 찾아 들을 무슨 기분으로 음악을 들었을 상상해본다. 수첩을 넘기며 간혹 발견하는 감성들은 때때로 너무 깊거나 너무 얕아서어린 시절 나라기보다는 지금과는다른 시절 나로서 다가오는 같다.


<폴리나> 마지막 장면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폴리나가 폴리나를 새로이 만나게 해준다. 독자가 <폴리나> 다시 읽었을 , 폴리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 춤을 춘다. 폴리나의 깊은 눈을 알고 있는 독자들은 다시 소녀가 밖으로 던지는 눈길을 주의 깊게 따라간다. <폴리나> 그래픽노블로 창작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폴리나> 대사를 상당 부분 절제하고, 굵은 일러스트로 그림을 매우 깊이있게 전달한다. 그리하여 폴리나는 작품 안에서 단순히 말풍선 안에 씌여진 텍스트로만 말하지 않는다. 폴리나에게 대사가 할당되지 않은 상태여도 얼굴 위에 그려진 섬세한 표정들이나 선들을 통해 폴리나의 발화가 묘사된다. 이건 그래픽노블로서 <폴리나> 갖는 특징적 요소로, 특히 <폴리나> 시각적 요소에 무게를 보다 깊게 싣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폴리나> 재독할 , 이번에는 대사가 아니라 그림을 통하여 보다 다른 이야기를 접할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한에서, 재독의 순간에 보진스키와 폴리나가 하는 말들은 다른 맥락으로 재구성된다. 여기에선 그저 고집만 부리는 같던 보진스키의 말이 듣는 없이 떠도는 외로운 짝사랑처럼 느껴진다. 또한 폴리나가 가끔 마주치는' 대한 경구들은 비록 그것들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진 않더라도, 순간순간의 상황 속에 폴리나가 무언가를 선택하게하는 기제로서 빠르게 지나쳐 간다. 최대한 절제된 폴리나의 대사와 표정은 보진스키와의 관계에서 폴리나가 견지하는 수동성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비디오를 통해 다시금 옛날의 자신을 재회하는 폴리나의 삶의 속도와 재현 방식에 맞추어 독자가 책을 재독하는 같은 환상을 자아내는 것이다.


폴리나가 베를린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 시점과, 친구들과 함께 연극 공연을 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댄서가 시점- <폴리나>에는 사이의 기간이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다. 단절은 폴리나가 자기 자신을 재회하는 것과 매우 중요한 연관성을 갖는다. <폴리나> 바라본 성장은 연속하는 관계에서 가능한 것이며 실상 그녀 자신은 연속하지 않는 무언가다. 연속의 의미를 갖는성장 보진스키와 폴리나의 관계를 읽는 키워드라면, <폴리나> 작품 중간중간에 삽입된 절단된 시간들은 모든 상황에 연속적이지 않고, 오히려 불연속한 폴리나 자신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면적 효과들은 직선적 시간관에서는 결코 마주칠 없는 지난 삶과의 동등한 만남을 주선한다. 세계적인 댄서가 되었다고 해서 폴리나가 결코 이전의 삶에 비해 우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재회의 장에서 폴리나는 그저 과거의 혼란스럽고 나약했던, 지금보다 열위의' 아니라 다른 시공간에 있었던 삶을 겸손하게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서의 성장은 현재의 , 본래의 , 과거의 나를 모두 부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의 '' 어떤 방식으로든 고쳐 앉아야 하는 자리로 묘사된다. 그러나 <폴리나> 이와는 반대의 방식으로 성장을 말한다. 점과 사이에 선을 긋는다면, 점들은 시간으로 분리된 ''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 나여야 한다. 성장은 바로 선에서만 존재한다. '' 오롯이 점과 점으로 만나야 한다. 삶은 언제나 신기루 같아서, 시간을 길게 늘어뜨려 앞을 향해서만 걷게 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을 숨겨 놓는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모든 시간에 같은 ''이지 않다. '' 어떤 방식으로든 조우하며 이해해야 친구이지 폐기의 대상이 아니다. 자기계발 담론이 말하듯 언제나 '' 후자에 머물러 있다면, 끝내 우리는 삶의 순간도 스스로에게 수용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폴리나가 은은한 침묵으로 건네는 말은 이런 것이다. 다른 이와 함께 성장할 , 그리고 어느 때의라도, 어떤 모습이더라도 자신을 끝내 사랑할 . 너무나 오래된 정식이지만 한숨 쉬고, 금세 잊고 마는. 그러나 타인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나를 있게 하는 하나의 진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