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을 둘러싼 현대정치철학의 고민들-아감벤, 랑시에르, 발리바르의 인권론을 중심으로 -2
이 사람이 아감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감벤은 한 국가의 최고 권력, 즉 주권권력이 근본적으로 국가가 보장하는 권리로부터 시민을 추방할 수 있는 권리에 의해 정초되어있다고 파악한다.2) 그에 따르면 주권 권력이란 합법적으로 법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력, 다시 말해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권력이다. 법의 중지로서 예외상태가 의미하는 것은 법이 보장하는 시민의 권리가 중지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권리, 법을 법에 의해 중지시킬 수 있는 권리가 주권권력을 규정하는 최종심급이다. 법을 수립하거나 법을 집행하는 권력은 이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이다. 이는 주권 권력이 시민의 삶을 아무런 권리도 보유하지 못한 그저 생물학적으로 생존하기만 하는 삶, 즉 헐벗은 삶(bare life)으로 만들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감벤은 근대에 이르러 헐벗은 삶, 다시 말해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결정하는 권력으로서 주권권력의 성격이 가장 명백해졌다고 주장하며, 그런 의미에서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camp)야 말로 근대의 노모스가 발생한 장소였다고 말한다. 주권권력에 대한 아감벤의 이러한 이해는 현재 합의라는 정당성의 절차를 통해 대중을 권리로부터 배제하는 신자유주의체제의 권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하겠다.
오늘날 인권은 바로 이러한 배제와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근거로서 논의된다. 인간은 그의 국적, 성별, 연령, 종교, 신념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엄하며 그 존엄성은 결코 침범될 수 없다는 것이 인권에 대한 일반적 이해이다. 그래서 인권을 강조하는 자들은 배제의 폭력에 맞서 인권을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 아감벤은 이러한 인권 개념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3) 그는 난민에 대한 아렌트의 논의를 이어받으면서 인권이란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한 권리이며, 이는 결론적으로 공허한 권리라고 파악한다. 그의 논의틀에서 인권이란 헐벗은 삶의 권리이다. 인권을 강조하는 자들의 논리는 인권과 정치적 권리, 시민권의 분리를 전제로 하며 이는 헐벗은 삶을 그 자리에 그대로 고정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인도주의와 정치의 분리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가 분리되는 극단적 국면이다. 그러나 최종분석에서-국제적 위원회들에 의해 점점 더 많이 지원을 받고 있는-인도주의적 기구들은 헐벗은 삶이나 성스러운 삶이라는 형상에서만 인간의 삶을 파악할 수 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 기구들은 자신들이 맞서 싸워야 마땅한 권력 자체와 은밀한 연대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4)
시민권, 다시 말해 정치적 권리로부터 분리된 인권이란 다양한 삶의 형태들을 창안해낼 잠재력(potentiality)5)을 상실한 자들, 다시 말해 무력한 자들의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헐벗은 삶이란 그들의 정치적 권리의 박탈로 인해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형태들을 다양하게 창안해낼 잠재력을 모두 소진해버린 삶이며, 인권의 논리는 이와 같은 헐벗은 삶을 재생산해낼 뿐이라는 것이 아감벤의 인권이해이다. 그러므로 배제의 폭력과 투쟁하기 위해서 인권이란 피해야 하는 함정이며, 버리고 떠나야하는 짐일 뿐이다._정정훈(CAIROS 연구원)
1) 고병권, 같은 글
2) 지오르지오 아감벤 지음, 김상운 옮김, 『호모 사케르』, 미출간 번역본, 2006
3) 같은 책, 3부 2장 "삶정치와 인권", p.148-159 ; 지오르지오 아감벤 지음, 양창렬, 김상운 옮김, 「인권을 넘어」, 자율평론 13호, 2005
4) 같은 책, p.156
5) 아감벤은 구체적인 삶의 형태들을 창안하는 잠재력으로서 삶을 '삶-의-형태'(forme-de-vie)라고 표기하며, 헐벗은 삶이란 '삶-의-형태'를 상실한 삶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삶-의-형태」(지오르지오 아감벤 지음, 양창렬 옮김, 자율평론 11호, 2005)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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