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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사건에서 제시된 수학적 존재론과 사건적 진리의 과정을 중심으로


근대적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서의 프랑스 현대 철학의 움직임

 

글의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근대modern 혹은 근대성modernity라는 용어 또는 개념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듯 합니다. 근대의 개념을 우선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적 철학의 기획 내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 철학은 인간, 이성, 진리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출발하고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인간이라는 개념은 근대적 산물입니다. 근대의 사유는 인간에 대한 사유이며,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여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사물, res cogitans라는 사유를 끌어냈던 데카르트Descartes에 이르러 이성적인 인간 주체를 탄생시키기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생각하는 사물의 특성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이성에 의한 진리 탐구는 과학적 진리의 발견과 그에 따른 기술적 발전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과학 기술의 힘은 대상화를 통한 사물의 특성에 대한 파악에서 나오게 됩니다. 대상이 된 사물에 숨겨진 진리, 즉 사물들의 총합으로서의 세계에 대해 보다 정확히 관찰하고 알게 됨으로써 이에서 발견한 사물들의 본질을 사용하여 보다 많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성적 인간은 세계의 대상화를 통해 과학과 기술의 진리를 얻게 되고, 이러한 진리는 힘이 됩니다. 이성과 진리를 전유하는 존재이며 생각하는 사물로서의 인간은 이러한 힘을 소유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힘으로서의 진리를 사용하게 되면서 근대라는 인간의 거대한 기획은 물론 그 이전에도 여러 문제적 징후들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특히 근대의 문제는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라는 세 명의 탁월한 사상가들을 통해 비판된 바 있습니다) – 20세기에 들어 두 차례의 대전으로 인해 그 기획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근대적 기획의 최종적 형태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의 욕심의 증가, 다시 말해 자본의 논리에 따라 세계의 모든 체계가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보다 많은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추동 된 대규모의 전화로 인해 세계는 전화에 휩싸였고 이로 인해 근대적 기획에 의해 탄생한 이성적 인간 그리고 그에 의해 추구되는 진리에 대한 관념에 대해 다시 사유할 필요가 생겼던 것입니다.[1]

 

프랑스 현대 철학은 바로 이러한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켰던 근대 철학을 비판하고, 이 비판을 통해 새로운 주체와 진리 개념을 재구성하기 위한 기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잡하고 단순하게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 모두가 공유하는 특성은 바로 데카르트의 자아적 주체 개념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더해 하이데거 후기 철학의 경향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영향을 받았던 언어적 전회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철학자들의 영향은 사실 이성과 진리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우선 하이데거에 대해 살펴보자면, 프랑스철학이 하이데거를 전유하는 맥락은 프랑스 철학 만의 특수한 경향성이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프랑스 철학이 받아들인 것은 하이데거 후기 철학의 맥락인데 후기 하이데거의 철학은 주로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와 존재자의 분열에 천착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철학이 존재자의 존재 사실이 되는 존재Being 그 자체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존재자beings의 문제에 천착하여, 과학 및 기술의 지배를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빛)는 기술에 의해 은폐되었고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던 형이상학은 의미를 잃었고 허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존재 그 자체를 기억하는 것은 시인 이외에는 없게 되었고, 그러므로 시인의 언어를 통해 존재를 다시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인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이성의 사물에 대한 대상화의 힘에서 벗어난 신들의 언어이며, 이러한 존재를 기억하는 신들의 언어에서 기술적 지배에서 벗어난 사유와 존재의 구원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신들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은 주로 형이상학적 진리의 시효상실에 대한 것입니다. 이전과 같은 존재-신학적 진리는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오직 남는 것은 언어적 혹은 논리적 진리라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세계는 사물의 총계가 아닌 사실의 총계입니다. ‘세계는 일어나는 것의 모든 것이며 사실들은 이에 대응하는 명제들에 의해 표현이 가능합니다. 세계의 형식은 이를 구성하는 몇 가지 형식의 논리적 요소들을 분석하게 되면 모든 사실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관계라는 것은 어떤 관찰 불가능한 사실들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사실들을 배제해야만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런 명제들은 어떤 의미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즈음에서 바디우가 쓴 프랑스 철학의 모험이라는 글에서 제기되는 프랑스 철학의 몇 가지 경향성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프랑스 철학의 모험: 현대 프랑스 철학의 문제들 및 경향성

 

프랑스 철학의 모험이라는 글의 도입부에서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현대 프랑스 철학의 특수한 배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한 숙고를 하나의 역설로 시작하려고 한다. 그것은 가장 보편적인 것은 또한 동시에 가장 특수한 것이라는 역설이다. 헤겔은 이것을 구체적 보편이라고 명명하며, 이 구체적 보편은 모든 것과 관련된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것과 하나의 특수한 시간과 장소를 가지는 것과의 종합이다. 철학이 하나의 좋은 예가 된다. 철학은 절대적으로 보편적이며 스스로를 모든 문제에 예외 없이 제기한다. 그러나 철학 내에는 문화적이고 국내적인 특수성이 강하게 존재한다. 

Let us begin these reflections on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y with a paradox: that which is the most universal is also, at the same time, the most particular. Hegel calls this the concrete universal, the synthesis of that which is absolutely universal, which pertains to everything, with that which has a particular time and place. Philosophy is a good example. Absolutely universal, it addresses itself to all, without exception; but within philosophy there exist powerful cultural and national particularities.

 

이에 이어 바디우는 파르메니데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인 시기, 그리고 칸트, 헤겔, 피히테, 쉘링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의 시기가 철학사 내에서 있었고, 마지막으로 이전의 시기들에 견줄만한 20세기 전반기의 프랑스의 철학적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프랑스 철학의 특징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함께 바디우는 이들 질문들에 대해 탐색하게 될 네 가지 수단 또는 도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제시된 네 가지 방법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현대 프랑스 철학이 새로운 것을 탐색하기 시작한 시기와 이 시기의 기원, 그리고 선행자들에 대해 살피는 것. 2. 프랑스 철학이 행한 작업을 따라 살피는 것. 3. 철학과 문학의 연관성을 살펴보는 것. 4. 정신분석학과의 연관성을 살펴보는 것.

 

바디우는 우선 첫 번째 접근법의 차원에서 20세기 초에 제시된 뚜렷한 철학적 대립양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철학과 개념의 철학의 대립일 것인데, 그 예로 바디우는 베르그송Bergson 1911년 옥스포드에서 행한 [사유와 운동La pensée et le movement] 제목의 강연과 함께 -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 브륀슈빅Brunschvicq [수리철학의 흐름Les étapes de la philosophie mathématique]이라는 저작을 들고 있습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삶과 개념이라는 두 가지 지향점은 대전 이전에 이미 정립되고 있었습니다. 베르그송은 존재와 생성의 일치를 정립하는, 생기론적 내재성의 철학philosophy of vital interiority 그리고 삶과 우연의 철학을 정립하여, 이런 흐름이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내내 지속되었고, 브륀슈빅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수학과 철학적 형식주의의 가능성에 근거하는 개념의 철학, 사유와 상징적인 것의 철학은 레비-슈트로스, 알튀세르, 라깡, 바디우에 의해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존재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경향성, 즉 삶과 개념의 문제에 대한 대립 내에서도 두 다른 지향점을 가진 듯한 흐름들은 주체의 문제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삶과 개념의 문제는 인간을 둘러싼 문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내재적이고, 즉물적이며, 유기적인 삶을 사는 존재인 인간은 개념적으로 사유하며, 추상적이며, 창조적인 능력을 띈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개념의 대립이 주체를 둘러싼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알튀세르에게서 주체 없는 과정과 역사는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호출 또는 호명하면서 주체를 탄생시킨다는 구도에서 드러납니다. 데리다는 하이데거 해석으로부터 주체의 관념이 형이상학적으로 소진되었음을 말하며, 전통적인 주체 개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할 때에만 작동함을 비판합니다. 라깡은 생각하는 사물res cogitans로서의 주체 개념에 반대하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으로부터 생각하는 존재가 아닌 타인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는 것으로서 주체를 드러냅니다. 라깡의 주체는 바로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바로 이 타인의 욕망에 순응하는 과정이 주체화의 과정이 됩니다. 사르트르와 메를르-퐁티는 주체를 현상학의 기초로서 배치하여 주체에 절대적인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배정합니다.

 

프랑스 철학은 인간 주체의 문제로 넘어온 것입니다. 주체의 긍정/부정에 상관 없이 이 문제에 대한 사유에 참여한 철학자들은 주체의 문제에 들어오게 됩니다. 레비나스의 예를 들자면 그에게서 주체는 자아에서 타자로 일종의 경로 변환을 했을 뿐 여전히 주체의 문제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철학은 결국 데카르트Descartes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립된 싸움터Kampgrund는 하나의 데카르트와 수많은 데카르트들 간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 주체의 성립에 대한 데카르트의 유산과 자신의 사유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연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우리는 바디우의 접근법에 따라 이런 주체의 문제에 천착하면서 프랑스 철학의 흐름들은 어떤 공통적인 움직임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바디우는 여러 다양한 활동들에도 불구하고 크게 네 가지 작용operation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네 가지 움직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독일 철학의 재전유. 2. 과학적 전통의 계승. 3. 정치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 참여. 4. 삶과 예술의 새로운 형식 탐색.

 

독일 철학의 재전유를 통해 프랑스 철학자들은 개념과 삶(실존)에 대해 새로운 관계를 설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선 알렉산드르 코제브의 [헤겔 정신현상학 강의]를 통해 여러 철학자들이 영향을 받았고, 1930년대에는 훗설과 하이데거를 통한 현상학의 도입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메를르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몸의 현상학이라는 형식의 새로운 주체 개념의 탐구를 시도했습니다. 주체는 대상을 상정하고 이를 관찰하려 하는 욕구를 가지지만 우리의 몸은 주체 스스로에게 대상이 되면서 동시에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인식에 기반해 메를르 퐁티는 몸으로서의 실존의 문제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 프랑스의 철학은 독일 철학을 개념과 삶의 관계에서 독일 철학이 말하지 않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프랑스 철학은 독일 철학의 아류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학적 전통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바디우는 전통적으로 과학이 인식 철학의 영역에 갇혀 있었음을 지적하여 과학을 이러한 인식의 영역에서 끌어내는 시도에 대해 말합니다. 과학은 단순한 반성적 차원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며 인식의 영역을 넘는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내거나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 내는 힘을 말하는데, 이러한 힘에 의해 과학은 창조적 사유의 실천이라는 과제를 부여 받게 되며, 인식의 영역으로부터 어떤 철저한 창조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과학은 예술로 격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뢰즈, 깡기엠, 푸코, 그리고 바디우 자신의 철학에서 이런 측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측면에 대해 프랑스의 68 혁명이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68년 이전의 철학은 어떤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68년 이후의 영향력은 주로 제도적인 측면 보다는 어떤 문화적 관습의 변화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68 혁명 이후에도 제도적으로 변화한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내에서 그 이외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이 자유로운 형태로 바뀌는 등 많은 부분이 변했다고 합니다. 바디우는 사르트르, 메를르 퐁티, 푸코, 알튀세, 들뢰즈의 사유에서 정치적 활동을 철학적 목적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개념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탐색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정치 집회에 대한 참여가 개념과 집단적 실천 행위 사이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삶과 예술의 새로운 형식에 대한 탐색이라는 측면은 철학의 근대화modernization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측면에서는 상당한 수준으로, 그리고 정치의 영역에서도 철학은 어느 정도 근대화를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서의 발전(. 쇤베르크, 추상화, 재즈, 추리소설 등)에 대해 철학은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을 보였고 프랑스 현대 철학은 바로 이러한 예술의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빠른 근대화 과정에 집중하였던 것입니다.

 

세번째 문제로 철학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바디우는 말합니다. 사실 18세기에는 사상가들이 문필가를 겸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볼테르, 루소, 디드로, 파스칼 등은 당대의 철학자들이면서 동시에 문필가들입니다. 20세기에도 사르트르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문학과 철학의 통합이 시도되었습니다. 사실 철학이 문학을 도입하게 된 것 역시 어떤 철학의 변화의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철학이 변화하기 위해 철학의 외부로부터 문학을 도입한 것입니다. 철학은 이런 시도를 통해 미학과 접합하고, 철학의 미학화가 시도됩니다. 문학적 맥락 속에서 철학적 글쓰기의 방식에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푸코와 들뢰즈는 묘사description라는 문학의 글쓰기 방식을 도입했고, 라깡은 새로운 수준의 문장을 시도하고 말장난을 도입하여 매우 독창적인 언어를 창조했습니다.

 

네번째로 바디우는 정신분석과의 관계에 대해 말합니다. 라깡의 정신분석은 일종의 반-철학입니다. 서용순 선생님에 따르면 이 반-철학은 철학의 개념들에 심하게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반은 철학이며, 동시에 철학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철학에 반대하는 철학입니다. 정신분석과 관계 그리고 도입으로 철학은 기존의 철학이 다루는 주체의 개념을 변화시켜서 새로운 주체를 선언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주체를 둘러싼 전장의 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라깡의 정신분석은 반성적 주체(자아)가 허구임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거짓말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라깡의 명제로 치환됩니다.

 

어쨌든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는 무의식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고 이 무의식에 맞는 주체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이 철학에는 어떤 과제보다 더 중요한 급선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 주체의 문제에 관해 프랑스 철학은 정신분석과의 장기적인 대화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삶의 철학(실존적 생기론)과 개념의 철학(개념적 분석론)의 합종연횡을 통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됩니다. 예를 들어 바슐라르는 [불의 정신분석]에서 억압이 아니라 환상에 기반한 정신분석, 즉 시와 꿈에 기반한 실존주의적 정신분석을 제안하며,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존재와 무]에서 프로이트의 경험적 정신분석과는 다른 주체의 근본적 선택을 통한 실존적 차원의 정신분석을 도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앙티-오이디푸스]를 통해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새롭게 구성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하며 정신분석과의 관계라는 싸움터에 뛰어든 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디우는 프랑스 철학을 여섯가지 특징으로 설명합니다.

 

1. 개념과 실존은 과거와 같이 대립선상에서 파악할 수 없고, 이러한 분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념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며, 창조적이고 과정적이므로,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실존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2. 근대성 안에 철학을 기입하는 것으로, 철학이 아카데미를 벗어나 삶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라 말합니다. 성적 근대, 예술적 근대, 사회적 근대는 철학과 섞여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앎의 철학과 행위의 철학 사이의 대립을 폐기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분리했고 이러한 분리에서 철학의 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 철학은 이러한 분리를 폐기하고 인식 그 자체가 실천이 되도록 하며, 과학적 인식마저도 사실상의 실천이 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4. 정치철학이라는 돌아가는 길을 가지 않고 정치적 장 위에 철학이 직접적으로 뛰어들고, 정치적 무대의 전면에 스스로를 기입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철학적 투사philosophical militant를 만들어 내며 정치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입으로 이끕니다.

 

5. 주체의 문제를 재사유하며, 반성적인 주체의 모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과의 대화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6. 새로운 철학의 진술exposition의 스타일을 창조하여 문학과 경쟁합니다. 이는 주로 18세기 문필가들의 재전유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상을 통해 현대 프랑스 철학의 문제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바디우의 기획 역시 여기서 논의된 프랑스 철학의 특징들 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체의 문제, 개념과 삶의 문제, 정치적 참여, 새로운 것에 대한 갈구라는 것 말입니다. 바디우의 기획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수학의 집합론을 통해 사유함으로써 존재론으로부터 출발하여 메타-존재론의 차원에서 진리-사건-주체의 과정을 수립하고, 무한한 진리의 가능성과 유한한 주체의 이 무한한 과정에의 참여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이런 프랑스 철학의 맥락을 염두에 두며 다음 부분에서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존재와 사건의 두 가지 흐름: 수학적 존재론에서 사건에 개입하는 대상 없는 주체로

 

수학적 존재론

 

20세기 후반의 철학에는 존재론과 관련을 맺고 있는 두 가지 주요한 전통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분석적 철학의 전통 그리고 다른 하나는 후기-하이데거post-Heideggerean 철학의 전통입니다. 분석적 전통은 인식론epistemology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여 존재론을 이론들의 특성으로 전락시킵니다. 후기-하이데거적 전통은 영속적으로 근본적 존재론의 종말을 선언하는 한편 이 선언을 그 자체의 근본적인 욕망 또는 차이의 존재론의 토대 위에 정초합니다.

 

바디우는 이 두 가지 전통을 거부하지만 단순히 이 두 전통과의 단절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디우는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을 이 두 전통에서 도입한 두 개념에 놓고 있습니다. 그 두 개념들 중 하나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게서 도입한 상황situation’이라는 개념이며 다른 하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ontological difference’라는 개념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차이라는 개념을 존재Being와 존재자들beings 간의 차이로 규정합니다. 이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개별적 존재자과 그들의 존재의 사실 간의 차이인데, 바디우는 여기에서 존재자들이라는 용어가 실체화의 위험을 앉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이 용어는 개체entity’, ‘실체existant’, ‘대상object’ 등에 너무나 가까운 의미를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바디우는 현시된 다수성presented multiplicity’, 또는 일어나는 것의 장소place of taking place’로서의 상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상황이라는 용어는 실체와 관계 사이의 구분에 우선하며 그로 인해 상황들은 사건들, 전혀 다른 종류의 집합적 현상, 개체들의 모든 흐름, 특성, 양상, 연쇄 등 존재론 내에서 다루게 되는 모든 것들을 망라하게 되며, 이 상황의 개념은 또한 어떤 특정한 양식에 관련 없이 어떠한 것이라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 필연적, 임의적, 가능적, 실질적, 잠재적, 또는 가상적이라는 특성들에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바디우가 정의하는 상황situation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존재자를 포함하는 모든 행동이나 우연적으로 벌어지는 일들 모두가 들어갑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글을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카페 안에 있는 의자, 테이블, 이 안에서 우연히 함께 앉아있는 다름 손님들, 울려 퍼지고 있는 음악, 창 밖을 달리고 있는 자동차 등 모두가 나라는 개인이 처한 상황에 속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주장이 실체들이 있다는 것이라면, 바디우는 상황들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다수의 다수성들이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디우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차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각각의 실체가 그 자체로 하나의 단일한 통일적 개체 우주cosmos – 라면, 바디우에게 이러한 다수의 다수성들을 포괄할 수 있는 통합된 전체성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다수의 다수성들에는 이들의 존재를 토대 짓는 기본적인 또는 시원적인 일자도 없습니다.

 

바디우에게 있어 근대적 존재론의 과제는 고전적인 존재론이 제시하는 근본적인 일자적 존재와의 단절입니다. 라이프니츠Leibniz는 이 고전적 존재론의 신념을 하나의 존재자가 아닌 것은 존재자가 아니다(What is not a being is not a being)’라는 명제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형태의 존재적 일자와 단절하는 것은 존재론에 있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일자와 개별 존재자 간에는 시원적인 형태의 등가물이 없음에도, 어떤 특정한 형태의 일자성이 있고 바디우는 라깡을 따라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Il y a l’un’). , 일자적 통합이라는 것은 시원적이지 않더라도 존재자의 현시에는 모종의 일자적 통합의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디우의 해결책은 현시된 다수들로서의 상황들이 일자적 통합에 종속되지만 그런 형태의 통합은 하나로 셈하기count-as-one’라 명명된 어떤 작용의 결과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이 계산 혹은 셈하기는 바디우가 상황의 구조situation’s structure라고 명명하는 것입니다. 구조는 다양한 다수들을 특정한 상황의 원소들elements로서 셈함으로써 이 상황에 귀속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결정합니다. 원소들이라는 것은 상황의 기본적인 단위로 좀 전에 말한 테이블과 같은 카페 안의 사물들 그리고 음악과 같은 어떤 흐름과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카페의 이름인 선 레이Sun ray’라는 상황을 설정할 때 구조는 이 상황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하나로-셈하기를 통해 창 밖의 보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 도로의 차들, 그리고 가로수들과 같은 원소들을 배제하고, 카페 안의 여러 가지 사물들과 흐르고 있는 음악, 커피 냄세 등과 같은 원소들에 대해서는 이 상황에 귀속할 것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구조는 이 카페라는 상황에 속한 각각의 원소의 수준에서 일자적 통합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또한 전체 상황의 수준에서 원소들로 이루어진 다수성을 통합함으로써 일자적 통합을 이루어냅니다. 이것이 상황의 정태적static’ 정의이며, 여기에서 상황은 다수성으로 현시됩니다.

 

반면 철학자들을 때대로 일자를 존재Being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사유해 왔는데, 바디우에게 있어 일자는 구조화의 효과일 뿐이며 토대, 기원 또는 목적이 되지 못합니다. 상황들의 일자적 통합의 결과가 하나로 셈하기라는 작용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황에 귀속되는 다수multiple가 또 다른 상황에 귀속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말하자면 상황들은 서로 배타적인 특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로 셈하기의 작용은 상황의 다수성에서 동떨어진 어떤 모종의 행위자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적인 존재론 또는 심지어 상대주의적 존재론에서도 신, 역사 또는 담론이라는 이름 하에 그런 형태의 행위자로 상정됩니다. 그러나 상황과 그것을 구조 짓는 하나로 셈하기의 구분은 엄밀하게 말해서 존재론 내에서만 통하는 것입니다. 상황은 하나로 셈하기라는 작용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만일 하나의 상황이 하나로 셈하기라면, 바디우는 또한 상황에 대한 동태적dynamic 정의를 가지게 됩니다. 일단 바디우의 이론에 상황에 대한 동태적 정의와 정태적 정의 하나로 셈하기의 작용 그리고 통합적으로 현시된 다수성 의 차이가 있다는 점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를 재구성한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디우는 존재론적 차이가 하나의 상황과 그 상황의 존재 사이에 위치한다고 말합니다. 하이데거에게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상황들과 그 존재의 탈구는 존재론이 펼쳐질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상황의 존재는 오직 시적인 언어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은 단순하고 평범하게 하나로 셈하기의 효과가 미치기 이전의 비-통합적 또는 비연속적인 상황과 하나로 셈하기가 행해진 이후의 통합적이고 연속적인 상황으로 나뉠 뿐입니다.

 

바디우가 제시하는 존재에 대해 비연속적 다수성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상정하고 여기에서 모든 특성들, 심지어 그 정체성과 통일성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제거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비실체화destabilization에 대한 신념을 뽐내는 많은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그런 작용 이후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있어 이런 작용 이후에 남겨지는 것은 단순히 그 어떤 것의 존재이며 그런 존재자만이 비연속적 다수성inconsistent multiplicity’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형상 없는 질료formless matter’ 마저도 질료라는 개념이 우리가 말한 어떤 것으로부터 제거해 버리는 일반적인 특성들 중 하나가 되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게 됩니다. 바디우가 제시하는 비연속적 다수성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초적 질료prime matter’와도 같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의 실질적상태는 결정불가능undecidable’한 것입니다. 엄밀하게 여기서 모든 상황들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지만 이 이전에 대해 알 수가 없으며, 그로 인해 비연속적 다수성의 사유는 그 자체로 사유의 한계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라깡을 따라 바디우는 이러한 사유를 그것의 실재real’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

 

이쯤에서 바디우의 철학적 기획에 대한 개략적 고찰을 뒤로하고 다음으로 바디우의 수학적 존재론과 집합론 사용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집합론인가?

 

바디우는 하나의 급진적인 명제를 내어놓습니다: ‘만일 존재가 비연속적인 다수성이라면 존재에 대해 적합한 오직 하나의 담론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라 수학이다.’ 바디우에게 있어 수학은 존재론 혹은 존재에 대한 담론입니다. 수학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존재에 대해 말하거나 써왔던 것입니다.

 

이 명제로 바디우는 존재being, 관계relation, quality과 같은 고전적인 존재론의 언어를 수학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수학적 언어는 집합론의 언어입니다. 그것은 집합론이 현대 수학의 토대를 놓는 메타-수학의 의미를 띄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수학적 진술도 집합론의 언어로 다시 쓰여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존재와 사건l’Etre et l’evenement에서 바디우는 집합론의 채용에 대한 근거로 두 가지 원칙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비연속적 다수성에 대한 것이며 앞에서 설명된 바 있습니다. 두 번째 원칙은 공백에 대한 것입니다. 이 두 원칙은 무한한 집합들을 다루는 집합론과 바디우의 상황의 다수성 사이의 간극을 연결합니다.  

 

첫 번째 원칙에 대해 살펴봅시다. 상황들의 존재가 비연속적 다수성이라면 그런 존재의 언어에는 무엇이 요구될 것인가? 쉽게 생각해서 이 언어는 비연속적이며 비통합적인 다수성을 현시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몇 가지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 언어에서 현시된 다수들은 어떠한 종류로도 개별적인 사물의 다수들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별적 사물들의 다수가 되면 이것은 실체성을 띄게 될 것이고 슬그머니 일자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 다수들은 또한 그 자체로 다수들로 이루어진 다수의 다수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존재론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전체적 다수, 또는 달리 말해 하나의 우주에 귀속되는 것으로서의 다수들을 현시할 수 없습니다. 이것 역시 다시 전체적인 수준에서 일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로 존재론의 다수들은 경계가 없어야 하며 상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존재론은 단일한 다수성의 개념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확정으로 인해 다수성들을 통합하고 그럼으로써 존재를 통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집합론은 비-통합적인 다수성들에 대한 형식적 이론입니다. 집합론의 특성들은 위에서 진술된 조건들에 부합합니다. 첫째 집합은 원소들로 명명된 다수들의 다수입니다. 물론 원소들과 집합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원소들 역시 각각이 하나의 집합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여기에는 전체집합 다시 말해 집합들의 집합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전체 집합이라는 것은 모든 종류의 집합을 포함하는 집합이라는 것인데 그런 궁극적인 집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궁극적인 형태의 집합은 그 정의상 스스로를 포함해야 하는데 그것은 모순을 일으키며 집합론의 토대의 공리Axiom of foundation’에 의해 금지된 사항입니다. 집합론에는 무한한 종류의 무한한 집합들의 무한이 있습니다. 세 번째, 집합론에는 집합에 대한 개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귀속belonging’이라는 근본적인 관계와 변수들과 논리적 연산자들, 그리고 아홉 개의 공리만이 있습니다. 이 규칙을 따르는 연산 혹은 이 규칙에 의한 작용에 의해 집합은 생겨납니다.

 

두 번째 원칙은 공백에 대한 것입니다. 비연속적인 다수성에 대한 원칙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상황들의 본질에 대해 말합니다. 바디우는 모든 상황에 없는 것nothing’의 존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상황 내에서 어떤 것 혹은 무엇인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하나로 셈하기의 작용에 의한 결과로 그런 것입니다. 상황 내에 없는 것nothing은 상황 내에서 셈해지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어지지 않는 것으로서의 없는 것 외에도 하나로 셈하기라는 작용operation과 셈 이전의 비연속적 다수 역시 상황 내에 존재하며 정의상 셈해질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셈해질 수 없는 것들이 바디우가 말하는 공백void가 됩니다.

 

바디우는 이 공백이 상황의 존재에 대한 감산적 봉합subtractive suture to being’이라고 말합니다. 이 공백이 현시에 대한 봉합이 되는 것은 공백이라는 것이 상황(하나로 셈하기로서의)이 나오는 지점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존재(비연속적 다수성으로서의)가 이 공백에 의해 현시로부터 폐제foreclosed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백이 감산적인subtractive’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공백이 현시로부터 빠져있기(subtracted) 때문이며, 두 번째는 공백이 상황에 대해 고유한 것이 됨에도 마치 상황의 모든 특수성들이 제거되거나 빠져버린 것처럼 상황의 어떠한 특질에도 참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디우에게 모든 상황은 궁극적으로 공백 위에 정초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근거-없음(Ab-grund, 심연)이 아니며 신학적 의미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 nihilo도 아닙니다. 상황의 공백은 단순히 거기에 없는 것이며, 어떤 것이 거기에 있기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집합론의 모든 집합은 공집합, 즉 없는 것 또는 공백의 다수로 구성된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오직 이러한 집합으로부터 형식적인 공리들에 의해 작동하는 연산 또는 셈하기의 작용에 의해 집합론은 무한하게 펼쳐지는 추가적인 집합들을 내어놓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집합론은 공백으로부터 집합들을 조직하며, 이 공백은 그 상황의 존재에 대해서는 감산적 봉합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론이 상황 내에 있는 것들에 대한 이론, 다시 말해 상황 내에서 하나로 셈하기의 작용을 통해 있는 것으로 인식된 것들에 대한 학이라면, 모든 비존재론적 상황(하나로 셈하기 이전의 다수들로 구성된)에서 비연속적인 다수성은 바로 공백이 되며, 공백이 현시되는 유일한 방식은 공집합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집합론이 상황들에 연관되는 두 번째 방식은 집합론이 공백의 현시로부터 비연속적 다수들을 구성해내는 것입니다.

 

집합론과 연속체 가설(CH)

 

집합은 원소로 구성됩니다. 집합의 원소들은 귀속belonging 이외에는 어떤 특별히 구분되는 특성도 없습니다. 당연히 귀속이라는 것은 집합론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이며 다음과 같이 표기합니다: a∈b. 집합론에는 포함 관계(A⊂B)라는 다른 형태의 관계가 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귀속 관계에 기초합니다. 집합에는 또한 부분집합이 있습니다.

 

집합론은 이런 요소들로부터 9개의 공리체계를 구성해냈습니다. 이 공리들의 집합이 바로 집합론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공리들의 필요성은 지난 백 년간의 집합론의 역사를 통해 이들 공리에 기초하여 작동하는 모든 셈하기의 작용들이 정합적인 결과를 내는지에 대해 시험되고 입증되어 왔습니다.

 

바디우에게 있어 이 공리들은 하나의 출발점으로서의 사유의 결정을 구성합니다. 당연히 이 공리들은 지난 수십 년에 걸친 집합 이론에 가해진 일련의 개편을 통해 변화되어 왔으므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역사적 시초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공리들은 과학적 사유 내에서 어떤 새로운 것의 출발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집합론에서의 칸토어의 선구적 작업은 두 가지의 다른 형태의 무한을 사유할 수 있게 했습니다. 

 

칸토어가 창안해낸 무한에 대해 우선 살펴보자면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무한과는 다릅니다. 칸토어는 이전에 지배적이던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가 부분과 전체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을 전도시켰습니다. 말하자면 한 집합이 무한할 때 그 집합의 부분집합들 중 하나에 상응하는 사물들의 집합이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집합을 비교하여 원소들을 하나하나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예를 들자면 자연수의 집합과 짝수의 집합의 원소일대일로 대응하게 되면 무한히 대응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부분이 곧 전체와 같으며, 부분집합과 그것이 속한 집합 사이의 관계는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따릅니다. 0 1 사이에 존재하는 점들과 0 n 사이에 존재하는 점들의 수가 같다면 점들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한집합의 무한성을 전제할 때 셈하기는 과연 어떻게 시작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칸토어의 대답은 기수(cardinal number)에 대한 정리입니다. 이 정리는 각 기수와 각 기수 집합에 대해 크기에 있어 직접적으로 잇따르는 정확히 하나의 기수가 존재하며, 따라서 모든 집합에 있어서 순차적인 기수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이 정리는 이후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증명이 되지 않았으며, 그런 이유로 잠재적 차원에서 CH(연속체 가설, continuum hypothesis)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정을 잠정적으로 인정하게 되면 무한집합들의 무한수의 존재와 그것을 이용한 계산의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칸토어가 만들어낸 초한수transfinite number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무한을 생각할 때 1,2,3,4,5,…를 따라가 이 수열이 단순히 무한까지 간다는 형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칸토어의 무한 개념은 이런 서수의 정렬 체계에서 벗어나 우리가 계산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극한으로 보내는 서수의 이후의 수를 사유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ω로 표기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최초의 극한의 서수를 상정한다면 논리적으로 ω+1 첫 번째 무한수 혹은 기수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ω0) 여기에서부터 무한수들의 무한한 수열 혹은 초한수라고 하는 aleph 수들의 생성과 추가가 가설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무한은 단순히 잠재적인 차원의 무한 또는 가무한의 차원을 벗어나 실질적으로 실존하는 수가 되고, 직관의 대상이 됩니다.

 

사실 바디우의 진리는 고유하게 결정 불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은 바로 이 연속체 가설의 특성에서 나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가설은 1960년대에 수학자 괴델과 폴 코헨에 의해 집합론의 체계에서 독립적임[3]을 증명하게 되는데, 바디우는 폴 코헨의 증명과정에서 여러 개념들을 전유하게 됩니다. 증명 과정에서 코헨은 실제로 보수적인 형태의 집합론을 구성하는 ZFC(체르멜로-프랑켈 체계Zermelo-Frankel system, 선택의 공리Axiom of choice)라는 공리체계를 통하는데 이 공리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홉 가지의 공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연성의 공리(Axiom of extension), 분리의 공리(Axiom of separation), 멱집합의 공리(Axiom of power-set), 합집합의 공리(Axiom of union), 공집합의 공리(Axiom of empty set), 무한집합의 공리(Axiom of infinity), 토대의 공리(Axiom of foundation), 치환 공리(Axiom of replacement), 선택 공리(Axiom of selection).

 

외연성의 공리는 동일성과 차이의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외연성의 공리는 만일 집합 α의 모든 원소 γ가 동시에 집합 β의 원소가 되기도 하며 그 역도 성립한다면, 집합 α와 집합 β는 구분할 수 없으며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집합론적 존재론에서 동일성과 차이는 특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외연(또는 확장, extension)에 의해 결정됩니다. , 모든 차이는 하나의 지점으로 한정됩니다. 두 집합이 다르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집합들 중 한 집합에 속한 원소 하나 이상이 다른 집합에 속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기술될 공리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집합에 기초하여 새로운 집합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구성적constitutive’ 공리들입니다. 분리의 공리가 말하는 것은 만일 집합 α가 존재한다면, 집합 α의 부분집합 β가 존재하며, 그 집합의 모든 원소들인 γ는 수학식 F를 만족한다입니다. 이 공리는 수학식에 의해 최초의 집합으로부터 다른 집합이 분리되어 나올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이 공리의 다른 이름은 부분집합 선택의 공리입니다). 예를 들어 최초의 집합 사과들에서 이와는 구분되는 부분 집합 빨간 사과들이 나올 수 있으며, 여기서 수학식은 빨간색 사과가 됩니다. 바디우는 이 공리에 대해 존재가 언어에 내재한다는 것을 지시한다고 말합니다. 존재란 이처럼 제시되거나 발화되어야만 하며 따라서 존재란 자신에게 분리된행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멱집합의 공리는 한 집합에 포함되는 모든 부분집합들이 함께 모여 멱집합이라는 또 다른 집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집합 {a, b}는 공집합 Ø을 포함하여 {a}, {b}, {a, b}을 부분집합으로 가지게 되는데 이 부분집합들을 원소로 이루어지는 멱집합은 {Ø, {a}, {b}, {a, b}}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집합이던지 멱집합의 크기는 어떠한 경우에도 멱집합의 본래의 집합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어떤 주어진 집합에서 보다 큰 집합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합집합의 공리는 최초에 주어진 집합 a의 원소들인 c의 모든 원소들인 d가 그 자체로 합집합이라고 명명된 또 다른 집합 b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집합 b는 본래의 집합의 합집합이 되며, Ua라고 씁니다. 이것은 집합들이 해체되었을 때 균질적으로 다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정리된 공리들은 적어도 하나의 집합의 존재를 상정하지만 그들 자체로는 집합들의 존재를 확립하지 못합니다. 공집합의 공리는 그와 다릅니다.(토대의 공리는 이 공집합을 상정할 수 있게 만드는 원소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공집합의 공리를 기초합니다. 그리고 이 공리의 의미는 상황 내에서 사건을 사유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공집합의 공리는 모든 집합들의 구성에 대한 존재론적 토대가 됩니다. 그것은 어떠한 원소들도 귀속되지 않는 집합, 즉 공집합(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공집합과 앞에서 서술된 구성적 공리들을 활용하면 공집합으로부터 다른 모든 집합들이 나오게 됩니다. 멱집합의 정리에 의해 공집합은 멱집합 {Ø}가집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형태의 집합들이 순차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Ø, {Ø}}, {Ø, {Ø}, {Ø, {Ø}}}, … (여기서 무한 집의 공리가 공집합의 공리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만일 수학이 존재론이라는 주장을 인정할 수만 있다면 바로 이 공리들은 철학적으로 심오한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바디우는 고유한 존재론으로서의 수학(집합론)을 구분하기 위해 메타-존재론(meta-ontology)로서의 공리들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구분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집합론적 항들에게는 개별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철학적 담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합은 메타-존재론적으로 다수성’, ‘상황’, 또는 현시로 말해집니다.

 

분리의 공리는 수학사 내에서 제기된 어떤 역리를 피해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집합론이 대응하는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들 중 하나는 존재자와 언어 간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 관계는 집합론이 말하는 것은 집합과 그 집합들의 정의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임을 말합니다. 집합론에서 처음에 만들어질 대 프레게Gottlieb Frege에 의해 개념의 연장(또는 외연)’으로 정의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하는 집합은 개별적으로 하나의 개념에 상응한다는 형식으로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어와 존재자 간의 관계는 정확한 대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트란트 러셀이 1902년에 발견한 러셀의 역리는 이 관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게 됩니다. 이 역리는 그 자체들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집합들의 집합the set of all sets which are not members of themselves’이라는 형태로 정식화 됩니다. 과연 이 정식을 만족시키는 원소들의 집합은 이 정식에 의해 구성되는 집합 그 자체에 속할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만일 스스로에게 귀속된다면 정식에 의한 정의에 의해 속할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스스로에게 귀속되지 않는다면 정의에 의해 귀속하는 것이 됩니다. (다른 형태의 정식도 가능합니다. ‘제목이 20자로 된 집합들의 집합’. 이 집합은 스스로에게 귀속될까요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요?)

 

바로 이러한 러셀의 역리, 즉 자기 귀속성의 역리를 피하기 위해 분리의 공리가 만들어진 것이며, 이 공리는 주어진 집합의 스스로에 대한 귀속을 금지합니다. 분리 공리가 말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집합 a가 있다면 그 원소들이 정식 F를 정당화하는 부분집합 b가 적어도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식 F썩은것이라고 하고 이에 의해 몇몇 사과들은 썩었다는 판단을 내리기로 합시다. 불리 공리에 의해 모든 사과들의 집합의 가정된 존재로부터 썩은 사과들의 부분집합을 분리해 낼 수 있게 됩니다.

 

분리 공리로부터 존재자와 언어 간에 설정된 관계가 비록 언어에 의해 존재자가 동일성(정체성)을 부여 받게 되지만 존재는 언어를 초과하게 됩니다. 메타-존재론적 의미에서 분리 공리는 정의되지 않은 실존은 언제나 어떠한 형태로든 한 종류의 다수를 정의하는 정의 내에서 상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4]

 

그래서 존재의 언어로서의 집합 이론의 차용으로 얻는 결과는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하면 수학적 존재론은 더 이상 존재자들 자체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그런 역할은 물리학, 인류학, 문학 등에 맡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바디우가 말하는 감산적 존재론subtractive ontology으로서의 집합론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집합론이 말하는 존재자들은 어떤 특성이나 성질로 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 그 동일성 또는 정체성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본질적 측면에 삭감된 형태의 존재론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수학적 존재론에는 동시에 우주나 현상, 원인과 질료(물질)가 없습니다. 집합론으로서의 존재론은 세계를 채우고 있는 구성물들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다수의 다수성들이 있다는 주장을 펼칠 뿐입니다. 수학적 존재론은 세계와 같은 특정한 상황들의 존재나 비존재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오직 어떤 상황이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의 구조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상황들의 존재론적 도식

 

그렇다면 다음으로 상황들의 존재론적 도식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다수의 다수성으로서의 상황들을 구조 짓는 도식에 대해서 말입니다. 메타-존재론적 차원에서 논의할 때 어떤 주어진 상황의 부분 집합들로 구성되는 집합인 멱집합power-set은 상황의 상태the state of a situation가 됩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로 셈하기의 작용을 거친 상황에 다시 한번 하나로 셈하기를 거쳐 만들어 내는 하위적 다수로서의 개념이 되며, 그런 의미에서 이 상황의 상태는 반성적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 상황의 상태 또는 단순히 상태로 부르는 것은 국가라는 함의를 지니며 국가가 한 상황의 원소들의 모든 가능한 재그룹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태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상태/국가가 하는 일은 상황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며, 정치적 상황 내에서의 정부나 행정부의 입장과 같은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급, 조직 등과 같은 다른 고려 사항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바디우는 자연적인 형태, 역사적인 형태, 그리고 중립적인 형태의 세가지 형태의 상황에 대해 말하는데 이 상황들이 구분되는 것은 해당하는 상황을 구성하는 다수들의 종류에 따라 결정됩니다. 세가지 형태의 다수들에는 정상항normal, 돌출항excrescent, 그리고 단독항singular으로서의 다수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정상항은 상황에 대해 귀속과 포함의 관계를 맺고, 돌출항은 포함은 되지만 귀속은 되지 않는 관계에 있게 되고, 단독항은 귀속은 되지만 포함은 되지 않는 관계에 있습니다. 자연적인 상황들은 정상항과 돌출항들로 구성되는 것이며, 중립적인 상황들은 세가지 항들 모두로 구성됩니다. 역사적인 형태의 상황들이 중요할 것인데 이 상황들에는 적어도 하나의 사건의 장소eventual-site’가 있게 되며 여기서 사건의 장소는 단독적 다수에 속하는 것입니다.

 

자연적 상황에 속하는 정상항들은 그 하부의 원소들 역시 정상항이 되는, 다시 말해 ab에 귀속 될 때 ab에 포함되는 형태의 정규적인 관계가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관계를 보이게 됩니다. 이런 관계를 추이적transitive라고 하는데 위에서 논의한 기수들의 집합은 이런 방식의 추이성을 보이게 됩니다. 즉 자연 내의 무한은 이런 추이관계를 보이는 정상적 관계로 정렬되는 구조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디우는 자연은 없다라는 명제를 수사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 내에서 변화는 아무런 의미를 띄지 못합니다. 전도서의 해아래 새 것이 없다는 잠언은 자연적인 상황들 내에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적 상황들에 대해서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여기에는 사건의 장소가 적어도 하나 이상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단독항이 있는 것이며 상황에 귀속은 되지만 포함이 되지 않는, 즉 상황의 재현 구조인 상황 상태에 의해서는 인식되지 않는 항이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 역사적 상황들을 사유해 보자면 상황 상태로서의 국가를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국가는 개인을 단지 어떤 기표 혹은 지위로 보게 될 뿐 절대로 개인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국가는 한 개인을 직업, 사회적 지위, 결혼관계, 가족관계 등으로 고려할 뿐,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의 가족이 사고를 당해 지금 어떤 병원의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개인은 자신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위반을 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이 개인을 보는 방법은 교통법을 어긴 범법자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인의 상황은 절대 국가에 의한 셈하기에 고려되지 않습니다.

 

이런 예를 좀 더 확장해서 보자면 우리는 이주민의 문제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들어와 있는 많은 이주민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투표권도 없고 교육, 의료 등의 복지에도 취약합니다 (어차피 국적자들의 사정도 그리 나을 바는 못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고 있는 역할은 이 사회 내에서 지대합니다. 그들이 없다면 우리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고, 가구도 쓰지 못하는 등 이 사회 내의 경제적 상황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공백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단독항으로서 상황에 현시되고 있는 이들 모두가 연대하여 파업을 감행하게 된다면 상태가 유지하고 있는 상황의 통일성에 구멍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사건의 장소가 절대로 어떤 새로운 것의 도래로서의 변화를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사건의 장소가 실제로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 필요한 보충물supplant이 있는데 바디우는 그것을 사건이라 말합니다. 또한 사건의 장소에서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을 인식하고 명명해 줄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시초적 명명은 전체 상황에 대해 전환적 결과를 야기하며, 바디우는 이를 개입intervention’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입은 바디우가 충실성fidelity’ 또는 유적 진리의 절차generic truth procedure’라 명명하는 진리의 주체적 절차의 초기 단계입니다.

 

유적 절차는 기본적으로 사건에 대해 충실성을 가지고 행동해 들어가는 투사적 주체들에 의해 구성되는 상황에 대한 일련의 탐색enquiry으로 이루어진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탐색들의 목적은 사건이 상황 내에 귀속됨에 의해 드러나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어떻게 사건을 변환할 수 있을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는 유적인 것generic, 다시 말해 이전의 상황에 현시되었던 다수적-존재자들에 입혀졌던 술어들이(또는 본질들이) 박탈될 때 드러나는 최소한의 형식만이 남겨진 다수성입니다.

 

예를 들어 쇤베르크의 음악이 클래식 음악에 끼친 영향을 고려해 보자면 그것은 그의 12 음계로의 확장이 기존의 클래식 음악이라는 상황의 통일성을 해체하여 음악이라는 상황을 구성하던 원소들을 음, 음표, 악기, 연주가 등의 다수만을 남긴 채 모든 명성과 지위, 형식 등의 술어적 본질들을 박탈해 버린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적인 다수로서 음악의 원소들은 새로운 변화를 유발한 쇤베르크의 12 음계에 의해 재구성될 것이고, 새로운 것으로서의 유적인 진리는 이전의 음악적 상황에 속한 다수와의 연관 속에서 새롭게 구성된 상황에 자연적인 것으로 현시될 것입니다.  

 

바디우의 유적인 진리의 절차 또는 사건-주체-진리의 과정은 폴 코헨의 연속체 문제(CH)에 대한 증명방법에서 온 것입니다. 사실 코헨의 수학적 과정을 엄밀하게 살핀다는 것은 이 글의 목적에서도 벗어나거니와 엄청난 시간을 소요할 것이므로 상당히 부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코헨의 수학적 고안물들에 대해서는 간단히라도 살피고 넘어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코헨은 자신의 증명을 통해 칸토어가 제기한 연속체 문제가 ZFC(체르멜로-프랑켈 공리체계 및 선택공리의 체계)라는 집합론의 구성원리들에 독립적이라는 것을 보이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과정에서 코헨은 충실하게 ZFC 체계를 따랐고 이 체계에 내재적인 방식에 의해 CH가 어떤 값을 가지더라도 동일한 결과를 낸다는 것을 보입니다.[5]

 

이 과정에서 코헨은 유적인 것the generic’ 또는 식별불가능성indiscernibility’강제forcing’ 등의 개념을 내놓는데 이 개념들을 바디우가 차용하게 된 것입니다. 코헨은 1963년 자신의 증명과정에서 자신이 집합론의 기초 모델ground model’이라 명명한 모델을 고안하고 자신의 증명과정의 출발점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집합론의 모델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구조화된 다수성이므로, 그 자체로 하나의 집합으로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주어진 집합들과 그 하위 집합들은 어떤 주어진 정식에 의해 규정되는 성질property에 의해 표현될 수 있습니다. 즉 모델에서 발견되는 모든 다수는 언어라는 도구들을 통해 식별되는 것입니다.

 

유적인 집합generic set은 그런 언어에 의해 식별되는 부분 집합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어떤 새로운고안물이었습니다. 유적인 집합은 집합 내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특성에 대해서도 그 특성을 공유하지 않는 원소를 적어도 하나 이상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언어적 특성에 의해 완전하게 잡히지 않는 이 집합은 정의상 집합론 내에서 식별불가능성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 새로운 다수가 존재에 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이 유적인 집합이 정치, 과학, 예술, 사랑에서의 근본적 변화의 과정들에 대한 존재론적 도식을 제공하는가? 바디우는 이 기초 모델이 상황 이전에 수립된 역사적 상황을 도식화한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상황 내에서 유적인 집합의 개념을 정의할 수는 있지만 정말로 그런 집합이 존재하는지는 모른다는 말이죠.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 유적인 집합이 일종의 돌출excrescent로서 상황에 재현될 뿐 현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적인 부분 집합은 오직 포함의 층위에서만 현존하며, 다른 부분 집합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그 특성 또는 성질로 식별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유적인 집합의 존재를 보이기 위해 코헨은 기존의 기초 모델에 일종의 보충물supplant을 더해주는 방식을 고안했습니다. 이 보충물이 더해진 새로운 집합 내에서, 유적인 다수는 귀속의 층위에서 실존하게 됩니다.

 

그에 더해 코헨은 이 새로운 보충물이 더해진 집합에 대해 한정적인(또는 유한한) 기술을 하기 위해 본래의 집합에서 유래한 자원들 만을 이용하는 방법을 발전시킵니다. 이 과정을 코헨은 강제forcing’이라 불렀고 바디우는 이를 차용하여 사건에 대한 충실성으로 행동하며 한편으로 사건에 의해 촉발된 변화를 상황에 이끌어오기 위해 시도하는 주체들의 다양한 실천적 탐색enquiry에 대한 존재론적 모델로 사용했습니다. 이 활동가적 주체들이 추구하는 정의에 대해 이들 주체들은 전혀 확고한 지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예상하고, 탐색하는 과정만이 가능하며, 이들의 강제의 과정을 통해 그들이 이끌어 가는 사건의 특성들이 시험되고 검증될 것이고 또한 다시 예상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제는 이런 예상적 탐색의 반복으로서의 측면에서 볼 때 역사적 상황의 전체적 변화를 가져오는 미래적 실험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 바디우의 수학적 존재론과 존재론의 차원을 벗어나는 사건-주체-진리의 과정에 대한 수학적 모델과 그 모델에서 바디우가 끌어내는 메타-존재론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에 제시한 것은 바디우의 감마 도식으로 위에서 살펴본 유적인 진리의 절차를 잘 요약하는 측면이 있어 가져왔습니다. 이 그림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와 사건의 후반부의 사건과 무한한 진리를 추동하는 유한한 진리의 부분으로서의 주체에 대한 설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간단히 구두로 설명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 때가서 제대로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결어: 바디우의 철학에 대한 평가


상당히 무식한 방식으로 바디우의 엄밀한 형식 논리를 설명하는데 매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아직 바디우의 철학 체계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거니와 공부의 부족을 스스로 통감하는 상황에서 이런 발표를 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어쨌든 바디우의 철학 체계에 대한 소개를 목적으로 하는 이 글에서 바디우의 철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평가로 끝을 맺는 것은 필요한 수순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 체계를 평가함에 있어 다른 임의적 범주를 도입하는 것 보다는 글 도입부에서 제시한 바디우의 프랑스 철학의 모험에 제시된 범주에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바디우의 철학은 수학적 형식으로서의 개념을 수학 기초론으로서의 집합론의 차원에서 끌어내 상황에 대한 구조를 수학적 존재론의 다수의 다수성으로서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구성된 구성물을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의 현실적 차원으로 끌어오는 형태의 과정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디우의 말 그대로 그의 수학적 개념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며, 창조적이고 과정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디우의 철학은 또한 행동을 위한 주체의 철학입니다. 교조적인 아카데미를 벗어나 현실에서 행동하는 전투적인 투사적 차원의 주체가 새로운 것으로서의 진리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개념적 고안물들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주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기획이며, 하나의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디우의 사유 체계는 집합론적 의미의 존재론이 진리에 대한 권리를 선언하고 그것을 옹호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형태의 진리의 절차들, 즉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의 진리 생산 절차들을 사유하고, 이 사유를 통한 실천을 이끌어내 기존의 담론을 위한 담론과 해석을 위한 해석의 차원에서 철학을 구해냅니다. 여기에서 바디우의 철학은 정치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입을 실행하는 철학적 투사의 가능성을 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디우의 기획은 주체의 문제에 대한 재사유와 관련됩니다. 더 이상 반성적인 주체의 모델, 주체와 대상의 이분적 구도에서 벗어나 대상 없는 주체로, 진리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진리 자체의 유한한 일부분이 되는 주체를 사유해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디우의 사유는 오늘날의 상대화와 차이의 정치만이 난무하는 탈-근대 혹은 탈-구조주의적 담론의 전장의 지형도를 바꾸어 낼 위대한 체계의 사유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 반성하지 않는 주체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재앙 또는 전체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우는 오히려 [윤리학]을 통해 선/악이 동일한 사건-주체-진리의 과정을 거쳐 현실에 도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바디우가 제시하는 진리의 주체는 어떠한 실체적인 것에도(인종주의, 파시즘, 정치적 이익 등등)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비어있는 공백의 자리로서의 주체입니다.

 

이런 주체를 통해 바디우의 철학은 영속적으로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아무런 의미 없는 변화가 아닌, 상황에 현시되지 못하던 공백으로서의 다수를 상황 또는 백과사전적 지식체계로서의 구조에 기입해 넣기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것으로서의 변화를 사유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사유의 주인은 낙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암울하고 비관적인 상황에도 끝없이 낙관하며 새로운 것의 도래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무한한 낙관성일 것입니다.

 

- 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분은 각각 서용순 선생님의 프랑스 철학 개설 강의 내용에 대한 정리이며, 세 번째 부분은 제이슨 바커의 바디우에 대한 개설서, 바디우의 무한한 사유의 영어판 서문 그리고 존재와 사건에서 참고하여 카이로스 콜로퀴아에서 발제 할 목적으로 작성했음을 밝힙니다_박성훈(CAIROS 연구원)



윤리학: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동문선현대신서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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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알랭 바디우 (동문선,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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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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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알랭 바디우 (새물결,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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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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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알랭 바디우 (새물결,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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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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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알랭 바디우 (이학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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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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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제이슨 바커 (이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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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수적 근대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형태의 근대 역시 이미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기획으로 논해지는 근대에 대한 일종의 대안적 선택alternate option으로서 사유될 뿐이므로 이미 자본주의적 기획으로서의 근대라는 문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2] 라깡의 실재the real’의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한계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재는 만일 그것에 이르게 되면 상징계the symbolic가 무너지고 이전의 삶 자체가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여 실재에 이른다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의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며, 그런 의미에서 실재를 사유하는 것은 상징계의 한계를 사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의 실재라는 용어의 사용을 볼 수도 있습니다.

[3] 여기서 CH ZFC 공리체계에 독립적이란 것은 ZFC의 공리체계의 내적인 연산방식으로는 CH가 상정하는 초한수들의 정렬이라는 사실에 대해 긍정 또는 부정의 증명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이 외에 치환 공리와 선택 공리가 있는데, 치환 공리는 한 집합 a 내의 모든 원소들에 대해 치환이 가능하며 이러한 치환에 의해 새로운 집합 a’가 생긴다는 것을 말하며, 선택 공리는 모든 집합 a에 대해 선택 작용 f가 존재하여 이 선택작용을 통해 선택 집합 b를 형성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선택 공리는 모든 집합의 정렬well-orderedness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하며, 그런 의미에서 기수 집합의 실존의 증명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5] 이것은 괴델의 불완정성의 정리와도 궤를 같이 합니다. 괴델은 불완정성의 정리를 통해 힐버트 형식 체계의 형식 논리적 규칙들을 통해서는 덧셈과 같은 가장 간단한 셈하기도 결정할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다시 말해 셈하기는 힐버트 체계와 무관하게 가장 직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괴델은 분명한 플라톤주의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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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icon of http://www.hurstvillerepaircentre.com.au/ BlogIcon repair iphone| 2011.06.16 19:50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퍼가도 될까요?
편집장 | 2011.06.29 16:50 신고 | PERMALINK | EDIT/DEL
네. 출처만 밝혀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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