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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성서와 인문학의 조우

「낯선 바울에게 ‘메시아’에 대해 다시 듣다」에 관한 논평

■ CAIROS 포럼 | 신학적 전회? 현대철학자들 성서를 읽다 - 논찬 3

                                                                    김동규 l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나는 아감벤(Agamben)과 바울에 대해서 그다지 잘 아는 바가 없고, 가장 최근의 현대철학자들의 논의에 대해서도 익숙하지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본 논평을 하기에는 그다지 적절하지 못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평은 논쟁을 일으킨다기보다는 이러한 논의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아감벤의 바울 해석을 좀 더 잘 이해해보고자 하는 관점에서 진행될 것이다.

 발표자는 아감벤의 바울 해석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선 『호모 사케르』의 논의를 경유하여 『남겨진 시간』에 나타난 바울의 로마서 1:1에 대한 아감벤 특유의 해석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과정에서 아감벤의 바울 해석의 핵심이 되는 주제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메시아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메시아적 시간의 구조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나 역시 이러한 단계를 그대로 거치면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발표자는 이러한 주제들을 탐구함에 있어 『호모 사케르Ⅰ』의 논의를 경유한다. 그 이유인즉, 『호모 사케르Ⅰ』에 관한 이해가 없이는 『남겨진 시간』에 관한 논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3쪽, 각주 3번 참조). 여기서 발표자가 설명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란, 신의 법과 인간의 법에서 모두 배제되어 있는, 즉 “법의 외부에 있으면서 무차별적인 법의 폭력의 대상이 되는”(3쪽) 존재이다. 이처럼 법에 배제되면서 법적 구속의 대상이 되는 ‘포함적 배제’라는 역설적 상황에 처한 존재가 바로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발표자는 아감벤이 이러한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 될 만한 예를 ‘무젤만’과 같은 이들의 “말없는 저항의 형식”(4쪽)에서 찾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말없는 저항의 형식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기술된 바가 없다. 어떤 점에서 이들이 “수용소의 법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4쪽)가 된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볼 때, 무젤만처럼 수용소에서 “모욕, 공포, 두려움”(4쪽)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법으로 통제하기 쉬운 자들이 아닌가? 아감벤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발표자가 제시한 설명만으로도 이에 대한 논의가 잘 이해될지 모르겠으나 사전 지식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법과 권력 등에 대한 포함적 배제라는 예외상태에 있는 인간이 억압적인 법과 권력을 깨트릴 수 있다고 보는 것 같기는 하지만, 무젤만이 그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이와 관련하여 또한 발표자는 엄밀하지 못한 설명으로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나는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의 선포가 왜 “규칙을 위반함으로써 그것을 지키고 완성한다는 역설적 논리를 보여”주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5쪽). 이러한 예수의 말이 그 자체로 그러한 역설적 논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예수의 실제적 삶과 견주어보았을 때 도출될 수 있는 논리가 아닌가?

 

 “메시아적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발표자는 아감벤이 바울 해석을 통해서 강조하는 ‘마치 ~아닌 것처럼(hōs me)의 용법에 주목해야 한다고 밝힌다. 모든 법적인 소유권을 박탈시킨 채로 사는 것이 메시아적 삶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즉, “메시아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현존하는 질서에 반해서 그것이 ‘마치 아닌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7쪽)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은 ‘마치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 왜 “주체를 전위시키고 무화”(7쪽)시키는 것인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발표자는 ~이 아닌 것처럼 삶이 주체를 존재하지 않도록 만든다고 하는데, 우선은 이것이 도대체 어떤 주체를 겨냥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기서의 주체는 통상 철학에서 인간 주체의 문제를 다룬다고 했을 때의 인간 일반으로서의 주체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이데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모든 것을 떠받치는 근본토대의 역할을 하는 데카르트적인 Subjectum으로서의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규정 없이 주체를 무작정 무화시킨다고 하니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들어오지 않는다. 발표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이 바로 갈 2:20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라는 바울의 고백의 참된 의미이다”(7쪽)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역시 근거가 부족하다. 표준새번역 갈 2:20을 다시 새겨보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바울은 “내가 ~~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라고 끝맺고 있다. 이는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셨기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나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 아닌가? 여기서 ‘나’라는 주체 자체가 완전히 폐기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은 아닌가? 무엇이 옳은 해석이든지간에 발표자의 논문에서처럼, 이 구절을 가지고 주체의 무화를 곧장 이끌어내기란 어려워 보인다.

 

 다음으로 메시아적 시간의 구조에 대해 짚어보자. 발표자는 아감벤이 주장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은 바로 ‘남겨진 시간’, 메시아의 출현 이후부터 종말 때까지의 ‘아직 남아있는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이 시간은 “연대기적 시간도 묵시록적 종말의 시간도 아니다”(8쪽). 이 시간은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끝나기 시작한 시간이고, 바울은 이러한 시간이 펼쳐지고 있는 세속적 세계가 신이 예취한 종말론적인 “카이로스의 포화와 성취”(9쪽)의 장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발표자는 예수 부활이후에는 “성취의 요청으로서의 현재, 그 자체 ‘종말’로서 설정되는 현재”(9쪽)가 대두된다고 아감벤의 입장을 설명한다.

 전문신학자도 아닌 아감벤이 이러한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 일면 놀랍기는 하나,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닌 것 같다. 메시아적 시간에 대한 아감벤의 바울읽기가 발표자가 말한 대로 “기존의 바울신학자들이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독법”(10쪽)일 수는 있으나 이는 단지 독법(읽는 방법)의 새로움이지 해석의 새로움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내가 다른 신학적 입장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발표자 스스로가 그런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발표자는 오스카 쿨만이나 제임스 던을 거론하면서 근래의 많은 학자들이 기독교적 시간론의 종말론이 내포하고 있는 긴장의 성격을 많이 인정해왔다는 식의 언급을 하고 있다(10-11쪽 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아감벤이 철학자의 입장에서 바울 해석을 하고 있다는 독법의 신선함 외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철학자가 성경을 해석한 행위 자체가 신선하다는 것인가?

 이러한 궁금증은 이 글의 다음 대목을 검토해봐야 해소될 수 있을까? 발표자는 “예외상태와 메시아적 지양”(11쪽)이라는 작은 제목 아래 아감벤의 로마서 해석에 관한 최종적인 해명으로 치닫고자 한다. 그는 아감벤이 고전 3:31과 고후 13:8에 등장하는 카타르게타이(katargeitai)라는 ‘작동하지 못하게 하다, 폐지하다’의 의미를 지닌 이 어휘에 주목하여 예외상태의 메시아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감벤이 주목하는 메시아적 예외상태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과 성취”(11쪽)를 요청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법의 내/외부의 구별 불가능성을 생산해내는 예외적 상태가 바울 자신의 율법에 대한 입장 정리를 통해 드러나게 됨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 아감벤의 입장인 것처럼 보인다. “유대 율법의 기본적 구분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분이고, 이것이 바울에게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으로 반복”(12쪽)되는데, 바울은 “육체와 영이라는 분할”(12쪽)을 통해서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은 아니지만, 율법 없이 사는 이방인도 아닌 자를 출현시킨다. 즉, 유대/이방이라는 단순한 이항대립에 속하지 않는 제삼자의 출현을 염두에 둠으로서 율법을 진정한 의미에서 보존하고 성취한다는 것이 발표자가 제시한 아감벤 해석인 것이다. 발표자는 이러한 잔여적 존재자의 출현이 “바울의 율법관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빛을 던져준다”(13쪽)고 평가하면서 이 해석이 “충분히 타당하다”(13쪽)는 입장을 표명한다. 그런데 이 해석이 어떤 근거에서 기존의 해석보다 더 타당한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는 부분이 없다. 물론 이 문제를 가지고 다시 한 번 길게 서술하는 것이 본 발표의 목적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존 입장과의 충분한 대조와 비교 없이 타당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성급해 보인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내가 묻고 싶은 논점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이는 “메시아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발생하는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15쪽) 한다는 발표자의 촉구를 따라 내가 묻는 물음이다. 메시아적 사건의 순간을 경험하는 자는 ‘우리들’이다. 그렇다면 메시아적 시간을 살아내는 ‘우리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발표자의 이해에 따른) 아감벤의 이해는 ‘주체’가 아니고 ‘남은 자’여야 하며 모든 법적 사실적 권리를 ‘마치 ~이 아닌 것처럼’ 여기며 예외상태에서 사는 자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자인가? 예외상태는 나의 의지에 의해서 구성될 수 있는가 없는가? 예외상태에 있는 것 자체가 저항의 힘을 내포할 수 있는가? 그 저항의 결단은 내가 하는가? 내 바깥의 부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가? 이 문제들을 두고 씨름한다면 우리는 발표자가 제안한 고민의 시작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아감벤도 바울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본 논고를 되짚어 보았다. 사실 나의 시시한 지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아주의가 주는 함의는 무엇인지, 이 메시아주의가 안고 있는 시간관과 이러한 시간 속에 살아가는 ‘남겨진 자’들의 존재방식은 무엇인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 점에서는 우리는 발표자의 수고 덕분에 아감벤의 귀한 통찰과 문제제기를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