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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은 실패한 탐정의 이야기 또는 불완전한 추리소설이다.* 범인을 잡지 못한, 문제가 되었던 책을 찾지도, 수도원의 화제 사건을 막지도 못한 탐정 혹은 수사관의 이야기를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에서 보자면 결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럼에도 어떤 의미를 지닌다. '중세의 가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늙은 수도사의 입을 통해 에코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결코 녹록치 않은 철학적/신학적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오늘날의 상황 내에서 일정 이상의 시의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러니까 아마 지난 겨울이었을 것이다. 한 일년쯤지났을려나... 대학 시절 항상 남들은 생각하지도 않는 골치아픈 문제들을 가지고 함께 검토하던 어찌 보면 나만큼이나 얼빠진 녀석이 이 책을 다시 보고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자연스럽게 <장미의 이름>에서 검토할 수 있는 여러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참고로 그 친구는 당시 소설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던 요아킴이라는 세대주의자에게서 발단한 종교논쟁, 그러니까 베네딕트 파였던 그에게서 시작된 프란체스코 파 내의 갈등과 승인된 교회 조직 바깥의 평신도 공동체들, 그리고 더 나아가 카타리 파와 같은 이단들에 관심을 가지고 추적 중이었고, 내 경우에는 그런 여러가지 정황들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철학의 문제와 관련된, 예를 들자면 진리의 문제나 일자와 다수의 문제에서, 그리고 플라톤주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관련된 이야기를 끌어나갔던 듯 하다. 그리고 결국 무언가 이 생각들을 정리할 글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벌써 그 때로부터 거의 1년이 흘렀다. 이것저것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하던 차에 이 책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뜨고 있는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 때문이다. 바로 웃음의 문제, 이 책에서 제시된 일견 소설을 전개를 위해 곁다리로 등장하는 듯한 이 문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 특히 이 이야기를 그저 추리물 정도로 생각한다면 - 별 것 아닌 이 문제는 실상 소설 전체를 관통하여 청빈 문제나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권(희극론) 그리고 정치 문제에 닿아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 소설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현실이라는 비극, 웃음, <나꼼수> 현상

 

 

약간은 뜬금없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자. 바로 이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의미를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 상황은 어떤 변동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어느 시절이 그렇지 않았겠는가? 문제는 일련의 그런 가능성들과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정치가 정말로 변했던가 하는 것이다. 4.19, 80년 서울의 봄, 5.18, 87년 민주운동 등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언제나 사라져 버린 가능성, 혹은 모호한 파국으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건설된 이후로, 아니 더 나아가 식민지 이후로,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들이 교체된 사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더 이상 지배의 교체 혹은 더 나아가 지배의 폐지가 아닌 관리적 차원에 속하게 되었으며,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혹은 포화)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또는 의회 자본주의의 공고화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민영기업의 CEO 출신 대통령의 선출이 바로 이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정치적 현실은 비극이다. 언제나 법의 저편에 있는(그러나 동시에 법에 의해 실현되어야만 하는) 정의는 그 가능성마저도 찾기 힘든 것이 되어버렸고,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변화를 희구하면서도 동시에 변화의 불가능성에, 다시 말해 정치적 좌절과 무기력함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웃음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관리나 경영이 되어버린 정치에 대한 비웃음,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희망을 주지 못하는 의회정치에 대한 비웃음 말이다. 웃음은 - 그것이 어떤 형태의 웃음이 되었던 간에 -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현실이 되어버린 비극을 볼 때 혹은 그 비극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게 될 때, 사람들은 좌절에 빠져 변화의 가능성을 꿈꿀 수 없게 되지만, 그 비극 속에서 웃음의 요소를 찾아내어 마음껏 웃을 수 있을 때, 바로 그 비극적 동일시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할 공간을 얻게 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근/현대적인 연극들로부터 이런 요소들을 찾을 수 있는데, 비극 속에 혼재된 희극적 요소의 효과를 브레히트는 '거리두기(distancing, 소격효과)'라 명명했던 바 있다.  

 

<나꼼수>가 제시하는 긍정적인 측면은 바로 이런 측면에 있다. 물론 <나꼼수>는 동시에 일정 이상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제시하는 정치는 과거로부터 반복적인 실패를 보였고, 이미 포화되어 버린 재현적 정치(혹은 대의 정치)의 차원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재 <나꼼수>는 현실의 비극적 무기력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어, 이들이 더 이상 비극의 '희생양'이 아니라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사자'가 되도록 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분명 웃음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먼저 비극적 동일시에서 빠져나와 관리 혹은 경영의 차원에 속한 현실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드는 측면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힘을 주어 '양이 사자가 될 때까지 일어서고 또 일어서'게 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드러나는 '웃음의 문제'

 

그렇다면 중세 말엽 유럽에서, 특히 수도원에서 웃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연히 금기시 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웃음의 금기는 플라톤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연관된 신플라톤주의적 신학(호르헤가 대변하는)과 연관된다. 아마도 여기에는 종교와 철학 사이의 모종의 공모가 있었을 터인데, 어쨌든 플라톤의 저작들을 살펴볼 때 글자 그대로의 해석을 하게 되면 플라톤은 웃음을 금기시 하고 있다. 말하자면 웃음은 인간의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 인간이 웃음이라는 감정의 격동에 탐닉하게 하여 올바른 몸가짐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 사실 신학적으로는 이 문제가 더 우위에 있을 것인데 - 예수의 웃음이라는 문제가 거론된다. 신플라톤주의적 학설에 따를 때 신의 아들 예수는 거룩하며 당연히 삼가고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는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그런 해석이 말이다.

 

문제는  먼저 성인들의 증거나 그리고 원전상의 증거가 이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장서관에서 있었던 호르헤와의 논쟁에서 윌리엄은 우선 아벨라르 성인의 자만을 힐난하는 호르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르헤 수도사, 내가 그런 말씀에 찬성할 줄 알았던가요? ...  아시겠지만,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화시키는 데 웃음은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웃음이란 사악한 것의 기를 꺽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 데 요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 마우루스 이야기를 아시겠지요. 이교도들이 이 성인을 끓는 물에다 넣었을 때 이분은 목욕물이 어째서 이렇게 차냐고 불평했습니다. 이교도 형리는 그 말을 믿고 거기에다 손을 넣었다가 그만 병신이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적들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버리신 순교 성인의 쾌거라고 아니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아무리 그렇다라도 그리스도는 웃지 않았으니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호르헤에게 최후의 일격(coup de grace)을 날린다.

 

글쎄요. 나는 그렇게 안 봅니다. 바리사이 인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을 때, 화폐는 거기에 새겨진 형상의 임자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을 때, 재담하시면서, <투 에스 페트루스Tu es petrus>**라고 하셨을 때, 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당황케 하고 제자들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시려고 우스갯소리를 하신 것 같습니다. 가야파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하셨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재담을 하신 것이지요....

 

분명 웃음은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화시키는데 ...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플라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아카시 싱(Aakash Singh)이라는 학자의 논문은 우리가 너무나도 근엄한 것으로 생각해 마지않는 플라톤의 국가/정체(politeia) 편에 얼마나 많은 웃음거리 - 조롱, 힐란, 농담을 모두 합쳐서 - 가 들어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플라톤이 그려내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결코 시종일관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플라톤은 웃음을 사용하여 '의견의 체제' 혹은 통상적이고 전통적인 주류의 의견들이 논리에서 벗어남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선은 플라톤이 그리고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맞섰던 현자들 또는 소피스트들(sophistes)이 대변하는 전통과 당대의 지식에 맞서는 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웃음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정치와 직결될 수 있다.

 

청빈 문제 혹은 usus facti(사실상의 사용) 논쟁

 

<장미의 이름>의 상황에서 당시의 정치와 관련되는 논쟁은 바로 usus facti 혹은 사실상의 사용에 관한 논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소유물을 가졌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가졌던 것은 사용을 위한 것이었을 뿐 소유로 볼 수 없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다. 왜 이 문제가 정치의 문제와 연관되는지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당시 유럽의 상황에 대한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데, 잠시 개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유럽사회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인해 많은 귀족들의 봉토가 왕에게 귀속되는 과정에 있었다. 당연히 세속적인 왕권은 강화되고 그에 반해 교황권은 약화 일로에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중에 서양 역사에서 '아비뇽 유수기'라고 명명되는 1307년부터 1376년까지의 약 70년간 교황이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 지역에 머무르게 되는 기간이 있었는데, <장미의 이름>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시기는 1327년으로 이 기간에 속한다.

 

이 시기에 전개된 이 그리스도의 청빈에 관한 논쟁이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일단 당시 프란체스코 파가 제기했던 그리스도가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았다는 주장에 대해 교황청이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교황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교회 역시 소유를 포기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교황청으로 대변되는 카톨릭 교회는 권력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말하자면 교황청은 이런 성서 해석을 따라 재산과 권력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재산을 가졌던 것이다(예수에게 와서 영원한 생명을 구했던 부자 청년처럼). 따라서 이런 의견을 내놓았던 프란체스코 파에 속한 학자들은 이단으로 단죄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당시 교황권을 억누르고자 하는 반대 세력인 세속 왕권이 이 일단의 학자들의 의견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겠다고 여겼는지 이들을 비호하고 나선다. 소설 내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이탈리아 북부의 한 베네딕트 파 수도원에 모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 내에서 프란체스코 파에 속한 미켈레를 필두로 한 황제 측 사절단과 델 포제토 추기경 및 베르나르 기를 필두로 한 아비뇽 측 사절단이 이 수도원에 모여 논의하게 된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청빈이라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된 자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요아킴이라는 이름의 한 베네딕트 파 수사가 주장했던 세대론적인 종말의 주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이탈리아 반도의 다양한 이단 종파들, 즉 카타리 파, 보고밀 파, 특히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돌치노 파 등등의 민중신앙적 운동들을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와 세속 권력기관들을 습격하는 급진적인 활동을 수행했던 것은 이 자발적인 가난을 부정하고 세속 권력과 함께 부를 축적하는 교회의 행태를 부정하는 측면과 결코 양분할 수 없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 이단들에게 어떤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윌리엄의 모습이다.  

 

윌리엄과 호르헤 -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대 신플라톤주의

 

기실 윌리엄도 그 성향으로 볼 때 토마스 아퀴나스의 호교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에서 벗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대하게 되는 그는 오히려 매우 영국적인, 경험론적인 근대인의 모습을 띄고 있다. 분명 자연학적 지식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그는 이베리아 출신의 장님 수사 호르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여러 학자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용을 통한 신학적 축적으로 인해 뒷방으로 밀려난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을 대변하는 호르헤와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윌리엄과 호르헤가 벌이는 웃음 논쟁 역시 바로 이런 대립과 결을 함께 한다. 호르헤가 다른 수사들이 볼 수 없도록 막고 있었던 장서관의 책, 독을 발라 보는 사람마다 손가락과 혀에 검은 자국을 남기고 죽어가도록 했던, 그리고 종국에는 스스로 독이 발린 책장들을 삼키고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 책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희극론>이기 때문이다.

 

장서관에서 치뤄지는 윌리엄과 호르헤의 마지막 대결 장면에서, "희극을 논하고 웃음을 찬양한 서책은 얼마든지 있소. 왜 하필이면 이 서책이 유포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게 되었던가요?"라는 윌리엄의 질문에 호르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가 이 서책의 저자였기 때문이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은 하나같이 기독교가 수세기에 걸쳐 축적했던 지식의 일부를 먹어 들어갔오.... 오늘날에 와서는 성자와 선지자들까지 신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철학자의 일자 일언이 바야흐로 세상의 형상을 바꾸어 놓기에 이르렇어요. 이 서책이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어 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기어이 넘게 되고 말 것이오.

 

호르헤는 겁을 먹고 있다. 웃음을 비웃는 그가 바로 이 웃음에 대한 책이, "웃음이 예술로 과대 평가되어 있고, 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으로 과장되어" 있는 책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에 대해서 말이다. 호르헤가 이어사 말하는 것은 교회적 권위의 실추에 대한 것이다. 범부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신에 대한, 교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스스로 주인으로 여김으로써 그 주종 관계를 역전시킬 수도 있는" 가능성, 말하자면 그는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즉 이름도 없는 범부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호르헤와 묘하게 겹쳐지는 상이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의 정치는 - 전 세계적으로 -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경제적 실패에 대한, 테러에 대한 공포를 퍼뜨리는 보수적 정치 세력에 의해, 그리고 보수적 언론에 의해, 우리와 같이 이름없는 '범부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지난 약 2세기 동안의 인류의 정치적 진보를 되돌리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작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호르헤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두려움'의 유포자들이라는 점이다.

 

장서관의 화제 - 일자적 진리의 소멸과 새로운 시대의 알림

 

호르헤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없앤다(정확히 말하면 먹어버린다). 그러나 그 책은 사라졌을 망정 시대는 분명히 변했다. 당시 시대적 난맥상을 드러내는 '중세의 가을'은 지나가고 이후 종교개혁과 계몽의 시대는 분명히 도래했다.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범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 시대적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 바로 '장서관'의 화재다.

 

우연이었던 아니면 사고였던 간에, 어쨌든 장서관은 화마에 휩싸인다. 당대의 모든 지식의 보고, 유럽의 어느 수도원도 따라갈 수 없는 지식을 대변하는,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유일한 진리, 일자적 진리를 대변하는 장서관은 몇일 동안 지속되는 불길 속에서 타버린다. 그리고 화재 이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아드소가 다시 방문한 장서관이 있던 자리들에 오직 지식의 편린들만이, 책의 파편들만이 남아 뒹군다. 하지만 통상적인 해석을 따라 이런 귀결을 단순히 어떤 포스트모던적인 진리의 소멸 정도로만 끝내버리고 지나가기에는 무언가 밋밋하다. 무언가 다른 해석은 있을 수 없는가? 비록 중세적 교회의 권위는 소멸했을 망정 역사는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해석의 단초를 윌리엄이 은연 중에 내 비치는 '범부들'에 대한, 또는 '이단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서 찾고 싶다.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교회와 하나의 신앙의 시대 이후 도래하는 종교개혁과 계몽의 시대는 보다 세속적이고 다양한 진리들을 생산해냈던 시대다. 말하자면 장서관의 소멸은 일자적 진리가 아닌 다수의 진리가 탄생하고 인정 받는 시대였다는 말이다. 사실 매우 소설 외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는 없는 이런 이야기는 유일한 진리의 부정이 결코 진리 자체의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리의 문제

 

그렇다면 일자적 진리가 아닌 그러한 진리는 어떤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주장을 소개함으로써 답하고자 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다수의 진리다(정치, 과학, 예술, 사랑). 진리는 우리 주위의 상황 혹은 세계 내에서 인정 받지 못하던 것들(공백)이 어떤 사건을 통해 드러난 이후, 이 사건에 감화된 주체들이 이 사건의 존재를 선언함을 통해 구축해 나가는 일종의 무한한 과정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때 진리로서의 성격을 가졌던 기독교는 예수 사건에 대한 바울의 선언 이후 지속적으로 이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것을 인정받는 과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제도로서 정착된 이후 이 종교는 과거의 운동적 성격을 접어버리고, 체제와 함께 과거의 것들에만 종속되어 있는 모습을 띄게 된다. 이 때 기독교는 진리로서의 성격을 닫아버린 것이다. 또한 진리는 언제라도 악이 될 수 있다. "장서관은 진리도 증거하고 허위도 증거하는 곳이오!"라는 호르헤의 말은 매우 설득력을 지니는 말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잔혹행위와 대량학살이 일자적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던가.***** 바디우는 <윤리학>이라는 저작을 통해 진리가 악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란 확고한 것이 아니라 매우 유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결코 위계화된 질서가 아닌 평등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정치적 진리는 더 이상 주인과 예속된 자의 관계가 아닌 평등이라는 이념을 지향한다. 비록 절차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완성되었을지언정 결코 사회적 위계화와 예속의 관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호르헤가 두려움에 떨며 말하는 "스스로 주인으로 여김으로써 그 주종 관계를 역전시킬 수도 있는" 가능성이 도래하게 할 용기를, 말하자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웃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윌리엄의 말 그대로 웃음은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화시키는 데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으며, "사악한 것의 기를 꺽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 데 요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껏 웃자. 악한 것을 정의롭지 못한 것을, 불합리한 것을 마음껏 비웃으며, 사자가 될 용기를 가지자.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이 시대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명령이다.

 


* 윌리엄 수사의 바스커빌이라는 이름은 이런 특성을 대변한다.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바스커빌의 개>라는 작품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이 문구는 베드로에 대한 말이다. 마태복음 16:18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가 시몬에게 베드로 즉 Petrus를 교회를 쌓아올릴 반석으로 말하는 장면이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농담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너는 돌맹이다', 즉 '너는 돌대가리야' 정도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이 발언이 충직한 성격의 베드로를 비하한다기 보다는 그의 성정을 칭찬하는 의미이기는 하나, 여전히 농담으로 볼 수 있다.  
 

*** Aakash Singh. ≪Laughing at Politics: Rethinking Plato's Republic≫. Dialegesthai. Rivista telematica di filosofia [in linea], anno 6 (2004) [inserito il 30 maggio 2004],http://mondodomani.org/dialegesthai/asi01.htm


**** 플라톤이 그려내는 소크라테스는 argumentum ad absurdum 혹은 reductio ad absurdum이라는 방식으로 부조리에 대해 비웃는다. 이것은 우리가 귀류법이나 간접 증명법이라 말하는 방식인데, 고전 수학의 증명을 담보하는 배중률(principle of excluded middle)과 관련된다.  


***** 우리는 십자군 전쟁 당시 아랍인들의 학살을 자행했던 자들의 구호가 "God wills it!(신이 원하신다!)"였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국가 이데올로기를 위해 혹은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고문 당하고 학살된 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 한 가지 덧붙이는 뱀발. 이 책에서 웃음의 문제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말한다면 잔소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윤기 선생의 번역이 너무 근엄한 문체로 쓰인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는 성서나 플라톤 저작집의 국내 번역판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는 문제다. 앞으로 개선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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