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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Father Brown

(번역) 욥기 서론: 욥, 죽어야 사는 사람 (G. K. Chesterton)



* 역자의 글: 이 글은 2010년 5월에 번역되어서 비평루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번역에서 누락된 부분이 나중에 많이 발견되었고, 또한 전체적으로 번역이 어색한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마침 이번에 비평루트의 복간이 이루어지게 된 터라, 당시에 누락되었던 부분을 새로 번역하고, 문장을 조금 윤문해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원래 욥기의 ‘서론’이라는 제목으로 체스터턴Chesterton, Gilbert Keith이 쓴 글로, 현재 Amazon Kindle Bookstore 등에서 유통되고 있는 체스터턴 전집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욥기라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수수께끼에 가까운 책인 동시에 인간이 신에 대해서 던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에 대해서 체스터턴이 그 특유의 문체로 해설하고 있는 글인지라, 욥기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또한 체스터턴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의 원문은 http://archive.org/details/bookofjob00chesuoft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각괄호 [] 안의 글과 각주는 역자가 첨가한 것이며, 각주의 작성에는 주로 영어 위키백과를 참조하였습니다. 성경 번역은 개역개정판을 사용했습니다.



욥기 서론: 인간은 역설에서 가장 크게 위로받는다.

Introduction: Book of Job “Man is most comforted by paradoxes”


구약성서 가운데 욥기는 철학적인 수수께끼이자 역사적인 수수께끼이다. 이러한 서론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철학적인 수수께끼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측면에 대하여 언급되어야 마땅할 몇 가지 일반적인 설명이나 주의사항 등은 여기에서는 생략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 서사시에서 어떠한 부분이 원저자가 계획하였던 것이고 어떠한 부분이 훨씬 후대에 첨가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격렬한 토론이 이어져 왔다. 학자들의 의견은 서로 불일치하는데 - 사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 학자들의 주된 업무이긴 하다 - 전반적인 연구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실제로 어떠한 부분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면, 산문으로 기록된 서론과 후기는 [확실히] 첨가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젊은이 [엘리후]의 연설과 마지막의 [욥의] 회개가 후대의 첨가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든지, 이 문제에 관하여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일반적인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어떠한 고대의 예술 작품을 다루고자 한다면, 고대의 저작이 점진적으로 [즉 후대에 계속적으로 첨가되었다는] 쓰였다는 사실이 이 저작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건축되어 왔던 것처럼, 욥기도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건축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구전 시가를 쓴 사람들은, 실제 연대와 실제 저자에 대해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원저자와 원연대에 우리가 흔히 부여하는] 그러한 중요성이란 모든 면에서 근대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개인주의의 창조물인 것이다. 종교적인 어려움들이 뒤얽혀 있는 욥기를 일단 미뤄 두고, 다른 예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일리아스를 예로 들어 보자. 많은 사람들이 근대 회의주의의 특징이 되는 도식을 일리아스에 적용시킨다 - 호메로스의 저작들은 호메로스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호메로스라고 자처하는 다른 사람이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모세의 저작들은 모세가 아닌, 모세라고 불리는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리아스에 관해 분명히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설사 다른 사람들이 어떤 구절을 이 저작에 삽입하였다 하여도, 그 당시의 그러한 행동은 지금과 같은 개인주의적 시대에 그러한 행동이 불러 일으킬 정도의 충격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부족이 창조한 서사시는 어느 정도까지는, 부족의 사원 건축과 마찬가지로, 그 부족 전체의 창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한다면, 욥기의 서문과 후기, 그리고 엘리후의 연설이 원래의 저작이 쓰인 이후에 삽입되었다고 믿어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삽입이 근대의 개인화 혹은 개별화된 책에 이루어지는 삽입처럼 책을 명백히 위조물로 만든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삽입을 조지 메러디스가[각주:1] 쓴 책에서 이후에 실제로는 그가 쓰지 않은 한 장을 발견한 것과 같이 취급해서도 안 되고, 입센의[각주:2] 희곡에서 윌리엄 아처에[각주:3] 의해 교묘하게 삽입된 장면 일부처럼 간주해서도 안 된다. 일리아스나 욥기처럼 오래된 시를 만들어 낸 옛 시대는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전통을 언제나 지켜 왔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을 자기 자식이 추수하도록 물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쓰던 시를 자기 자식이 마무리하도록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통일성Homeric unity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일리아스는 한 사람에 의해 쓰였을 수도, 백 명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백 명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통일성이란 지금 한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통일성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 당시에는 한 도시가 마치 한 사람과도 같아 보였다. 지금은 한 사람이 마치 내전 중에 있는 한 도시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학자들이나 궁금해 할 이러한 통일성에 대한 질문을 다룰 필요 없이, 학문적인 수수께끼에 대해 우리는 모든 위대한 전통적 창조물이 통일성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 예컨대 캔터베리 대성당이 [많은 이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을 지니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 이 책이 통일성을 지닌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내가 철학적 수수께끼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욥기는 분명히 구약성서의 정경에 포함된 대부분의 책들과 구별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욥기에 통일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약성서가 단지 느슨하게 긁어모아진 도서관이며, 따라서 어떠한 일관성이나 목적도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약성서라는 이 결과물이 어떤 우월한 영적인 진리에 의해서 나온 것이든, 아니면 꾸준히 이어진 민족적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든, 아니면 단지 후대의 정교한 선택에 의한 것이든 구약성서에는 충분히 지각될 만한 통일성이 존재한다. 이 주요한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 구약성서를 이해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작가가 어떠한 철학적 소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 하나를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의 이야기를, 덴마크의 해적 왕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읽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독자는 햄릿이 [계속] 주저하는 것이 작가의 입장에서는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한 독자는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대체 얼마나 오래 걸려야 셰익스피어의 주인공은 원수를 죽이는 거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을 파괴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불행히도 그들은 근본적으로는 성경을 숭배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각주:4] 그들은 구약성서의 특별한 어조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단지 더 강한 힘 [즉 신]의 도구일 뿐이라는 구약성서의 근본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의 판관들 [혹은 사사들]과 예언자들의 잔인함과 [신에 대한] 반역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이 머리 속에 진짜로 가지고 있는 개념이란 이러한 주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 역시 [어떠한 의미에서는] 기독교인이다. 그들은 기독교 이전 시대의 문헌 속에서 순수하게 기독교적인 아이디어를 – 성인saints의 개념이라든가, 신의 가장 주된 도구는 아주 특별하게 좋은 사람들이라든가 –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유대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극단적이고, 훨씬 친근하며, 훨씬 흥미를 끄는 생각이다. [이러한] 순수함에는 어떠한 대단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여러 국가,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계를 만들어 온 생각이다. 하지만 구약성서의 사상이란 강한 것은 강한 것이고, 교활한 것은 교활한 것이며, 세속적인 성공은 세속적인 성공이고, 야훼는 이러한 것들을 자연의 힘이나 물리적인 요소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용한다는, 이런 상식적이라고 불릴 법한 생각을 훨씬 넘어선다. 야훼는 영웅의 힘을 매머드의 힘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용한다 – 매머드의 어떤 특별한 측면을 고려함이 없이 말이다. - 나는 어떻게 그 많은 수의 단순한 회의론자들이 야곱이 사기를 친 이야기 같은 글을 읽고, 이 글을 쓴 사람이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야곱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좀도둑sneak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가정을 하는지[각주:5]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원시 시대 사람들에게 있었던 명예에 대한 개념은 [야곱을 좀도둑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와 그렇게까지 많이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회의론자들은 현대 회의론자들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은 족장들이 [일종의] 본보기를 의미한다고 망상한다. 그들은 야곱이 일종의 성인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망상한다. 그리고 그 경우 나는 그들이 조금은 놀랐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당황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 [즉 그들의 생각]은 구약성서에 흐르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구약의 영웅들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알라딘의 노예였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신의 노예다. 위대하고도 끔찍한 노예다.


구약성서의 상당 부분에서 나타나는 중심적인 사상은 신의 고독함이라는 사상일 것이다. 신은 단순히 구약성서의 유일한 ‘주요’ 등장인물이 아니다: 신은 사실 구약 성서의 ‘유일한’ 등장인물이다. 신이 목표하는 바의 분명함과 비교해보자면,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다른 모든 의지는 동물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둔탁하면서도 비자발적일 뿐이다. 신의 현실성actuality과 비교해보자면, 모든 육신의 아들들은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보면 볼수록 이러한 기록들은 충격적이다. “그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이사야 40:14).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이사야 63:3). 모든 족장들과 예언자들은 단지 신의 도구이거나 무기일 뿐이다: 신이 바로 전쟁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신은 여호수아를 도끼처럼 사용하고, 모세를 측량대처럼 사용한다. 신에게 있어서 삼손은 칼일 뿐이고, 이사야는 트럼펫일 뿐이다. 기독교에서 성인은 신과 같은 존재로 간주되지만, 실상은 신의 조그마한 조각상일 따름이라는 의미에서 신과 같은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다. 톱이나 망치가 목공과 동일한 형상을 지니지 않은 것처럼, 구약성서의 영웅들은 신과 똑같은 본성을 지니지 못한다. 이것이 히브리 문헌들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핵심적인 생각이며 특징이다. 이 문헌들에는 위대한 원시적인 산문들과 시에서라면 결코 부족하지 않게 나타나는, 셀 수 없이 많은 거친 유머들과 예민한 감정과 강력한 개성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유지된다: 신은 인간보다 강력하고, 인간보다 더 은밀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신은 그 이상이다. 신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더 잘 이해한다. 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소 불분명하고, 비이성적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방황하는 짐승들과 같은 어떤 것이다. “그는 둥근 땅 위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사 40:22).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구약성서는 신의 인격성에 대해서 너무나도 집중하고 있는 나머지 인간의 비인격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거대한 우주적인 지성이 어떠한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안정하고 공허한 것이다: 인간은 그것의 영속성을 보장할 만큼 충분히 집요하지 못하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즉, 다른 모든 부분에서, 구약성서는 신의 목적과 비교하였을 때 인간이 소멸되는 것을 기뻐한다. 욥기는 이런 점에서 분명히 독특하다. 욥기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질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의 목적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의 비참한 인간성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물론 더욱 위대하고 더욱 친절한 [신의] 의지를 위해 우리 [인간] 자신의 하찮은 의지를 없애는 것은 충분히 쉬운 일이다. 하지만 신의 의지가 과연 더욱 위대하고 더욱 친절한 것인가? 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도구를 사용하게 하자. 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도구를 부수도록 하자. 하지만 과연 신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 도구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부서지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질문 때문에, 우리는 욥기의 수수께끼를 철학적인 수수께끼로 여기고 씨름하여야 한다.


욥기가 고대의 문헌들 가운데 가장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이 책의 중요성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욥기가 근대의 문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책이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물론 이 두 표현들 가운데 어떤 것도 이 문제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종교성과 인간의 근본적인 비종교성은 낡은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영원한 것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건 철학이 아니다. “이것은 내 의견이지만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라고 말하는 근대적인 습관은 완전히 비합리적인 것이다. 내가 어떠한 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이 내 의견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서로 다른 철학이 있다: 이것이 나의 철학이며 이것이 나에게 맞다”라고 말하는 근대적인 습관은 단지 나약한 기질의 표현일 따름이다. 우주적인cosmic 철학은 인간에 맞추기 위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주적인 철학은 우주에 맞추기 위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적으로 종교를 소유할 수 없다. 이는 인간이 개인적으로 해와 달을 소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욥기의 첫 번째 지적인 아름다움은 이 책이 실재성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에 관한 즉 어떤 것의 단순한 피상적인 측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과연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욕망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다. 근대인들이 이 책을 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단지 욥의 위로자들은 본성적으로 “낙관주의자”들이며 욥은 본성적으로 “비관주의자”라고 말함으로써 욥과 그의 위로자들이 단지 사람들이 흔히 기질이라고 부르는 서로의 차이를 단순히 지적하는 것만으로 서로 논쟁을 피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욥과 그의 친구들은 적어도 때때로는 분명히 참이 아닌 어떤 것을 말하자고 합의함으로써, 서로 충분히 위안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비관주의자”라는 단어에 어떠한 의미가 있다면, 욥은 분명히 비관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실례만으로도 우리는 모든 것을 육체적 기질로 설명하려는 근대의 우스꽝스러움을 논박할 수 있다. 어떻게 보더라도, 욥은 인생을 우울한 관점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바로 낙관주의자라면, 욥은 낙관주의자이다. 그는 혼란에 빠져 있는 낙관주의자이다. 그는 분노한 낙관주의자이다. 그는 분노한, 모욕을 당한 낙관주의자이다. 그는 이 우주가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이 우주가 기대를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 우주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이 설명을 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욥은 존 햄든이[각주:6] 찰스 1세Charles I에게 설명을 요구할 때처럼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는 아내가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는 남편에게 설명을 요구할 때처럼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의 창조주를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에 창조주에게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전능자를 자기의 적이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는 절대로, 마음 한 구석에서라도, 그의 적에게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정교하고도 유명한 신성모독적인 이 구절에서 욥은 말한다: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31:35). 그는 결코 이 고소장이 잘못 쓰였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는 확신을 받고 싶어한다. 즉, 그는 신이 자신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요약하자면, ‘낙관주의자’라는 단어에 어떠한 의미가 있다면 [과연 그러한지는 의심스럽지만], 우리는 다시금 욥은 낙관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세계의 기둥을 흔들면서 미친 듯이 천국을 두드린다. 그는 별들을 후려친다: 하지만 별들을 침묵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별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기 위해 후려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공식적official 낙관주의자들, 즉 욥의 위로자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비관주의자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과연 그런지 의심스럽지만], 욥의 위로자들은 낙관주의자라기보다는 비관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믿는 것은, 신은 선하기는 하지만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신을 선하다고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들을 [약육강식을 따르는] 진화론자라고 부르는 것은 과도한 비난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화론적 낙관주의자들이 범하는 치명적인 오류와 비슷한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몇 가지의 지저분한 것이 서로 조화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의미에서 위로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우주의 이 모든 것이 서로 다른 것들과 조화가 된다고 끊임없이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 시의 위대한 절정에서 신이 어떻게 이 특정한 논증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지 보게 될 것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소 별안간) 신이 등장할 때, 이 모든 것을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하게 만드는, 급작스럽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화려한 기록이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간들은 - 특히 욥은 - 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평범한 시인이었다면 어떤 의미에서든 신이 이들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게 하기 위해 신을 등장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듯한 손길로, 시인은 신이 등장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 일련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 회의주의적인 드라마에서 신은 스스로 회의주의자의 역할을 떠맡는다. 신은 모든 위대한 인물들이 종교를 방어하기 위해 항상 던 일을 한다. 예컨대, 신은 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을 한다. 그는 합리주의가 합리주의 자신을 공격하게끔 만든다. 그는 질문을 할 때가 오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인간 질문자들을 내던져버리고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절묘한 직관에 따라, 역설적으로, 시인은 신이 -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로 - 그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신은 기꺼이 그것을 공정한 지적 결투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8:3). 영원자는 이 거대하면서도 냉소적인 비천함을 받아들인다. 그는 아주 기꺼이 기소당하길 바란다. 그는 단지 모든 기소당한 자들에게 있는 권리를 요청할 뿐이다: 그는 기소에 따른 증인들을 상호 심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신은 법률적 대상 [욥]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말해서, 신이 욥에게 묻는 첫 번째 질문 욥에 의해 고소당한 어떤 범죄자이든지 당연히 물을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는 욥에게 당신이 과연 누구인지 묻는다. 그리고 탁월한 지성을 지닌 인물인 욥은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에 그 대답을 알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이 법적 심리의 정점이 되는 신의 연설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하는 첫 번째 위대한 사실이다. 신의 연설은 더욱 강한 회의주의에 이끌리는 모든 인간 회의론자들을 표상한다. 때로는 위대한 지성들에 의해, 때로는 평범한 지성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던 이러한 방법이 바로 진정한 신비주의자들의 논리적 무기가 되어 왔던 방법이다. 예전에 이야기하였듯이, 소크라테스는 충분한 궤변을 허락하였을 때에만 궤변론자들sophist을 논파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바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천국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사두개인들에게, 천국에서의 결혼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결혼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도 없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18세기, 기독교 신학이 붕괴되던 시기에, 버틀러는[각주:7]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합리주의적 논증은 교리가 갖추어진 종교나 정체가 불분명한 종교나, 합리주의적 윤리학이나 기독교 윤리학이나 (무엇이든지) 동일한 방식으로 논파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방법이 종교적인 믿음을 지닌 인간은 – 뉴먼 추기경이나[각주:8] 발푸어나[각주:9] 말록[각주:10] 등 - 철학적인 의심도 동시에 지닌다는 사실의 기원이자 이유이다. 이러한 실례들은 삼각주로 흘러드는 작은 지류들이다: 욥기는 강을 만들어내는 최초의 거대한 흐름이다. 의심하라고 거만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다룰 때 의심을 멈추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옳은 방법이란 계속 의심하라고, 조금 더 의심하라고, 매일 이 우주에 있는 좀 더 새로운 것들, 좀 더 야생의 것들에 대해서 의심하라고 이야기해 줌으로써 마침내 이상스러운 깨달음이 찾아와서 그가 스스로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이 연설을 감동적으로 만드는 첫 번째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탁월한 영감으로 마지막에 신을 등장시키는데, 이는 수수께끼에 대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수께끼를 내놓기 위해서이다. 이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이 작품을 단지 철학적일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만드는 또 다른 위대한 사실은, 단순히 불가해한 것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욥을 갑작스럽게 만족시키는 또 다른 위대한 놀라움의 순간이다. 겉보기에 야훼가 제시하는 수수께끼는 욥의 수수께끼보다 더욱 어둡고 더욱 절망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욥은 야훼의 연설 이전에는 위로를 받지 못하다가 그 이후에야 위로를 받는다. 욥은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무섭고도 흥분되는 그 무언가의 분위기를, 너무나도 좋기 때문에 차마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의 분위기를 느낀다. 신이 자신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의 계획에 대한 분명한 단서가 된다. 신의 수수께끼는 인간의 해결책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이다.


세 번째로,[각주:11] 물론 신이 신을 정죄하거나 변호하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논박한다는 것은 놀라운 충격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를 똑같은 망치로 쓰러뜨린다. 그리고 기계적이고도 거만한 욥의 위로자들과 연관될 때 비로소 내가 이야기했던 더욱 심오하고도 정교한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기계적인 낙관주의자들은 만물이 합리적이고도 연속적인 패턴이라는 주장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한다. 그는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지점이 바로 -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 신이 그에 답변하면서 명시적으로 폭력적이 되는 지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것도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38: 28). 그는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뚜렷하게 모든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주장한다.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38: 26). 신은 인간이 비실재의 검은 배경을 뒤에 놓을 때에만 인간이 사물을 볼 수 있게 만든다. 신은 욥이 말도 안 되는 세계를 볼 수 있을 때에만 이 놀라운 우주를 볼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을 놀라게 하기 위해 신은 일시적으로 신성모독자가 된다: 아마도 우리는 신이 일시적으로 무신론자가 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욥 앞에서 말, 독수리, 갈까마귀, 야생 당나귀, 공작, 타조, 악어 등 창조물들의 긴 파노라마를 펼쳐놓는다. 그는 그것들 각각을 마치 태양에서 걸어나오는 괴물처럼 묘사한다. 이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 놀라움을 담은 일종의 시편 내지는 야상곡이 된다. 이 모든 것을 만든 이는 그 자신이 만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것을 우리는 세 번째 요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욥은 질의를 제출한다: 신은 경탄으로 답한다. 세계란 설명이 가능한 것이라고 욥에게 증명해 주는 대신, 그는 세계가 욥이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 연설에서 다수의 훨씬 단순한 서사시에서 발견되는 무의식적인 예술적 정확성으로 또 다른, 하지만 훨씬 더 섬세한 것을 성취한다. 야훼는 이 의도적인 선언에서 자신의 엄격한 불가해성을 한 번도 완화시키지 않고, 은유 여기저기에 삽입된 이미지를 통해 신의 비밀이 근사한 것이고 결코 서글픈 것이 아니라고 갑작스럽지만 또한 화려한 모습으로 제안한다: 그러나 이 제안은 닫힌 문의 틈새에서 우연히 새어나오는 빛처럼 반쯤은 우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 더 낙관적인 암시가, 마치 전능자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암시해 두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는 양, 다른 것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그 때에 나타나는 그 본능적인 정확성과 미려함이란 순수하게 시적인 의미에서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를 들어, 야훼가 욥에게 땅의 기초가 놓일 때 욥이 어디에 있었는지 묻고 나서 (마치 단지 날짜를 확정하는 것처럼) 신의 아들들이 기뻐 외치던 시간에 대해 통렬하게 풍자하는 구절을 생각해볼 수 있다(38: 4-7). 이 빈약한 정보만으로도, 우리는 기뻐 외쳐야 할 어떤 것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또는, 신이 물리적인 우주의 단순한 목록 속에서 눈과 우박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그것들이 전쟁의 날을 대비하기 위해 보관해 놓은 보물이라고 말한다(38: 22, 23): 이것은 악이 마침내 무너질 거대한 아마겟돈에 대한 암시이다.


예술적인 관점에서, 검은 구름의 가장자리에서 빛나는 불타는 황금빛과도 같은, 불가지론 속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낙관주의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서사시의 야만적인 기원을 피상적으로 살펴보는 사람들은 인과적 직유법이나 우연한 구절들에서 이렇게나 풍부한 예술적인 중요성을 읽어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롤랑의 노래나[각주:12] 오래된 민요들처럼, 절반쯤은 야만적인 시가들에서 나타나는 위대한 예들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면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원시적 시가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 의식적인 형태는 단순하지만 더욱 정교한 시적 효과가 미묘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일리아스는 헥토르와 살페돈에게 서글프지만 기사처럼 용맹스러운 체념의 느낌 혹은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표현해 내는데, 이 분위기는 비관주의라고 불릴 만큼 씁쓸하지 않으면서도 낙관주의라 불릴 만큼 쾌활한 것도 아니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느낌을 결코 세련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는 단순한 단어들로 그러한 느낌을 표현한다. 롤랑의 노래는 기독교가 그 자신의 영웅에게 역설을 부여한다는 생각에 대해 표현한다: 그들의 이상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잔혹함이 그들의 죄악이 불러오는 커다란 겸손과 합쳐진다는 역설 말이다. 물론 롤랑의 노래는 이러한 것을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생각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마찬가지로, 욥기에는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작가의 영혼에는 있었을 여러 가지 미묘한 결과물들이 틀림없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나는 욥기가 이후의 유 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어떤 영향을 미치기는 미쳤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 학자들조차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욥기에 어떤 영향력이 있다면, 이러한 영향력이 엄청난 붕괴와 부패에서 유대인들을 보호해 왔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신이 과연 변함없이 지상의 형벌로 악을 처벌하는지, 그리고 지상의 풍요로 미덕에 상을 주는지 질문한다. 유대인들이 이 질문에 잘못된 대답을 했다면 그들은 인류 역사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근대의 잘 교육된 사회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풍요가 미덕의 보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재난이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풍요가 미덕의 보상으로 간주된다면 [즉 미덕은 풍요를 가져온다], 사람들은 오히려 풍요를 미덕의 징후로 간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즉 풍요가 우선이 된다]. 인간은 선한 사람들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임무를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좀 더 쉬운 임무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근대의 상업과 저널리즘에 누누이 나타던 이러한 사상이 욥의 위로자들의 사악한 낙관주의가 궁극적으로 가져다 줄 네메시스이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사상에서 보호받았다면, 바로 욥기가 그렇게 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장된 것처럼, 욥기는 관습적으로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주목할 만한 저작이다. 욥은 그의 불행이 그의 죄 때문인지, 그를 발전시키려는 어떠한 계획의 일부인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서론에서 우리는 욥이 최악의 사람이 아니라 최고의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본다. 이 저작이 주는 교훈이란, 인간이 역설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가장 어둡고 가장 이상한 역설이 있다: 그리고 욥기는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언약들 가운데 가장 위로가 되는 언약이다. 최악의 운명을 만난 최고의 사람이라는 역설이 어떤 거대하고 이상한 역사로 이어질지 굳이 내가 추측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장 자유롭고 가장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하나의 전범이 될 만한 구약의 인물이 있다고 내가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는 욥의 상처가 무엇을 예표하는지 굳이 내가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 George Meredith (1828년 2월 12일 – 1909년 5월 18일).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에고이스트’ 등의 소설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2. Henrik Ibsen (1828년 3월 20일 – 1906년 5월 23일).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 ‘인형의 극’등의 희곡으로 유명하며, 현대극의 시조가 되는 인물로 여겨진다. [본문으로]
  3. William Archer (1856년 9월 23일 – 1924년 12월 27일). 스코틀랜드의 비평가이며, 입센의 희곡을 영어권에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본문으로]
  4. 원문은 다음과 같다: So speak the Bible smashers, who are unfortunately always at bottom Bible worshippers. 일단은 at bottom을 ‘근본적으로는’이라고 번역했지만, 이 말을 체스터턴이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개신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이전이다. 바로 아래 이어지는 문단에서 드러나듯이, 체스터턴의 초점은 오히려 성경에서 나오는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내용을 기반으로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다. [본문으로]
  5. 즉 지금의 우리의 시각에서는 야곱은 좀도둑에 불과하지만, 당시의 저자는 야곱이 좀도둑이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야곱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으로 기록했다는 주장. [본문으로]
  6. John Hampden (1595년 –1643년). 영국의 정치가로, 1642년 찰스 1세가 불법적으로 체포하려고 했던 영국 의회의 다섯 명의 의원들(Five Members)의 일원이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잉글랜드 내전(England Civil War)의 계기가 되었다. [본문으로]
  7. Joseph Butler (1692년 – 1752년). 영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토머스 홉스와 존 로크의 이론에 대한 비판으로 알려져 있으며, 데이비드 흄, 토마스 리드, 애덤 스미스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본문으로]
  8. John Henry Newman (1801년 2월 21일 – 1890년 8월 11일). 영국 성공회의 사제이자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으나, 가톨릭의 전통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의 주역이었으며, 결국 가톨릭으로 회심하였다. [본문으로]
  9. Arthur Balfour (1848년 7월 25일 – 1930년 3월 19일).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정착하도록 허락하는 밸푸어 선언으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10. William Hurrell Mallock (1849년 2월 7일 – 1923년 4월 2일). 영국의 문필가. [본문으로]
  11. 원문에도 두 번째가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12. The Song of Roland / La Chanson de Roland. 중세 프랑스의 서사시. 샤를마뉴 대제가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패배했던 전투와 그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나 전체적인 문화적 배경은 12세기 초기의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