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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우리는 신념에 따라 사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최근 이석기 사태에서 보듯, 신념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들의 과거에 붙박힌 시대착오적 신념은 SF식의 망상처럼 보인다. 그들의 신념도 나름대로는 신념이겠지만, 사회적 상황과 동떨어진 그 신념은 단지 자위나 망상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때문에 신념 자체의 위상과 가치를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허나 우리가 신념에 따라 사는 삶의 양식을 비웃은 지는 오래되었다. 이미 90년대부터 ‘거대 서사의 죽음’, ‘큰 타자의 죽음’ 등 포스트모던적 주장들과 더불어 이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무엇보다 IMF 이후 한국사회에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신념을 먹고 살지 않는다. 돈을 위해선 신념과 도덕을 배반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게다가 가치의 전도도 발생했다. 더 이상 우리는 졸부를 비난하지 않는다. 도리어 부러워한다. 새해 인사가 “부자되세요”가 된 지도 오래다. 처음에는 그 말에 거부감을 갖다가 이제는 대다수가 그것에 익숙해졌다. 따라서 굳이 부(富)를 감출 필요도 없고, 검소한 척 위장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물론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살아야 되나’라고 되뇌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대중매체는 끊임없이 ‘진정성’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며, 일상에서 사라져가는 신념을 간접적이나마 느끼게 해준다. “아, 그래 아직 나는 진정성과 신념을 모두 잃지는 않았어” 하지만 생각이 어떻든 이미 나의 몸은 나도 모르게 신자유주의의 습속에 따라 살고 있다. 생각보다는 실천이 결국 중요하지 않은가.


신념은 몰락하고 있지만, 이처럼 물질화된 ‘이데올로기’는 결코 종언을 고하지 않았다. 아무리 신념 같은 건 없다고 외쳐봤자 이데올로기의 구속에서 벗어나긴 어려운 것이다. 어떤 신념과 이데올로기에도 거리를 두려는 쿨한 ‘냉소주의’조차, 슬로터다이크와 지젝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신념과 구식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자리에 전체주의적 또는 파쇼적 무게를 필터링한 건강한 실용주의가 들어설 줄 알았더니, 외려 이데올로기만 만연하게 된 셈이다.


단순한 인상이지만, 이와 관련하여 한국사회에서는 ‘기회주의opportunism’가 가장 숭고한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냉소주의는 어쩌면 기회주의로 가는 길을 예비하는 전(前) 단계가 아닐까?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판하거나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 일하던 사람들도, 막상 사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목도하게 되면 서서히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냉소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어차피 변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기회주의적 마인드로 발전하는 것은 아닐까? 기회주의의 기본 공리는 “착하게 살아봐야 손해다”, “내부고발자는 배신자일 뿐이다”, “올바른 것이 정의가 아니라, 이기는 것이 정의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일 뿐이다”와 같은, 우리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선택의 기로마다 떠올리는 말들이 아닐까?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현대사는 정직하게 살거나 올바르게 산 사람이 대접받은 역사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친일에 대한 처벌도 유야무야되고, 군사 쿠데타에 대한 처벌도 유야무야 넘어갔다. 친일파의 후손을 처벌하기엔 이제 많이 늦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우리들의 머리속에서 가치의 전도를 일으켜서는 안될텐데, 아마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듯하다. 가치의 전도의 결과물이 바로 기회주의이다. 친일파는 한국 기회주의의 신전 맨 앞자리에 배치된 듯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냥 조용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기회주의를 증폭시키고 정당화시키는 가치의 전도를 일으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친일파 이외에도, 여러 기회주의 세력들이 한국사회의 계속해서 핵심 권력을 차지해 온 것이 한국의 현대사이다. 이러한 한국의 현대사는 우리들 개인의 삶 속에서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타협해야 한다.”는 마인드로 귀결된다. 타협이란 환경과 상황에의 적응이다. 적응은 ‘주어진 현실’을 용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설령 이념적으로는 이 세계를 용인하지 않더라도, 실천적으로는 용인하는 것이다.


이렇듯 기회주의는 주어진 현실에 머무를 뿐, 이 세계 너머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국정원 대선 개입 국정조사에서 국정원 직원과 경찰 직원들은 모두 입을 맞추고 권은희 수사과장과 ‘정반대’의 말을 하였다. 그들은 마치 대본을 읽는(실제로 국정원 직원들은 장막 뒤에 숨어서 대본을 읽었다!) 연기력 딸리는 배우들 같았다. 그들이 읽은 것은 기회주의의 대본이었다. 하여, 권은희 과장은 기회주의 세력들에 의해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청문회 현장은 마치 의인이 한 자리 수도 안 되었던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보였다. 아마 그들은 처음에는 용기가 안 났을 것이다. “과연 내가 솔직히 말하면 이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주어진 현실에의 적응 과업이 무너질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한걸음씩 가다 보니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 가던 길로 가야겠다는 오기까지 생겼을 것 같다. 결국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어설픈 기회주의적 대본 읽기를 반복했다. 만일 국정원 직원 중 한 두명이라도 청문회 현장에서 ‘폭로’를 감행했다면, 아마 모든 국정원이 차린 무대와 대본은 박살이 났을지 모른다. 그만큼 청문회 현장은 연약한 개인이 ‘거대한 폭로’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권은희 과정은 거대한 폭로를 감행했다.


기회주의의 이 같은 지배, 그리고 그것을 더욱 증폭시키는 신자유주의의 생존경쟁은 계속해서 우리의 사고 지평을 이 세계 내로 제한시킨다.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기회주의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를 비판하고 있고, 비판적 사고방식도 갖고 있다. 내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은 충분히 비판적이고 삐딱하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의 비판적 사고는 변하지 않는 현실에 가로막혀 냉소주의로 귀결되고 있는 것 아닌가? 어쩌면 다수의 냉소주의자 반대편에, 편집증적 망상을 제조하는 이석기와 그 부류들이 놓여있을지도 모른다(오른편에는 아마도 ‘일베’가 있을 것이다). 양자는 일종의 공생관계일지도 모른다. 그들도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냉소를 부인(denial)하다가 그렇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냉소주의와 편집증적 망상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다가 기회주의라는 블랙홀로 빠져들 것인가? 혁명의 가능성이 적어지거나 사회가 바뀌지 않더라도 계속 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물론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비판은 계속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는 심적 추진력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어쨌든 역사적으로 ‘세계의 바깥’을 상상해온 기록이기 때문이다. 비판하되, 상상의 지평은 지금 이 세계 바깥으로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계속 비판하고 계속 바꾸어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바깥에 대한 상상은 망상으로 치닫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여과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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