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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난은 신의 뜻”이라는 사고방식, 그리고 그것을 국가의 역사적 운명에도 적용하는 사고방식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옛날의 주술적 세계관, 운명론적 사고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창극의 역사인식은 결코 문창극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한국 보수 개신교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의 역사인식이 모두 엉망이자 문제인가? 사실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서술한 한국 신학사(또는 신학의 범주를 넘어서는)의 역작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이다.


함석헌 선생도 민족의 고난에 직면하여, 신의 뜻과 민족의 역사를 연결시켜 사고했다. 민족의 고난에 신의 뜻이 있다고 했다. 표면상으로는 문창극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국 보수개신교나 문창극과는 달리 함석헌 선생의 저작은 고전 중의 고전이며, 한국 진보진영과 민중신학 진영에서 폭넓은 인정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양자 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첫째, 문창극과 함석헌의 차이점은, ‘고난의 원인제공자’가 다르다는 점이다.

문창극에게서 신은 파시스트이자 새디스트이다. 경제발전이라는 텔로스를 위해 민중 학살도 마다하지 않는다. 일제통치, 6.25와 민족분단, 심지어 독재도 정당화된다. 신정론이자 신정을 정당화하는 담론이다.

함석헌에게서 신은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는 신이다. 고난의 원인제공자는 일제 같은 외세와 지배층, 권력자들이다. 그래서 함석헌의 역사인식은 고난받는 자와 함께 한다. 신의 근본적 뜻은 민중들의 번영일뿐 고난이 결코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성서적 역사관이다. (물론 성서에서 문창극과 같은 ‘승리주의적 사관’을 뽑아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역사신학자들에게 맡겨두자.)

둘째, 시간관의 차이가 있다.

문창극 같은 인식에서, 고난은 실제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 경제발전된 세계만이 목표이므로, 그의 시선에 고통받는 역사적 시기는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과정에 머무른다. 오히려 신에게 그 시기의 고통을 ‘떠넘기는’ 것이며, 나아가 지배계층의 죄악을 덮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문창극의 역사인식은 “가해자를 신을 빌어 용서해버리는” 역사관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본 적 있지 않은가? 결국 문창극의 역사관은 ‘면죄부’ 역사관이다.

반면 함석헌의 역사관에서 주인공은 고난받는 민중이다. 고난의 과정도 의미가 있다. 해방 자체가 목표라기보다 해방의 과정도 중요한 것이다. 물론 함석헌의 사상도 5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신정론적 시간관, 근대의 직선적 시간관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과거 굳이 맑스주의적 역사관보다 함석헌의 역사관이 대중들에게 소구력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함석헌의 역사인식이 단순한 근대의 목적론적 역사관과는 뭔가 다른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성서를 둘러싼 역사인식 문제는 단순한 백년전쟁도 아니고, 이천년 전쟁, 나아가 오천년 전쟁일 수도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를 지배했던 ‘사회진화론’은 사실 기독교의 승리주의적 역사관과 거의 동질성을 갖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기독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글_박치현(연구집단 카이로스 회원, 사회학 강사)
*이 글은 ㅍㅍㅅㅅ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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