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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반봉건사회

 

 

마르셀(CAIROS)

 

 


1. 외디푸스, 근대인간

 

 

  근대에 이르러 주관과 객관은 분리되고, 특수와 보편은 나뉘었다. 어떠한 특정 개인도 보편과 객관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왕이 곧 국가이고, 왕의 말이 법이었다. 그러나 근대 국가에서 왕은 국가가 아니고, 왕의 말도 법이 아니다. 왕도 법 아래에 존재한다. 법과 국가로 상징되는 보편과 스스로를 동일시 할 수 있는 주체는 근대국가에 없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오직 사제들만이 신의 뜻을 알 수 있었고, 그랬기에 그들 사이의 논쟁과 회의를 통해서 보편적인 신의 뜻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넘어서면서 모든 이들이 신의 뜻을 알 수 있는 존재가 된 대신, 어떤 사람도 신의 뜻을 독점할 수 없다. 성서에 대한 해석학이 출현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신의 뜻을 해석할 수는 있으나, 신의 뜻 그 자체를 알 수는 없는 상태. 이처럼 누구도 로고스를 독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근대 세계이다.


  로고스와 주체사이에 존재하는 이반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기에 근대의 상징세계와 근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에게는 부정과 결여, 타자성이 존재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헤겔은 역사를 도입했다.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변증법과 역사를 향한 여정. 체제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는 내부에 항상 부정의 계기를 포함하면서 시간과 만나 이행하고 발전한다. 


 
이러한 역사의 발전을 표현해주는 단어가 체제(regime)이다.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특정한 체제의 형성은 그 이전의 시간과 단절적인 것으로 표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형성된 체제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엄청난 퇴행으로, 반동으로 여겨진다. 일단 체제가 확립되고 나면 체제의 틀 내에서 게임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세계의 역사는 체제의 해체와 구성이 반복되는 역사이다. 


  로고스와 주체 사이의 이반은 소쉬르에 의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이반이라는 언어학적 용어로 번역되었고, 라캉은 ‘이반’을 ‘미끄러짐’으로 번역하여 정신분석학으로 이를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상징계로의 진입과정에서 반드시 발생하는 부정의 계기를, 그의 스승이 발견한 외디푸스 이야기로부터 가져온다. 근대인간은 세계 속에 살기 위해 외디푸스라고 하는 부정의 계기를 거쳐야만하고, 그랬기에 스스로 로고스와 동일화되지 못한다. 보편과 객관이라는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고 늘 미끄려져 내려오는 근대 세계 속 주체들은, 그 자신의 지위와 관계없이 외디푸스적 부정의 계기를 가진 주체들이다.


 
상징계의 법에 종속된 존재이자,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한 결여(manque)와 부정을 내포하고 있는 주체가 외디푸스라면,[각주:1] 들뢰즈의 ‘앙띠 외디푸스’는 이를 부정과 결여를 넘어 욕망을 긍정하고 생산하는 기계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라캉의 상징계, 프로이트의 슈퍼 에고로 대표되는 근대적 질서의 체계 바깥으로 뛰어넘어 갈 수 있는 주체의 존재가능성을 탐구한 것이다. 근대세계의 상징적 질서가 외디푸스라는 거세를 거쳐 진입하계 된 세계라고 할 때, 들뢰즈는 그와 같은 외디푸스가 없는 삶, 상징적 질서 바깥의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반(反, Anti)외디푸스이고, 이를 통해 들뢰즈는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탈출을 꿈꾸었다.

 


2. 체제 바깥으로 향하는 한국의 앙띠 외디푸스들

  글의 댓머리부터 어렵고 체계적이지도 못한 설명이 이어졌다. 양해를 부탁드리며 글을 이어간다. 그와 같은 앙띠 외디푸스적 존재들이 현실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들뢰즈가 앙띠 외디푸스적 주체의 가능성을 보았던 1968년으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 프랑스로부터 약 1만 km 떨어진 한반도 남쪽에서 우리는 앙띠 외디푸스적 존재들을 목도한다. 들뢰즈의 앙띠 외디푸스와 체제 바깥으로의 월경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기는 하지만, 들뢰즈의 그것이 탈근대로의 탈주라면, 한국사회에서 보이는 그것은 전근대로의 탈주다.


  이전 정부부터 현 정부 들어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 것은 체제의 틀 바깥으로 나가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87년을 하나의 체제로 믿어왔다. 완벽하진 않지만 ‘87년 이후를 잠재적인 하나의 로고스로, 초자아의 명령으로 믿어왔다. 87년 이후에는 더 이상 이전에 했던 일을 반복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전국민적 합의가 존재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87년 체제를 중심으로 조직된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대타자의 명령, 초자아의 명령이자 잠재적 로고스로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광범위한 국가기관의 조직적 선거범죄와 그것을 덮기 위한 정치 개입, 용산참사 책임자의 공기업 사장 임용, 선거부정 범죄자의 청와대 입성 등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형성하는 데 기초가 된다고 생각했던 틀조차 무너뜨리면서 87년 체제의 바깥으로 나가기를, 체제의 틀을 부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들을 보게 되었다.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더라도 체제라고 하는 상징세계에서 삭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되돌아가면 외디푸스가 맞닥뜨려야 했던 부정의 계기, 즉 거세에 대한 공포를 스스로 극복했거나 공포가 사라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권력의 핵심부에 가까이 갈수록 거세 공포는 사라진다. 한국사회라는 상징계 내에 진입하기 위해 거세되었던 남근은 권력의 핵심부에 가까이 가면서 다시 자라난다. 그러면서 거세공포를 뛰어넘은 앙띠 외디푸스적 주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를 보면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범죄를 저지른 회사의 중역들이 자신의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술수와 변명을 생산해낸다. 하지만, 그와 같은 술수와 변명이 주인공의 추궁에 의해 논파되고, 논리의 궁지에 몰리게 되면 결국 회사의 중역이라 할지라도 고개를 숙인다. 도개자라고 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죄하는 행위까지 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범죄자와 주인공 간의 싸움은 언어를 매개로 한 논리의 싸움이다. 정치도, 사법도, 시민사회에서의 토론도, 사실은 언어를 매개로한 논리의 경쟁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세계는 언어가 만든 상징계라고 할 수 있다.

  윤창중의 사례를 보면, 언어 바깥으로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처음 시작은 [한자와 나오키] 속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술수와 변명이다. 그런데, 그것이 논파당하고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과정에서 드라마 속 주인들과 달리 윤창중은 체제 내에 없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거짓말들을 계속해서 생산해내는 것이다. 그와 같이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한 거짓말들이 진실이 드러난 이후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상징세계 내에서 어떠한 비난을 감수해야 할을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한 사회의 도덕이라는 초자아의 명령 바깥으로 나갔을 때의 두려움이 있다면, 간단히 말해 거세에 대한 공포가 있다면, 그와 같은 행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거짓말을 하더라도 상징세계 내에서 큰 타격을 입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거세 공포에 대한 초월이 존재하기에 그러한 행동을 전국민이 보는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는 외디푸스적 부정의 계기가 없다. 


  윤창중이 직위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거세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기춘을 보라. 유신헌법의 작성자이자, 초원복집 사건의 주인공. 87년 체제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와 그에 반하는 인사에 대한 사회적 발언권의 박탈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그와 같은 인물의 복귀는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용산참사의 주인공인 김석기가 공기업 사장으로 임명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기춘의 초원복집 사건은 정치적 발전 단계에서 형성된 87년 체제의 차원도 아닌, 가장 일반적이고 낮은 단계의 한줌의 도덕성(미니마 모랄리아)에 관련된 문제이다. 이것은 비단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전근대 사회에 있더라도 처벌과 징계의 대상이 된다. 그와 같은 낮은 수준의 도덕률마저 지키지 못했던 사람이 70대 중반의 나이에 정계를 절반정도 은퇴했던 상황에서 단번에 권력의 핵심에 진입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회에서 87년이라는 체제가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일을 반복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한 매우 기초적인 수준의 도덕률마저 지키지 않아도, 사회적 상징세계 내에서 시민권을 잃지 않는 것이다. 권력에 가까운 이들은 ‘그런 일을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외디푸스가 없다는 것이다.

 

 

3. 절반의 근대와 절반의 봉건

  체사레 베카리아에 의한 형벌 개혁을 필두로, 근대로의 인식론적 단절의 계기에 맞추어 개편된 형벌제도는 범죄자를 사회 바깥으로 내보낸 뒤에 교화시켜 다시 사회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푸코가 말한 규율권력 장치로서의 원형감옥은 그와 같은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한국의 권력이 활용하는 형벌은, 고전주의 시대의 그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왕에게 대항한 자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가하고, 그 고통으로 괴로워 하는 모습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시함으로써 다수의 사람들에게 왕의 권력을 보여준다. 한국사회에서 권력의 눈 밖에 난 이들이 어떻게 처벌받는지 살펴보자. 고통의 스펙타클, 모욕의 스펙타클을 목격하게 한다. 사회 바깥으로 내보낸 뒤 범죄자를 훈육하겠다는 의도가 없다. 대중들 앞에서 이들에게 최대한의 모욕을 가함으로써 권력의 위엄을 보여준다. 유신시절처럼 고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신시대보다 훨씬 더 다수의 사람들에게 처벌의 스펙타클을 보여준다. 


  이들이 활용하는 처벌 방법은 ‘명예형’이다. 즉, 검찰과 언론을 동원하여 최대한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다. 스스로 내세워 온 가치를 배반한 사람,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썩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언어의 상징계 내에서 머물며, 87년이라는 체제를 수호해온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실상 그 바깥의 인물이라고 여겨지게 되는 것은 유신시대의 그 어떤 고문보다 가혹한 처벌이 된다. 그가 내세우고 지켜오려 했던 말들에 대해 사람들이 냉소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노무현으로, 그에 대한 기억을 둘러싼 진정성과 냉소 사이의 간극은 바로 권력이 활용했던 형벌의 스펙타클이 낳은 사후 효과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는 이와 같은 명예상의 형벌이 그 어떤 신체적 고문보다 끔찍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민주주의라는 초자아의 명령이, 아니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에 대한 대타자의 명령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이들이 있다. 감옥에서 출소한 소감을 묻자 ‘여러분들은 그런데 가지 마시오.’라고 대답하는 그런 류의 사람이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줄 아시죠.’라는 거짓말을 하는 류의 사람이다. 최소의 도덕이라는 규범의 틀이 자신에게 드리워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규범에 맞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따지거나, 규범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진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이들은 규범을 어긴 상태에서, 규범의 옳고 그름도 따지지 않으며, 나아가 규범 자체가 없다고 항변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이 한국사회에 존재함을 발견한다. 한쪽에서는 민주주의와 도덕성이라는 상징계 내에 머물며, 상징계를 고수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민주주의와 도덕성이라는 상징계를 조롱하고 유희한다.  이를 통해서 보면 한국사회에는 한편에 87년이라는 이름으로 레짐을 만들어서 스스로 그 틀 속에 존재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그러한 레짐을, 87년 체제라는 이름의 초자아가 발하는 명령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정치세력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 국민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5월 광주를 둘러싸고 2013년 5월에 벌어진 일이다. 1990년대 중반 광주의 진실이 드러나고 국가가 사과 및 배,보상을 실시하면서 그들을 폭도라고 부른다거나,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언어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광주의 희생자들을 폭도나 간첩으로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들을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민중항쟁으로까지 부르는 새로운 ‘기억의 레짐’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국민적 차원에서 합의되고, 일반화,보편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진실이 드러났고, 모든 폭도설과 간첩설에 대한 반박가능성이 생김으로써, 이전에 권력이 만들어냈던 명제들은 기각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폭도와 간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간첩과 폭도라는 군사정부 시절의 공식기억은,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 국가가 나서서 공식화하기까지 한 새로운 기억체제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역사의 한켠에 숨죽이고 잠복해 있다가 다시 부상하였다. ‘우리나라는 독재를 해야 돼’라는 말, 일상 속에서 지나가고 마는 말로만 여겼던 이 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말이 아니라, 비공식적 언설의 형태로 한국사회의 한 구성적 부분으로 존재하기를 지속해온 것이다. 당연히, 87년 체제라고 하는 이 말 자체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도, 동의한 적도 없는 이들이 한국사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단계론적으로 발전해온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1987년 체제를 믿는 사람들과,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병존해왔다. 


  푸코와 그의 제자들이 보여준 규율권력의 테제들, 이것이 작동하는 원리 자체는 18세기 말 19세기 초반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것이 운용되고 전방위적으로 확산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이다. 복지국가가 태동하던 바로 그 시기이다. 공화정부의 입지가 확고해진 그 시기이다. 물리적 폭력과 사회적 배제가 아닌 설득과 포섭을 통한 규율화와 주체 만들기의 전략. ‘민주정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국민을 주체로 창출하기 위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전략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이 민주화를 만들어내는 전략이다. 하지만 1987년 이후 한국 정부는 이러한 설득과 포섭을 통한 규율화 전략을 사용하지 못했다. 안쓰기도 했고 못쓰기도 했다. 새로운 권력 원리가 미분화되고 보편화 되어 사회 공간의 구석구석에 침투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보여주는 현상 중 하나가 ‘노빠’이다. 즉,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이 보편화되고 일반화되기보다는 소규모 공동체로 결집된다. 사회의 진보를 꿈꾸는 운동은 늘 그렇듯이 확산에 실패한다. 참신하고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가 등장하고, 이를 체현할 인물이 등장했을 때, 이에 대한 지지가 네이션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어소시에이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이데올로그 에밀 뒤르켐은 공화주의의 원리를 네이션 전체로 확산시키기 위해 교육과 종교를 탐구했지만, 그와 같은 네이션으로의 확산 시도는 한국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87년 체제는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그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체제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과의 괴리가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한쪽에는 팬덤은 강하고 지지층의 결집도는 높지만 개표해보면 결과는 애처로운 현상이 발생한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댓글이나 페이스북에서의 ‘좋아요’를 통한 분노도 또한 그러한 현상을 반영할 수 있다고 하겠다. 1987년 체제 이후 만들어지는 상징계마다 네이션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소시에이션차원에 머물게 된다. 


  그리하여, 한국사회가 반봉건이라 함은, 1980년대 이야기했던 것처럼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정치적 반(半)식민 상태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한 경제적 종속상태라는 주변 강대국에 의한 억압에 의한 저발전 상태를 가리키고자 함이 아니다. 시민사회 그 자체를 근대화한다고 하는, 새로운 체제와 함께 새로운 네이션이 형성된다고 하는 과제들을 스스로 달성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초래된 저발전 상태이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근대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 저항의 역사는 근대화의 역사이고, 저항을 거치지 않은 근대화의 길은 없을진데,[각주:2] 저항이라는 부정의 계기를 자기화한 경험은 아직은 너무나도 협소한 일이기만 하다. 그러니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독재로의 회귀 그 자체를 근거로 반봉건 상태라하기 어렵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사회에서 나타나는 독재가 계급세력의 재편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특정인의 카리스마에 의지했던, 보나파르티즘과 같은 ‘1인 지배’였던 데 비해, 한국사회는 계급세력의 재편도 없는 상태에서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한 이가 혈통에 기반하여 정치적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따라서 지배자가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지고 새로운 체제건설을 강력하게 추동하고자 하는 책임감에 가득 찬 서구의 독재와 달리, 한국의 독재는 새로운 체제건설의 추동이라는 모티브도 결여하고 있다.[각주:3] 책임의식이 없으니 사과할 줄 모르고, 권력은 극대화 되어 있으나 자신이 하는 일은 없이 ‘이전 정권에 벌어진 일’이라는 말을 되풀이 하는 지배자가 등장한 것이다. 누구도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한 상황이 만들어 낸 사회적 결과로서의 독재. 그래서 반봉건이라는 것이다.

 


4. 동물화하는 반봉건사회

  이와 같은 한국사회의 현실이 만든 존재들은 ‘동물’이다. 즉, 도덕과 규칙, 레짐과 법 등으로 실체화된 상징계가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한국사회에서, 도덕성,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 합리성이라고 하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 자리 잡은 상징계가 작동하는 프레임에 대해서 균열을 내는 이들이다. 보통 권력은 상징계를 더욱 강화하고,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고, 틀을 더욱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려 한다. 그런데 한국은 권력 스스로가 상징계를 부수고, 표면에 기스를 내고, 틀을 파괴한다. 스스로 상징계를 부수고 틀을 넘나든다.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에서 많이 회자되어 온 ‘속물’은 그래도 상징계 내에 존재한다. <헤겔강의>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정의에 따르면 속물주의 즉, 스노비즘이란 형식화된 가치에 매몰되어 실질적인 이유의 존재유무에는 관심이 없게 된 상태를 말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를 오타쿠에 빗대어 실질적인 무의미에서 형식적인 가치 즉, 취향을 분리해낸 상태로 본다.[각주:4] 즉, 기의없는 기표에의 집착인 것이다. 쏘스타인 베블렌이 19세기 말 발견한 ‘과시적 소비’ 역시 기의 없는 기표를 지칭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과시적 소비에 몰두하는 이들이 일상 속에서 ‘속물’로 불리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속물은 민주정부라는 이름 아래 있었던 그 사람들에게 해당한다. 알맹이 없이 빈껍데기만 남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이라도 고수하려 했던 사람들 말이다.


  형식과 내용 사이, 기표와 기의 사이의 미끄러짐이라는 부정적 계기는 결여를 만들어내고, 이는 욕망이라고 하는, 결코 완전한 충족이 불가능한 주체의 상태를 창조한다. 상징계 속 주체들이 ‘민주주의’라는 기표와 기의를 둘러싼 ‘욕망’ 속에서 살아갈 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책들이 등장하여 이 둘 사이의 괴리를 메우려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그러한 욕망의 하나임을 드러내준다. 이러한 미끄러짐을 두고, 기표와 기의의 합일을 시도하려는 상태를 우리는 ‘진정성’이라고 부르고, 기표에 집착하는 이들을 가리켜 ‘속물’이라 부른다. 


  그러나 동물은 거세당하지 않으므로 부정의 계기가 없다. 당연히, 동물들에게는 대타자를 포함하여,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일자(Un)와 그 기계들이 존재한다. 앙띠 외디푸스적 기계들은 잠재성(le virtuel)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나눠주는 일자의 절대성에 의존한다.[각주:5] 이는 들뢰즈의 설명을 차용한 것인데, 들뢰즈가 의미하는 것은 (근대적) 주체를 넘어 개별자가 주권자가 되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일자와 기계이다. 그런 점에서 탈근대적 기계들이다. 하지만 한국의 앙띠 외디푸스들은 전근대적 절대군주라는 일자와 그 아래서 충성을 다하는 전근대적 기계들이다. 


  절대국가에서 국왕의 신하들이 짐이 곧 국가다(L'etat, c'est moi)라고 외쳤던 절대군주의 권력의 절대성에 의존하는 동시에 국왕의 권력의 잠재태로 존재했듯이, 그리하여 국왕이 말한 법에 대한 도전, 국왕이 권력을 나눠준 신하에 대한 도전은 국왕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 되었듯이 말이다. 스스로 로고스를 발화하는 존재와 그 로고스를 나눠받아 가진 존재들에게 로고스와 주체 사이의 간극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절대군주에 대한 충성을 통해 기계는 로고스와 합일하게 된다. 


  이처럼 로고스와 주체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에게 충족이 불가능한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충족이 가능한 욕구가 존재할 뿐이다.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이를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소비사회에서 발견해냈다. 소비로 대표되는, 결핍과 충족으로 구성된 욕구의 공간에는 과잉이 존재한다. 쓰고 남는 것,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욕망의 공간에는 과잉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근대세계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이들은 ‘민주주의’를 욕망으로 여긴다. 완벽한 민주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동물들에게는 ‘민주주의’도 욕구로 바뀐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물은, 이제는 더 이상 특정 정치집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일베라고 하는 공간을 통해 우리는 사회 공간 속에서의 동물의 탄생을 본다. 일베인들이 공격 당할 때 보이는 반응을 통해 우리는 이들이 동물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 법, 도덕 등을 들이대면 이들이 보이는 반응은 이런 방식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민주정부를 구성한 이들도 알고 보면 모두 비민주적이었으며, 도덕적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범법자였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비민주적이라는 지적은 형식과 실질 간의 괴리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일베에서 발화하는 위와 같은 비판의 목적은 실질을 채워 더욱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민주주의라는 상징계 따위는 애초에 만들어진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자 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단순화시키고 보편화 시킨 것이 ‘씹선비’라는 표현이다. 정치적인 올바름을 넘어 일베에 대해 가해지는 법의 틀과 도덕의 틀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냉소해버리는 것이다. 도덕과 규칙, 법과 체제 같은 것이 자신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상징계 없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가장 진정성 있는 정치인으로 꼽히는 전 대통령을 가장 맹렬하게 조롱하고 그의 죽음을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바로 그들이 상징계를 부수는 유희에 무엇보다도 탐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 동성애자, 노동자 등 사회의 약자들에게 드러나는 그들의 호전성과 공격성 또한 그들의 동물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약육강식으로 표현되는 동물적 질서는 ‘신자유주의’가 표방하는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방식의 약육강식과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약육강식의 질서를 구별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약육강식은 신자유주의적이기보다는 봉건적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약육강식이라 하면, 그래도 ‘속물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가진 형식은 지키고 상징계는 유지하는 것이다.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가 생기면 그래도 물러날 줄은 안다. 효율성이라고 하는, 스스로 설정한 대타자의 준칙에 위배될 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동물들은 절차적 정당성이나 효율성이라고 하는 대타자의 준칙에 위배되더라도 물러나거나 하지 않는다. 제대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체제 하에서는 효율성에 문제가 생기면 권력이 교체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을 보자. 그들에게서 어떠한 효율성을 찾을 수 있는가?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였는가? 아니다. 4대강 사업부터 해외 원전수주 사업까지 정부가 추진했던 굵직한 프로젝트들은 성공하기는커녕 문제만 일으켰다. 그러고도 정권을 재창출하고 권력을 지속시켰다. 이들이 가진 문제를 지적하는 비판을 대하는 이들의 반응은 ‘노무현 때문이다’였다. 정당성도 효율성도 없다는 그 비판 앞에서, 궁색해진 언어 앞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장을 부수어 버리고, 언어의 틀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최근 아감벤의 소개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비오스(bios)와 조에(zoe)라는 개념이 있다. 비오스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이뤄지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를 통해 얻게 되는 불멸의 삶을 가리키고, 조에는 생물학적인 생존이 목표가 된 삶을 가리킨다. 당연히 동물이 영위하는 삶은 비오스가 파괴된 조에라고 부를 때,[각주:6] 한국의 정치권력을 구성하는 이들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더 나은 정치, 더 나은 민주주의, 더 나은 한국사회? 아니다. 정권의 지속적인 창출과 지배력의 유지 그 자체이다.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렇게 집권해서 무슨 의미가 있어?’ 하지만 그들에게는 집권 그 자체가 의미다.
일베인들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인터넷 공간에서 대할 때 목표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나은 결론을 도출하는 것? 아니다. ‘실재(팩트-거의 대부분은 날조된 경우가 많지만)’를 들고 와서 상징계의 틀을 부수는 것이다. 더 나은 결론이란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기 앞서 그 상(像)을 언어화하는 단계에 다름없다고 본다면, 이들이 제시하는 태도는 새로운 체제를 언어화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된다. 팩트 제시를 통해 반박했음을 드러내는 것. 자기가 토론에서 지지 않았음을, 민주화 당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그 자체가 의미인 것이다.
절반의 근대화만을 이뤄낸 반봉건사회 한국은 이처럼 동물화하고 있다.

 

Der wahre Schade entsteht durch jene Millionen, die uberleben wollen.
“진정한 해악은 단지 생존하기 원하는 수많은 보통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
- 소피 숄

  1. 1) 김석, 2006,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하는 기계 : 라캉과 들뢰즈의 욕망이론”, <철학과 현상학 연구>, Vol. 29. p. 177. [본문으로]
  2. 2) 윤여일, 2012, “동양의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다케우치 요시미의 「근대란-무엇인가」를 읽는다”, 서강대 대학원 신문 제113호. [본문으로]
  3. 3)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1997,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한길사. [본문으로]
  4. 4) 아즈마 히로키, 이은미 옮김, 2007,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사회>, 문학동네. [본문으로]
  5. 5) 김석, 앞의 글, p. 185. [본문으로]
  6. 6) 김홍중, 2007, “삶의 동물/속물화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귀여움”, <사회비평>, Vol. 36. pp. 83-8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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