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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공동체를 상상하다

 -<해체와 파괴>(미하일 리클린, 최진석 역, 그린비, 2009)를 읽고

 

 엄진희

 

 

랭보는 시를 의미의 전달로부터 구제(장 뤽 낭시와의 대담에서)했다. 또 앤디 워홀은 미학의 원리를 제로 지점까지 환원시켜(보드리야르와의 대담 중에서) 놓았다.

 

시를 의미의 전달,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흐름으로부터 분리해 낸 것은 랭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p. 185)


워홀은 미학의 원리를 순수한 이미지로, 순수한 대상으로, 즉 무관심적인 시각적 대상물로 전환시켜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미학의 원리를 제로의 지점까지 한원시켜 놓았으며, 바로 그것이 워홀의 작업을 가장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p. 107).

 

말레비치는 또 어떤가. 말레비치는 흰 바탕에 흰 사각형을 반복함으로써 어쩌면, 데리다 식으로 말해 어떤 순수성을 부정(데리다와의 대담 중에서)해 버렸다.

 

순수한 ‘yes'가 존재하지 않는 만큼, 순수한 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일련의 텍스트들을 통해 제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yes'는 반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yes'라고 말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은 ‘yes', ‘yes'입니다. ‘yes' 가 이중적이고 반복적이라는 사실은 그 순수성의 부재를 뜻합니다(p. 34).

 

최초의 ‘yes'는 그 다음에 오는 ‘yes'에 의해 침식되고 부정된다. 이들은 서로를 감염시킨다. 마치 흰 사각형의 순수성이 흰 바탕에 의해 침해 받는 것처럼. 혹은 나는 나야, 신은 신이야, 왕은 왕이야 라고 반복함으로써 앞에 것의 순수성이 부정되고 파괴되는 것처럼. 나는 정말 나일까. 순수하게 최초의 자기 동일자인 일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그들이 하는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나는 그저 순수한 일까. 나는 차라리 타자가 아닐까. 타자들에 의해, 타자의 담론에 의해 오염된 나, 아님의 나. 말레비치는 흰 것 에는 아무것도 없거나 다시 흰 것만이 있다는 사실, 즉 그 자체의 모순, 분열만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들, 파괴들. 자기 분열. 더 이상 하나의 자기 동일한 의미도 자기 동일한 자아도, 하나의 미적 원리도 가치도 없다. 그것들은 스스로 분열되어 있거나 이미파괴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보드리야르는 자기 분열과 모순 없이 동일한 투명성을 하나의 덫’(p. 97)이라고 불렀다.

 

투명성의 담론이 인권의 담론이기도 하며 또 자유주의적 가치 수호를 위한 무기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해두고 싶습니다. 체제는 그 자신의 지속을 위해서라도 더욱 투명해지고자 안간 힘을 다 쓰거든요(p. 96).

 

 

이러한 자기 투명성이 체제를 공고화 하는데 기여한다면 우리는 자기를 자기 동일한 자기이지 하게 하는 바로 이 불투명성, 간극, 틈새 즉 자기 안의 미세한 차이, 최소 차이, 자기 스스로와의 차이를 들여다 봐야 할 것 같다.

 

후설은 존재를 본질적으로 시간적 자아라 불렀는데 시간적 자아는 반성하고 사유하는 자아로서 반성하는 자아반성되는 자아가 시간적 격차를 두고 존재하면서, 바로 이러한 시간적 차이, 간극을 지닌 비동일적 자아라고 여겼다. 이러한 자아는 자기 스스로와 차이를 갖는 익명적 자아’(자기 투명성, 정체성을 갖는 자아가 아니라)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자아 개념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비동일성을 수용하면서 자기를 무화할 수 있고 그로써 동물처럼 유한성 속에 유아적으로 갇힌 존재가 아니라 타자를 향해 무한히 열린 존재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나 자신의 자기 차이를 망각한 채(이러한 자기 차이야 말로 타자를 향해 열린, 무한한 주체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순히 나와 너를 구분하고 경계 지으며, 나 이외의, 외부의 억압적 제도와 장치들이, 적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 상징적 제도들의 상징적 금지는 우리로 하여금 그 장애물만 사라진다면 금지된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창조’(지젝과의 대담 중에서)한다. 하지만 진정한 장애물은 자기 안에 있는 무(), 이다. 타자를 비난하기 보다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 진정한 전복적인 힘은 바로 이 무()를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라캉 이론의 근본적인 비밀은, 상징적 금지는 그 자체가 애초에 이미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일반의 생각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렇게 불가능한 것이 도대체 왜 금지되어 있는가? 라캉의 이론에서 금지의 기능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금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금지를 극복할 수 있다는, 우리가 금지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창조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지는 도달 불가능한 것으로서 대상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로, 허용된 것, 도달 가능한 대상을 제시합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대상을 손에 넣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다만 금지되었기 때문이라는 환상이 생겨납니다. 바로 여기가 라캉에겐 결정적입니다(p. 296).

 

푸코는 고정불변의 단일한 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반성하고 사유하는 자아로서 내가 비동일적인 자아(자기 차이를 갖는)인 만큼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은 나의 시차(視差)에서 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겐 부르주아가, 여성에겐 남성이, 가부장이 장애물이다. 하지만 이들 장애물이 사라진다고 해서 주체가 자신의 순수한 자기 동일성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런 고민들을 다루고 있다.

 

상징적 질서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적과 동지, 선과 악을 나눈다면 미학의 세계, 상상의 세계는 이런 상징적 질서의 견고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하는 자기 동일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동일성의 불가능성’, ‘공백을 표현한다. 이 공백은 정상과 비정상의 사이의 영역일지 모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아니지만 모두의 공간(공통적인 공간)일 어딘가를 말이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는 우리의 일상적, 상징적 질서에는 없는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불가능성이며 공백이다. 하지만 예술은 단순한 파괴, 폐허, 공허가 아니라 전혀 낯선 가치, 새로운 가치’(옮긴이 후기에서 p. 435),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을 만들어 낸다. 지금 우리의 세계가 자유롭지 못하고 불평등하다면 우리는 분명 그러한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상상해야 하고 실험해야 한다.

 

그래서 수잔 벅 모스는 미학의 프리즘을 통해 어떻게 미가, 예술이, 기존의 세계를 파괴시키고 지연시키며, 정지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대학생들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에 대한 엄청난 중압감입니다. 결국 서로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안나는 거죠. 모두 자기가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제가 이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연관시키곤 하는 파열이라든가 지연, 정지와 같은 개념들이 유의미한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p. 319).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미친 듯 질주하는 자본의 광기, 진보에 대한 광기에 사로잡혀 사람에 대한 신뢰도 땅에 떨어진 지 오래이고 사람을 도구적으로만 대하려고 하는 관습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이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효율성이나 생산성 따위에 대한 끝없는 집착을 포기’(p. 310)해야만 한다.

 

우리가 타자에 대해 개방된 존재이며, 타자들과의 관계 속으로 진입해들어 갈 수 밖에 없다’(p. 185)면 바타유가 말했듯, ‘어떤 사적 의미나 개인적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낭시가 말한 공동적 존재성’, ‘함께라는 것 즉, /, /밖이라는 자기 동일성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타자 지향적으로 그들과 함께일 수 있는 세상이다. 즉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세상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의 예술적 조우, 새로운 (미적)세상이다. 미하일 리클린이 만난 사람들, 데리다, 지젝, 수잔 벅 모스, 장 뤽 낭시, 이들과의 대담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장 뤽 낭시 :

 

저는 여하간 공동적 존재성의 문제로 되돌아 가는데, 왜냐하면 저로서는 이 개념을 통해 이야기 하는 게 더 편할뿐더러, 이 개념이야 말로 함께 있음이란 무엇인가또는 공동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일련의 질문들과 진정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

 

데리다와 저 사이에는 논의해 보아야 하는 불일치점이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데리다는 비결정성이라는 문제에, 그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는 다만 결과란 예측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 할 뿐입니다. 이는 그 나름대로 옳은 판단이고, 사실 전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어쨌든 여하한의 선택을 내리고 그 결과들에 개입하기 위해 요구되는 어떤 진중한 근거들이 요구되는 법입니다(p. 194).


글_ 엄진희는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네이버와 알라딘등에서 서평과 신간 평가단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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