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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한나

성소수자의 자긍심은 사랑할 수 없나?

*이 글은 기독교세례관학술동역회가 발행하는 <월드뷰> 에서 카이로스 이름으로 청탁을 받아서 기고한 것임을 밝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성애는 낯설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15년 전에 커밍아웃 한 홍석천씨가 거의 유일한 동성애자로 기억되고 있을 정도이니 실제로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들을 보았을 때 느낄 당혹감은 얼마나 클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주변에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채로 당신의 이웃으로, 친구로 지내고 있다. 다만 커밍아웃 하지 않았을 뿐이다. 주변의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침묵을 지키며 벽장 속에서 지내는 가장 큰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사회 차별과 혐오의 시선 때문이다. 자신의 성적지향을 밝혔을 때, 평범한 일상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누리고자 할 때 마주할 격렬한 반응 때문이다.


시위는 어떻게 축제가 되었나
 동성애는 일종의 근대적 신종 식별범주이다. 동성애에 관한 지식은 여타의 근대적 기획들과 마찬가지로, 그 의미와 대상에 있어서 다양한 주체들 간의 치열한 경합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구성된) 문화적 범주들의 담론적 효과라는 말이다. 동성애적 행위는 고대부터 있었으나 근대 이전에는 일시적인 일탈이나 일종의 유혹적인 행위로 여겨졌을 뿐 특정한 종류의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특징은 아니었다. 동성애를 병리적인 것으로 규정한 의료담론이 발전한 시기, 동성애자를 정체성에 기반한 공통의 집단으로 가정하고 통제한 시기도 모두 20세기에 들어서서이다.

이 시기 인권운동가들은 동성애를 질환으로 규정한 정신의학적 관점에 도전하며 동성애자들의 정신적 고통은 전문가들의 정신의학적 개입이 아니라 정치적 개입으로 해결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동성애자들은 더 이상 이성애중심의 세상과 의료 전문가들에게 동성애자를 병리화 할 수 있는 권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공적 영역에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사적인 수치심으로 치부되었던 이들의 감성을 하나의 존재 방식으로 공론화 시켰다. 이 같은 급진적인 인식론적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1969년의 스톤월 항쟁이다.

스톤월 항쟁은 동성애자를 포함한 성소수자가 차별에 대응할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가치로서 자긍심(Pride)을 일깨웠다. 자긍심의 발로는 이성애 중심 사회로부터 일방적으로 통제되어야만 했던 동성애자들이 자신들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고 사회적 편견과 혐오에 맞서 싸우는데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은, 처음의 용기 있는 경험에서 기인한다. 스톤월에서 유래한 자긍심 퍼레이드(Pride Parade)는 차별과 배제로 소외된 동성애자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킬 뿐 아니라 사회의 인식 개선 및 성소수자 인권 보장을 당당하게 요구하기 위해 대로를 행진(parade)한다. 전세계 수많은 도시로 퍼져 진행되고 있는 자긍심 퍼레이드는 화려한 축제적 성격과 소수자 인권 증진을 요청하는 시위의 성격 모두를 가지고 있다.


자긍심(Pride)은 혐오를 당황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자긍심 퍼레이드가 개최되고 있다. 처음 행사를 시작한 2000년 이후 지금까지 15년이 넘도록 이어진 이 축제는, 성소수자 뿐 아니라, 성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지역민들 모두가 함께 서로를 긍정하고 축복하는 일종의 사회적 상견례와 같은 역할을 맡아왔다. 지난 6월, 서울과 대구에서 개최된 ‘퀴어문화축제’는 성소수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고 드러내며 존엄과 인권을 요구하기 위해 자긍심 퍼레이드를 준비하였다. 동성애자 뿐 아니라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은 이성애중심의 세상에서 쓰고 있던 방패와 같은 가면을 벗어놓고 진정한 자아를 대면하는 전환을 경험한다.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근거로 차별이 난무하는 억압적인 세상에서 성소수자들은 일 년에 단 하루, 축제의 형식을 빌린 안전한 공간에서 진정한 자신을 열어 숨겨두었던 매력을 뽐낸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허락된다. 이 날의 해방감과 자기긍정으로 얻은 자긍심을 기억하며 364일을 살아낸다는 자기고백이 이어지고, 끝난 후에는 사랑하지만 드러낼 수 없는 자아에 대한 지독한 상사병을 앓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들의 자긍심 퍼레이드에는 연민이나 동정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혐오세력이 당황하는 지점이 여기다. 고통과 자기비하로 몸부림 쳐야 마땅한 이들이 실은 눈부신 자아를 가진 전인격이고 자기긍정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면, 혐오와 비하의 언설을 하는 입과, 그들의 행복과 사랑에 참견의 지분을 요청하는 손은 그 대상을 잃고 허공을 휘저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올해 서울, 자긍심 퍼레이드가 있는 날, 보수 기독교 세력들과 극우 보수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행사를 방해했다. 이들은 선정적인 혐오와 저주의 언행을 쏟아내며 연중 단 하루뿐인 소수자의 날을 집요하게 방해하였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퍼레이드 차량의 이동을 막았고, 통성기도를 빙자한 고성을 지르거나, 심지어는 불특정 다수에게 매질을 가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끔찍한 일은, 이름만 ‘세월호 추모 콘서트’로 붙이고, 실제로는 동성애 혐오 메시지만이 난무하는 집회를 열어 참사 피해자들과 유가족들, 그리고 상처 입은 시민들 모두의 슬픔을 수단으로 이용해먹는 사기극을 펼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날 가면을 벗은 것은 성소수자들만이 아니었다. 혐오세력은 증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들의 방해로 행사가 지연됐음에도 불구하고, 일 만 여명의 참가자들은 준비된 공연을 즐기면서 동시에 눈앞의 탄압과 혐오에 대항하는 즉석 피켓팅과 퍼포먼스를 하는 등 자긍심 퍼레이드 본연의 탄압과 혐오에 맞선 저항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볼 수 없었던 후안무치한 폭력을 목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트라우마가 아닐 수 없다. 성소수자에게 단 하루 허락된 안전한 공간마저 침탈해야만 했을까? 원색적인 혐오행동으로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죽도록 혐오하기?
  지금 한국사회의 성소수자 이슈는 자극적인 여론몰이로 성서를 전유해버린 일부 보수 기독교 혐오세력의 동성애자에 대한 극단적 언설 만이 마치 윤리와 도덕의 전부인양 지배적인 위치를 점한 채 혐오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보다 앞서 치열한 고민과 토론의 과정을 거쳐 동성애자에 대한 시민사회적 합의를 일구어 낸 나라들이 파기한 비과학적, 반인권적 자료들마저 차별화 혐오를 재생산하는데 처절하게 동원한다. 선진국이니 무조건 따르자는 사대주의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공유하는 사회의 갈등과 토론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유의미하다.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도외시한 채 조작적 정의나 지엽적인 통계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혐오집단은 성적지향을 개인의 취향, 성향, 기질 내지는 특정 문화현상으로 파편화 시켜 문제의 본질인 권력과 위계의 문제를 희석한다. 이런 탈맥락화, 탈정치화는 이성애중심주의 사회가 만든 차별과 혐오의 결과로서 발생한 성소수자 인권운동(자긍심 퍼레이드)을 “타락한 성문화”의 원인으로 도치시키는 잘못을 범한다. 또한 기독교 혐오세력의 자극적이고 극렬한 반대는 동성애자의 존재와 인권보장이 마치 ‘논쟁적인’ 문제인양 왜곡된 프레임을 조성하고 있다. 성별, 인종문제에서처럼 타인의 존재 자체는 찬반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프레임은 특히 공공영역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듯 보인다. 시민의 행복증진과 인권보장을 추구하는데 앞장서야 할 국가에게 일종의 정치적 부담을 지워 반인권적 결정에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논의와 갈등을 헌법의 가치에 맞게 적절히 다루고 중재해야 할 공적 영역으로서 국가는 성소수자들과 인권운동가들의 요구에 호응하는 대신, 혐오세력들의 선정적 피켓팅에 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직간접적인 혐오와 차별로 혐오세력에 동조하고 있다. 차별을 촉구하는 자신들의 요구가 반복적으로 관철 될 때 마다 보수 기독교 혐오세력들은 승리의 성취감, 신의 뜻을 대리한다는 사명감을 강화시켜왔다. ‘말만하면 다 이뤄진다’는 식의 종교적 승리의 경험으로 번역된 차별 행동은 그 자체가 지속적인 혐오와 폭력의 보상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차별과 혐오는 그 대상의 가치 혹은 정체성에 위계를 둔, 권력을 매개로 작동하는 정치학이지, 무균·무중력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면 혐오세력들은 ‘상식’이거나 ‘문화’, ‘종교’라는 무균실을 짓고 혐오를 탈정치화 시키며, 그들의 증오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다. 권력과 집단의 맥락에서 벗어난 차별과 혐오의 문제는 그 문제의 접근방법과 해결방법을 개인적인 차원, 감정적인 차원의 단순한 일로 치환하며 ‘차별할 권리’, ‘배제 할 권리’의 주장에까지 이어진다. 자신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채 타자를 색출하고 박멸하는 방식으로 지키는 신앙이 과연 지속가능한 방식인지 묻고 싶다. 혐오는 기독교신앙일 수 있는가? 혐오로 종교적 승리를 맛보는 것은 정당한가?자긍심의 기독교적 재현차별금지법 제정 등 그간 논란이 되었던 동성애 관련 이슈들은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를 멈추고 정상성 내부의 특권적 지위를 공유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검증되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수사 속에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차별과 배제, 억압은 모든 사람이 일상적으로 누리고 당연히 인정받아야할 보편의 가치인‘사랑’을 저항과 투쟁을 통해 획득해야만 하는, 급진적인 정치 용어로 만들어버렸다. 

한국 사회는 동성애자 뿐 아니라 규범적 성정체성, 성적지향을 위반하는 모든 성소수자들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 또한 수용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한국사회가, 특히 사랑의 종교라 불리는 기독교가 낯선 이들을 대하는 윤리적인 태도로 다소 서툴고 어렵더라도, 타자가 이루어온 역사와 맥락을 살펴보는 조심스러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혐오의 필터를 거쳐 분절되고, 왜곡된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 스스로 이루어온 해방의 역사가 진술하는 동성애자의 가치와 자의식을 존중하는 것 말이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인 동성애자들이 있고, 또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혐오와 차별에 맞서며 동성애자들의 사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지키는 것은 비단 동성애자들의 존엄뿐만은 아니다. 기독교가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차별한다는 혐의를 벗겨주는 소수의 집단이기도 하다. 혐오 일색인 한국 기독교 내 동성애 담론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의 왜곡된 프레임, 반론의 여지가 없는 획일화된 전선/담론에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스톤월의 첫 용기와 그날의 자긍심을 한번 더 요청하는 일이 될 것이다.

글_김한나 : 연구집단 카이로스 연구원. 대학원에서 여성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은 섹슈얼리티와 종교, 교회의 가족중심성이다. 가족 혹은 남성과의 관계맺음 속에서만 여성에게 정상성과 여성됨을 허락하는 이성애중심주의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성주의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