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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광화문 광장과 세월호 유가족들의 공간:그들이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

사진: SP

그림: 표지혜


 



2014년 4월 16일, 거대한 배 한 척이 침몰했다. 선박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을 자랑하던 대한민국 정부는 그 배의 침몰 앞에서만큼은 어떠한 기술도 자랑하지 못했다. 몇 척의 보트와 몇 대의 헬리콥터만이 그저 침몰중인 세월호의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을 뿐이다. 참으로 놀라운 점은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고 난 뒤 구조된 사람의 숫자가 0이라는 사실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실질적으로 구조된 사람은 없었다. 정확히 말해 이 사건의 생존자들은 구조된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선박에서 스스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는 선내방송을 따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까스로 배 내부를 벗어났던 사람들까지도 세월호와 함께 차가운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어떤 손길도 까만 바다가 삼켜버린 세월호와 그 안의 희생자들을 잡아주지 못했다.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믿을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그 누구도 이 정도로 처참한 결과가 발생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고 발생 이후 “전원구조”라는 보도가 흘러나온 순간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안도하며 그 보도를 당연시했을지 모른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복구된 휴대전화 영상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희생자들조차도 자신들이 이렇게 어이없게 희생되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년 전의 4월 16일은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상상력의 범위를 넘어선 재난이 발생한 날이었다.

 

2014년의 4월은 정말 잔인했다. 「황무지」("The Wasteland")에서 T. S 엘리엇(T. S. Eliot)이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한 것처럼 대한민국에게도 그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되었다.[각주:1] 물론 엘리엇이 말한 잔인함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그해 4월은 우리에게 잔인한 달이 되고 말았다. 엘리엇은, 죽음과 침묵을 갈구하는, 다시 말해 활력을 거부하는 대지에 봄의 이름으로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점을 들어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다. 죽어있고 싶으나 살게 하고 땅속에 묻혀있고 싶으나 새싹을 내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엘리엇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2014년의 4월은 엘리엇이 노래한 4월의 정반대에 놓여있었다. 그해 4월은 살고자 했던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물속에 잠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기도했던 자들을 까만 바다로 가라앉게 했다. 하지만 그해 4월도 그동안 우리가 보내온 세월과 다름없이, 고통의 세월들이 늘 그렇게 우리를 지나쳐갔듯이 우리를 지나갔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2014년도 지나갔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세월호 사건을 잊기 시작했다. 망각 앞에서 사람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중지했다. 대한민국의 무능력함을 드러내준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더 이상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미디어를 통해 마주하게 된 세월호 사건의 참혹한 현실이 사람들에게 억압되어야 할 부정적인 기억으로 남게 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한 해가 지나고 2015년, 세월호의 “세”만 들어도 지겹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댓글 알바든 아니든 이 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든 그렇지 않든 사람들은 점점 세월호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망각을 침묵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표현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망각이 그해 4월의 잔인함을 완성시켜주고 있는 것은 아닐지, 세월호가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넌 것은 아닐지 불안했다.

 




망각의 동물은 인간에 대한 여러 정의 가운데 하나다. 인간은 망각을 통해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게 될 뿐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고통스런 사건을 경험한 인간이 그 사건에만 얽매여 살게 된다면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재앙이 될 것이다. 망각은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미덕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망각은 인간이 자신을 고통에 빠뜨린 사건이나 사고와 관련된 기억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극복할 때 미덕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인간은 적어도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원인을 자기만의 언어로 이해할 때 비로소 온전한 망각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이해하게 될 때, 또는 고통에 따른 애도를 온전히 마치게 될 때 고통을 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은 고통의 원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고통에 따른 그들만의 애도를 온전히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망각을 강요당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세월호 침몰에 대한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월호의 인양문제는 제대로 거론되지도 못했다. 그 누구도 사건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조차 세월호의 침몰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상황이다. 비밀주의라는 철벽 뒤에 숨은 정부는 (기독교 이단 종파) 구원파의 수장에게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했다. 충분한 설명의 부재 속에서 세월호 사건은 말 그대로 “‘왜’라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왜’라는 물음으로 끝”나가는 비극 같았다(작가기록단 187). 충분한 대답의 부재 속에서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망각을 부덕하게 강요하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에는 시대의 망각을 경계하며 자신들의 분노와 슬픔을 세상에 기억시키고자 하는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 가족들이 모여 있다. 지금도 그렇다.[각주:2] 2015년 2월,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광화문의 까만 하늘 아래 놓인 광화문 광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참혹했던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고 유가족들의 고통을 나누기 위한 이 공간은 어느새 시민들에게 익숙한 일상적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 점은 잔인했던 그 날의 사건이 우리들의 감각을 더 이상 자극하지 못하는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렸음을 의미한다. 지나가며 한 번쯤 눈길을 줄 법도 한데 사람들은 더 이상 유가족들의 공간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세월호 사건 초기에 보여줬던 연민과 동정은 이제 더 이상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광화문 광장 속의 이 공간은 이제 고립된 작은 섬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한때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었던 그 작은 섬을 그저 지나칠 뿐이었다. 사람들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벌써 1년이 되어가는 사건에 사람들이 큰 관심을 쏟지 않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론사들은 사람들이 세월호 사건을 잊도록 만들거나 세월호 유가족들의 작은 실책을 과장·집중보도함으로써 세월호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은 각종 사회적 특혜를 노리는 영악한 사람들로 변질되었다. 싸늘하게 식은 시신만 찾아도 주변 실종자 가족들로부터 “축하”를 받아야 했던 유가족들은 사회적으로 변질된 이미지를 떠안고서 사람들의 망각에 대항한 시간과의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유가족들의 상황을 가장 잘 말해주는 어휘는 바로 투쟁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무관심뿐 아니라 사람들의 무관심을 조장하는 세력들과의 투쟁을 멈출 수 없었다. 광화문 광장 속에서 유가족들의 공간은 철저히 포위된 것처럼 보였다. 사실 광화문 광장 주변에는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세력들의 터전이 존재한다. 유가족들이 광화문 투쟁을 중단하고 마음 편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들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이 바로 광화문 광장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유가족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팽목항에서 최대의 구조작전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언론사들은 세월호 사건발생의 모든 책임이 유병언 개인이나 청해진 해운에 있는 것처럼 여론을 몰아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의식을 잠재우려 애썼다. 언론사들이 만들어낸 유병언이라는 희생양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와 비판의 방향을 정부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각주:3] 또한 한국의 일부 교회 목사들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실언으로 빈축을 사기까지 했다. 이 점은 방한 당시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에 말을 거는 행보를 이어간 교황과는 대조적이었다. “가난한 집 애들이 수학여행을 경주로 가지, 왜 하필 배를 타고 제주로 갔냐”는 말도 결국 한 기독교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작가기록단 229).[각주:4] 번쩍이는 그들의 간판과 대형 스크린은 유가족들의 공간을 향해 “너희들은 포위됐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밤이 깊어가도 그 불빛들은 특유의 강렬함으로 유가족들의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유가족들의 공간은 이렇게 강력한 세력의 근거지에 포위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가족들의 말과 행동이 일반 시민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상황들이 유가족들에게 불리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도 그 공간을 지키고 있었다. 희생자들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유가족들의 노란리본은 그날에도 광화문 광장을 굳게 묶어주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상황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투쟁이 지속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예컨대 보상금 같은 사회적 특혜를 향한 그들의 갈망이 그들을 광화문에 잡아둔 것일까? 정부와 언론은 이 질문에 강한 긍정을 표하며 유가족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깊은 바다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는 책임에서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다룬 영화 『다이빙벨』은 결말부분에서 세월호 유가족과의 인터뷰를 보여준다.[각주:5] 이상호 기자와 유가족의 대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살아남은 어른들이 뭘 해야 할까요? 승묵이를 위해서.”
“진실을 밝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구조를 바꿔야죠.”
“아버지, 돈을 원하십니까?”
“아니오.”
“그럼 특례입학 원하세요?”
“아닙니다.”
“그러면 의사자 지정을 원하세요?”
“아닙니다.”
“뭘 원하세요?”
“저는 우리 애들이 왜 그렇게 갈 수 밖에 없었나, 왜 구조를 하지 않았나, 전 그것을 꼭 밝히고 싶습니다.”

 

그 누구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은 세월호 사건의 원인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투쟁을 멈출 수 없게 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구조를 위한 충분한 골든타임이 있었다. 게다가 전부는 어려웠어도 많은 인원을 구조할 수 있는 기술이 대한민국에는 있었다. 하지만 구조를 통해 단 한 명도 살아오지 못한 현실은 유가족들에게 수용할 수 없는 수준의 절망을 안겨다주었다.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정부의 설득력 있는 해명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사건 이후 팽목항을 기점으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 유가족들은 충분히 구조할 수 있었음에도 구조하지 않은 정부의 이 납득할 수 없는 면모를 거듭 확인해야 했다.

 

아이들은 선단이 낮은 [민간] 배들이 다 실어 날랐던 거죠[구조했던 거죠]. 해경들이 이제는 자기들이 구했다고 말을 안 하고 있잖아요. 민간 선주들이 구하는 장면이 TV에 다 나오기 때문에 이제 할 말이 없는 거죠. […] 배에는 전부 앙카라는 게 있어요. 그걸로 유리창을 깨면 그 방 아이들은 다 살아서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민간 선주들 전부가 하나같이 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섬에 내려갔을 때 선주들이 나를 보자마자 하는 첫마디가 “해경 개새끼, 죽일 놈의 새끼들. 저 새끼들이 안 구했어”였어요. 나보다 성이 더 나갖고 ‘살릴 수 있었는데 안 살렸다’고 욕을 하는 거죠. (작가기록단 179-80)

 

인간 사회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에 노출될 수 있다. 어떠한 인적 노력에도 극복될 수 없는 재앙은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재난에 따른 피해자들과 그들의 유가족들은 오히려 재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자신들의 정부를 상대적으로 덜 비난하거나 그 비난을 오래 지속하지 않는다. 유가족들이 이 재난이 불가항력적이었다는 점과 정부가 재난에 따른 구조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 그들의 정부 비난은 점점 사라지거나 단기적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은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사건이 아니었다. 따라서 충분히 구조할 수 있었다는 생각, 다시 말해 내 가족이 이렇게 억울하게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안타까움이 세월호 유가족들의 정신에 자리 잡고 있다. 억울한 죽음을 마주한 상태에서 유가족들을 비롯한 생존자들까지도 사건의 구체적인 원인을 알아내려 애쓰고 있다.\

 

지난 [2014년] 7월 28일과 29일, 선원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한 안산 단원고등학교 생존 학생의 마지막 진술은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선원들에 대한 처벌보다 더 원하는 것은, 왜 친구들이 그렇게 돼야 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알고 싶다.” (민변 9)

 

정말 어쩌면 유가족들 가운데 몇몇은 가족의 죽음 앞에서 돈을 비롯한 사회적 혜택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금전이나 사회적인 혜택을 받을 목적으로 광화문 광장을 지키고 있다는 시각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각주:6] 그들의 투쟁이 계속된다고 해도 그들의 안타깝고도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은 돌아올 수 없다. 그들은 다만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광화문을 지키고 있다. “진상규명”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다. 그들에게 침몰한 세월호를 인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왜 그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어이 없이 잃어야 했는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답을 듣는 것이다. 유가족들이 침몰한 세월호의 인양을 요구하는 이유도 다름 아닌 자신들의 가족들이 맞이한 안타까운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왜”라는 이 질문에 대한 정부의 성실한 대답을 기다리며 광화문 광장을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이 “절대적인 호의에서 절대적인 반감으로 바뀌는” 과정을 경험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광화문을 떠나지 않고 있다(작가기록단 6). 정확히 말해 그들은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상태가 아니라 떠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태인 것이다. 물론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안타까운 마음과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모두 잊히게 될지 모른다. 지금의 세월호 유가족들도 결국 망각을 선택하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유가족들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침묵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믿으며 지난 1년 동안 망각과 싸우며 광화문 광장을 지켜왔다(작가기록단 7). 안타까운 점은 우리의 무관심 또한 그들을 광화문 광장에 포위하여 고립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공간을 그저 지나쳐 가고만 있었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는 것만큼, 나아가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은 것만큼, 세월호 유가족들의 공간이 아직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유가족들은 사건에 대한 그들의 원천적인 질문에 대해 아직까지도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광화문 광장에 멈춰있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미덕은 유가족들의 공간이 고립되지 않고 세상을 향한 그들의 목소리가 온전히 전달될 수 있게 하기 위한 초석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들의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요구되는 미덕인 것이다.


바로 이 기억은 유가족들의 강력한 정치적 무기의 유지시킨다. 그들이 있는 광화문 광장은 하나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적인 정치공간이 되었다. 침묵은, 유가족들의 사건 관련 질문들에 대해 정부가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아직까지도 정부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원초적인 실책을 범한 정부 입장에서 그들의 존재가 부담스러운 이유는 유가족들의 라는 질문에 대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부가 어떤 방식을 사용해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기인한다. 그들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는 순간 정부는 스스로 자신의 무능력을 세상에 입증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정부는 확실히 알고 있다. 물론 정부가 유가족에게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분석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정부가 정권 초기부터 국민과의 소통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에서 나타난 정부의 태도는 이번 정부가 각종 사안마다 유지해온 비밀주의와 불소통의 자세와는 뭔가 다르다. 유가족들의 질문에 명확한 진실의 대답을 내놓는 순간 권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점을 정부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자신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현재 정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침묵과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방임이라는 폭력이다. 정부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상징적 폭력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공간을 지금까지도 까맣게 억누르고 있다. 정부는 이 상징적 폭력을 통해 유가족들의 공간을 조금씩 우리 기억 속에서 지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유가족들의 공간은 이 같은 상징적 폭력의 한 가운데서도 삭제되지 않고 존재를 이어가고 있다. 이 공간의 존재양식은 유가족들의 존재양식에 대한 공간적 은유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이 공간은 유가족들의 존재적 의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공간의 존재양식은 󰡔성스러운 테러󰡕에서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전형적인 파르마코스의 한 예로 언급한 소설 󰡔클라리사󰡕의 비극적 주인공 클라리사의 존재양식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클라리사는 희생양이다.[각주:7] 이는 그녀가 단순히 희생자이기 때문이 아니라사실 모든 희생자가 희생양인 것은 결코 아니다그녀가 자신의 더럽혀진신체를 통해 사회 전체의 부(不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정화되고 변화되기 위해서 반드시 직면야만 하는 사회의 괴물성을 드러내고있기 때문이다. (이글턴 236)

 

 

유가족들의 공간은 이 같은 자기 존재성을 통해 투쟁한다. 유가족들에 대한 정부의 상징적인 폭력과 언론사들의 편향된 보도는 그들의 공간을 매일매일 더럽힌다. 그럼에도 그 공간은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 유가족들의 공간은 그 존재로써 대한민국 정부의 부정적인 면모뿐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우리만의 추악한 면모까지 드러내주는 우리 시대의 능동적 희생양들의 공간이다.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자로 전락시키고만 대한민국 정부의 무능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으로 인해 유가족들은 그들의 희생된 가족들처럼 우리 사회에서 희생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과 그들의 공간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슬픔을 넘어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세월호 참사는 분명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었지만 무의식을 배제하고 우리의 신체와 언어를 자본의 이윤 축적에 맞게 정립하라는 자기계발의 정언명령을 변혁할 새로운 주체를 호명하도록만든 중대한 사건이었다(이택광 298). 그 변혁적 주체가 모여 있는 곳이 바로 광화문 광장인 것이다. 희망적으로만 보기에 너무 많은 생명을 앗아간 사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들과 그들의 공간은 절망의 시대 속에서 우리 시대에 필요한 희망의 씨앗을 안고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존재로써 라는 질문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라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라는 물음으로 끝”(작가기록단 187)나가는 비극 속에 놓여 있음에도 바로 그 라는 질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무능을 표현해낼 수 있는 투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망각에 저항하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의 추억이 아닌 기억은 그들이 광화문 광장을 억울하게 떠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정치적인 힘이다. 기억은 작은 행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씨앗이다. 이 기억의 지속을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광화문 광장을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망각에 따른 무관심이다. 우리의 기억이 그들이라도 붙잡아주기를 바란다. 우리의 기억이 그들을 위한 더 많은 가능성의 모태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광화문에 놓인 세월호 유가족들의 공간은 오늘도 잊히지 않으려 그 존재로써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잔인한 국가 앞에서 외면하는 대중의 일원이 되어, 그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광장의 그 공간이 오늘도 우리 사회에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글_박진우(CAIROS 회원)

 

 

 

인용문헌

 

󰡔이빙벨󰡕. 이상호·안해룡 감독. 시네마달, 2014.

 

르네 지라르. 󰡔희생양󰡕. 김진식 옮김. 서울: 민음사, 2007.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416 세월호 민변의 기록󰡕. 서울: 생각의 길, 2014.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금요일엔 돌아오렴: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서울: 창작과 비평, 2014.

 

이택광. 「사회적 영성과 주체의 정치학: 민주적 유물론의 패러다임을 넘어」. 󰡔사회적 영성: 세월호 이후에도은 가능한가󰡕. 서울: 현암사, 2014. 282-99.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서정은 옮김. 서울: 생각의 나무, 2007.

 

 


  1.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4월을 엘리엇의 「황무지」에 빗대어 논의한 기사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2. 2015년 3월까지는 그랬다. 언제까지 그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현재 아무도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아마 그들도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1년 가까이 미뤄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은 불행하게도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본문으로]
  3. 유병언을 희생양으로 만들기 위한 사회 기득권 세력의 시도는 많은 우려를 낳았다. 유병언은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총체적인 사회문제를 말 그대로 “덮기” 위해 선택된 희생양이 되었다. 이 같은 덮기에 대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결코 단순한 교통사고나 조류독감 같은 전염병이 아니다. 그것은 ‘돈’과 ‘권력’을 성공의 잣대로 평가하고, 사람의 안전과 생명마저 비용의 문제로 취급해온 정부의 정책과 제도 그리고 그에 편승한 기성세대가 빚어낸 사회구조적 재앙이다. […] 따라서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선장과 선원, 청해진해운, 부조리와 관련된 일부 공무원 그리고 침몰 후 구조에 투입된 해양경찰의 위법 행위 처벌로 세월호 사태를 덮으려는 시도이다”(민변 6-7). [본문으로]
  4. 한국의 교회들은 세월호 희생자 추모 기도회를 개최하는 등, 세월호 사건에 대한 사회적 애도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동참해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행동은 정확히 “기도회” 개최에 머물고 있다. 종교집단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으나 적극적으로 세월호 문제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머뭇거리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목사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목사들의 실언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본문으로]
  5. 이 인터뷰는 이상호 기자와 세월호 사건 희생자 강승묵 군의 아버지 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으로]
  6. 이 글의 작업을 위해 광화문 광장에 방문한 날은 2015년 2월 18일, 즉 설 전날이었다. 사진촬영을 하며 글에 대한 토의를 하던 가운데 유가족들이 분홍색 복주머니를 진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필자는 유가족들에게 다가가 “그거 판매용인가요?”라고 물어보았다. 필자는 유가족들이 그 복주머니를 판매하여 세월호 투쟁과 관련된 기금을 마련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자원봉사자 한 분의 대답은 필자를 부끄럽게 했다. “우리 아이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붙여놓는 복주머니예요.” 복주머니는 판매용이 아니었다. 복주머니는 철저히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자는 이 날의 경험을 통해 세월호 특별법 가족대책위안에 희생자 보상 문제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고 진상규명을 위한 장치들이 주되게 언급되어 있는 이유(민변 195)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현재까지도 유가족들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특혜가 아닌 철저한 진상규명을 원하고 있다. [본문으로]
  7. 인용문에서 이글턴이 클라리사를 희생양이라고 말한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희생양 개념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글턴이 말한 “희생양”이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희생양과 개념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통상 “희생양”은 지배권력이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별하여 처벌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이지 못한 수동적인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희생양에 대한 이 같은 접근은 특히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희생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지라르의 희생양 모델은 이 점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라는 지적을 받고는 한다. 지라르에게 희생양은 공동체의 위기를 완화해주고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사용되는 존재로서 궁극적으로 지배권력의 권력을 공고화하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이글턴의 희생양, 즉 파르마코스는 지라르의 희생양 모델과 비슷하게 지배권력에 의해 선별되어 처벌되지만 그 자신의 신체 혹은 존재를 통해 지배권력의 부정성과 괴물성을 세상에 폭로하는 전복적인 정치기능을 수행하는 희생양이다. [본문으로]